파웰과 프레스버거

 

[image]
Powell and Pressburger
1. 개요
2. 역사
3. 마이클 파웰
4. 에머릭 프레스버거


1. 개요


주로 193-50년대에 활동했으며,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로맨티시즘과 표현주의 양식으로 영국 영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오페라연극에 영향을 받은 세트 촬영과 호사스러운 테크닉컬러, 영국식 유머와 극문화 전통, 환상성, 전원적 풍경, 휴머니즘적 통찰이 특징으로 이후 영화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의 문제, 분홍신, 흑수선이 있다.
다만 활동 당시엔 은근히 무시당하던 콤비였다. 당시 영국 영화의 주류 스타일하고 거리가 멀었던데다 반응들도 썩 신통치 않았다. 또한 히치콕과 달리 전성기에도 철저하게 독립 제작 체계로 영국 영화계에 머물고 있었기에 인지도도 은근히 안습한 편. 한국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이다. 국내에서는 박찬욱이 이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2. 역사


1939년 원래 단독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던 마이클 파웰이 The Spy in Black 작업 당시 각본가 에머릭 프레스버거를 만나면서 협업 체제를 시행하게 된다. 첫 두 영화를 찍고 난 뒤 그들은 독립 스튜디오 더 아처스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의 협업은 1950년대 중후반까지 이어졌으며, 원만하게 해산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협업을 하기도 했다.

3. 마이클 파웰


Michael Powell (1905–1990)
원래 은행원이였다가 1925년 연출부로 경력을 시작, 히치콕의 <샴페인>(1928) 촬영 현장에서 스틸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다양한 현장에서 촬영, 편집,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은 파웰은 1932년에 첫 장편 <내 친구는 왕이야 My Friend the King>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협업 체제를 하기 전에도 감독으로써 경력이 있었던 사람이다.
협업 체제가 종료된 이후로도 감독 생활을 했는데, 피핑 탐으로 주류 평단의 분노를 일으켜 매장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세월이 지나서 피핑 탐은 영화사의 걸작으로 복권된 상태이다.

4. 에머릭 프레스버거


Emeric Pressburger (1902–1988)
헝가리 유대인으로 독일과 체코에서 언론학을 공부했다. 원래 독일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왔다. 거기서도 각본가로 일하다가 파웰과 의기투합해 지금과 같은 협업 체계를 이루게 된다.
협엽 체계가 종료된 이후로는 각본가에 중점을 두며 활동했다. 말기 파웰 영화 각본으로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손자는 터칭 더 보이드, 휘트니(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를 감독한 영화감독 케빈 맥도널드다. 맥도널드가 밝히길 자기 아내가 자신에게 반한게 맥도널드 외할아버지가 콤비의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안다' 각본을 썼다는 걸 알고나서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