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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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19일~1994년 7월 11일
Gary Arlen Kildall
과거 MS-DOS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운영 체제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던 CP/M과 BIOS의 제작자. 1994년 7월 11일 사망.
별명은 빌 게이츠가 '''될 수 있었던''' 사나이.
하버드에 입학했지만 학위 대신 대학을 중퇴하고 사업을 차린 빌 게이츠와는 달리 이 양반은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박사까지 마친 학자로서, 당시 초창기에 태동하던 컴퓨터 공학을 제대로 전공하여 학-석-박사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며, 디지털 리서치 사를 세워 CP/M이라는 초창기 컴퓨터 운영 체제를 개발하여 당시 시장을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CP/M은 당시 쓰이던 컴퓨터들에 쓰이던 운영 체제 중 가장 인기있고 성능이 탁월했다.
그러던 중, IBM도 IBM PC용 CP/M을 제작 의뢰하기 위해서 게리 킬달과 접촉하려 했다. IBM이 처음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접촉했지만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 체제 개발사가 아니어서 빌 게이츠가 게리 킬달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게리 킬달은 종종 첫 아내이면서 디지털 리서치 공동 설립자였던 도로시 맥윈 킬달 부사장에게 협상을 맡겼고, IBM 대표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부사장에게 비공개 협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사장은 게리 킬달의 동의 없이는 그런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며 거절했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했다.[1]
IBM 대표가 접촉해왔을 때 게리 킬달은 자가용 경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게리 킬달 본인은 몹시 화를 내며 부정했지만, 주변 인물들의 말로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당시 흔하게 알려진 레저를 즐기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게리 킬달은 컴퓨터 제조사에 소프트웨어를 전달하기 위해 자가용 경비행기를 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사무실에 돌아와 IBM과 다시 접촉했고, 게리 킬달 본인도 비공개 협약에 서명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IBM은 게리 킬달과의 거래를 포기하고 당시 운영 체제 쪽으로는 듣보잡에 가까웠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MS-DOS[2][3] 로 계약했다. 하지만 IBM은 MS-DOS/PC-DOS가 CP/M의 특허권을 침해한 사실을 알고 다시 게리 킬달과 접촉했다. IBM은 게리 킬달이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IBM PC를 시판할 때 PC-DOS와 함께 판매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이미 주 운영 체제를 MS-DOS/PC-DOS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CP/M의 가격은 250달러였던 반면 MS-DOS의 가격은 40달러로 MS-DOS와 가격이 CP/M의 6배가 넘는 것도 문제였다. 여기에, MS-DOS는 IBM PC와 함께 출시해 사람들에게 정품 이미지를 각인한 반면, 그 반 년 후에 나온 것이 게리 킬달의 운영 체제다 보니 MS-DOS가 잘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리 킬달은 이후 가격 책정에 대해 IBM 탓을 했으나, PC-DOS의 점유율이 완벽하게 폭망하기 전까지 게리 킬달은 직접 본인의 입으로 프리미엄 가격 정책을 고수했고 MS-DOS를 '장난감 운영 체제' 취급했다. 본인 생각에는 취미용 운영 체제와 작업/업무용 운영 체제의 급수차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후 IBM이 PC의 개발 관련 문서를 완전히 개방하면서 그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PC 제조사가 생겨났고, 그 회사들 역시 MS-DOS를 구매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크로컴퓨터용 운영 체제 회사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었다.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
그 후 게리 킬달은 DR-DOS를 출시하는 등 발버둥을 친다. 당시 게리 킬달이 했던 일로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BASIC의 확산을 우려하여 CP/M을 운영 체제로 하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전체 PL/I 프로그래밍 언어의 ANSI 표준 부분 집합인 PL/I-80을 만들었던 것과,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로고나 CD-ROM 드라이브와 비디오 디스크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는 것, CD-ROM 버전의 Grolier's를 제작하는 것 등의 여러 실험적인 프로젝트 등이 있다.
하지만 좋은 성능과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형 PC 업체와 MS-DOS와의 기존 계약을 뚫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대세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기울었던 것이다. 결국 게리 킬달은 시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1991년에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매각했을 때 은퇴하면서 컴퓨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 컴퓨터에 관한 TV 방송 프로그램인 <컴퓨터 크로니클스>의 진행자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활동하였다. 본인은 기자들이 위의 얘기를 자꾸 꺼내면서 자신을 시대를 못 읽은 얼간이 정도로 취급할 때마다 정말로 화를 냈다고 한다.[4] 정작 자신은 CP/M 원본을 만들었는데, 빌 게이츠는 CP/M 클론을 가져다가 시작한 MS-DOS로 떼돈을 벌었을뿐만 아니라 그 덕에 IT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빌 게이츠만큼 세계적 대부호가 아니었을 뿐, 1991년에 은퇴하면서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1억 2천만 달러'''에 매각했으며 유산도 수억 달러나 남긴 부유층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도 비극적이었다. 그는 알코올 의존증 상태였으며 술에 취해서 뒤로 넘어졌는데, 이때 뇌출혈로 사망했다. 1994년 7월 8일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Franklin Street Bar & Grill'라는 바에서 술에 취해 뒤로 넘어졌는데, 이 때 받은 두부 충격으로 인해 경막 하부에 혈종이 생겨서 실려간 병원인 'Community Hospital of Monterey Peninsula'에서 3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시대 상황을 가늠하고 CP/M를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의 안목과 실력을 갖춘 우수한 엔지니어였지만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크나큰 패인인 비운의 인물.
하지만 이 부분은 빌 게이츠가 대단하게 성공한 것이지 딱히 게리 킬달이 실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가 마이크로소프트 대신 IBM의 계약을 따내었다고 해도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만큼 성공했을 거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뛰어난 기술력에 비해서, 사업가로서는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 약간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정도다.[5][6] 그리고 컴퓨터 산업에 크게 공헌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 성격은 외향적인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레이싱 매니아에 경비행기도 즐겨 몰았고 바다를 매우 좋아했다.
두번 결혼했으며[7]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스콧 킬달은 시각 미디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1942년 5월 19일~1994년 7월 11일
Gary Arlen Kildall
1. 개요
과거 MS-DOS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운영 체제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던 CP/M과 BIOS의 제작자. 1994년 7월 11일 사망.
별명은 빌 게이츠가 '''될 수 있었던''' 사나이.
2. 생애
하버드에 입학했지만 학위 대신 대학을 중퇴하고 사업을 차린 빌 게이츠와는 달리 이 양반은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박사까지 마친 학자로서, 당시 초창기에 태동하던 컴퓨터 공학을 제대로 전공하여 학-석-박사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며, 디지털 리서치 사를 세워 CP/M이라는 초창기 컴퓨터 운영 체제를 개발하여 당시 시장을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CP/M은 당시 쓰이던 컴퓨터들에 쓰이던 운영 체제 중 가장 인기있고 성능이 탁월했다.
그러던 중, IBM도 IBM PC용 CP/M을 제작 의뢰하기 위해서 게리 킬달과 접촉하려 했다. IBM이 처음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접촉했지만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 체제 개발사가 아니어서 빌 게이츠가 게리 킬달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게리 킬달은 종종 첫 아내이면서 디지털 리서치 공동 설립자였던 도로시 맥윈 킬달 부사장에게 협상을 맡겼고, IBM 대표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부사장에게 비공개 협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사장은 게리 킬달의 동의 없이는 그런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며 거절했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했다.[1]
IBM 대표가 접촉해왔을 때 게리 킬달은 자가용 경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게리 킬달 본인은 몹시 화를 내며 부정했지만, 주변 인물들의 말로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당시 흔하게 알려진 레저를 즐기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게리 킬달은 컴퓨터 제조사에 소프트웨어를 전달하기 위해 자가용 경비행기를 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사무실에 돌아와 IBM과 다시 접촉했고, 게리 킬달 본인도 비공개 협약에 서명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IBM은 게리 킬달과의 거래를 포기하고 당시 운영 체제 쪽으로는 듣보잡에 가까웠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MS-DOS[2][3] 로 계약했다. 하지만 IBM은 MS-DOS/PC-DOS가 CP/M의 특허권을 침해한 사실을 알고 다시 게리 킬달과 접촉했다. IBM은 게리 킬달이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IBM PC를 시판할 때 PC-DOS와 함께 판매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이미 주 운영 체제를 MS-DOS/PC-DOS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CP/M의 가격은 250달러였던 반면 MS-DOS의 가격은 40달러로 MS-DOS와 가격이 CP/M의 6배가 넘는 것도 문제였다. 여기에, MS-DOS는 IBM PC와 함께 출시해 사람들에게 정품 이미지를 각인한 반면, 그 반 년 후에 나온 것이 게리 킬달의 운영 체제다 보니 MS-DOS가 잘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리 킬달은 이후 가격 책정에 대해 IBM 탓을 했으나, PC-DOS의 점유율이 완벽하게 폭망하기 전까지 게리 킬달은 직접 본인의 입으로 프리미엄 가격 정책을 고수했고 MS-DOS를 '장난감 운영 체제' 취급했다. 본인 생각에는 취미용 운영 체제와 작업/업무용 운영 체제의 급수차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후 IBM이 PC의 개발 관련 문서를 완전히 개방하면서 그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PC 제조사가 생겨났고, 그 회사들 역시 MS-DOS를 구매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크로컴퓨터용 운영 체제 회사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었다.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
그 후 게리 킬달은 DR-DOS를 출시하는 등 발버둥을 친다. 당시 게리 킬달이 했던 일로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BASIC의 확산을 우려하여 CP/M을 운영 체제로 하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전체 PL/I 프로그래밍 언어의 ANSI 표준 부분 집합인 PL/I-80을 만들었던 것과,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로고나 CD-ROM 드라이브와 비디오 디스크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는 것, CD-ROM 버전의 Grolier's를 제작하는 것 등의 여러 실험적인 프로젝트 등이 있다.
하지만 좋은 성능과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형 PC 업체와 MS-DOS와의 기존 계약을 뚫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대세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기울었던 것이다. 결국 게리 킬달은 시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1991년에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매각했을 때 은퇴하면서 컴퓨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 컴퓨터에 관한 TV 방송 프로그램인 <컴퓨터 크로니클스>의 진행자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활동하였다. 본인은 기자들이 위의 얘기를 자꾸 꺼내면서 자신을 시대를 못 읽은 얼간이 정도로 취급할 때마다 정말로 화를 냈다고 한다.[4] 정작 자신은 CP/M 원본을 만들었는데, 빌 게이츠는 CP/M 클론을 가져다가 시작한 MS-DOS로 떼돈을 벌었을뿐만 아니라 그 덕에 IT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빌 게이츠만큼 세계적 대부호가 아니었을 뿐, 1991년에 은퇴하면서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1억 2천만 달러'''에 매각했으며 유산도 수억 달러나 남긴 부유층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도 비극적이었다. 그는 알코올 의존증 상태였으며 술에 취해서 뒤로 넘어졌는데, 이때 뇌출혈로 사망했다. 1994년 7월 8일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Franklin Street Bar & Grill'라는 바에서 술에 취해 뒤로 넘어졌는데, 이 때 받은 두부 충격으로 인해 경막 하부에 혈종이 생겨서 실려간 병원인 'Community Hospital of Monterey Peninsula'에서 3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3. 평가
시대 상황을 가늠하고 CP/M를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의 안목과 실력을 갖춘 우수한 엔지니어였지만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크나큰 패인인 비운의 인물.
하지만 이 부분은 빌 게이츠가 대단하게 성공한 것이지 딱히 게리 킬달이 실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가 마이크로소프트 대신 IBM의 계약을 따내었다고 해도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만큼 성공했을 거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뛰어난 기술력에 비해서, 사업가로서는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 약간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정도다.[5][6] 그리고 컴퓨터 산업에 크게 공헌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4. 기타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 성격은 외향적인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레이싱 매니아에 경비행기도 즐겨 몰았고 바다를 매우 좋아했다.
두번 결혼했으며[7]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스콧 킬달은 시각 미디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1] 이에 대해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선호해서 양복입은 비즈니스맨식 일처리를 싫어했다는 말도 있고 이 협상이 매우 불공평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갑을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걸 받아들여 IBM보다 더 큰 회사가 된 마이크로소프트만한 운과 선견지명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2] 초기 MS-DOS는 16비트이면서 CP/M 응용 프로그램 호환성을 기본으로 설계했다. 확장자가 COM인 실행 파일은 이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프로그램 제작사는 기존 프로그램에서 작은 수정 혹은 재컴파일 만으로 MS-DOS용 프로그램 개발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만큼 당시 CP/M은 독보적인 존재였다.[3] CP/M은 8비트 CPU인 8080/Z80을 위한 OS였고, MS-DOS는 16비트 CPU인 8086/8088을 위한 OS였다(80286 이후 CPU도 포함). 8086/8088은 8080과 다르게 주소 지정을 1MB까지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세그먼트:오프셋 방식을 도입하였다. 문제는 이 때문에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CP/M 프로그램 호환성을 가지게 할 수가 없었고, 이를 위해 MS-DOS는 독특한 트릭을 사용했다. 문제는 이후 주소지정 영역이 16MB로 늘어난 80286부터는 반대로 이 트릭 때문에 호환성에 문제가 생겼고, 이 때문에 IBM이 A20 Gate라는 또 다른 트릭(...)을 도입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물론 이것 말고도 이유가 있었다). 좀 더 기술적으로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자.[4] 게리 킬달 사후에 그의 회고록을 지인들에게 배포했는데, IBM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철천지 원수처럼 깠다고 한다. 논란이 일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2016년에서야 유족들이 일부 공개할 정도. 사실 당사자 앞에서 시대를 못 읽은 얼간이 취급 하면 화 안낼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5] 사실 이후에야 어찌됐든 8비트 운영체제 시장을 완전히 점령했었던 만큼, 이 사람을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다. 아직 제대로 된 OS 개념도 부족하던 시절에(물론 PC 기준이다) 난립하던 수 많은 컴퓨터들에 공통된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이후 컴퓨터 제조사들이 설계부터 CP/M을 의식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뛰어나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위에 나와있듯이 IBM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먼저 접촉했고 이 때 빌 게이츠는 디지털 리서치와 연결시켜주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빌 게이츠는 처음부터 IBM PC의 운영체제 시장을 높게 평가한 안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IBM PC용 BASIC 인터프리터와 오피스 등을 판매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만약 이 때 게리 킬달이 IBM과 계약하고 CP/M 계열이 주 운영체제가 되었다면 둘의 상황이 반대가 되어있었을 수도 있으며 빌 게이츠는 OS 시장을 버리고 낡은 BASIC 인터프리터에 집착한 얼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6] 물론 위에도 적혀있다시피 게리 킬달의 실책도 분명히 있다. 가격 정책도 그러하며, 또 하나의 실책으로는 CP/M-86을 개발하면서 시스템 콜(BDOS) 호출 방식을 기존 CP/M-80의 CALL 5 방식에서 INT E0h로 바꿔버렸는데, 이로 인해 황당하게도 CP/M-80 호환성이 CP/M-86보다 오히려 MS-DOS가 더 나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정확히는 둘 다 바이너리 호환성은 없었고, 소스 코드 호환성에서의 얘기인데 MS-DOS의 경우 기존 CP/M-80으로 개발된 소스를 거의 수정없이 재컴파일하는 것으로 이식이 가능했으나 CP/M-86의 경우 BDOS를 직접 호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부터 다 바꾸어야 했다. 물론 이것이 그렇게 이식에 큰 악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MS-DOS에 패배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프로그램적 트릭으로 CALL 5를 지원했던 MS-DOS에 비해 불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7] 첫 아내 도로시 맥웬은 디지털 리서치 창립에도 관여한 컴퓨터 공학자였다고 한다. 1983년 별거 후 이혼했으며 2005년 뇌암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