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군명

 

성명
한군명(韓君明)
이명
창해(滄海), 애골
생몰
? ~ ?
출생지
미상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군명은 일찍이 러시아로 이주해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니콜리스크 한인회 서기를 역임했다. 1919년 1월, 그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노농정부 집정관 중 한 명인 아우크센체프로부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제의받고 최재형 등과 논의하여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최재형, 김철훈(金喆勳) 등 대한국민의회 임원들과 회합하여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논의하고 임시정부를 러시아로 이전시키는 것을 계획했지만 임시정부 임원들에게 거절당했다.
1919년 12월 대한국민의회 임시총회에서 문창범의 뒤를 이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장서리로 선출되어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고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를 불태우고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회장 최재형 등 90여 명을 사살하자, 그는 전 러시아 육군소장 출신 김인수(金仁洙), 한 안드레이와 함께 무루나이구베스케에서 노동자 등을 결집했다. 그해 9월에는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노동재무부장으로서 문창범 등과 함께 무기와 탄약 등을 입수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1920년 10월 평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같은 해 겨울 만주 지역 독립군이 연해주로 이동하는 문제가 논의되자 문창범, 오하묵(吳夏默) 등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소재 소련군 제2군단과 교섭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자유시로 이동하는 데 도움을 줬다. 또한 그해 2월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밀정 처단,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한군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