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살로 게레로
1. 개요
Gonzalo Guerrero
1470년 스페인 우엘바에서 출생한 스페인인 선원으로 메스티소의 정신적인 조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상세
아메리카 항해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크게 밝혀진 게 없다고 한다.
1511년 파나마를 출발해 산토도밍고를 향하던 중 표류했고 게레로와 그 일행은 유카탄 반도의 킨타나 로오(Quintana Roo)에 상륙했다.
현지의 마야인들은 게레로 일행을 산제물로 생각하여 그 중 5명을 인신공양을 해버렸고, 게레로를 포함한 살아남은 선원들은 기회를 틈타 탈출했다. 이후 그는 마야 부족 중 하나인 체투말(Chactemal)에 들어가 그곳의 군주 나찬 칸(Nachan Can)의 장군(Warlord)로서 현지 마야 세계에서 유명해졌고, 그의 딸 자질 하(Zazil Há)와 결혼해 그 지역 최초의 메스티소 아이들을 가졌다. 나찬 칸 사후 그는 체투말의 족장이 되었다.[1]
에르난 코르테스가 게레로의 소문을 듣고 그를 합류시키기 위해 게레로에게 그와 함께 탈출했었던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Geronimo de Aguilar)를 보냈지만, 게레로는 그에게 자기가 현지 여자와 결혼해 이미 아이가 셋이며, 체투말의 족장이자 마야 장군이니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고 대신 그 쪽에서 가져온 구슬이나 몇 개 주고는 부족원들에게 동향 사람이 다녀갔었다고 전하겠다고만 했다.
게레로는 그 후 코르테스의 원정군에 대항해 마야인들을 이끌며 저항했지만, 톡스카틀의 학살로 유명한 페드로 데 알바라도[2] 에게 패했고, 화승총 사격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때 스페인인들은 그의 모습이 원주민들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는 점에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3. 기타
오랜 세월이 지나고 현대에서 곤살로 게레로는 멕시코 유카탄 메리다 시에서 스페인 침략자들과 싸운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 동상까지 둔 사람이 되었다. 덤으로 정신적으로는 메스티소의 아버지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와 동일하게 메스티소의 정신적 아버지로 여겨지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전형적인 그 시절 스페인에서 온 침략자의 이미지가 있고[3] 행적으로도 옹호와 비판이 갈리는 것과는 대조적.
대부분 정복자로 갔던 다른 스페인인들(콩키스타도르)과 달리 문명도 점령도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도 죄다 포기하고[4] 원주민 사회에 동화되어 원주민 사회를 위해 스페인 사람들과 싸우다 죽기까지 한, 그 시절로 보면 참 드문 인물. 그의 행적만 본다면 마야 부족에 귀화하여 지도자가 된 인물이라고 봐도 된다.
서구권에서도 그를 주역으로 한 드라마가 있는 등 해외에서도 미디어매체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있다.
[1] 이때 원주민들에게 석궁 제작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2] 코르테스의 부관이자 그의 절친이다.[3] 코르테스의 경우 다른 콩키스타도르에 비해 조금은 유연한 면이 있긴 하나,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금품을 갈취하며 식민지로 삼아 이익창출을 노렸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자였다.[4] 함께 탈출했던 동료는 결국 스페인의 코르테스 일행에게 합류한 것과 대조적이다. 게레로 역시 이들에게 참여해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면 성공한 콩키스타도르로서 정복활동 후 떨어질 떡고물이 없잖아 있었을테니(실제로 코르테스는 갈취한 대량의 금제 장신구나 금 세공품 등을 녹여서 아군에게 분배했다) 나름대로 제법 누리고 살았을텐데 그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