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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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1998.12.1
해방 직후 1940~50년대에 코주부란 캐릭터로 큰 인기를 끈 대한민국 초창기의 주요 만화가이자 한국 일러스트계의 거장.
본래 일본에 유학을 가서 그림을 공부한 후에 추리소설 등등 여러 소설의 펜화 삽화로 인기를 끌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코주부 삼국지를 비롯해 코주부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 만평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김용환은 1946년 5월 국내 최초의 만화 단행본인 '토끼와 원숭이'를 내기도 했으며# 1952년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지금도 흔히 볼수있는 칸나누기와 말풍선이 있는 만화 형식을 국내 서적에서는 처음 시도하면서[1] 현대 한국만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주한 미군 간행물의 삽화를 맡게 되면서 점차 코주부 만화 작업을 접게 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생활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만화도 만화지만 펜으로 그리는 삽화의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굉장하다. 코주부 김용환 선생의 작품들 오늘까지도 펜화 실력에 있어서는 대항할만한 작가가 없을 정도의 레전드급의 거장으로 손꼽히며, 그 외에 수채화나 만평, 극화체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6.25당시 그에게는 참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는데 ‘한국의 만화가 18인’에 나온 것에 의하면 처음에는 북한군에게 잡혀서 수감되었다가 직업이 뭐냐 묻는 북한군 장교에게 그림쟁이라고 간략하게 말하자 화가냐고 묻던 그 장교는 그러면 춘화를 그려보라고 하였다. 이에 김용환은 주저없이 여인 알몸을 담은 춘화를 그렸는데 장교가 만족해하여 수감되긴 해도 먹을 것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그림 마음껏 그리라고 먹물이나 붓이나 종이같은 것을 넣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국군이 와서 자유가 되긴 했는데 빨갱이들에게 그림 그려주었다고 또 위기가 닥치기에 김용환은 “살고자 춘화를 그린 게 그리도 문제란 말이오!” 한국군에게 따져들었다. 그러자, 또 한국군 장교도 어디 춘화를 그려보라고 하여 또 그려줘 똑같이 별 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극장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의 감독인 신동헌은 김용환의 제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일화를 소개하자면 젊었을 때의 신동헌이 자신이 직접 그린 펜화를 거리에서 내놓고 있었는데, 한 중년의 신사가 그것을 보고 누가 그렸내고 묻자, 신동헌은 '제가 그렸다'고 했고, 신사는 누구한테 배웠냐고 묻자, 딱히 누구한테 배운건 없고 '소년구락부'[2]의 잡지에 있는 기타고지나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며 연습했다고 하자, 그 신사가 "아, 내가 바로 그 기타고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타고지(北宏二)'는 일본에 있었을때 김용환의 필명이다. 신동헌에게 그림을 업으로 삼을려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케치를 하라라는 조언을 하면서, 그는 이 말을 평생 잊지 않았다.(한 인터뷰영상에서 지하철에서도 스케치를 하고 있었으며 2017년 펜을 들 수 있다면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1] 그전에는 그림비중이 많아봤자 삽화 하나에 설명글을 적는 형식의 책만 있었다.[2] 전간기 코단샤에서 발행했던 아동용 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