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동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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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1년 3월 4일 새벽 3시 47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의 다세대주택에서 집 주인의 아들인 최씨(당시 32)의 고의 방화로 인해 발생된 화재로 소방관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이 큰 부상을 입은 대형 참사다.
2. 상세
오전 3시 47분, 화재 신고가 최초로 접수된 후 가장 가까운 서울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를 비롯 인근 소방서의 소방차 20여대와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으나,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방관들은 화재현장으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 부터 소방호스를 끌고 뛰어 진화작업을 시작했다.
그 시각 구조대원도 겨우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은 화재진압대가 먼저 현장에 도착 할 수 있도록 다른 진입 경로로 현장에 접근하려 했지만, 폭 6m 남짓한 좁은 이면도로에 주차된 차량들이 너무 많아 구조차량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어 5명[1] 의 구조대원들이 25kg이 넘는 장비들을 직접 들고 200m 가량을 달려서 도착했다.
이후 오전 3시 59분 '연희소대'가 현장 근처에 도착했지만, 마찬가지로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에 의해 접근이 어렵자 15m 남짓 소방호스 12개를 이어붙여 가까스로 진화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진화 시작 5분여 만에 집주인 및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때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집주인이자 방화범 최씨의 어머니인 선씨의 주장에 이미 화마로 뒤덮힌 2층집으로 먼저 '구조1조'의 소방관 3명이[2] 이 진입했으나 아들 최씨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게 1차 수색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선씨가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했고[3] '구조1조'의 소방관 3명과[4] '녹번 2소대'의 소방관 3명[5] '홍은소대' 소방관 2명[6] 그리고 '2조'의 소방관 2명[7] 이 당시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비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구조자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녹번 2소대'와 '홍은소대', 그리고 '구조1조', '구조 2조'의 10명이 요구조자를 찾기 위해 건물로 들어간 오전 4시 11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2층 주택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소방관 10명이 무너진 건물속에 그대로 매몰되었으며, 인근에 있던 소방관 3명[8] 도 날아온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건물이 붕괴된 직후인 오전 4시 18분, 다른 화재신고[9] 장소에 갔다가 뒤늦게 도착한 '녹번1소대'와 이후 출동한 시내 11개 소방서에서 도착한 구조대원 200여 명은 소방호스 대신에 삽과 망치를 들고 필사적인 구조작업을 벌여 3명[10] 의 소방관을 구조해 냈으나 나머지 6명은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11]
이미 불은 다 꺼진 오전 5시 47분, 영하 0.3도, 초속 4m의 서남풍에 습도 60% 굵은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며 아침을 맞이했지만, 그 풍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각종 중장비와 인력의 투입으로 오전 7시 57분, 매몰되었던 마지막 대원이 들것이 실려 나왔고 오전 9시 28분, 집주인 아들 최씨가 불길이 치솟기 전 현장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 수색작업을 종료했다.
2.1. 방화 경위
방화범인 집주인 아들 최씨(32)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이 나기 한 시간 쯤 전인 어제 새벽 2시 반쯤 술에 만취한 채 귀가해, 자신을 야단치는 어머니 선씨와 다투다 결국 주먹을 휘둘렀고, 최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피해 윗층으로 몸을 숨기자 화가 풀리지 않아 방안에 있던 생활정보지에 불을 붙였다고 자백했으며, 불길이 크게 번지자 겁이 난 최씨는 친척집으로 달아났다가 4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최씨의 자백에 따라 오늘 오전 방화와 존속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결국, 그는 현주건조물방화 및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지만, 1989년경부터 정신 질환으로 세차례나 입원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심신미약 등이 인정돼 징역 5년 형을 선고 받았다.
3. 순직 소방관 명단
현재는 1계급 추서되었으며, 아래 계급은 순직 당시의 계급이다.
4. 이후 바뀐점
당시에 소방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 부터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먼저 당시 근무 형태는 24시간 맞교대로 격일 근무였는데, 참사 후 3교대로 바뀌었다. 또한 기존에는 방화복이 없어 방화복 대신 비옷을 입었지만, 방화복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이 높아졌으며, 가장 큰 변화로는 의무소방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5. 반응
비극적인 사고가 벌어진 뒤 시민들 사이에서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합동분향소에는 3일 동안 3만명에 가까운 시민과 공무원이 조문하는 등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소방관 6명이 한번에 순직한)국내 최악의 화재 참사
한편 소방관들이 목숨을 바쳐 구하려 했던 집주인 아들은 화재를 일으킨 당사자인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6. 바깥 고리
- [오리지너]소방관 6명 집어삼킨 2001년 서울 홍제동의 어느 새벽 - 한국일보
- 홍제동 화재 "아들이 방화" - SBS
- [오늘의 역사]3월4일:2001년 불꽃이 된 여섯 소방관 - 중도일보
- <주택가 이면도로 `화재사각지대'>(종합) - 연합뉴스
7. 둘러보기
[1] 김기석 소방교, 장석찬ㆍ박준우ㆍ권영철ㆍ이민호 소방사[2] 김기석 소방교, 장석찬ㆍ박준우 소방사[3] 분명한건 당시 방화범 최씨의 어머니는 최씨가 불을질럿고 최씨가 제일먼저 도망을 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4] 장석찬ㆍ박준우 소방사, 김기석 소방교[5] 박동규 소방장, 박상옥ㆍ이승기 소방교[6] 강남길 소방사, 김철홍 소방교[7] 권영철ㆍ이민호 소방사[8] 심미현 소방교, 곽용규ㆍ이문형 소방장[9] 오인신고[10] 강남길ㆍ이민호 소방사, 이승기 소방교[11] 권영철 소방사는 자체 대피했으며, 심미현 소방교 곽용규ㆍ이문형 소방장은 파편에 맞아 쓰러졌지만 큰 부상이 아니라서 바로 동료 구조작업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