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운

 

1814년(순조 14)∼1877년(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평(景平), 호는 유정(柳汀). 본관은 안동(安東[新]).
증조부는 김이안(金履安), 조부는 김봉순(金鳳淳)이고, 부친은 김호근(金湖根)이다. 외조부는 이광헌(李光憲)이다.
성품은 호학하고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엄하고 맺음을 잘하였다. 1831년(순조 31)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고, 1844년(헌종 10) 갑진증광문과(甲辰增廣文科)에 을과(乙科) 5등으로 급제하였다. 1852년(철종 3)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1854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856년 부제조(副提調)로 임명되었다가 2년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부임했다. 1860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1863년에 한성판윤에 재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 받았다.
저서로는 『유정수후록(柳汀隨後錄)』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1]이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이패동에 있으며, 전처 남양 홍씨 홍경(洪坰)의 딸[2]과 후처 평산 신씨 신봉선(申鳳善)의 딸[3]이랑 합장되었다.

[1] 족보에 왜 이렇게 시호를 정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면하게 배우고 즐겨 묻는 것을 '문'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겁게 살다가 삶을 마치는 것을 '정'이라 한다."[2] 1812년에 태어나서 1860년 7월 1일에 죽었다.[3] 1840년에 태어나서 1896년 12월 8일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