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판윤

 

1. 개요
2. 상세
3. 연혁
4. 여담


1. 개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라고도 불리는 이 관직은 수도인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의 관직으로서, 품계는 자헌대부 이상의 품계에 해당되었다.

2. 상세


한성부의 최고위 관직으로, 정원은 1인이고 행정과 사법 업무를 겸하였다. 육조의 판서,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9경으로도 부른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상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고등검찰청장에 해당한다.

3. 연혁


태조(조선) 3년인 1394년 11월 26일 개성특별시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수도명을 한양부(漢陽府)라 하였으며, 한양부를 관할하는 총책임자를 판한양부사(判漢陽府事)라 하였다.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라 개칭함과 동시에 최고 관직인 판한양부사를 판한성부사로 개칭하였다. 이후 1469년 한성부의 관제 개혁과 동시에 판한성부사를 판윤으로 개칭하고 초대판윤에 서거정(徐居正)을 임명하였다. 판윤 밑에 종2품인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을 두고 그 아래에는 종4품인 서윤(庶尹)을 두었다.
이후 고종(대한제국) 31년인 1894년 8월 13일 관제개혁에 따라서, 판윤을 부윤(府尹)이라 개칭했다. 1895년 5월 26일에는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전국 팔도제도(八道制度)를 23부(府) 337군(郡)으로 개정할 때 한성부를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하여 수도를 관할하는 관부(官府)가 일개의 군과 같이 되었다.
따라서 한성부는 경기관찰사가 관할하는 11개 군 중의 하나인 한성군으로 격하되었고 판윤은 참사관(參事官)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 8월 4일 다시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 한성군을 한성부로 다시 격상하였고 총책임자를 다시 판윤으로 돌려놓았다.
1905년 일제의 침략으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모든 관제가 개정됨에 따라서 한성부의 책임자를 윤으로 고쳤으며, 그 품계를 칙임관(勅任官)이라 하였다.
1907년에는 윤(尹)을 다시 부윤이라 하였고, 1910년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함에 따라서 수도 한성부의 명칭도 없어졌고 한성부의 총책임관이었던 한성부 부윤의 명칭도 없어졌다.
이후 경성부윤, 서울특별자유시장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이어진다.

4. 여담


한성판윤 최다 역임자는 이가우로 무려 10번을 역임하여‘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총 재임 기간은 1년 3개월에 불과하다.
반대로 최단 기간 역임자는 김좌근으로, 오전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가 오후에 다시 이가우가 한성판윤으로 임명되면서 한나절만에 물러났다.
외에도 3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역임한 가문은 풍산 홍씨의 홍상한 가문이 유일하며 3부자가 역임한 경우는 달성 서씨 서종태 집안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