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기/배경
1. 개요
2. 설정 & 배경
마비노기 영웅전 공홈 헤기 툰 : 팬텀 - 어둠을 가르는 환영[image]
어린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억할 나이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손목 위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마치 거미를 형상화한 듯 여덟 개의 다리가 그려져 있는 괴이한 문양이었다.
나는 이 문양을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문양은 케르 가문의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란다.”
내가 문양을 지우고 싶어 할 때마다 부모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랬다.
그 한 마디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보다 익숙함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저택에서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이 저택에 머무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거대한 저택에서 나 홀로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인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혼자가 편했다.
그 날은 추수가 한창인 가을날이었다.
오랜만에 부모님 두 분 모두 저택으로 돌아와 다 함께 식사를 마쳤다.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다음날 아침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말에 나는 한껏 들뜬 기분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첫 외출이 될 터였다.
나는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밤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슨 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복도로 뛰쳐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부모님의 방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
방 안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붉은 혈액이 방 한가득 웅덩이를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발에 끈적하고 미적지근한 액체가 닿았다. 소름이 끼쳤다.
방 안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하인들의 시신들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내 외침을 듣고 한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두건을 둘러 쓴 자가 어머니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건의 손에는 기이한 형태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단검 두 개를 자루끼리 이어 붙여 만든 듯한 검, 듀얼대거였다.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두건이 부모님을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소리를 지르며 두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검을 든 자에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들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두건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제대로 된 사리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두건은 내 주먹을 잽싸게 피하고는 눈앞에서 단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그것만으로 오른쪽 눈두덩 위로 붉은 피가 왈칵하고 쏟아져 내렸다.
뜨거운 혈액이 눈 위를 타고 흘러내리며 한쪽 시야를 가렸다.
나는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두건은 틈을 주지 않고 다가와 내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어지럼을 느끼며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두건은 당장에라도 검을 내리쳐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두건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녀석은 가만히 서서 나를 지켜보더니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두건 밑에서 차가운 인상을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는 들고 있던 단검을 천천히 내려뜨렸다.
남자의 무심한 눈초리가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방안의 모든 것들이 정적에 잠겨 있었다.
내 흐트러진 숨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남자의 고요한 시선과 적막의 무게에 짓눌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 부모들처럼 여기서 죽던가. 아니면, 내 아래에서 살아남던가. 하나를 선택해라.”
선택이라는 말로 포장된 그것은 선고에 가까웠다.
나는 남자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죽음과 복종 가운데 나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
살인자 녀석은 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왜 나는 살인자 녀석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일까?
어두운 방 안으로 의문은 먼지처럼 쌓여만 갔다.
같은 생각이 수백 번째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왜 그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는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결국, 나는 죽음을 피해 복종을 선택한 것일까?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덧없는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살인자 녀석을 따라온 것이 분했다.
“에일이다. 에일!”
문밖으로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내 모습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때때로 들려오는 저 웃음소리가 내 머릿속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방안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모두 어린아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자 녀석은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 부모님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나는 기가 찼다.
이곳에는 살인자 녀석과 아이들뿐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도 함께 생활하고 있는 듯했다.
내게 식사를 가져다준 아제이스라는 여자도 내 나이 또래였다.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 밖에서 새어 드는 햇빛을 피해 나는 몸을 한층 더 웅크렸다.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이, 꼬맹아. 계속 이러면 굶어 죽는다?”
살인자 녀석의 목소리였다.
방 안의 침대에는 어젯밤 아제이스가 가져다 준 식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흥. 내가 먹든 안 먹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장에라도 녀석을 흠씬 두들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에 놓인 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우물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날 따라왔냐? 거기서 그냥 죽지.”
제멋대로 내뱉는 녀석의 헛소리를 더는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앉은 살인자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자 녀석이 내 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좋다. 그럼 이건 어때?”
살인자 녀석이 내게 새로운 제안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내뱉는 헛소리는 이번에도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환영술을 배워라. 대련 중 언제든 날 죽여도 좋아. 날 죽여서, 네 부모의 복수를 해라."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번 제안에는 복수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
살인자 녀석은 에일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에일 녀석은 단검을 하나 주며 언제든 덤벼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무기까지 주면서 복수할 기회를 주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뭐하냐! 너무 느려서 달팽이가 친구 하자고 하겠다!"
나는 매일 같이 에일 녀석에게 도전했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나는 녀석의 목을 베기 위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녀석은 내 단검을 너무나도 쉽게 피해냈다.
마치 내가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통 검은 모든 걸 베지만, 환영검은 베려는 것만 벨 수 있게 컨트롤 할 수 있지."
녀석은 싸움이 끝나면 거들먹거리며 내게 환영술을 가르쳤다.
녀석이 말하는 환영검이란 정신력을 이용해 만들어 낸 실재하지 않는 검을 뜻했다.
환영검은 보통의 검과는 달리 술법자가 원하는 순간에만 실체화되는 검이었다.
이를테면, 보통의 검은 갑주를 두른 적을 공격할 때 갑주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기 쉽지 않지만, 환영검을 사용한다면 갑주에 직접 닿을 필요 없이 적의 신체, 나아가서는 적의 장기를 직접 베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환영술은 케르 가문만의 특기지. 타고났을 테니 금방 할 거야."
환영술을 배워 에일 녀석에게 복수하고자 마음먹은 것과 동시에 내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영 마법과 환영술은 케르 가문의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내 손등에 남겨진 문양, 이 문양이 바로 우리 케르 가문의 증표다.
그러니 내가 환영술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에일 녀석도 환영술을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에일 녀석이 나와 같은 케르 가문의 사람이란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녀석은 왜 내 부모님을 죽였단 말인가.
나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image]
이 숲 속의 작은 집에는 에일 녀석을 비롯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불렀다.
아직 가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덟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 일곱 명이 있었고,
이 아이들을 보살피고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리아, 미셸, 아제이스 같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 단 한 사람. 로드 박사라는 사람이 집 뒤편에 있는 별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 사람을 제외하면 이 집은 온통 아이들뿐이었다.
나는 점차 환영검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제 환영검을 동시에 여러 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정신력을 집중해 환영의 단검 여섯 개를 동시에 만들어 사방을 향해 던졌다.
내 주변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목표물들이 놓여 있었다.
내 의식에 따라 환영검이 재빠르게 날아가 목표 지점인 여섯 개의 통나무들을 단숨에 꿰뚫었다.
"헤기, 굉장하다! 배운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내 훈련을 지켜보던 아제이스가 탄성을 올렸다.
겨우 이 정도로 놀라다니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뒤를 돌아보니 아제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건 도무지 놀려 먹으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성격이었지 싶었다.
별생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해맑다고 해야 하나 독특한 녀석이었다.
"그야 난 천재니까 못하는 것 따윈 없어."
내 한 마디에 아제이스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 눈으로 본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아제이스는 이 집 사람 중에서 가장 편한 상대 중 한 사람이었다.
항상 목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이 단발머리 여자는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한시도 놓치지 않고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내가 계속해서 무시하는 태도를 일관해도 친하게 지내자며 매일 같이 찾아오는 통에 나는 포기를 선언했고, 어느샌가 한두 마디쯤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이곳 아이들은 평범하고 또 친절했다.
내가 매일 같이 에일 녀석의 목숨을 노리고 덤비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여기 있는 아제이스처럼 나를 응원한다는 녀석조차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에일 녀석조차 이곳 아이들에게만큼은 친절해 보였다.
내가 보았던 잔인한 살인자의 모습은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미셸이란 여자아이가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는 갑작스레 쓰러져서는 호흡곤란을 일으킨 것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주변의 모두가 패닉 상태가 되어 에일을 찾았다.
마침 에일이 달려와 치유 마법으로 그녀에게 응급 처치를 해 주었다.
다행히 미셸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에일의 품에 들려가는 미셸의 무릎에서 나와 같은 문양을 발견했다.
거미를 형상화한 듯 여덟 개의 다리가 그려져 있는 문양이었다.
'이 문양은 케르 가문의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내 손목의 문양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손목이 욱신거리며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대체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 머무는 것일까.
케르 가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한번 환영술에 집중하기로 했다.
더는 길을 잃을 순 없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그 날의 저택에 있었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던 그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방에 또 한번 발을 들였다.
방 안에는 아직도 새빨간 피의 웅덩이가 가득 차 있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새빨간 웅덩이.
그 웅덩이 밑에서 거대한 거품처럼 무엇인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억울해….... 헤기."
그것은 그 날 목숨을 잃은 수많은 하인과 나의 부모님이었다.
피를 뒤집어쓴 죽은 자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내게 다가왔다.
"갚아줘....... 원수를......."
"우리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를......."
죽은 자들이 내 몸을 끌어당기며 애원했다.
피의 웅덩이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에일 녀석에게 복수하겠노라 이야기했다.
죽은 어머니를 붙잡고 꼭 원수를 갚겠노라 외쳤다.
그리고 한순간, 어머니의 얼굴은 아제이스의 얼굴로 변했다.
"아니, 넌 할 수 없어. 에일은 네 가족이니까."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죽은 아제이스의 눈동자가 나를 피의 웅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
천재적인 재능에 힘입어 내 환영검 실력은 금세 늘었다.
나는 이미 에일 녀석보다 환영검을 잘 다룰 수 있었다.
오늘 대결도 녀석이 치사하게 갑자기 체술을 사용해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내 승리가 확실했다.
"헤기. 날 죽인 후에는 말이야. 지키기 위해 살아라."
대결이 끝난 후 에일 녀석이 또다시 설교를 늘어놓았다.
나는 녀석이 이럴 때마다 항상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증오란 일시적인 강함이야. 목표를 잃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지. 누군가의 도움이 되는 힘을 배워라, 헤기. 그래야 끝까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비틀어 놓고 이제 와서 잘난 척 이야기하는 녀석이 꼴 보기 싫었다.
"웃기지 마!"
나는 에일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녀석 때문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게 지키고 싶은 것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image]
시간이 갈수록 복수를 향한 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일은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에일은 그와 동시에 이곳 아이들의 가족이었다.
내가 에일을 죽인다면 아이들은 나처럼 가족을 잃게 될 것이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의 가족을 죽이고 싶은 걸까?
그것이 망설임의 시작이었다.
"당신, 치료마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 나한테 치료마법을 가르쳐라. 죽이는 건 그다음이야."
대련이 끝난 후, 나는 에일에게 말했다.
언젠가 에일이 미셸에게 사용한 치료마법을 떠올렸다.
그 능력이 있으면 혹시라도 내가 에일을 다치게 했을 때 편리하겠다 싶었다.
죽일지 살릴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으니 두 힘 모두 익혀두면 도움이 될 터였다.
절대 지난번 에일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에일이 씨익 하고 웃으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부탁하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 가르쳐주세요 라고 해야지!"
에일이 등 뒤에서 내 목을 조르면서 다시 한번 부탁해보라며 협박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다시 한번 부탁하기 전까지 에일은 내 목을 조른 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이 녀석한테 부탁하는 게 아닌데 싶었다.
-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악몽이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 현실에서까지 죽은 부모님과 죽은 아제이스의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
점차 미쳐가는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은 복수를 서두르라고 애원하고 아제이스는 함께 가족이 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환영을 피해 모든 것을 외면하며 도망쳐다녔다.
부모님의 환영을 볼 때면 환영술을 훈련했고, 아제이스의 환영을 볼 때면 에일에게 배운 치료 마법을 연구했다.
때가 되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결정을 미루고 현상 유지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한 남자의 환영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모습을 한 환영이었다.
환영의 등장과 함께 가문의 문양이 욱신거리며 아파졌다.
나의 모습을 한 환영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환영을 피해 도망쳤다.
손목의 욱신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집을 벗어나 정처 없이 숲 속을 달렸다.
그 어떤 환영도 날 찾을 수 없기를 바라며.
-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나는 결국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헤기!"
아제이스가 나를 향해 소리치며 뛰어 왔다.
그녀의 뒤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도망쳐야 해! 따라와!"
아제이스는 필사적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숲에서 이어지는 산 능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을 피해 우리는 정신 없이 산길을 달렸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도망가는지 설명이라도 좀 해!"
발걸음을 살짝 늦추면서 나는 아제이스를 향해 물었다.
나로서는 상황 파악을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다.
"저건....... 케르 가문의 병사들이야."
그 말에 나는 아제이스의 손을 뿌리쳤다.
"뭐? 그럼 나는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날 구하러 왔을지도......."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일 때문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까 얘기할게."
아제이스가 목에 두른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평소에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낸 적이 없던 붕대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는 나와 같은 문양이 있었다.
케르 가문의 문양.
"그래. 나도 케르 가문의 아이야. 여기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각인을 가졌어."
그리고 그녀는 망설이듯 다음 말을 꺼냈다.
"왜냐면 이 각인은 마물을 심어두었다는 표식이니까."
아제이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며 내 손을 다시 잡아 끌었다.
그녀는 발길을 재촉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람의 몸속에서 마물을 길러내면 강력하게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마물을 얻기 위해 케르 가문의 주술사들은 일부러 아이를 길러 아이의 몸속에서 마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몸에 새겨진 '각인'은 가문의 문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술사들이 마물을 심었다는 표식이었다.
아이들 몸속 마물이 깨어나려 할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케르 가문의 마법석을 통해 마력을 주입하는 것뿐이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일은 가문석을 훔쳐 아이들을 데리고 가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가문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가문의 추적자들을 뿌리쳐왔다고 아제이스는 이야기했다.
"네 부모님을 죽인 이유도 그들이 우릴 모두 처리하려 해서였어. 그리고 거기서 너를 발견했던 거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내 부모님이 케르 가문의 아이들을 처리하려 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반박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아제이스의 표정이 굳어지며 시선이 내가 아닌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엔 어느샌가 우리를 쫓아온 케르 가문의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마법 스태프를 겨누었다.
"헤기! 위험해!"
찰나의 순간, 아제이스가 내 몸을 감쌌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아제이스의 몸을 가까스로 부축했다.
"아제이스!"
아제이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모습이 언젠가 보았던 미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멈춰! 헤기는 귀한 실험체라고 말했잖나!"
아제이스를 공격한 무리 중 한 사람이 나서며 스태프를 가진 병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직접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제이스의 몸을 일으켜 함께 도망가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일으키려 해도 아제이스가 자꾸만 나를 손으로 밀쳐냈다.
"헤기. 도망가....... 나는 곧 마물이 될 거야. "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일이 도와주기 전엔 발작이 멈추지 않아."
그녀가 왜 자꾸만 나를 밀쳐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그녀가 왜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는지.
"왜냐하면, 헤기는….... 우리의 가족이니까."
그녀의 몸을 뚫고 거대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뼈를 부수고 살갗을 찢으며 튀어나온 그것은 더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아제이스라는 존재가 훼손당하는 듯한 끔찍한 죽음이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한때 아제이스였던 존재의 몸을 검으로 찍어 눌렀다.
조금 전에 나를 실험체라 부른 남자였다.
남자의 검이 마물을 천천히 꿰뚫고 들어가자 마물의 가시가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왜 아이들을 마물로 만드는지 아나?"
그가 공포에 빠진 나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길러진 숙주들은 나중에 마물이 되더라도 가문 사람을 공격하지 않거든."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내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공포에 질려 모든 이성이 마비된 탓이었다.
뭐가 난 천재니까야.
넋이 나간 나를 향해 병사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것도 못 한 주제에.
그 순간, 에일이 나타나 병사들을 환영술로 쫓아냈다.
아제이스.
에일이 나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제이스.......
에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안아 올렸다.
미안해....... 아제이스.
날 어깨에 짊어진 에일은 병사들을 피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렸다.
아제이스의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도 추격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와 에일 모두 체력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 와중에 갑작스러운 내리막이 나타나자 내 다리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중심을 잃은 나는 비탈을 미끄러지며 바닥을 여러 차례 굴렀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다시금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발목에 격통이 느껴졌다.
바닥을 구르며 발목을 다친 것이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녀석들에게 잡힐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image]
에일의 표정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우리가 내려온 비탈 위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얼마 안 가 도착할 것이었다.
에일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헤기.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에일은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양날의 단검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함께 병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건 케르 가문의 가문석이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마물화 되는 걸 막을 수 있어."
그가 항상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가문석이라는 부적을 내게 맡긴 것이다.
그것은 나 혼자라도 도망치라는 의미였다.
"지금 나 혼자 도망치란 거야?"
에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난 널 죽이려고 했다고! 그런데 어째서 날!"
"넌 나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그가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했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일까.
"난 지키려 했던 걸 모두 잃었어. 그래서 살아봤자 별로 의미가 없지."
그는 등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섰다.
"헤기, 너만은 꼭 살아남아야 해. 넌 내 하나 남은 가족이니까. 알겠지?"
그 말만 남기고 에일은 병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병사들이 그를 맞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환영 마법을 사용해 마치 맹수처럼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수많은 환영검이 공중을 수놓으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한순간, 그에게 가문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그에게 마력을 주입했다.
에일은 아제이스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나는 또 한 번 소중한 존재가 산산조각이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를 닮은 환영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모두 내 탓이었다.
환영은 내가 두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경고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내 각오가 부족한 탓이었다.
내가 망쳐버렸다.
병사들의 손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 손은 내게서 가족을 빼앗아 간 자들의 손이었다.
-
아침이 밝은 무렵이었다.
머리가 유난히 무겁고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 주변으로 케르 가문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몽롱한 머릿속으로 그들이 나와 에일을 뒤쫓던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꿈이 아니었다.
그들을 피해 달아나던 기억도 두 사람의 죽음도.
그리고 내 목에 남겨진 가문석의 목걸이까지.
꿈이 아니었다.
에일도….... 아제이스도....... 아이들 모두가.......
'헤기. 날 죽인 후에는 말이야. 지키기 위해 살아라.'
에일 녀석의 허세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슬픔이 가슴을 옥죄듯 조여왔다.
턱밑으로 물방울이 모여들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키기 위해 살라니.
멍청아.
나보고 어떡하란 거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을 찾자마자 전부 잃어버렸는데.......
솔직히 말할 걸 그랬어.
나도 당신들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고.
-
시간이 흘렀다.
헤기는 내면의 환영과 마주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image]
에일이 남기고 떠난 양날의 단검도 이제는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헤기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날 자신이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헤기는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눈앞에는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헤기를 쫓는 추격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아직도 아이들의 몸에 마물을 심고, 마물을 길러내 전쟁에서 이득을 취하는 추악한 무리가 건재하다는 뜻이었다.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생존을 위해서도 아닌,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헤기는 환영의 검을 뽑아 들었다.
케르 가문의 저택.
오늘 이곳에 가문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한 데 모일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저택의 문을 열고 헤기가 들어섰다.
케르 가문의 귀족들이 경악에 찬 눈으로 헤기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수많은 환영의 칼날이 비쳤다.
그것은 헤기가 바치는 진혼곡이었다.
악인들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영혼의 진혼곡.
-
그로부터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헤기는 정처 없이 세상을 여행하던 와중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작지만 거미의 수호신과 딸기로 모험가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마을이었다.
"빨리 종탑 앞으로 집합해라! "
헤기가 마을에 막 들어섰을 때, 용병단 사무소를 주변으로 집합의 종소리가 울리고 용병단원들의 발걸음이 울렸다.
용병단의 출정 명령이 내려진 듯했다.
"신참! 여기서 왜 넋 놓고 있나! 빨리 종탑으로 집합해!"
종탑으로 향하던 용병 중 한 사람이 헤기를 누군가로 착각한 듯 말을 걸었다.
헤기는 당황한 나머지 단원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단원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용병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용병이 혼잣말이라도 하듯 이야기했다.
"신물의 폭주라니 불길해. 이대로는 콜헨도 위험해질 수 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 한다!"
용병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헤기는 용병들을 따라 종탑으로 향했다.
원작: team Weaver / 글 : 칼미슈 / 그림 : jin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