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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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이 인물을 다룬 장편역사소설은 여기를 참고.
鄭起龍
1562년 ~ 1622년
1. 소개
2. 임란에서의 활약
2.1. 그러나...
3. 전후
4. 기타
5. 같이보기


1. 소개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본관은 진주(晉州)로 훗날 곤양 정씨(昆陽 鄭氏)[1]의 시조가 된다.
본명은 정무수(鄭茂壽)였는데, 본래 몰락한 집안의 자제[2]였으나 그의 아내 권씨가 관상을 보아 그의 됨됨이를 알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무과에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기룡을 주인공으로 한 박상하의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2008)가 출판된 이후 사람들에게 60전 60승 무패의 장수, 육지의 이순신 등 조금 과장되게 알려졌다.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후에 영조 대에 와서 충의공(忠毅公)으로 격상되었다.

2. 임란에서의 활약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이순신, 권율이야 익히 알려져있는 분들이고 정기룡은 당시 나이가 30대 젊은 장수였기에 이례적이다. 한명련은 출생일이 알려지지 않았고 이괄의 난에 참여해 참살당했으므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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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면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내고, 명 황제 (만력제)도 그의 실력에 감탄해 총사령관 직책인 '''총병''' 벼슬을 내려주었다는데 사실 이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2.1. 그러나...


정기룡의 전공 중에는 '''그의 개인 전공을 집성한 매헌실기에만 나오는 것이 많다.''' 행장은 개인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는 게 많다. 상기의 거창 전투는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라고 주장하지만[3] 이게 다른 사료엔 안 나오고 매헌실기에만 나온다. "본진과 떨어진 상태에서 전투를 했는데 실전은 처음이다 보니 정기룡이 보고해야하는 것을 몰라 그냥 넘어가서 다른 곳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편리한 이유를 주장하지만 당연히 확인할 길은 없다.[4] 이에 대해 난중일기징비록 등을 들어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둘은 이미 다른 기록과 교차 검증이 완료된 사료로 인정받는다.
실록의 기록에는 정기룡이 조선군에 투항한 항왜병까지 죽인 경우도 있다. 이때의 실록 기록을 보면 왠지 의미심장하다. 정기룡의 승전 중 상당수가 아군을 죽이고 적군이라 속인 전공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중에 이른바 순왜들을 다 잡아 죽이려든 일도 있고.[5]
전후 7년 뒤 1등 공신에 올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순신과 비교를 하지만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이고,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 1등이다. 즉, 선무 공신에 들지 못한 후보자라고 할 수도 있다.[6] 이 선무 원종 공신 1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이 있으며 3등까지 합해서 18명인 선무 공신과 달리 '''선무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달한다.''' 당연히 수가 적은 선무 공신이 더 끗발이 높다. 실제로 공신에게는 공신전 등이 주어지지만 원종 공신에게는 그런 거 없다. 후손들에게 음직(음서)의 혜택 등이 좀 주어질 뿐이다.
또 이러면 정기룡은 혈연이나 파당이 없어서 추천을 받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서인이라도 (그나마도 거의 티를 내지 않았다.)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오성 이항복권율장인이라서 공신을 준 정말 썩을 놈으로 만들고 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그럴 의도도 없겠지만,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선무공신의 문제는 졸장 원균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순신, 권율과 동등한 선무 공신 1등으로 제수되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혈연과 파당이 있어서 전라좌수사가 된 것도 아니다. 이순신의 가문은 의외로 이전까지만 해도 문신 집안에 가까웠고[7] 당파 문제를 보면 분명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덕이었다. 당시 이순신은 고작 종 6품이었고 전라좌수사는 정 3품으로 품계로 따지면 '''8계단'''이나 뛰어넘는 있기도 어려운 특진이었고 떄문에 '''류성룡의 친구이자 동문이요 같은 당파인''' 김성일[8]이 '이순신' 등의 특진을 비판하며 '취소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모함받았을 때도 남인인 이원익이 옹호하기도 했으나 남인의 영수 격이었던 유성룡은 이순신 모함에 가세하는 등(...) 이순신은 혈연뻘도 파당빨도 받은 적이 '''없다.'''[9] 그 이순신조차도 혈연빨도 파당빨도 없었는데 정기룡이라고 오죽할까.
다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어쨌건 왜란 와중에 활약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술하겠지만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혔다가 제대로 데인 경험이 있는 조선 조정인데, 선조는 물론이고 여타 중신들이 단체로 죄다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잘해봐야 평범한 장군을 그 자리에 앉힐 리는 없다. 적어도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앉혔다고 봄이 옳다.[10] 게다가 명나라 장수 마귀이순신, 권율, 한명련과 같이 조선 제일의 장수로 꼽았던 것이나, 정기룡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던 시기에 북관대첩의 주역이었던 정문부나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던 정인홍같이 왜란에서 활약했고 사서에서도 그 능력이 충분히 검증된 인물들 중 조정에 출사한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기록에 거품이 많을 가능성과 별개로, 정기룡 자체는 충분히 유능한, 적어도 당대에 그렇게 평가받을 만한 수준의 공적을 쌓은 인물이 맞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3. 전후


1601년 울산부사를 역임했고 1610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과의 외교는 재개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여파가 워낙 엄청났던지라 정기룡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보직되었다.

4. 기타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 하동군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11]는 정기룡 장군의 고향으로, 그의 탄신지에는 생가와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관련 문화재 세 점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에는 정기룡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관련 기사 상주시에서는 정기룡 장군을 소재로 뮤지컬을 제작한 적도 있다.
은근히 대한민국 육군에서 밀었던 인물인 거 같은데, 해군이 이순신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거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초반에 육군에 비치된 책자에서 정기룡을 이순신과 동급인 조선의 수호신인 것마냥 설명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항목만 잘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무리수인 주장이라서 별 호응은 없었던 거 같지만...
2020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이 출간되었다.

5. 같이보기


[1] 2000년 인구조사에서 450가구 1416명으로 나타난 희귀 본관이다.[2] 본래 진주 정씨 자체가 계유정난갑자사화에 박살난 집안이다.[3] 공식적으로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는 신각해유령 전투다.[4] 무엇보다도 당시에 없는 전공도 있는 전공처럼 만들고 자기가 잘못해서 패배해놓고도 남탓을 하는 등 허위보고가 판을 치는 당대 모습을 생각해보면 보고를 하지 않았다 운운은 "나 공 세우고도 뭐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요."라고 말하는 것인데, 조선군 최악의 바보인 원균조차 보고는 허위가 많을지언정 제깍 올렸다.[5] 물론 순왜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이상은 풀어주기도 했다.[6] 그리고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 1등 공신은 권율, 원균 두 명뿐이다. 그나마도 원균은 선조 혼자 밀어붙였을 뿐이다. 신하들은 그래도 왕 눈치가 보여 원균을 최대한 높은 자리까지 추천했는데 그게 선무 2등 공신이다. 한 마디로 신하들은 '원균은 죽었다 깨어나도 1등은 절대 안 돼.'라고 생각했단 뜻이다. 실질적으로는 권율만이 선무 1등 공신의 자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7] 이랬던 이순신네 가문이 이순신 사후에는 무신 집안으로 바뀐다. 조선은 둘째치고 명나라에서도 찬양한 장군이 배출된 집안이라 반강제적으로 무과에 응시해서 이순신 후손들 중에서 문신은 딱 한 명 배출되었고 나머지는 무신이었다.[8]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말했던 그 김성일 맞다.[9] 인맥빨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유성룡도 이순신 모함에 가세했을 때 인맥빨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정탁도 천거했다.[10] 이게 논파되려면 이 사람보다 잘난 사람은 이미 다 죽었거나 다 벼슬을 사양했다고 해야 말이 되는데 확실히 전쟁 중에 의병장 다수가 전사하였고 곽재우처럼 벼슬길을 멀리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정기룡보다 더 유능함에도 이미 죽었거나 벼슬을 사양해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 사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병장의 경우는 1610년대 이상까지도 살아있던 사람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설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 의병장 정문부는 장례원 판결사, 호조 참의, 용양위 부호군 예조 참판 등을 거쳤고 정인홍은 대사헌도 거쳤다. 즉 의병장들 중 곽재우처럼 벼슬을 멀리한 이들도 있었으나 정문부, 정인홍처럼 벼슬길을 나간 이들도 분명 있는 만큼 '정기룡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으나 단지 다른 뛰어난 인물들이 다 죽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는 가설이 성립하기는 어렵다.[11] 현재도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