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미국의 조선 진주

소련의 대일전
1. 개요
2. 8월 15일
3. 8월 16일
4. 당시 상황
5. 기타
6. 미디어에서
7. 관련 어록


1. 개요


'''8.15 광복'''은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1]이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현재의 NHK) 라디오로 옥음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여 식민지 조선(대한민국)[2]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였으며, 북한에서도 '''해방절'''이라 하여 이날을 기리고 있다.[3]
일본에서는 이날을 '''천황이 전쟁으로 고생하는 자국민을 불쌍히 여겨 종전을 선언했다'''고 해서[4] '''종전기념일'''이라고 기리고 있다.[5] 일본 제국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며, 실제로는 천황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 천황일본 정부의 명에 따라, 그리고 대본영의 명에 따라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6]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도 8.15 광복의 3주년 날짜로 맞추었고, 1974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첫 지하철인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선) 개통식이 벌어진 것을 보면, 이날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여졌고 지금도 쓰이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2. 8월 15일


그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7] 5개 조항[8]을 요구했다. 당혹스러운 조건이었지만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이 도는 상황에서 다급했던 총독부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9]
그날 정오에 쇼와 덴노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방송 부분에 대해서는 옥음방송 참고. 당일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쇼와 덴노의 항복방송을 들은 군중들이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항복 선언 순간 바로 그러한 모습이 조성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천황의 종전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는 데다가,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로 나왔기 때문에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10] 결정적으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낸다는 내용의 '''종전만을 언급'''했을 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 방송을 전부 이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전이 당장 조선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광복이 되었다고는 해도 일본군의 압제와 탄압이 하루만에 풀릴 리는 없어, 8월 15일 당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게다가 광복 소식이 퍼져도 언론 통제로 계속 일본군이 연승한다는 소식만 듣고 있던 조선에서는 뜬금없이 일본의 패망이라는 사실 자체가 전혀 기존의 보도와 맞지 않는 헛소문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하며, 워낙 긴 일제강점기를 겪은 조선에서는 '광복'이라는 관념 자체가 잘 와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35년이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닌 것이 당시 35세 밑으로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얘기고, 당시의 인구구조를 보면 굉장히 높은 비중이었다. 당시 학교선생이 일본이 패망했다고 좋아하면서 학생들에게 알리자 학생들이 "우리 일본이 망하다니!"하면서 눈물 뚝뚝 흘려서 선생이 당황해서 "애들아 일본이 왜 우리나라야 정신차려!"라는 일화도 있으며 어린 학생들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자 "우리나라(일본)가 망했는데 왜 만세를 부르지?"라며 의아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병합 이후 태어났더라도 그 사람들을 양육한 부모는 그 이전부터 살았던 조선 사람들이고, 일본인들도 식민지 조선인들을 조선인이라고 불렀지 일본인으로 취급을 안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일본인과 구분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는 틀린 말이다.[11] 그리고 저 말대로라면 16일 이후 사람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어린층들 중에는 저런 사례들도 있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
강준만 같은 경우는, "방송 직후 바로 조선 민중들이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서서히 서대문형무소의 죄수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증언들도 마찬가지. 당시 정오에는 조용했지만 반복된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이상한 분위기, 행정의 공백(배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는 입소문 등으로 당일 오후와 밤 동안 도시 지역에는 광복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는 이 부분이 은근히 고증이 잘 되어 있다. 8월 15일 광복 당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가만히 있다가, 그 다음 날부터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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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당시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월 15일 당일에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며, 이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의 태극기의 태극 무늬가 비정상적으로 큰데, 일장기에 덧칠한 태극기다.

3.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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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12] 그때서야 경성[13]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일본 천황종전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지 26년이 지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태극기의 형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 강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 태극기 문양이 맞네 틀리네 하는 서술 자체는 의미가 없다. 독립문과 가까운데 살았던 지역 주민들은 독립문 태극기를 보고 태극기를 그렸지만, 급한대로 기존에 있던 일장기에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광복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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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휘문중학교 앞 여운형 연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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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14]
전남 광양[15] 출처.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위 사진 참고)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정무총감을 말한다)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연설은 중간에 소련군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서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되었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16]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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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건물의 건준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은 며칠간 전국에 조선이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며칠간 광복을 환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아쉽게도 위에서 나왔듯이 당시 사람들은 태극기의 모양을 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태극기는 얼마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에는 태극기의 형태가 정리되지 못한 채 일제강점기를 맞은 탓도 있긴 하지만…

4. 당시 상황


광복 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 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광복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선전물을 뿌렸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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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선 일본인들은 황급히 재산을 팔아 치우고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하였다. 몇몇 조선 출생 일본인들이나 처분할 재산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땅을 고향으로 생각했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걸 오히려 꺼려했다고도 한다. 치안이 유지되었으나 일본인들이나 친일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공격도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북에서 좀 더 많았다고 한다. 역으로 치안을 유지한답시고 일본제국 경찰이나 군인이 총격을 가해 조선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당시 상황이 소상히 나왔다. 광복 후 한참이 지난 9월 미군 진주 때에도 미군을 본다고 모여든 구경꾼들을 통제하던 일제 경찰이 구경꾼 조선인 2명을 현장 사살하기도 했다.
한편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 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결국 행정권 등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
경성부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일본육군성직속 비밀 테러단이 연합군 요인들을 암살하려다가 적발되어서 감옥에 갔다. #

5. 기타


  • 부산광역시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집중거주지역은 변천정(弁天町, 벤텐마치), 금평정(琴平町, 코토히라마치) 일대였는데 매우 일본스러운 지명이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광복을 기념해 동네 이름을 '광복동(光復洞)'으로 바꾸었다.[18]
  • 이를 기억하기 위해 광복절에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름을 ‘광복’이라고 붙이기도 한다.
  •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반도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의 광복절의 날짜가 같다. 참고로 인도네시아 역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8월 17일이 국경일이다. 게다가 3.1 운동이 일어난 시간과 쇼와 덴노옥음방송을 했던 시간이 정오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요일은 한국 쪽이 수요일, 인도 쪽이 금요일로 달랐다.
  •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할아버지들은 ‘해방됐을 때 몇 살’ 하는 식으로 자신의 나이를 세기도 한다.[19] 현재 생존 중인 어르신들은 대체로 광복 됐을 때 20대 이하였고 아예 미취학 아동이나, 젖먹이 아기 때 광복을 겪은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간 세대였다.
  • 서울 기준으로 이 해 7월과 8월 초순까지는 큰 폭염은 없었으나, 8월 중순 초부터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우연의 일치인지 광복절 당일인 15일에 33.9도까지 치솟아 폭염으로 발전했다. 그 뒤로 기온이 큰 폭이 올라 23일에는 37도를 기록했고, 이 폭염은 8월 막바지인 30일에 진정되었다. 비슷한 시기 전주는 8월 18일 34.2도, 인천은 20일 35.5도, 강릉도 20일 34.7도, 부산도 20일 34도, 여수도 20일 33도, 대구는 21일에 37.4도, 목포는 22일에 33.6도, 광주는 25일에 34.5도[20], 제주는 29일에 34.5도를 기록하는 등 전국에 크고 작은 폭염이 찾아왔다.

6. 미디어에서


야인시대 50화에서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을 맞는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과 거지촌 거지들 등 온갖 사람들이 '해방조선'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미와 경부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멘붕하여, 그냥 경찰서에 남아 김두한을 만나 죽기를 택한다. 이 때, 김두한의 우미관 패거리도 독립 소식을 기뻐하는데, 정진영은 기뻐하며 '드디어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독립 공화국이 만들어질 겁니다!'라고 말하며, 이는 광복 후 좌우대립 속에서 정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빠져서 김두한과 대립하게 된다는 복선 중에서도 절정에 달한 복선이다.
국희에서는 어린 국희가 장태화의 심부름으로 떡판 영업을 하다가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이 유난히 한적한 것에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멍해 있을 때, 갑작스레 태극기를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 의해 넘어진다. 이때 어린 국희는 광복의 기쁨이 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다음 회에 역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장태화의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배우게 된다.
영화 암살에서 마지막 부분 때 잠깐 나온다.

7. 관련 어록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21]

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그날이 오면〉[22]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청포도>[23]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돌아보니 별들이 떴네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24]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 일에 걱정이었다.

- 백범 김구일본의 항복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25]


[1] 쇼와 천황[2] 임시정부의 국호를 계승한 한국의 표현이다. 일본식 표현은 식민지 조선[3] 8.15 광복을 '8.15 해방' 이라고도 부르는데 국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광복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우리 민족만의 힘으로 쟁취한 게 아니라 연합군의 도움으로 된 측면이 있기에 (소련과 미국의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더 알맞는 용어라는 시각도 있다. 일부 학계에서 펴낸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도 해방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후 임시정부의 문서와 소련 붕괴 이후 소련 기밀이 알려지고, 정확하게 공개되면서 특정 시기, 외국의 특정 정부만을 위한 표현이 아닌,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한 모든 기간을 포괄하는 역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인의 민족자결적 의미와 계승함이 정확하게 알려졌다. 즉 '''광복'''이라는 표현이 '''역사성'''과 '''민족성'''을 반영한 표현이다.[4] 옥음방송의 내용이 그러하였다.[5] 1984년에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념하는 날" 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일반인들은 종전기념일 이라 부른다.[6]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다리 한쪽을 잃어 절뚝거리며 갑판에 올라 서명했다.[7] 조선 거주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두려움 역시 매우 컸다. 자세한 건 히키아게샤 참조.[8]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9] 총독부는 8월 17일 정도면 경성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8월 9일에 만주 작전을 실행한 후 광복 당일까지 38도선 이북 지역 대부분은 이미 소련군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일본에서는 천황의 조서, 칙명 등등 온갖 공문서에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항복 발표 방송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긴 했어도 여하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극소수였다.[11] 애초에 내선일체를 비롯한 강제 창씨개명 등은 일제시대 말이나 되어서야 시작되었다.[12] 위의 사진은 그날 아침 9시 마포형무소에서 출소한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환호하는 모습이다. 저 사진은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13] 지금의 서울(경기도 서울시로 바뀐 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완전히 항복서를 적는 9월 2일이다.)[14] 아직까진 광역시(직할시)로 승격되기 전이기에 전남 광주가 맞다.[15] "'고려독립만세"'라는 문구가 보인다.[16] 강령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17] 상술했듯 조선인들의 보복이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시골의 몇몇 일본인들은 보복을 당하기도 했고.[18] 비슷한 사례로 일제강점기 서울일본인 집중거주지역이었던 혼마치(本町)는 과거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에서 따 온 충무로로 바꾸었다.[19] 나이가 더 많은 경우는 ‘3.1 운동 때 몇 살’ 하는 식으로도 나이를 셌으나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고인이다. 또한 학교를 다녔다면 '어느 학교 몇 학년 때 해방됐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20] 단, 광주는 이미 7월부터 더위가 이어져 31일에 35.4도를 기록한 바가 있다. 8월 초순과 하순에도 폭염이 이어지기도 했다.[21] 육조 건물들은 일본에 의해 헐렸다.[22] 안타깝게도 심훈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9년 전인 1936년 9월 16일 사망했다.[23] 불행히도 이육사 역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44년 1월 16일, 광복을 1년 앞둔 때였다.[24] 이 내용은 김구가 오판을 했거나 과장된 내용으로 봐야한다.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까지 점령한 상태여서 바로 일본 본토를 공격할 작정이었지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는 논외였다. 자세한 사항은 몰락 작전 참조[25] 이후 백범의 우려대로 광복 직후 눌러온 문제가 터지고 미소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인해 뒤숭숭해졌으며 결국에는 최악의 동족 상잔으로 나타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