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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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
'''MC 한새'''
'''본명'''
윤성훈
'''생년월일'''
1976년 11월 25일 (48세)
'''학력'''
서초초등학교
서일중학교
가락고등학교
원광대학교 (중퇴)
'''신장'''
170cm, 58kg
'''데뷔'''
1995년 이창권 1집 타이틀곡 '애인 만들기' 객원 래퍼
1. 개요
2. 이야깃거리


1. 개요


대한민국의 1세대 힙합 MC이자 래퍼.
1995년경부터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도 1집 앨범 파랑색 파란으로 데뷔했다.
그 후 본인의 동료들과 BCR Crew를 결성하고 그 중심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참고로 DJMAX의 Fate로 리듬게임계에 이름을 알린 Sti도 원래는 이 크루 멤버로 활동한 바 있다.)

2. 이야깃거리


특히 네번째 앨범인 "사랑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병(2003)"으로 본격적인 메이저 활동과 언더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 앨범으로 그저 불량한 마이너 문화의 이미지가 강했던 힙합을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했다는 평이 있으나 '''그렇게 보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수준이다.[1] 한새는 "힙합계의 로맨티스트"라는 별명으로 주 타이틀 곡은 거의 사랑 노래이며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 동안 뉴에이지 피아노 멜로디와 힙합의 결합으로 재미를 봤다. 나름대로 사회 비판이나 풍자에 관한 곡도 굉장히 많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곡도 굉장히 많이 쓴다.
8장의 정규앨범과 수많은 앨범 참여와 싱글을 발매했으나,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다. 일단 랩 스타일부터가 수수해서 2000년쯤에는 잘 먹혀들었을지 몰라도 힙합에 있어 온갖 방법론이 주창된 지금 시대의 리스너들에게는 어필하기 힘들다. 특히 4집을 기점으로 메이저 진출을 시도하면서 멜로디를 중시해 멜로디와 리듬의 균형이 깨졌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도를 전후로 한 시대 수준에서도 랩을 그렇게 잘한다고 볼 수 없었고 멜로디 작곡과 가사의 내용으로 인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4집에서부터 지나친 멜로디 위주의 작곡, 그리고 욕설과 비속어 등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색하게 사용한 노래가사 등 기존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조하게 된다. 가장 좋았던 결과물은 3집이라고 볼 수 있는데 3집으로 메이저의 관심을 끌었지만 잘못된 프로듀서를 만난 것 같다.
그래도 전성기에서는 기본적으로 편안한 멜로디와 비트를 바탕으로 진솔한 가사를 통해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당시 힙합 팬들과는 괴리가 있었는데, 사랑 얘기나 행복에 대한 고민 같은 가사도 그렇고 비트가 약하고 멜로디 위주의 구성이 제대로 된 힙합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다. 한새의 팬들은 힙합에 대한 격한 호감보다는, 큰 거부감이 없는 상태에서 한새의 감성에 끌려서 팬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한새의 팬들과 당시 힙합 팬들의 공집합은 별로 크지 않았다. 오히려 힙합 팬들에게 가짜 힙합이라고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사실 한새야말로 감성힙합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7집[2]을 발표하면서 'No Pain No Beat'라는 곡을 통해 가요계에 만연해 있는 표절 풍조를 비판했는데, 정작 자신이 2008년 발매했던 6집 My birthday의 타이틀곡 따라라가 Soulja boy의 Soulja girl 표절 의혹을 받았던 것을 잊은 듯 하다.
쇼미더머니6에 참가한 1세대 래퍼중 한명이었지만 원썬과 함께 1차에서 떨어졌다.
2000년대 초 버벌진트가 한창 키보드워리어였을 적 PC통신 게시판에 국내 래퍼들에 대한 평을 썼는데 여기 그에 대한 평도 있다.

'''MC Hansai : 한국 힙합 음악의 평균 수준을 존나게 끌어내린 사람이다.''[3]

이후 2015년에 정규 8집을 발표했다.

[1] 소속사의 이상한 카피라이트에 가까울 것이다.[2] 한 번에 내는게 아니고 여러 개의 싱글식으로 텀을 두고 발매 중.[3] 버벌진트가 이렇게 까내린 랩퍼가 한둘이 아닌데 2010년대 후반대부터 버벌진트가 해낸 것은 해낸 것이고, 그가 까내린 당시 사람들과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