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헌(감독)
1927년 4월 1일 ~ 2017년 6월 6일 (향년 90세)
1. 개요
대한민국 만화가 및 애니메이션 감독. 국내 최초 극장판 애니메이션 풍운아 홍길동 감독이다. 만화가 신동우의 형이었다.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으로 실향민이었다.
2. 일생
회령군에서 태어나 광복 이후에 서울로 와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재학하느냐 남한에서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이 시절, 함북 고향친구들과 같이 여럿이서 서울에서 지내며 대학에 다녔지만 그야말로 쪽방에서 여럿이 지내는 꼴이라 생활이 영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자 거리에서 초상화를 돈받고 그려주다가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에 재질이 있다고 만화가 김용환이 추천하여 만화가로서 길을 걷게되었다.
1947년 스티브의 모험이란 만화로 데뷔하여 만화가가 되었지만, 결국 같이 살던 고향 친구들은 모조리 함북으로 돌아갔고....몇 해 안가 6.25 전쟁이 터져버렸다. "그때, 북쪽으로 간 놈들...이후 60년이 되어가도록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라며 회상했었다. 이북에 남던 신동헌 가족들도 일부는 남아서 영원히 헤어졌고 어린 아우 신동우나 몇몇은 피난민으로 와서 남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이후 만화가 겸 애니 제작일을 하다가 1959년 진로소주 CF 광고를 연출하며 국내 첫 TV 광고 애니를 맡게되었고 신동우의 원작을 토대로 1966년 극장판 홍길동(1967)을 감독했다. 제작비 부족에 미군이 쓰다버린 애니메이션 셀지를 주워 양잿물로 씻어가며 재활용해 그려낸 이 애니는 1967년 1월 21일에 개봉하여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이라는 당시 엄청난 대박 흥행을 거둬들였지만...제작사 세기상사가 수익을 거의 독차지해버린 탓에 신동헌 감독은 그리 돈도 벌지못했고 오히려 제작하는데 빚을 져 집을 팔아야 했다.
그래서 다른 제작사와 배급사와 계약해서 만들어 1967년 광복절에 개봉한 3번째 애니메이션 호피와 차돌바위도 서울 관객 28만이라는 좋은 흥행을 거두고도 그리 돈을 벌지못해 극장 애니 제작을 중단해버린다. 우습게도, 그가 애니 제작을 그만두자....돈이라도 줘야하며 설득해야할 세기상사 측은 나몰라라 하고 홍길동(1967)을 감독 이름을 바꾸며 쾌남 홍길동이라고 재개봉하는 짓거리까지 했다. 세기상사는 이후에 홍길동 장군이라는 애니를 다른 제작진을 통해 홍길동 시리즈 속편인양 개봉했으나 철저하게 망했고 이후 디즈니 애니를 수입해 개봉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애니 개봉사업에서 물러났다.
1968년에는 이어령 원작 신성일 주연의 영화인 <장군의 수염>의 극 중간에 삽입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로 TV 광고 연출 및 애니 하청 제작일을 하며 1980년대 공익광고 TV 애니메이션이나 뽀뽀뽀에 들어가던 3분 정도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밖에 1987년판 아기공룡 둘리 에피소드를 연출하기도 했었다.
이후 90년대 들어서 아우인 신동우 원작 만화 홍길동을 다시 극장판 애니로 만든다고 하여 기대를 가졌지만 제작자인 윤석화는 신동헌을 아예 제작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이 와중에 신동우는 1994년 만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에 나온 게 바로 돌아온 영웅 홍길동. 신동헌 감독 이름으로 개봉했으나 일절 제작에 참여하지도 않고 일본인들 손으로 만들어져 드래곤볼 짝퉁으로 욕만 처먹어야 했다.
클래식 매니아로서 클래식 관련 책자도 여럿 쓰고 클래식 평론집도 내면서도 일본으로 원본 필름이 수출되어 영원히 못 볼 애니가 되고 만 풍운아 홍길동을 안타까워하며 복원에도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애니는 2007년 11월, ‘일본 고베 플래니트 비블리오테크’로부터 일본어 더빙이 된 16mm 필름 프린트판이 애니 전문가 김준양 교수의 제보에 따라 발견되었고, 국내에 존재하던 음성을 입혀 복원에 성공하여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 상암 이전기념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15일, 풍운아 홍길동은 개봉된지 49년만에 DVD로 출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2017년 6월 6일, 만 90세로 별세했다.
3. 한국 애니메이션의 거물, 그러나...
1967년 1월에 개봉한 풍운아 홍길동은 이후 한국애니메이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애니 제작에 참여하던 이들을 봐도 대원씨아이 설립자인 정욱, 날아라 슈퍼보드 제작사인 한호흥업 설립자인 한상호(미국으로 이민가서 스티브 한이란 이름으로 세계 최초 3D애니인 스타체이서를 감독했으나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1995년 12월에 SBS에서 오딘의 모험이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라이트 세이버 특수효과를 맡아 화제를 모으고 에미상을 받기도 한 신능균(넬슨 신), 새영동화를 설립해 일본에서 애니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 김대중(1945~2017. 2020 우주의 원더키디 감독으로 신동헌이 작고한지 3달도 안돼 별세) 등이 이 애니 제작에 참여하여 한국 애니 많은 거물들이 참여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상술하던 대로 배급사에게 불공정한 계약으로 돈을 벌지못해 줄곧 애니 제작을 하지 못했던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결과가 되었다. 본인도 이후 독자적으로 애니 제작을 하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끝내 흐지부지되어 버린 점을 무척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