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겸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승겸은 1910년 함경남도 정평군 귀림면 상풍리(현 정평군 내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6월 8일 정평농민동맹을 해산하고 정평농민조합으로 개조할 때 참여하였으며, 1931년 1월 동 조합원의 검거로 조합이 와해되자 1932년 6월 전정현 등과 함께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정평농민조합의 재건을 시도하였다. 1932년 8월 5일 제1회 위원회에서 출판부 책임을 맡았으며, 10월 3일경 제4회 위원회에서 지역위원회,지부위원회(면 단위),지구위원회(리 단위),반 위원회(리 단위) 등 하부조직 구성을 위해 논의하였다. 이때 지부위원회 내에 책임부,조직부,투쟁부,교양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반위원회에 책임부,소작부,청소년부,부인부,노농부 등 부서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33년 3월 3일경 제13회 위원회에서 동 재건위원회의 행동강령을 제정할 것을 협의하고, 그 초안을 작성하였다. 6월 19일경 제19회 위원회에서는 조직에 관한 본부,지부,반 전문부 강칙(綱則)을 결정함과 동시에 본부 전문부의 강칙에 따라 교양부,기관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특히 동 위원회의 출판부와 기관지부의 책임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재건뉴스, 빈농을 1개월에 1회 내지 2회를 등사판으로 수 백부를 발행하고, 그 밖에 메이데임기념 팜플렛, 퇴비장려 반대, 지방진흥운동 반대 격문 등 40여 종의 격문을 인쇄하였으며,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일반 민가, 산중천막, 암굴, 폐광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했다. 이들 기관지,격문 등은 여성 조합원들을 통해 각 조합원에게 배포하였고, 멀리 함흥,흥남까지 연락하여 배부하였다.
그러나 1933년 10월 25일 정평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된 그는 1936년 2월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4월 21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한승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