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
羅尚
? ~ 310년
서진의 인물. 자는 경지(敬之). 나식의 아들이자 나헌의 조카.
양양 사람으로 오나라 정벌 때 279년에 두예의 참군으로 종군했다가 280년에 두예가 유교와 함께 왕융에게 파견하면서 병사를 거느리고 왕준과 함께 무창을 공격했으며, 이후 양주자사가 되었다. 일찍이 아버지 나식을 잃어서 나헌에게 키워져 글을 잘 쓴다고 알려졌는데, 인품도 능력 못지않게 뛰어난 숙부 나헌과 달리 군재도 무능한 편이다.
301년에 조흠이 반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흠은 영웅의 재질이 아니니 패망할 것이라는 표문을 올렸으며, 나상은 가절 평서장군, 익주자사, 서융교위에 임명되어 촉으로 들어갔다. 이특이 나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동생 이양에게 영접하도록 시키면서 진기한 노리개를 바치자 기뻐하면서 이양을 기독으로 삼았으며, 이특, 이류 등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에서 대접하자 왕돈, 신염 등이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를 노려 그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3월에 성도에 이르러 문산의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돈을 파견하지만 진압에 실패하고 왕돈이 살해되었으며, 이특이 조흠의 반란이 진압했고 당초에는 조정에서 진주, 옹주에서 유민이 되어 촉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다.[1] 그러나 이특이 염식을 파견해 임시로 가을까지만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하면서 뇌물을 주자 이를 허락했으며, 종사를 파견해 유민을 보내는 일을 감독해 7월까지 길을 떠나게 했다.
이특이 다시 염식을 파견해 나상에게 겨울까지 이 일을 중지시켜 달라고 청했지만 광한태수 신염, 건위태수 이필 등이 반대했으며, 유민들이 조흠의 반란을 통해 대부분 약탈한 바가 있으니 편지를 보내 관문을 설치해 탈취해야 된다고 했다. 이를 받아들여 재동태수 장연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요소에 관문을 설치하도록 하면서 재물을 수색하게 했으며, 이특이 또다시 염식을 파견해 기한을 늘려줄 것을 청하면서 염식이 오자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신염과 이필이 모의하면서 나상이 결단을 내리지 못해 유민들이 간사한 계책을 펼친다고 여겨 광한도위 증원, 아문장 장현, 유병 등을 파견해 이특의 군영을 습격했으며, 나상은 이 소식을 듣고 독호 전좌를 파견해 증원 등을 돕게 했지만 패배해 전좌, 증원, 장현이 죽었다. 이특이 마침내 광한에서 반란을 일으켜 신염을 공격하자 이필, 비원 등을 파견해 구원하게 했지만 패했으며, 이특이 군사를 시켜 성도를 공격하게 하자 편지를 보내 염식을 타일렀다.
그러나 염식에게서 옭아매는 일이 지나쳐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말을 듣고 관대하게 했다면 이같은 일이 있었겠냐는 대답만 들었으며, 나상은 평소에 탐욕스럽고 잔인해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나상은 이특에게 자주 패해 마침내 긴 방어 장벽을 만들고 비수에 이어서 군영을 만들었으며, 700리에 걸쳐놓고 이특에게 대항하면서 양주교위와 남이교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02년에 하간왕 사마옹이 독호 아박을 파견하고 조정에서 장미를 광한태수로 삼자 나상은 독호 장구를 파견해 번성에 진을 치게 했지만 아박, 장미, 장구가 모두 이특의 군사들에게 패했으며, 8월에 군사를 파견해 비교에 진을 치고 있는 이양을 공격했지만 여러 차례 패했다. 또한 정예 용사 1만 명을 파견해 이양을 공격했지만 이양, 이류 등의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303년 봄 정월에 이특이 몰래 강을 건너 공격하자 강에 있던 군사들이 전부 흩어져 달아났으며, 태성을 지키면서 사자를 파견해 이특에게 화의를 청했다. 조정에서 형주자사 종대, 건평태수 손부를 파견해 수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나상을 구원하게 했고 이특이 이탕, 촉군 태수 이황 등을 파견해 덕양 태수 임장에게 보내 그들을 막게 했다.
익주의 병조종사 임예가 이특이 무리를 분산시켰으므로 여러 보루에서 비밀리 시간을 정해 동시에 이특을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다고 진언하자 임예의 진언에 따르기로 했으며, 임예를 밤 중에 밧줄을 걸고 성을 빠져나가게 하면서 여러 보루에 그 뜻을 알리기로 해 2월 10일에 동시에 이특을 공격하기로 한다. 또한 임예가 이특에게 거짓 항복을 하면서 그 허실을 살펴본 후에 보고하자 군사를 파견해 이특의 진영을 엄습해 이특, 이보, 이원 등의 목을 벴다.
3월에는 독호 하충, 상심 등을 파견해 이류를 공격했지만 격파되었으며, 이류 등이 이긴 기세를 타서 성도까지 이르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조정에서 시중 유침을 파견해 양주자사 허웅과 함께 군사를 통제받게 했다가 하간왕 사마옹이 석원에게 유침을 대신하게 하자 석원에게 군사를 통제받았으며, 평서장군 서여가 문산태수를 시켜주면 청성산의 처사인 범장생을 초청해 그와 연결하면서 이류를 토벌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류가 병으로 죽고 이웅이 추대되면서 이웅이 박태를 보냈으며, 박태는 나상에게 비성을 습격하게 해 자신이 내통한다고 하자 외백에게 군사를 거느려 비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소성에 들어갈 때 적의 계책에 걸린 사실을 알고 태성으로 물러나서 지켰으며, 12월에 이웅이 급히 공격하자 나상의 군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아문장 장나를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밤중에 우비수를 거쳐 동쪽으로 달아났다.
304년에 나상은 도망가서 강양에 이르자 사자를 파견해 상황을 표문으로 올렸고 임시로 파동, 파군, 부릉을 통솔해 군수용품을 공급하라는 조서가 내려오자 별가 이흥을 파견해 진남장군 유홍에게 보내 양식을 요구하게 하자 유홍은 3만 곡의 양식을 보냈으며, 나상은 유홍이 보낸 양식에 의지해 존립했다. 파군으로 옮겨서 주둔했고 군사를 파견해 촉에서 노략해 이양의 처인 잠씨와 그의 아들인 이수를 붙잡았으며, 아버지를 죽인 파서태수 마탈을 죽이기 위해 초등이 나상에게 군사를 덧붙여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310년에 나상은 사자를 파견해 재동으로 가게 했는데, 횡기 등이 나아가 그를 환송했고 이웅이 재동으로 거짓으로 도망온 것처럼 위장해서 가게 한 성한의 장수인 장보가 뒤에서 문을 닫자 재동이 성한의 손에 넘어갔다. 나상은 파군에서 죽었다.
나상은 과감하지 못하고 탐욕스러워 익주 사람들한테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으며, 그에 대한 평가로는 나헌전에 따르면 '''사악할 뿐만 아니라 제 몸의 안녕만 챙기면서 충성스럽고 바른 사람을 미워한다. 또한 부유하는 것은 노위에 비길 정도로 집은 성 같고 탐욕스러움이 시랑과 같으며, 절제를 모른다'''고 한다. 또 '''"촉의 도적은 나상으로 나상은 우리를 다 죽인다. 평서장군(나상)은 다시 없을 재앙이다"'''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악명을 떨쳤다.
그의 아들로 나우(羅宇)가 있는데, 성품이 아버지 못지 않게 사악한 인물로 나상에게 구원을 요청한 초등을 미워해 양식을 제공하지 않거나 익주자사 피소가 죄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310년 12월에 파군에서 피소가 도착하자 그를 살해해 파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 ~ 310년
1. 소개
서진의 인물. 자는 경지(敬之). 나식의 아들이자 나헌의 조카.
2. 생애
양양 사람으로 오나라 정벌 때 279년에 두예의 참군으로 종군했다가 280년에 두예가 유교와 함께 왕융에게 파견하면서 병사를 거느리고 왕준과 함께 무창을 공격했으며, 이후 양주자사가 되었다. 일찍이 아버지 나식을 잃어서 나헌에게 키워져 글을 잘 쓴다고 알려졌는데, 인품도 능력 못지않게 뛰어난 숙부 나헌과 달리 군재도 무능한 편이다.
301년에 조흠이 반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흠은 영웅의 재질이 아니니 패망할 것이라는 표문을 올렸으며, 나상은 가절 평서장군, 익주자사, 서융교위에 임명되어 촉으로 들어갔다. 이특이 나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동생 이양에게 영접하도록 시키면서 진기한 노리개를 바치자 기뻐하면서 이양을 기독으로 삼았으며, 이특, 이류 등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에서 대접하자 왕돈, 신염 등이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를 노려 그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3월에 성도에 이르러 문산의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돈을 파견하지만 진압에 실패하고 왕돈이 살해되었으며, 이특이 조흠의 반란이 진압했고 당초에는 조정에서 진주, 옹주에서 유민이 되어 촉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다.[1] 그러나 이특이 염식을 파견해 임시로 가을까지만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하면서 뇌물을 주자 이를 허락했으며, 종사를 파견해 유민을 보내는 일을 감독해 7월까지 길을 떠나게 했다.
이특이 다시 염식을 파견해 나상에게 겨울까지 이 일을 중지시켜 달라고 청했지만 광한태수 신염, 건위태수 이필 등이 반대했으며, 유민들이 조흠의 반란을 통해 대부분 약탈한 바가 있으니 편지를 보내 관문을 설치해 탈취해야 된다고 했다. 이를 받아들여 재동태수 장연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요소에 관문을 설치하도록 하면서 재물을 수색하게 했으며, 이특이 또다시 염식을 파견해 기한을 늘려줄 것을 청하면서 염식이 오자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신염과 이필이 모의하면서 나상이 결단을 내리지 못해 유민들이 간사한 계책을 펼친다고 여겨 광한도위 증원, 아문장 장현, 유병 등을 파견해 이특의 군영을 습격했으며, 나상은 이 소식을 듣고 독호 전좌를 파견해 증원 등을 돕게 했지만 패배해 전좌, 증원, 장현이 죽었다. 이특이 마침내 광한에서 반란을 일으켜 신염을 공격하자 이필, 비원 등을 파견해 구원하게 했지만 패했으며, 이특이 군사를 시켜 성도를 공격하게 하자 편지를 보내 염식을 타일렀다.
그러나 염식에게서 옭아매는 일이 지나쳐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말을 듣고 관대하게 했다면 이같은 일이 있었겠냐는 대답만 들었으며, 나상은 평소에 탐욕스럽고 잔인해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나상은 이특에게 자주 패해 마침내 긴 방어 장벽을 만들고 비수에 이어서 군영을 만들었으며, 700리에 걸쳐놓고 이특에게 대항하면서 양주교위와 남이교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02년에 하간왕 사마옹이 독호 아박을 파견하고 조정에서 장미를 광한태수로 삼자 나상은 독호 장구를 파견해 번성에 진을 치게 했지만 아박, 장미, 장구가 모두 이특의 군사들에게 패했으며, 8월에 군사를 파견해 비교에 진을 치고 있는 이양을 공격했지만 여러 차례 패했다. 또한 정예 용사 1만 명을 파견해 이양을 공격했지만 이양, 이류 등의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303년 봄 정월에 이특이 몰래 강을 건너 공격하자 강에 있던 군사들이 전부 흩어져 달아났으며, 태성을 지키면서 사자를 파견해 이특에게 화의를 청했다. 조정에서 형주자사 종대, 건평태수 손부를 파견해 수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나상을 구원하게 했고 이특이 이탕, 촉군 태수 이황 등을 파견해 덕양 태수 임장에게 보내 그들을 막게 했다.
익주의 병조종사 임예가 이특이 무리를 분산시켰으므로 여러 보루에서 비밀리 시간을 정해 동시에 이특을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다고 진언하자 임예의 진언에 따르기로 했으며, 임예를 밤 중에 밧줄을 걸고 성을 빠져나가게 하면서 여러 보루에 그 뜻을 알리기로 해 2월 10일에 동시에 이특을 공격하기로 한다. 또한 임예가 이특에게 거짓 항복을 하면서 그 허실을 살펴본 후에 보고하자 군사를 파견해 이특의 진영을 엄습해 이특, 이보, 이원 등의 목을 벴다.
3월에는 독호 하충, 상심 등을 파견해 이류를 공격했지만 격파되었으며, 이류 등이 이긴 기세를 타서 성도까지 이르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조정에서 시중 유침을 파견해 양주자사 허웅과 함께 군사를 통제받게 했다가 하간왕 사마옹이 석원에게 유침을 대신하게 하자 석원에게 군사를 통제받았으며, 평서장군 서여가 문산태수를 시켜주면 청성산의 처사인 범장생을 초청해 그와 연결하면서 이류를 토벌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류가 병으로 죽고 이웅이 추대되면서 이웅이 박태를 보냈으며, 박태는 나상에게 비성을 습격하게 해 자신이 내통한다고 하자 외백에게 군사를 거느려 비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소성에 들어갈 때 적의 계책에 걸린 사실을 알고 태성으로 물러나서 지켰으며, 12월에 이웅이 급히 공격하자 나상의 군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아문장 장나를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밤중에 우비수를 거쳐 동쪽으로 달아났다.
304년에 나상은 도망가서 강양에 이르자 사자를 파견해 상황을 표문으로 올렸고 임시로 파동, 파군, 부릉을 통솔해 군수용품을 공급하라는 조서가 내려오자 별가 이흥을 파견해 진남장군 유홍에게 보내 양식을 요구하게 하자 유홍은 3만 곡의 양식을 보냈으며, 나상은 유홍이 보낸 양식에 의지해 존립했다. 파군으로 옮겨서 주둔했고 군사를 파견해 촉에서 노략해 이양의 처인 잠씨와 그의 아들인 이수를 붙잡았으며, 아버지를 죽인 파서태수 마탈을 죽이기 위해 초등이 나상에게 군사를 덧붙여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310년에 나상은 사자를 파견해 재동으로 가게 했는데, 횡기 등이 나아가 그를 환송했고 이웅이 재동으로 거짓으로 도망온 것처럼 위장해서 가게 한 성한의 장수인 장보가 뒤에서 문을 닫자 재동이 성한의 손에 넘어갔다. 나상은 파군에서 죽었다.
나상은 과감하지 못하고 탐욕스러워 익주 사람들한테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으며, 그에 대한 평가로는 나헌전에 따르면 '''사악할 뿐만 아니라 제 몸의 안녕만 챙기면서 충성스럽고 바른 사람을 미워한다. 또한 부유하는 것은 노위에 비길 정도로 집은 성 같고 탐욕스러움이 시랑과 같으며, 절제를 모른다'''고 한다. 또 '''"촉의 도적은 나상으로 나상은 우리를 다 죽인다. 평서장군(나상)은 다시 없을 재앙이다"'''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악명을 떨쳤다.
그의 아들로 나우(羅宇)가 있는데, 성품이 아버지 못지 않게 사악한 인물로 나상에게 구원을 요청한 초등을 미워해 양식을 제공하지 않거나 익주자사 피소가 죄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310년 12월에 파군에서 피소가 도착하자 그를 살해해 파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1] 296년에 진주, 옹주에서 저족의 통수인 제만년이 저족의 추대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유민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