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배(1921)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그는 같은 학교 학생 박효준(朴孝濬)·강두안·유흥수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소재 이태길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문예부는 겉으로는 문예활동을 표방하면서 민족의식의 고취와 단결을 도모하여 궁극적으로 독립에 목적을 둔 결사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지 포섭과 비밀 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 감상 등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1940년 11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1941년 3월에 그는 박효준·문홍의 등과 함께 문예부원의 작품을 편집하여 기관지인 「학생」을 발간하여 부원들에게 배부하였다.
그러던 중 문예부원 가운데 상급생인 8기생들이 졸업을 하게되자 그를 비롯한 10·11기 학생들은 8기생 박효준을 중심으로 문예부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또한 같은 해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2월 8일에서야 예심이 종결되었고 그해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7월 18일 출옥한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이후 1994년 1월 31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