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1967)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다.
1. 개요
1967년 1월 21일 개봉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알아둘 점은 쾌남 홍길동으로 제목을 아는 경우가 있거나, 풍운아 홍길동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풍운아 홍길동은 원작 만화 제목이다. 그리고, 쾌남 홍길동도 재개봉으로 멋대로 제목을 더한 제목이다. 출처
신동우 화백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형인 신동헌이 감독한 한국 최초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일반영화 제작비의 10배인 5000만원 가량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하며, 당대로써 엄청난 화제가 되어 개봉 나흘만에 10만여명의 관객을 모아 일본에도 수출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이 일본을 앞질렀다는 일본발 보도도 나왔을 정도였다. 일본판 제목은 <소년용자 길동>이었다. 때문에 일본에서도 은근히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2. 변천사
2.1. 어려운 제작 요건
이 애니메이션은 1년의 제작기간이 소요되었고 애니메이터로는 유성웅을 비롯해 당시 만화가인 정욱(대원미디어의 창업주), 김대중이었다. 제작 당시 부족한 제작비뿐만이 아니라 재료 조달 자체가 힘들어 미군이 폐기한 필름을 재사용하는 등의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졌다. #
제작 당시 상황에 대해 신동헌 화백은 "셀 작업 전용물감이 없어 포스터컬러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림이 말라 떨어져 나가 촬영 전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등 무수한 난관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2.2. 흥행
1967년 1월에 개봉하여 서울 관객 50만(1995년 영화잡지 월간 로드쇼 출처)이라는 당시, 엄청난 대박 흥행을 기록했다. 오죽하면, 극장 관객들에게 사은품으로 3킬로그램짜리 설탕을 주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제법 좋은 선물거리였다. 다만 대박 흥행이긴 하지만, 관객 집계가 기록이 불투명한 상태이긴 하다. KOBIS에서는 서울 관객 27만 2천명이라고 나왔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이 정도도 엄청난 대박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전국 200만 관객 이상 흥행이다. 여하튼, 태권브이가 재개봉하여 거둔 관객 수치를 합쳐서야 이 흥행 기록이 깨질 정도로 오랫동안 한국 극장 애니 흥행작 역대 흥행 1위였었다.
홍길동 대박에 이후 호피와 차돌바위, 황금철인 등 히트작품이 계속 나오면서 1980년대 중반까지 장편 애니메이션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2.3. 제작사의 갑질
그러나, 제작과 배급을 다 맡은 세기상사 대표이자 전직 국회의원이던 국쾌남(1922~2007)은 이런 대박에도 수익을 신동헌 감독과 제작진에게 주지 않고 차기작 제작을 강요하는 갑질을 저질렀다. 분노한 신동헌 감독은 속편 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를 합동영화 및 극동필림과 공동 배급계약하여 대동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다. 세기상사는 이래놓고 이 애니를 대표 국쾌남 이름을 딴 쾌남 홍길동으로 재개봉하면서 박삼천 감독으로 감독 이름까지 바꿔가며 재개봉했다. 그래놓고, 용유수 감독이 맡은 홍길동 장군을 제작하여 개봉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70년대에 여럿 애니와 영화들을 제작했다가 손해를 본 끝에 국쾌남은 영화사업에서 철수했고, 1978년에는 세기극장을 합동영화에 판 후 대한극장만 지키며 1982년에는 아들 국정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서 일선에서 물러나 2007년에 숨을 거뒀고, 2018년에 사돈기업 호반건설 계열사로 편입됐다.
여하튼, 이 작품이 대박을 거두고도 정작 신동헌 감독은 돈을 벌지못해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
2.4. 환상의 작품
세월이 흘러 원판 필름은 이후 오랫동안 사라져서 2000년대까지 도저히 보고 싶어도 다시 볼 수 없는 전설의 작품이 되어버렸다. 호피와 차돌바위를 비롯하여 홍길동 장군이나 황금철인 같은 애니들은 80년대 초반까지 재개봉 및 지상파 방영, VHS 비디오테이프 출시 등으로 열악한 음질과 화질이라도 볼 수야 있었지만, 이 홍길동은 비디오 출시조차 되지 않아 더더욱 전설의 작품이 되었었다.
원판 필름을 잃어버린 것은 굳이 이 작품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1] 한국 최초 극장 애니를 볼 수도 없다는 비극에 딴지일보는 90년대 말엽에 한국애니메이션 관련 특집기사에서 자국 첫 극장판 애니가 남아있지 않는 나라로 한국은 유일무이한 수준이라고 했는데....중국조차도 1941년에 만든 서유기 극장애니 필름이 남아있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딴지일보에서는 당시 열악했던 한국 경제 사정상 필름을 녹여 은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홍길동>을 좋아했던 세대들은 나이를 먹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만화영화를 다시금 상기했다. 이들은 영화사적 의미부여와 추억 상기, 상업적 가치 등 여러 동기로 원본 필름을 찾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과 세기상사 등을 누볐으나 찾지 못했다. 일부는 필름 매니아들로 하여금 억대의 현상금까지 내걸어 찾으라고 독려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6년에는 개봉 40주년을 맞이해 황의웅 애니평론가와 일부 원로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필름 찾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추억,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을 시작했고, 동년 가을에는 '홍길동탄생기념사업회'를 세웠다.
2.5. 복원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점차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세기상사 출신이던 이남국 홍익대학교 조형학과 교수가 16mm짜리 흑백 예고편 필름(무음성, 7분)을 공개하여 제자들이 컬러로 복원한 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서울애니시네마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이 순간은 2007년 2월 13일 KBS1을 통해 특선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기억: 만화영화 홍길동>이란 타이틀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필름 시사회 당시 컬러 복원된 애니를 바로 신동헌 감독이 눈물을 흘리면서 보고 감격에 겨워하던 모습을 보였다.
이후 일본에 필름이 넘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토에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까지 찾아갔으나 35mm 필름은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 11월에 애니메이션 전문가 김준양이 오사카의 한 소규모 시네마테크에서 16mm짜리 컬러 더빙판을 각각 발견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필름을 공수해와 한국에 있었던 음성을 입힌 후, 필름 보수와 복사를 거쳐 35mm로 다시 만들어 복원해냈다. 그리고 2008년 상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박물관 개관기념 영화제' 폐막작으로 공개되었다.
크레딧에 따르면 일본판 더빙에 노자와 마사코, 츠카다 마사아키, 노지마 아키오가 참여했으며, 1분 가량 편집돼 있고 일본판 제목 <소년용자 길동>과 일본측 번안 스태프롤이 그대로 나온다. 아쉽게도 3분이 짤려있어 일부 장면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복원에 의의를 두자.
2016년 7월 15일, '''개봉된지 약 50년만에''' DVD로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과 네이버TV를 통해서도 VOD도 공개하였다.
3. 평가
어려운 당시 제작환경에서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과 수준 차이가 없을 정도의 작품이 나왔지만 제작사 갑질로 인하여 한국 애니 제작 시작부터 꼬여버린 비운의 명작이 되어버렸다.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단순히 한국 최초 극장 애니로서의 기록만이 아닌 작품성으로도 찬사를 받을 작품임에도 말이다. 로보트 태권 V가 표절문제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지만 이 작품에는 그런 문제도 전혀 없다.
사실, 월트 디즈니도 이름없던 시절에 제작하던 오스왈드 래빗이 판권을 억지로 빼앗긴 갑질을 당하기도 했고 일본도 애니 제작에 있어서 갑질이 이뤄지는 역사를 겪고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한국은 이런 갑질로 인하여 첫 극장 애니가 40년 가까이 볼 수 없던 비운의 시작을 겪어야 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4. 등장인물
- 홍길동: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 차돌바위: 홍길동의 제자이자 다음 작품의 주인공.
- 곱단이
- 텁석부리 장군
- 백운도사
- 홍 판서: 홍길동의 부친으로, 천첩의 소생 길동을 내치지만 속으론 마음 아파한다. 최골훈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지만 홍길동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지고 길동과 해후한다.
- 엄가진: 고을의 사또이자 작중 중간보스로, 백성들을 괴롭혀 곡식 한 톨이라도 빼앗으려는 못된 탐관오리다. 길동과 차돌바위에게 된통 혼난 뒤에도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 최골훈: 병조판서이자 작중 최종보스로, 길동과 활빈당 무리를 잡으려고 홍 판서와 생모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마지막 대결에서 길동에게 패하고 죽었다.
- 호랑이: 길동과 차돌바위에게 나타나 함정에 빠진 자신의 새끼를 구하라고 요청한다. 훗날 길동이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돌연 나타나 목숨을 구하고 은혜를 갚아준다.
5. 성우진
6. 출처
- 한국판 뉴타입 2008년 6월호 기사 <영웅 홍길동, 다시 살아 움직이다> - 황의웅 글. p116~117.
- 이남국 교수의 애니메이션 아카이브 24_세계 속의 한국 애니메이션: 근현대사 - 13
7. 관련 문서
[1] 당장 1980년대 이전의 한국 영화 필름도 상당수가 원판이 유실되어 있다. 우선 당시 영화 보존인식이 그리 높지 않았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1970년대 당시에 영화 필름에서 은성분을 따로 채취해서 밀짚모자 등으로 팔아먹는 일이 한 동안 유행을 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영화 필름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60년대 영화만 해도 유실률이 55%나 될 정도였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1996년 영화진흥법 제정 시 '의무납본제'가 추가되었다. TV나 라디오 방송자료도 마찬가지로 테이프 재활용으로 부실하기가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