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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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7년, 정유재란기 고령에서 일어난 전투.
2. 배경
일본이 조선을 재침했을 때,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부산에서 군을 좌우로 나누어 전주를 향했다. 우군은 모리 히데모토가 맡았고 이 곳에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속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김해에서 창원-함안을 거쳐 진주로 향한 뒤 성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김응서의 군과 충돌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김응서의 군을 우회했다. 그런 뒤 삼가현을 거쳐 성주쪽으로 북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8월 상순에 기어이 고령을 침공했다.
조선군은 산성에 틀어박혀 수성전에 나섰으며, 도체찰사 이원익은 선산에서 전군의 작전을 통제했다. 권율이 이끄는 군대는 성주와 김천의 사이에서 중로와 우로로의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서 길목을 막고 일본군이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정기룡은 상주 진영 아래의 9군을 이끌고 금오산성에서 수성 중이었다. 조선군의 지휘부는 일본군을 요격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원익은 권율과 곽재우와 상의한 끝에 정기룡이 적임자라 판단해 정기룡에게 일본군을 격멸하라는 명을 내렸다.
3. 전개
정기룡은 고령의 녹가에 들어가 진을 치고 있었다. 8월 상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군대는 고령에 침입했다. 들에는 진막과 깃발이 가득했으며, 인마와 악기의 소리가 하늘에 가득했다고 한다.
8월 15일 밤, 대장 정기룡은 이희춘과 황치원에게 병력 400명을 이끌고 적진을 정찰케 하였다. 적진을 정찰하러 가던 척후대는 관죽전에서 적의 복병을 만났지만 격전을 벌인 끝에 100여명을 베었다.
8월 16일 새벽, 정기룡은 전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주력을 찾아 격멸할 계획을 세웠고, 용담천 강가에서 많은 숫자의 일본군을 발견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했다. 각군은 서로 활을 쏘거나, 강을 건널 움직임을 보이는 등 진퇴를 거듭했지만 결정적으로 전 군이 강을 건너 결전을 펼치지는 못했다.
대장 정기룡은, 고착된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동현 방면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거짓 퇴각하며 일본군을 유인했다. 일본군은 정기룡의 부대보다 숫자가 많아 정기룡의 부대가 정말 패퇴한다 생각하고, 이동현까지 전력으로 추격했다. 그러면서 각 군은 어느새 이동현의 고개 아래에 다다랐고, 조선군은 깃발을 돌리면서 북을 울려 적을 향해 돌격했다. 대장 정기룡이 몸소 나섰으며 백마를 타고 홍색 갑옷을 입은 적장이 정기룡을 향해 돌격하자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런 뒤 그 장수를 높은 깃대에 매달아 일본군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뒤 다시 돌격에 나섰고, 이 때 미리 매복시켜 놓은 복병이 일어나 적을 향해 돌격했다.
조선군은 적진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찌르고 베고 죽이자 일본군의 진은 궤멸당했으며 일본군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정기룡은 예비대를 풀어 포위망 바깥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러면서 포위망에 빠진 적을 모조리 죽였다.
4. 결과
일본군은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에 참패를 당해 더 이상 낙동강을 따라 북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북진을 중지하고 전주성으로 들어가 좌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많은 숫자와 더 질이 좋은 장비를 갖추었음에도 조선군의 전략에 완전히 말려들며 많은 병사를 잃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벤 일본군의 수급을 모으니 큰 집채만한 것이 여섯 무더기나 되었다고 한다. 정기룡은 이 전투의 대승으로 절충장군으로 승진해 경상 우병사에 임명했다.
5. 실체 논란
그러나 이 전투는 그 신빙성에 의문을 품게 하는 구석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정기룡이 일본군과 육상에서 싸워 60전 60승 등 전무후무한 공적을 연거푸 쌓았다는 기록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정유대란 당시 일본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주요 대군이 깨지면 그 군대는 인근 지역을 장악하는 게 거의 어렵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의 승전 기록들만 보더라도 우선 교차 검증이 되며, 그 전후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보장되며, 그렇기에 더욱 이순신의 뛰어난 지략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기룡의 전투 기록들은 이 같은 교차 검증 및 전투 전후의 영향 등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며, 대부분 정기룡의 업적을 띄워 주기 위한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조선군은 사실상 대부분 와해되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이 전라도 깊숙이 침투해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부 자료에서는 이 전투로 적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붙잡혔으며, 이후 조선에서 처형되었다고까지 하는데, 나베시마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사람은 멀쩡히 살아서 17세기 전반까지 일본에서 잘만 살다 간 사람이다.(...)
이 때문에 진지하게 이 전투에 대해 따져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령 전투 역시 정기룡이 1만 여 명의 일본군과 싸워서 1000여 명 남짓밖에 살려 보내지 못했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기보다는 정기룡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와 나베시마 휘하의 소규모 군대가 맞붙어서 승전한 기록을 과장했다는 평가가 주류이다. 정기룡 문서만 보더라도 그의 공적은 대부분 『매헌실기』에만 나와 교차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로 지목된다. 하지만 정기룡이 임진-정유란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그의 전투 공적이 낮은 것은 분명 아니어 보인다.
정리하자면 정기룡 본인이 실력 없는 장수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공적 역시 혁혁하게 세운 것은 맞아 보이나, 그 공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믿기에는 어렵다. 고령 전투 역시 그 중 하나로서, 전투 자체는 실제로 있었을지라도 그 규모는 일본군 1만 여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기보다는 소규모 부대끼리 붙어 이긴 전투라 보는 의견이 많다.
6. 참고 문헌
- 정유재란사 중 정유재란 초기 경상도 지역의 전황과 주요 전투-김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