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프 휘틀럼

 



1. 개요
2. 실각


1. 개요


Edward Gough Whitlam
생몰년: 1916년 7월 11일~2014년 10월 21일
집권 기간: 1972년 12월 5일~1975년 11월 11일
호주의 정치인이자 수상. 노동당 당수로서 1972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21대 호주 수상으로 취임했다. 수상 재임기에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미군이 북베트남의 하노이를 공습한 크리스마스 폭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직접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2. 실각


이후 휘틀럼은 1975년 호주 총독 존 커(John Kerr)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임(!)당하게 된다. 정권은 보수적인 맬컴 프레이저(Malcolm Fraser)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으로 넘어갔으나, 총독 역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조기 퇴진해야 했으며, 이후 호주를 떠나서 대분의 여생을 영국 등 유럽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호주에서 군주제 폐지 여론이 대두되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호주에서 왕실의 지지가 낮은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1]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실질적으로 여당을 열린우리당이라는 소수정당으로 분리해서 나간데 대한 전 여당의 앙심과 야당의 밀어붙이기가 맞물려 억지 탄핵소추를 하게 되었고 결국 전국민적인 반감, (직접 국민들이 선출한 직선 대통령을 박근혜의 탄핵때와 같은 전국민적인 대규모 요구가 있었던것도 아니고 그저 국회 내에서 자기들끼리 졸속으로 소추안을 통과시켜버렸기 때문)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다음 총선에서 소수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여당이 되고 탄핵소추는 무효가 되버리는 사건이었기 때문, 이 사건은 실질적으로 호주 국민의 총화에 의해서만 행사해야할 총리 해임권을 호주국민의 요구, 의회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멋대로 해임해버린 사건이므로, 국민적인 요구가 없었음에도 멋대로 대통령 탄핵안을 의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처리해서 통과시켜버린 본 사건과 비교되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때와는 달리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연일 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해임 스캔들의 흑막은 사실 미국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휘틀럼 정권은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호주군을 철수시키려고 하고 호주에 주둔한 미군기지를 폐쇄시키겠다고 하기도 해서 미국의 불신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당시 미국은 좌파 노동당이 계속 집권하면 동남아에 퍼지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공산화 도미노 효과로 인해 호주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를 두려워한 미국이 CIA를 통해 존 커 총독이 휘틀럼을 해임시키도록 사주했다는 의혹. 정부 기밀을 다루는 업무를 보던 방위사업체 직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우연히 잘못 발송된 CIA의 통신을 듣게 되었는데 그 통신에는 CIA가 휘틀럼 정권을 실각시키려고 모의하는 내용이 있었다. CIA측에서 존 커 총독을 '우리 편'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었으며 미국 정부는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했다. 또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 조너선 크위트니는 존 커 총독이 CIA로부터 해외여행 비용 등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 왕실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게, 국왕은 호주에서 지명한 총독 후보자를 형식적으로 임명할 뿐이며, 국왕이 호주 내정에 간섭하는 일도 없다. 호주 하원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총독의 월권을 제지해달라고 청원하였지만, 여왕은 호주 헌법에 의한 총독의 권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게 전부였다. 총독은 국왕의 대리인이고 국왕도 이를 적극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왕이 총리를 멋대로 해임한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되어 왕실로 불똥이 튄 측면도 있다. 이 사건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과 비교되기도 했다. 참고 기사 1 참고 기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