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삼연

 

'''이름'''
기삼연(奇參衍)
'''생몰년도'''
1851년 1월 18일 ~ 1908년 1월 2일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탁곡[1]#
'''본관'''
행주 기씨
'''경력사항'''
호남창의회맹소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상훈과 추모
5. 작품


1. 개요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1851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소곡리(小谷里)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2]
기삼연의 집안은 대대로 전통적인 유교 가문으로 아버지는 생원 기봉진(奇鳳鎭)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長興 高氏)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집안 어른이자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3]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런 영향 하에서 교육을 받은 행주 기씨 가문에선 기삼연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이 나왔다.[4]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1896년에서 기우만(奇宇萬)[5]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기삼연은 군사 부문을 담당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할 즈음에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 등이 내려와 왕명을 전하여 설득했고, 이에 의병 거병이 무산되었다.
기삼연은 대한제국 고종의 본뜻이 아닐 것이라며 다시 의병 운동을 도모했으나,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전주 진위대에 의해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 체포되어 한성부 평리원으로 압송되었다가, 당시 평리원 원장인 이용태의 배려로 탈옥한 뒤 숨어지냈다.[6]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때 기삼연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련산(秀蓮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올랐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해 돌리면서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처단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전라남도 장성군, 고창군, 법성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법성포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겨울철 추위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담양군으로 피신했다가 기습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기삼연은 담양에서는 몸을 피했으나 곧 순창군에서 체포되어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西川橋)[7] 밑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사망했다.

3. 가족관계


  • 조부 : 재선(在善)
  • 부 : 봉진(鳳鎭)
  • 모 : 장흥 고씨(長興 高氏), 영진(永鎭)의 딸
    • 첫째 부인 : 금성 오씨(錦城 吳氏), 긍수(兢洙)의 딸
      • 녀: 익선(翼善)
    • 둘째부인 : 밀양박씨(密陽 朴氏), 감역(監役) 동연(東淵)의 딸, 정혜공(貞惠公) 수량(守良)후손
      • 자 : 우현(宇玄) (1895~1961)
      • 녀 : 울산(蔚山) 김면수(金冕洙) 처(妻)
    • 셋째부인 : ○씨[8]
      • 자 : 우생(宇生) (1884~1944)
      • 녀 : 옥천(玉川) 조면식(趙冕植) 처(妻)
      • 녀 : 울산(蔚山) 김홍중(金弘中) 처(妻)

4. 상훈과 추모


  • 1947년에 전북 진안군 이산사(駬山祠)에 배향(配享)됨.
  • 196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국민장이 수여됨.
  • 1966년에 장성군 장성읍에 순국비(殉國碑)가 세워짐.

5. 작품


체포된 뒤 사형당하기 전에 지은 다음과 같은 한시가 남아 있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呑日曾年夢亦虛)



[1] 행주 기씨 집성촌이다. 의병장 기우만, 기산도도 이 마을 출신이다.[2] 현 아곡리. 이 일대는 본디 행주 기씨의 세거지로 유명하다. 가까운 진원면에는 기정진이 세운 고산서원이 있다.[3] 기삼연에게 7촌 당숙이 된다.[4] 당숙 기정진을 비롯하여 기재(奇宰), 기우만(奇宇萬), 기산도(奇山度)등이 있다.[5] 1846~1916, 호는 송사(松沙). 기정진의 손자로 기삼연에게 9촌 조카가 된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6] 현대에 친일파로 알려진 이용태가 의병장을 보호해준 것이 아이러니하겠지만 사실 이 시기 이용태는 누구보다 철저히 일본에 저항하는 근왕파 대신이었다. 결국 모든 저항 수단이 사라진 1909년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게 되지만.[7] 현재 황금동 일대[8] 족보에도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