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동신
金東臣'''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1년 12월 26일
전라북도 장수군 원내면 명덕리
<color=#fff> '''사망'''
1933년 1월 30일
전라북도 장수군
<color=#fff> '''자 / 호'''
원표(元表) / 청암(淸菴)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동신은 1871년 12월 26일 전라북도 장수군 원내면 명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승(祕書丞)에 이르렀다. 1895년 10월 22일 사직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06년 3월 26일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에게 호응하여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민종식이 홍주성 전투에서 참패한 뒤 종적을 감추자, 그는 전라남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은밀히 규합했다. 1907년 8월 기삼연, 고광순과 공모하여 의병을 일으켜 내장산 일대에서 8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이후 순창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고문 분파소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다. 또한 남원 사장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 2명을 사살했다.
1907년 8월 11일 고광순 의진과 더불어 응령(鷹嶺)에서 적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求禮 燕谷寺)에 당도하니 그 지역은 천혜의 험지로서 군사를 머무르고 군세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군기(軍旗)를 세웠다. 군기에는 머지 않아서 국가를 회복한다'라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3글자를 썼다. 그리고 6시경에는 8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 군경을 격퇴시킨 후 이곳 군기를 노획하였다.
1907년 8월 17일 오전 약 8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함양군 좌전에서 일 군경 20여 명과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4일 의병 6백 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월성에서 일병 40명을 공격하였고, 9월 15일 의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이석용 의진과 합진하여 전북 용담군 심원사에서 일병 47명과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군 구랑 일대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북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3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병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신병이 발병하여 남몰래 고향인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대전 경찰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사령서(辭令書) 2매, 일기장,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주민에게 낸 명령서 7통, 탐정계서(探偵屆書)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잡서 1봉 등 그간의 그의 활약상을 담은 일체의 기록문서가 일경에게 넘어갔다.
이후 1908년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한일병합 이후 사면되었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다 1933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동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