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진
晉'''

[image]
삼국시대 통일 이후 서진의 강역
'''265년 ~ 316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위'''
'''전조''' '''등''' '''오호십육국'''
'''동진'''
'''별칭'''
'''서진'''(西晉), 사마진(司馬晉)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수도''''''
낙양(洛陽), 장안(長安) 등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사마#s-2(司馬)
'''국가원수'''
(265) → 황제(266)
'''주요 황제'''
무제 사마염 ,(265~290),
혜제 사마충 ,(290~307),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종족'''
한족
'''통화'''
오수전
1. 개요
2. 역사
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2.2. 통일 제국의 개창
2.3. 퇴폐풍조와 현실도피의 만연
2.3.1. 통일 이후 정치 이념의 붕괴
2.3.2. 백성들의 고난
2.3.3. 사상적 타락
2.4. 팔왕의 난
2.4.1. 황족의 지방 할거
2.4.2.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3. 평가
3.1. 국가 시스템에 대한 평가
3.2. 남조의 기반이 된 왕조
3.3. 삼국시대의 진정한 끝
4. 매체화
5. 역대 황제

[clearfix]

1. 개요


265년 ~ 316년, 4대 51년. 국호는 진(晉)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서진'으로 불리며, 간혹 북진(北晉), 사마진(司馬晉)[1]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낙양(265년) → (304년) → 낙양(304년) → 장안(304년) → 낙양(305년) → 장안(311년)
사마의의 후손들이 삼국을 통일한 중국의 고대 국가. 그러나 막장 드라마 뺨치는 팔왕의 난을 겪고 30년 만에 망해버렸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중에서는 진나라, 수나라에 이어 3번째로 단명했다. 단, 시황제의 진이나 수가 통일하고 얼마 못 가 완전히 멸망한 것과 달리 이 나라는 지방정권으로는 백여 년 넘게 더 갔다. 삼국지 엔딩의 허무함 때문인지 사마씨 진나라가 단명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국~삼국시대 기간+통일왕조 기간+동진으로 따지면 155년 동안 이어졌는데 의외로 중국사 주요 왕조 평균수명을 훨씬 상회하는 장수 국가 쪽에 가깝다(...)[2]
서진 이후 화북에는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헬게이트열리고, 진나라는 강남으로 수도를 옮겨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통일을 했다지만 위와 같은 난리통에 끝내 하나마나였고 이는 수나라가 통일하고서야 끝나나 싶더니, 수양제 덕에 다시 혼란기가 왔다가 시대에 접어들고서야 진정된다.

2. 역사


진나라의 전체 존속 기간은 265년 ~ 420년이다. 일단 왕조 자체의 존속 기간은 155년으로 중국사 왕조치고는 나름대로 상당 기간 동안 명맥은 유지했다. 이 가운데 수도가 화북에 있었던 316년까지의 기간을 서진, 수도가 강남에 있었던 317년부터의 기간을 동진(東晉)이라고 나누어 부른다(공백 기간 1년).
연표 보면 알겠지만 통일기간 30여 년에 평화롭던 시절은 사마염 재위기인 고작 10여 년밖에 안 된다.
249년
고평릉 사변
263년
사마소가 진공으로 책봉
263년
촉한 정벌
264년
사마소가 진왕으로 책봉
<colbgcolor=#aaf782> 265년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
279년
독발수기능 격파
280년
손오 정벌, 천하 통일
291년
가남풍의 쿠데타
300-307년
팔왕의 난
307-311년
영가의 난
316년
장안의 임시 정부 함락
317년
건강에서 사마예 즉위 → 동진

2.1. 진나라의 시초, 위나라의 권신


처음 조조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지지함으로써 친위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사마의는 이후의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을 막아[3]내면서 군부의 중심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이러한 군부 내의 입지를 바탕으로 해서, 조비와 그 아들인 조예가 죽은 뒤 나이 어린 조방을 끼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조상쿠데타로 축출하고 자신이 위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과거 조조가 헌제를 앞에 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 비슷하게 재현된 것이다. 이때가 249년, 사마의의 나이 71세였다.
그러다가 2년 만에 고령으로 사마의가 죽자,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받은 장남 사마사차남 사마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미 실권이 사라진 위나라 황제 조방과 조모를 각기 폐위시키고, 또한 이에 반발하여 오나라 전선에서 잇달아 일어난 관구검, 문흠,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굳혀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마소는 개국의 공으로 삼기 위해 촉한 정벌에 착수하여 263년 촉한정벌이 한창 진행되던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자 전쟁 중인 10월 진(晉)의 공작까지 올랐다(이전에 형 사마사는 사망). 사마소는 병주의 태원(太原), 상당(上黨), 서하(西河), 악평(樂平), 신흥(新興), 안문(雁門), 사주(司州)의 하동(河東), 평양(平陽), 홍농(弘農), 옹주(雍州)의 풍익(馮翊) 10개 군, 사방 총 700리인 토지를 받았는데 이 지역은 옛 진나라(晉)의 영토로서 사마소는 이 토지를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에게서 받아내고 진(晉) 공국을 세워 진공(晉公)으로 봉해지고 구석을 받았다. 이렇게 263년 10월, 후세에 서진, 동진 합쳐서 156년간 황제국 진나라로서 존속하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또한 진나라의 관부 설치는 일체 이전의 제도에 따르도록 했다. 아직 제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진나라는 이렇게 시작한 셈이다. 괜히 사마소가 태조의 묘호를 받은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263년 11월, 결국 촉한은 진공 사마소가 보낸 정촉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 공으로 이듬해 3월, 사마소는 다시 왕으로 진봉받아 자그마치 20개 군을 거느렸다. 하지만 정작 사마소는 중풍으로 이듬해 9월에 죽고, 이러한 건국의 기반은 고스란히 아들 사마염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사마염 이전에 나라의 기틀이 다 잡혔고 사마염은 그걸 받아먹은 것이 대부분이라, 사마염은 사마의사마사 그리고 사마소고조, 세종, 태조로 추존하고 자신은 실제 초대 황제임에도 세조 묘호를 받았다. 대체로 태조 묘호는 조조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초대 황제가 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사례다.
그러나 진나라는 한 명의 황제를 내치고, 한 명의 황제를 시해하는[4] 등 건국 과정이 탈법적, 부도덕적이었던지라 사마씨의 정통성은 취약했다. 여기서 조조와 사마의 이하 그 자손들의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비교할 수 있다. 조조나 사마의는 최소한 자기가 시키거나 자기 책임 아래 난 일은 스스로 책임을 졌다.[5] 그러거나 말거나 당대에나 후대에나 세인들의 눈에는 군주의 등에 칼을 꽂은 역신으로 보이는 건 매한가지이긴 하다만, 최소한 자기 지지세력에게까지 불신을 심어주진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뒷날 동진명제는 조상들의 건국 과정을 듣고 자신의 일족과 나라를 부끄러워 했고, 후조의 석륵은 "나는 조맹덕 부자사마중달 와 같은 도적질은 안 하겠다."라고도 했다.
이런 문제로 서진 정권은 구품중정제로 자리 잡은 귀족들의 지지에 기댔고, 이는 서진이 고작 건국 50여 년 만에 몰락하는 한 단초였다.

2.2. 통일 제국의 개창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진왕이 되자마자 곧장 찬탈이나 다름없는 선양을 통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 방법이 또한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세력을 구축한 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 조비가 안정적으로 선양받게한 인물이라 도찐개찐. 그러나 조조는 헌제에게 불려와서 뿌리박았고 사마염은 사마의부터 시작해서 4대째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라 급이 살짝 다를 수도 있다.
전신이었던 위나라는 황족과 외척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방계 친척들 위주로 근황 세력을 구축하다가[6] 그들이 사마씨에 의해 숙청되면서 군권이 사마씨를 비롯한 호족 세력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권력을 잃고 나라가 망했는데, 사마염은 그런 위나라의 쇠망 과정을 막으러 '''황족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황족들을 각 지방의 왕으로 분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마염의 숙부 사마주(司馬伷)와 사마량(司馬亮)으로, 이 두 사람은 각기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을 상대로 전선에 나갔다.
여기에서도 보이듯, 당시 진나라의 주요 적국은 '''강남의 오나라'''와 '''농서의 선비족'''이었다. 이에 농서의 선비족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진주(秦州)를 설치하고 현지 출신인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터질 반란은 터지기 마련인지라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견홍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선비족은 서량을 마음껏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적절하게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꼼수를 부려서 부임도 안 했다.
한편 당시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이 인간이 또 폭군이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그 자리에서 죽여서 호랑이 밥으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천이나 뽑아내는 등 여러 막장#s-1.1행각을 일삼았다. 안으로만 이러는 게 아니라 밖으로도 이러니 문제였다.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이를 깔보고 평화 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하다가 그만 폭설에 갇혀서 얼어죽을 뻔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진나라에는 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 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s-2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씹었다. 이에 양호는 결국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다.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한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했다.

2.3. 퇴폐풍조와 현실도피의 만연


  • 280년 ~ 290년: 통치 시작.

2.3.1. 통일 이후 정치 이념의 붕괴


이렇게 해서 사마염의 진나라는 천하 통일을 달성하고 삼국시대의 최종 승자에 올랐다.
대개 혼란기를 거쳐 새로 만들어진 제국들은, 그때까지의 폐단이 혼란기를 거치면서 무너져내렸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를 빚어내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서진은 조위가 폐단을 나타내기도 전에 조씨 황족을 숙청하고는 '''찬탈'''하면서 건국했기 때문에 위나라의 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았다.[7] 그래서 서진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위나라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전제적 · 법가적 정책 방향 부정,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 집단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 · 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에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후한시대 이래 흐트러진 유교 질서의 회복이었다.[8]
이에 따라 재위 초기 사마염은 여러 측면에서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즉위한 직후부터 사마염이 직접 사마소왕원희의 죽음을 3년간 심상(心喪)하면서 유명무실해져 있던 삼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곧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 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도 간관(諫官)을 설치하고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만 모아서 만든 옷인 치두구(雉頭裘)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오나라 전선을 지키던 석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체포령을 내렸다가 석포가 알아서 자진 출두해오자 오히려 최고위관인 사도로 임명하고 마륭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독발수기능 토벌을 맡기는 등 재위 초기 사마염은 나름대로 개념인이었다.
'''다만 사마염의 구상은, 의도는 좋았지만 여기까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내사마씨(河內司馬氏)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위법과 탈법으로 찬탈을 저지른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사마의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고, 그 아들 사마사는 임의로 외척을 척살하고 황제까지 쫓아냈으며, 사마소는 '''아예 황제를 시해했다.''' 조비 역시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9] 그러나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시해하였다. 직접적 실행자인 성제에게 책임을 물리기는 했지만, 성제가 죽기 전 저항하면서 사방에 실상을 다 까발린 데다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자근자근 밟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억지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최소한 '''수단을 정당화할 근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내사마씨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게 존재하질 않았다. 조씨의 위나라는 적어도 헌제가 이미 동탁에게 옹립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조조 조비 조예 3대 동안 동탁이 초토화시킨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으로 널리 초토화된 민생을 재건했다는 점에서 "조씨가 뭘 잘했길래 제위에 오르냐?"라는 질문에 할 말이 있었으나[10], 서진은 말 그대로 조씨 정권을 날로 주워 먹고 간판만 바꿔 달아놓은 사마씨 정권에 불과했다.
사마씨는 찬탈로 정권을 잡았고, 조씨 정권보다도 명분이나 정통성 측면에서 더 떨어졌기 때문에 사마씨 정권하에서는 유교를 외치면서도 정작 충(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을 펼친 이유는 황실의 일족인 사마씨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현위황제를 쫓아내거나 시해했으며, 반항하는 세력은 몰살시키는 행위를 통해 조씨를 몰아내고 집권한 현실과 무관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충을 강조하면,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이 걸리는 쪽이 사마씨 황실이다.
그나마 사마염이 내세운다는 게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교적 가족주의였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문제가 존재했다.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신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나고.
결론적으로 사마염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은 '''적극적으로 강조될수록 사마염의 집권 정당성이 약화된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었다. 결국 위에서 본 치두구 사건이 벌어진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사망하고, 280년에는 삼국이 통일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마유에 대한 처우인데, 이전까지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전대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받던 사마유가 280년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쫓아낸 뒤 사마유도 산동 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사마유가 정말로 저 세상으로 갔다.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삼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소가 있다.[11]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사마염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이미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가 함께 고발되었음에도 고관대작산도, 사마목,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온갖 사고치고 비리 저지르고 하면서 그 열매는 빽있고 지위있는 사람이 먹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쓰고 책임지는 건 이도저도 없는 하수인들이었다는 것.
그러니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사마염은 천하를 발 밑에 둔 뒤에는 그냥 다 포기하고 바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통치를 했다. 오나라의 손호가 모아들인 5천 궁녀를 그대로 흡수해서 '''1만 궁녀를 현실에 실현'''하는 현실판 하렘 물짓을 하는가 하면,[12] 이 많은 궁녀 가운데 오늘밤은 누굴 골라잡을 지 몰라서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 가는 대로 로또를 돌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게다가 이건 삼천궁녀처럼 과장한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정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때문에 궁녀들은 양을 유인하러 양들이 좋아하는 댓잎과 소금물을 문간에 깔아놓았다고. 또 관리 선발에서 "'''사치가 심한 건 좋은 것이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는 개드립도 쳤다.
이처럼 나라 꼴이 막장이었던 원인으로는, 우선 황제가 귀족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왕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마씨 일족이 위나라 말에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서였다. 한나라 시조 유방과 위나라 시조 조조가 극적인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데 반해,[13] 사마씨는 전통적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귀족 사회와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그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귀족 사회에 속한 권력자라면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고평릉 사변이나 조모 시해 사건 등을 거치며 이미 숱하게 피를 봤다.
제왕의 위상이 귀족층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위나라처럼 강력한 법치를 통해 귀족들을 제어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사마염은 법치의 각박함을 지적하며 유교적 통치를 시행하려다 결국 그걸 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현실 도피성이 강한 도교사상과 향락풍조를 스스로 조장했다. 이러다보니 사회 전체가 현실도피 및 퇴폐로 흘렀다. 이 당시 죽림칠현 등이 나온 것은 단순히 전란이나 권력투쟁에 대한 선비들의 염증이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사마씨 황실이 이런 풍조를 조장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졸부 석숭왕개가 온갖 사치로 돈을 뿌리며 낙양에서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나" 경쟁하는 돈지랄을 할 때, 황제였던 사마염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앞다투어 구경을 하곤 했다. 결국 유가도, 법가도 모두 버렸으니 진나라는 귀족을 제어할 수단을 다 내버린 셈이다.
황제부터가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재능있고 패기넘치는 황제가 열심히 노력해도 통치가 잘 안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황제부터가 개판이면 오죽하겠는가. 당장 문벌귀족들부터가 사치, 축재, 매관매직, 부정부패 등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누가 더 나라 잘 말아먹는지를 겨루었다.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 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 게 없다며 징징거렸고[14][15], 사마염의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의 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대 사치의 끝판왕은 역시 '''왕개석숭의 돈지랄 레이스.''' 왕개는 왕원희의 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고, 석숭은 위에서 이야기한 석포의 막내 아들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집을 주사로 칠했다. 왕개가 조금 밀린다 싶자 사마염은 외삼촌을 위해 2자(48cm)가 넘는 귀한 산호수를 하사했고 이걸 석숭 집에 들고 가서 자랑하자 석숭이 '''황제의 하사품을''' 쇠몽둥이로 개박살을 내버리고, 이에 왕개가 따지자 사과한답시고 창고에서 3~4자(72~96cm) 정도되는 산호수를 7개 정도 꺼내와서 하나 가져가라고 하였다.[16]
하다 못해 사마염 본인이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군왕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면 모를까, 통일 직후부터 바로 썩어들어갔으니 더이상 위엄이고 자시고 내세울 게 없었다. 결국 사마씨 황족은 귀족의 지지에 의존하게 되고, 자연스레 '''황제가 귀족들의 눈치를 봤다'''. 위에 언급된 대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했지만 내색도 못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귀족 석숭이 황제 사마염의 하사품인 산호수를 쇠몽둥이로 깨부셔도 별 말 하지못했다.
더군다나 개악된 구품관인법까지 더해져 서진 사회의 막장화에 기여하게 된다. 위나라 때 탄생한 구품관인법은 실시한 지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 하후현이 제도 개혁을 요구할 정도로 문제 많은 제도였는데,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씨 일파는 거기에 더해 주대중정을 둠으로써 사마씨 일파 기호대로 관료를 선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나마 등애 같은 한미한 집안출신도 고위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초기 구품관인법의 장점은 사라지고, 좋은 가문 출신의 사람만 상위 관품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능력이 좋아도 하위관품을 받는 일이 발생하게 되어 고위관직 세습화에 기여하는 제도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도 서진은 제2의 사마의가 나타나지 않게 면밀한 제도 개혁과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 체제 완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등장하는 유유나 소도성은 때문에 사마의와는 꽤 다른 방식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했고 실은 바로 그것이 전 황실을 몰살하는 좋지 못한 풍습의 근원적 원인이다. 유유가 각별히 잔인한 것만은 이유가 아니었다.

2.3.2. 백성들의 고난


그나저나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문벌들이 제 아무리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더라도 그만큼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면 그리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17] 실제로(?) 제환공관이오는 사치를 즐겼는데 그럼에도 별로 까이진 않는다. 그 이유는 제환공 시기가 제나라가 짱짱맨이던 시기라서 그렇다.[18]
[image]
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을 다스리던 서진은 고위 문벌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대비되는, 오히려 소빙기가 의심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부터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아예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다.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다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익어가는 곡식들을 망가뜨리기도 했다.[1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 '''중세 유럽에서의 농노를 생각하면 된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양인에 속하지만,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되었고, 의식객에서 벗어나려면 그때까지의 부양비를 배상해야 되었다.[20]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특히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가 무너지고 군벌들이 일어나는 건 시간 문제였던 것.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로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이었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21]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 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이함, 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히 한이 맺혀있었던 저 인간들에게 완장이 한번씩 갈 때마다 무지막지한 피바람이 일어났다. 그나마 자기들끼리는 나름의 카르텔도 있어서 기싸움하며 적당히 건드리다 말았던 주류 문벌 귀족들이었지만 갑자기 힘이 생긴 저 외부자들에겐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산호수를 멋대로 깨먹고도 무사했던 석숭은 자기 애첩을 탐내는 손수를 무시하고는 자기 뿐 아니라 3족이 살아남지 못했다. 장방이 낙양을 무지막지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인간 백정짓을 다 하고 다녔을 때 역시 중앙 귀족들은 그냥 칼로 베기 좋은 고깃덩어리었을 뿐이었다.

2.3.3. 사상적 타락


거기에 실상 서진이 표방한 유교 사상의 행보는 '''한밤중에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이 시대에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환관과 외척 등의 족벌들에게 대항하던 사인층은 정계로 진출해 권력을 잡은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부패한 정부에 발을 맞췄고 후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후한 시대까지는 광무제 덕분에 그럭저럭 유교 사상이 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광무제는 태학의 유학생이었고, 왕망의 한실 찬탈 때 관의 어용으로 이용당하는 유교 사상에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동한 시기에는 광무제의 개혁 이후로 뛰어난 유학생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어리고 어수룩한 황제들이 환관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자 유학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태클을 걸었다. 이후 환관들의 유학 탄압이 시작되자 관직을 내려놓고 중앙정부를 떠나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학문을 계속한다. 이들을 은자隱子라고 불렀으며, 후한에는 은자들이 유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이상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집중하는 현실 참여형 유학자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런 현실 참여형 학자들의 염원을 실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탁과 조조였다. 동탁은 권력 잡겠다고 낙양을 불태우고 깽판을 치면서 의도치 않게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사마의 역시 이런 사인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있어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에서 알 수 있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22]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상당 부분 이어받은 나라였다.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나마 삼국시대에 마융, 정현, 노식 등의 유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의 학풍이 계승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서진의 유학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당시 유학의 대표 중 죽림칠현이 유명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숲속에 틀어박힌 채로 다소 와전된 유교 사상과 도가 사상을 짬뽕시켜 즐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 말고는 하안, 왕필#s-2, 하후현과 같은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 도련님들이 내세울 법한 세련된 현학이었다. 이러한 현학들 중에서 큰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경우 유학 사상에 대해 논할 정도는 되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점에 변함은 없다. 대학자들이 이 모양이니,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얼치기들은 뭣도 모르고 허무주의신비주의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결국 서진의 유교 사상은 이미 사상적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유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포용, 탐욕과 권력욕에 대한 경계 등을 주장하는 청담사상은 후한말부터 시작된 청의(淸議)가 구체화된 사상이었으나, 서진에 이르러서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서진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는 '''공담(空談)'''이 판을 쳤으며, 이런 학풍은 위진남북조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여기에다 서진에서는 환각제까지 유행하여 더더욱 사회가 개판으로 돌아갔다.

2.4. 팔왕의 난



2.4.1. 황족의 지방 할거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더욱이 사마염은 또 다른 문제도 쌓아놓았다. 앞서 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23] 황족, 외척, 환관을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24] 하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능력이 뛰어났던 조씨와 하후씨 일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사마의 일파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대로 실현되었다.[25]
그래서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즉위 직후부터 황권강화를 위해 일종의 봉건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선택, 각지에 할거한 황족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다. 280년에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자사)과 군정권(도독)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군정권까지 황족에게 나눠주었으니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즉 '''황통을 지닌 사람이 인사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고 지방에 할거한 형국이었다.'''
[image]
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장군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왕위의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기반은 봉토인 성도가 아닌 평북장군·진북대장군·정북대장군 등으로서 주둔한 업이다.
다만 사마염 생전에는 중앙의 거대문벌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압도하고 있었고, 양호, 두예#s-1, 장화, 호분#s-1과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황족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것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멍청하게도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유리천장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모든 개막장인 상황에서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군대만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던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족 가운데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문제와 대안이 불분명한 이상 다른 황족이 한꺼번에 여기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의 토벌군으로 각개격파까지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놈의 지긋지긋한 외척.'''
사실 사마충 같은 백치가 별말없이 태자→황제테크를 탔다는 것 자체가 가충을 시작으로 하는 귀족집단의 힘과 사마씨 정권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실제로 팔왕의 난을 일으킨 원인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된 것부터가 가충의 뒷배 때문이기도 하고.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 사마염)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홍대용 《담헌서》


2.4.2.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천하 통일 뒤 정확히 10년 만에 사마염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충은 지금으로 보면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진단될 정도의 백치'''였다. 사마염도 살아 생전 이를 걱정했지만 그래도 사마충의 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장남인 사마충으로 밀고 나갔고, 그 대신 작은 아버지인 사마량, 장인 어른인 양준(楊駿), 개국 공신인 위관(衛瓘)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던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이에 남은 위관은 알아서 버로우를 타버렸다. 이로써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 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26]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27]
어쨌든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호족들의 사치와 삽질에도 고생은 적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인구는 세 나라를 더해도 777만 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갑자기 인구가 1600만 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통일 뒤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의 호구(戶口)라는 것은 戶의 경우 '집'을 의미하며, 口는 개별적인 인구를 말한다. 사료에 따라 戶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호구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보통 이들 口를 신분별로 나누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전한 시대에는 일단 대남(大男), 소남(小男), 대녀(大女), 소녀(小女)등으로 구분한 것이 보인다.[28] 이처럼 진한 시대에 이미 이들에 대해 성별, 연령에 따른 상세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간간히 목간 자료로 출토되고 있다. 물론 완벽한 파악은 한없이 멀었지만.
즉, 이 시대에 인구 폭증은 이러한 조사가 훨씬 원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전쟁이나 혼란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문명 시작 이전의 장기 빙하기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전근대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 그럭저럭 호구 파악이 잘 되던 청나라 시기를 보면 19세기의 혼란기에 중국의 인구는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증가해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평성대였는가 하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당시 중국은 소빙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매서운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29]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인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면서 검열삭제를 벌이는 데다, 황제라는 작자는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라는 지적장애에 걸맞은 개소리나 해대고 있으니.
끝내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실로 핵폭탄급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본래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의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 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마휼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그 방법이란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라는 글을 베껴쓰게 했다. 이 일로 사마휼이 유폐되자 태의령 정거[30]를 보내 독살하려고 했는데, 사마휼이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함께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가남풍 일파를 싸그리 쓸어버린 뒤 정권을 차지했다.[31] 하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태자는 이미 죽었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 뒤 기어코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놈이 나대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자기네들끼리 사이좋게 치고 박고 싸우다가, 사마충 사후[32]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가까스로 끝난다.

2.5.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그러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다.'''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과 결탁해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가, 이내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서 (漢)[33]을 세우고,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들(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사실상 와해'''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원래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책을 겸임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벌 세력화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이를 보완시키려 했지만 이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공중분해했으니(...).
때문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서 거점을 장악시키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다.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죄다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싹 몰살당했다.
이때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의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 등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 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 인물로 간주,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 정부를 이끌던 사마업(業)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 받아 2년 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또''' 살해당하고 만다. 이로써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 년 동안 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조지고 부시고 갈아엎으며 깽판을 치는 사이 강남에서 한족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3. 평가


역사적 의의를 떠나 국가 자체로서는 전형적인 막장테크를 탄 왕조라고 볼 수 있다. 과장된 헛소문이었던 백제의 삼천궁녀와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같은 에피소드가 진나라에서는 '''현실 정사에 기록된 채로 더 심각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국가 막장 테크에서 빠질 수 없는 '''내부 분열''', '''민족과 문화 관리''', '''수뇌부의 부패와 체제의 붕괴''', '''자연적 요인''', '''전쟁과 외침'''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화북에 있어서 형성된 귀족지배의 체제는 지금까지 기술해 왔듯이 화북 각지에 퍼져서 세력을 이루던 호족이 강대해진 탓에 사회의 계층분화가 진행해 가는 경향과 한편으로는 그 경향을 저지하면서 공동체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경향, 이 두 가지의 세태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소산물이었다. 그 중에서 호족들은 무인 영주로서의 지배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돌진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향론위에 서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적인 "사(士)"로서의 지배층을 양성하게 되었고, 그 "사(士)"계층 위에 귀족 사교계가 형성되어 갔다. 그리고 이들 "사(士)"와 그 위에 선 문인적인 귀족들이 제국 붕괴의 대혼란을 이겨내고 중국 문명에 새로운 전개를 가져온 주체였다. 그러나 그들을 배출해 낸 기층의 향촌사회에서는 대혼란에 의하여 입은 큰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호족의 강대화를 저지하는 자유농들의 공동체 지향력은 약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귀족층은 전술한 기성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채 외견상의 평화에만 안주하여 기층 사회로부터 유리되면서 그들의 사교계에 있어서 '''청담(淸談)'''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부 권력자의 권력 남용의 여지를 내주었고 팔왕의 난북방이민족이 함부로 설치도록 하는 결과가 되어서, 수습이 되지 않는 대혼란 동안 당시의 귀족사교계는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귀족 중에는 향촌 사회로 돌아가 그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자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강남으로 피난하여 그 땅의 일류호족들과 함께 동진 정부를 부흥시키면서 새로운 귀족사교계를 재생하고 그들의 지배체제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문명의 등불은 화북에서 설치는 이민족에 의하여 꺼지지 않고 강남에서 환히 타오를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4세기 초 화북에서 강남으로 피난해온 귀족들은 이 신천지에 이동한 초기에는 뿌리없는 풀과같은 망명자에 지나지 않았다.[34]
즉,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의 의의를 제외하고 왕조 자체를 보면 서진은 후한 말부터 내려온 사회 모순을 이길 능력을 갖춘 것은커녕 온갖 막장 행적과 문제점만 남긴 채 처참히 자멸해 버린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후한의 멸망 이후 그 후유증을 370여 년 동안 수습하지 못했던 위진남북조 시대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왕조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진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디를 봐도 서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우 찾기 힘들 지경이다. 비록 삼국을 통일한 나라지만 전신인 위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욱 많을 정도.

3.1. 국가 시스템에 대한 평가


삼국지연의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통일최후의 승자이며, 제갈량라이벌로 유명한 사마의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인데도 취급이 별로다. 아무래도 삼국지연의 후반이다보니 독자들의 재미와 관심이 떨어진 상태에서 등장한 국가이고, 덕분에 유명도가 함께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진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하게 의의가 있는 국가이다.
성공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왕조인지라 진시황제의 진(秦)나라와 비교하는 의견도 곧잘 보인다. 그래도 천하 자체를 완전히 잃은 그 진나라와는 달리 이쪽은 절반이나마 보전했다. 반쯤 말아먹은 것과 완전 말아먹은 건 다르다.
물론 군주로서의 역량이야 진시황암군 사마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났지만, 반대로 진시황은 사마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악행을 저지른 최악의 폭군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의 역량은 사마염의 진나라 쪽이 낫다. 진시황의 진나라는 근육은 좋아도 내장이 병들어 있었던 것이고, 사마염의 진나라는 군살이 많아 병들고 나서도 군살이 빠졌을 뿐 죽지는 않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결국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35] 적어도 체제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마염의 진나라가 판정승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도 거저 먹은 게 아니라 비록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각박한 위나라 전시체제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구품관인법의 경우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 이후 구품관인법을 개정하여 군중정의 상부기구로 주에 대중정을 설치하였고, 이는 군중정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낳았으며 중앙의 사도가 주의 대중정을 임명하도록 했다. 당연히 이건 사마씨 말 잘 듣는 자를 관리로 등용하거나 승진에 유리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훗날의 유송이나 제양이 전 왕실을 싹쓸이해야만 했던 건 이런 제도 탓에 찬탈 전에 자파 세력을 구석구석까지 심을 수가 없었던 환경이 나온 데 있었다. 당장 선양 후의 피비린내가 완전히 멈췄던 시기에는 1인자의 휘하 모든 장수들이 그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2인자의 사람이기도 했던 까닭에 그냥 니 세력이 내 세력이어서 구태여 남아 있는 어린 후계자를 손톱만큼도 의식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새 황제의 권력기반이 단단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36]
사마염의 능력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결과적으로 암군이겠지만 자질과 통치내용을 보면 상황이 따르지 않았다는 변호도 가능하기 때문에 명군이냐 암군이냐 하는 이분법적 구분이 애매하다. 또한 가장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37]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조위에게도 해당된다. 조조는 헌제의 신변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최후의 선을 넘지 않은 셈이지만, 조위가 서진보다 나은 점은 이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사마염도 조환은 놔두어 편히 살다 죽게 했으니 딱히 더 잔인하다고 보기도 좀 그렇다.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만큼 연의로 진나라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고, 연의 관련 매체에서도 취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의 관련 매체의 관점을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만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서진을 평가할 필요는 있다.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좋아하는 영웅들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렸다면서 썩 달가워하지 않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영웅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가 있었다고 하겠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기반을 갖춘 상태로 시작했으니 직접적으로 위나라의 덕을 본 셈이고, 또한 위나라와 함께 삼국의 형세를 만든 다른 두 나라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3.2. 남조의 기반이 된 왕조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서진도 분명 남긴 것이 있다. 서진 이후에는 남조와 북조가 탄생하는데, 남조가 바로 서진의 영향을 받았다.
서진은 삼국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오나라와 대립하면서 남쪽 국경 지역을 크게 발전시킨다. 동오의 손호는 무리한 군비 증강과 중앙 집권책으로 동오 지역 민중과 호족 세력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이를 알고 서진에서는 동오와의 국경 지역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다. 도망쳐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정착시키고, 기반 시설을 정비하여 생산력과 경제력을 향상시킨다. 특히나 양양 지역이 중요했는데,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오의 육항과 대립하던 양호가 군비 증강과 함께 민중을 위한 정책도 다양하게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오를 복속시키고 난 다음부터는, 동오가 기초를 세운 강남의 경제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지역의 생활 수준이 더욱 안정되었다. 이렇게 부강한 강남의 경제력을 받아들인 것은 훗날 동진을 비롯한 남조 국가들이 북조 국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강남 지역의 경제 및 생산력 향상의 주역은 해당 지방을 다스렸던 손권 뿐만이 아니라, 손호의 기이한 정치 행태를 끝내고 나름대로 동오 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마염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진으로 정착한 다음부터는 늘 북쪽 야만족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토착 세력들을 억누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동오의 호족들은 북에서 내려온 세력들에게 상당 부분 고까운 감정이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북방의 막장 야만족보다는 그들이 보다 나은 지배자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우습게도 서진 시절 국가통치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사마염이 황권을 약화시켜둔 덕분에, 무능력한 황제가 귀족들에게 태클을 걸어 중앙 정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일이 방지되었다(...) 남긴 거라면 이것도 남긴 셈이다.[38]
또한 서진이 훗날의 남조 국가들에게 남긴 유산이 또 있는데, 바로 정통성이다. 가장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쪽은 오히려 갑자기 황제에 즉위하여 의문을 남긴 오나라에게 향해야 할 비판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에서 위나라를 통해 건너건너 선양을 받으며 정통성을 갖췄다. 그리고 촉한정통론적인 관점에서도 서진은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데 서진의 실질적인 시조인 '''태조''' 문제 사마소가 최후의 한나라 왕조인 촉한을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진왕이 된 것이 바로 서진왕조이기 때문이다. 촉한정통론이 최초로 나타난 시기가 동진 시기임을 감안하면 서진-동진 역시 촉한이 내세운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후한-조위(촉한)-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중국 왕조의 정통성 계승 덕분이었다. 사실 북위도 정통성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고, 이름을 북'''위'''라고 한 것도 국가시조인 탁발부가 위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서였다. 그래도 형식상이나마 선양을 통해(혹은 직접 나라를 멸망시켜) 계승한 동진의 정통성 앞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에게서 정통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조 정권의 강력한 정통성은 오호 국가 및 북위에서 가끔씩 부정했으나, 역사적으로 남조가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부정하기 힘들다. 서구 학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동로마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일본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세력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북조였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에게는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과 반목을 일삼으며 국가의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당대에 조조급이라고 평가받던 유연이 있었고, 조조와 사마의를 무시하던 석륵이 있었으나, 그들조차 동진을 끝끝내 타도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동진을 잘 살펴보면 촉한을 병합한 직후의 조위보다 기반이 불안했는데도 그랬다.[39] 이는 정통성을 계승한 후손들이 동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기반을 세운 삼국의 영웅들이 남긴 업적과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3.3. 삼국시대의 진정한 끝


삼국시대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일부로 포함되긴 하지만 삼국시대 자체는 역사적으로 봐도 진의 통일로 끝난 게 맞고,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도 진의 통일로 끝나기에 대중적인 인식도 서진의 막장화는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삼국시대로부터 팔왕의 난-영가의 난으로 이어지는 서진 멸망의 흐름까지 기간이 너무 짧다보니까 서진 멸망과 그 이후를 기존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40] 단순히 진의 막장화를 삼국시대 전체의 문제로 뭉뚱그려 설명하기는 어렵다. 진이 전후 안정화에 실패한건 삼국 중 하나인 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사마씨들의 전횡이 도를 넘었던 것에 있지 위, 촉한, 오의 문제를 그대로 가져온게 아니기 때문. 촉한은 환관이 발호하는 사태가 일어났지만 그조차도 황제인 유선이 지나치게 황호를 총애해서 일어난 일일뿐 오히려 유선이 황호에 대한 총애를 거두었다면 그대로 황호는 모든 권력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될만큼 황권이 강력한데다 호족 통제면에서는 안정적이었고, 오의 경우 호족 이전의 통치자의 폭주가 직접적인 멸망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위의 경우 지나친 종실배제가 원인이 되어 호족 사마씨에게 정권을 탈취당했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 삼은 진에서는 오히려 종실중시를 과하게 한 것이 화근이 되어버린 것. 이후 폐단으로 비판받는 구품관인법을 시행한 것도 위와 이를 계승한 진만이었는데, 서진이 답습하지 않거나 해결하려다 실패한 문제, 위나 서진에만 있었던 문제들을 삼국시대 자체의 연장선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서진은 전신이었던 위의 기조를 강하게 이어받은 왕조인 동시에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체제를 극복하려다가 후한말부터 내려온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처참히 무너진 왕조로서 여러가지로 위나라를 많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촉한과 오는 긍정적인 영향이든 부정적인 영향이든 서진의 정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특히 오의 경우는 그 위치 때문에 서진 이후 5호의 발호에도 영향을 못 미쳤을 정도. 강남개발사나 명분론 같은 것들을 배제하면 촉한과 오는 멸망 시점에서 할거하던 그 지방의 지리, 역사에만 영향을 끼쳤을 뿐 광의의 의미에서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 중 오가 멸망하고 진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좁은 의미에서 삼국시대도 끝을 고한 것이다.
또, 촉한과 오가 서진에 남긴 것이 적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촉과 오 역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중국사에 남긴 성과는 아무래도 위 - 진보단 훨씬 적다. 촉한의 경우 한실부흥을 위해 이민족 회유에 국운을 걸어야했고 북벌의 기본전략도 강족을 편입시키느냐의 비중이 매우 컸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촉한이 강족의 호응을 분명 받긴 했지만 위나라에게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강족과 촉한의 역량이 위나라를 뒤집지는 못했다. 남중(익주 남부)의 경우도 촉한이 비교적 유화책을 쓰고 통치자들이 점점 현지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았지만 제갈량이 죽기 직전에도 이민족인 유주의 반란이 있었다.[41] 기록이 적은 촉한은 그렇다치더라도, 동진이 강남개발에 착수할 때 오나라가 했던 정책 중 참고할만한 것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제외하면 오의 황제 손권의 일대기만 보더라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고 이것 역시 그들의 한계를 증명하는 꼴이지 이민족의 침입을 극복하거나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42]
다만 여기서 연장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협의(狹義)에 의한 것으로 후한 말부터 시작된 중원의 혼란과 이로 인해 남하한 이들에 의해 시작된 강남개발, 정주민의 약화로 유입된 이민족과 이들의 발호 및 한족으로의 동화라는 역사적인 큰 흐름은 수나라의 통일로 끝이 난다. 대략 370년간 이어진 이 시기를 우리는 위진남북조시대라 부르며,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는 이 혼란기의 시작점이고 서진은 그 통과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봤을 때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진남북조시대가 결과적으로 후한의 멸망이라는 사건의 후유증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것에서 발생된 것이고 수문제-당태종 시기에야 간신히 수습하고 새로운 이념과 체제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광의적인 의미에선 서진(그리고 그를 뒤이은 동진) 역시 삼국과 마찬가지로 후한의 모순과 그로 인한 멸망으로 발생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한 당시의 전형적인 왕조라고 할 수 있다.
또, 이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강남개발사 중심으로 지칭하는 육조시대로 칭하면서 오나라를 첫머리로 두거나, 서진 멸망 이후 촉한정통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촉한의 명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등, 여전히 삼국이 남긴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들 역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런 경제적, 사상적 부분에서 촉한과 오는 일정 정도 중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4. 매체화


진삼국무쌍6에서 신세력으로 나왔다. 이제 사국무쌍이라 불러야 하느니 개드립이 많았지만 스토리 모드를 해보면 그냥 위나라 줄거리 2부 수준이다. 진짜 진나라 소속인 인물도 7 기준으로 사마소, 왕원희, 가충, 문앙 넷 뿐이고 사마염은 엔딩에서 뒷모습만 잠깐 나온다. 삼국지 관련 2차 매체들 가운데 삼국지 9 다음으로 제갈량 사후 부분을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화로는 고우영 십팔사략 8권에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 초반부에 해당하는 서진의 멸망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5.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능호
추존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
사마의(懿)
사마염의 조부, 건국의 기초를 닦음.
179년 출생, 251년 사망. 73세.
고원릉(高原陵)
추존
세종(世宗)
경황제(景皇帝)
사마사(師)
사마염의 백부.
208년 출생, 255년 사망. 48세.
준평릉(峻平陵)
추존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사마소(昭)
사실상 진나라의 초대 군주.
211년 출생, 265년 사망. 55세.
숭양릉(崇陽陵)
1대
265-290년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
사마염(炎)
진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43]
236년 출생, 290년 사망. 55세.
준양릉(峻陽陵)
2대
290-301년
 
효혜황제(孝惠皇帝)
사마충(衷)
백치 황제, 가남풍의 남편.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태양릉(太陽陵)
임시
301-301년
 
조왕(趙王)
사마륜(倫)
사마충의 숙조부, 3개월 천하.
301년 사망.
-
복위
301-306년
<colbgcolor=#aaf782>
<colbgcolor=#aaf782>효혜황제(孝惠皇帝)
<colbgcolor=#aaf782>사마충(衷)
유폐되었다가 복위.
263년 출생, 306년 사망. 44세.
태양릉(太陽陵)
3대
306-311년
 
효회황제(孝懷皇帝)
사마치(熾)
영가의 난이 터짐.
284년 출생, 313년 사망. 30세.
-
4대
313-316년
 
효민황제(孝愍皇帝)
사마업(鄴)
장안의 임시 정부에 의해 옹립.
300년 출생, 317년 사망. 18세.
-
이하는 동진/역대 황제 문서로.
서진 황실을 더 알아보고자 한다면 서진/계보 문서로.
[1] 단 사마진이라고 하면 사마씨 왕조가 계속 이어진 동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2] 그만큼 중국사에 여러 단명 왕조가 많았기 때문이다.[3] 3차 북벌에서도 나섰지만 그때는 조진 아래의 부도독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표기하지 않았다.[4] 여기에 시해의 죄를 실행자인 성제 형제에게 덮어씌웠다.[5] 그 덕택에 조조와 사마의는 어찌되었건 본인들은 직접 황제를 죽이지도, 폐위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망탁조의에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꼬라지를 라이브로 본 사마사, 사마소 형제가 아버지와 같은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책임회피를 시도했지만,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게 될리가 있나...[6] 대표적으로 조진, 조휴가 있다. 이들은 각각 군권을 행사하는 직위인 대장군과 대사마의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 조비 대에서 조예 초기까지 사마씨를 필두로 한 호족세력에 맞서 근황세력의 대표주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 덕분에 조예 치세까지는 황권이 신권에 압도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7] 구품관인법을 비롯하여 위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그대로 계승했다.[8] 사실 이건 전왕조인 조위도 개국 초에 실행했던 것이다. 조비는 선양(사실상 찬탈)으로 황제에 올랐지만, 정통성에 자신이 있었는지 퇴위한 헌제 에 대해서도 상당한 예우를 갖춰주고, 유교교육도 대폭 강화했다. 그러나 사회기조 자체가 엄격하고 각박하게 돌아갔기에 이러한 노력은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9] 연의나 민담에선 조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정사에서는 공작위(산양공)를 받고 편안히 살다가 조비보다 8년이나 더 살고 편안히 사망했다.[10] 그러나 조씨도 '조조가 공이 중국을 뒤덮고, 위엄이 사해를 뒤흔드나, 속임수를 숭상하고 계략에 의지하며, 정벌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나, 그의 덕은 품지 않았고 조비, 조예 부자가 참혹하고 지독한 짓을 계속하여, 안으로는 궁실을 일으켰고, 해마다 안정을 얻지 못했으니, 인심을 잃었다.'라는 오나라 마지막 승상 장제의 말처럼 말 그대로 최소한 할 말이 있다 뿐이지 꼭 잘한 건 아니었다.[11] 원소는 자기 생모가 아닌 원가의 정실부인의 3년상을 치르고 곧 이어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미 고인이었던 '호적상' 아버지 원성의 3년상을 이어서 치르면서 6년상이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행했고 이를 통해 얼자라는 태생적 약점을 씻어내고 당대 청류파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12] 심지어는 이전에도 5천이었으니 이전부터 막장이었다는 얘기다.[13] 하지만 조조는 십상시 따위가 감히 손대지 못할 레전드 환관이었던 조등의 손자였기에 손쉽게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탁류파 명사들의 지지를 받았고, 군벌로서 입지를 다질 때에는 원소의 권위에 기대었으며, 본격적으로 자립군벌로서 세력을 확대하고 굳힐 때에는 한 황실의 권위에 의지하였다. 유방이면 몰라도 조조가 자수성가형 군벌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소리. 이 때문에 조조는 견제자가 없는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음에도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였는데, 애초에 조조의 세력에 모인 인사들 자체가 순수하게 조조 개인을 보고 모인 것이 아닌, 한 황실의 수호자 조조를 보고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력을 재편한 이후에야 조비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14] 참고로 아들 하소는 하루에 먹는 데에만 2만 전을 썼다.[15] 이 하증은 후대에도 까임거리라서 소동파는 '나나 하증이나 배부르기는 매한가지' 라며 깠고 이색은 '가난한 시인에게선 시라도 할 줄 안다'라고 깠다.[16] 후한척은 약 23cm, 서진척은 약 24cm였으므로 후한척 또는 서진척을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이후 시대인 동진 시기에는 1척이 약 25cm로, 후대로 갈수록 점점 길어지는 양상을 띠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자#s-4 참조.[17] 예컨대 낙양지가귀의 고사를 만든 좌사의 삼도부에서는 극도로 성대하고 화려한 서진 사회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을 리가 있나. 애당초 삼도부는 서진 시기 이전 , 촉한, 세 나라의 도읍, 즉 , 성도, 건업의 화려함을 그려낸 부로, 구 삼국 세 나라 각각을 대표하는 화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사실상 서진 시기를 다룬다기 보단 그 이전인 삼국시대를 다룬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좌사가 삼도부를 쓰고 완성한 시기는 촉한 멸망 후~나라 멸망 전후, 삼국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시기이다.[18] 검소함을 중시한 공자도 관이오에 대해서 "그 양반 없었으면 우린 오랑캐와 뭐가 달랐겠나?" 라고 평가했을 정도. 그렇다면 오히려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었다는 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만일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우리를 보면 높은 확률로 사치한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옛날 사람들 중 대다수는 지금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는 건 밥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쌀밥은 별로 먹지도 못했다. 삼시세끼를 제대로 챙겨먹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마음껏 먹는 고기, 계란, 우유, 떡, 과자, 밀가루 음식 등은 조선시대에는 어지간한 부자도 쉽게 먹기 힘든 고급품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이전보다 경제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19] 실제로 진서 4권, 혜제편을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20]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21] 그나마 뇌물의 경우엔 후진국에서는 오히려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라도 되는 경우도 있지 이쪽은 노답 그 자체다.[22]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조조는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한 바 있다.[23] 위의 실질적 건국자인 조조는 십상시의 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24]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유전자가 남달랐던 건지 조씨와 하후씨 위주로 구성했는데도 이들의 능력들이 뛰어난 편이라 조예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돌아갔다. 조진, 하후상, 조휴 등..[25] 특히나 당시 이들을 제어해야 할 조방이 어렸음을 감안하면 측근 중심 정치는 결국 제어할 사람이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붕괴되기 쉬운 체제였음을 보여준다.[26]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인망이 좋아서 죽자마자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가남풍의 자작극으로 일부러 사마량과 위관을 총애해 사마위의 어그로를 끈 뒤 사마위에게 몰래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고 한 것이다.[27]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자치통감[28] 호북성 형주시 출토 <이년 서향 호구부> 등.[29] 유소민(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30] 사마염에게 치두구를 바쳤다가 혼쭐난 그 인물 맞다.[31] 태자를 제거한 이상 명분으로는 아주 충실하다. 특히 가남풍에게 다른 자식이 없었으니.[32] 동해왕 사마월이 떡을 줬는데 그걸 먹고 앓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독살이 확실하나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33] 유연의 유씨는 선조 묵특이 한 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 유요가 즉위한 뒤에 조(趙)로 개명한다. 이것을 전조라고 부르고, 여기서 분가한 석씨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부른다.[34]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35] 역사적으로도 통일 제국 중 최약체인 송나라가 당나라보다 오래 갔으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북송과 남송을 합쳤을 때 이야기지만...[36] 현대에 가장 가까운 사례로 보면, 특전사 사령부를 무력화한 후 똑같은 사태가 나오지 못하게 제도를 개혁한 게 바로 신군부였음을 유념하면 되겠다.[37] 사마씨는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라도 거침없이 폐위시키거나 죽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도 과감히 제거했다.[38] 덕분에 유능한 권력자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권력을 휘두르다 보면 국력이 더 강해지면서 영토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환온이나 유유의 활약이 대표적인 예다. 비수대전 때 효무제가 한 일이 그다지 없음에도 사안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국가의 위기를 넘긴 것도 그 예...[39]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합비에 회수 일대에다 여러 유민 군단들을 더해서 시작한 동진의 첫 출발은 손오가 전성기였을 시절보다도 훨씬 나은 편이었다.[40]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 사계절 출판사[41] 그러나 촉한 정권이 이렇게 남중에 쌓아놓은 기반은 후일 서진-성한-동진이 잘 써먹는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42] 물론 그렇다고 오나라가 남긴 강남 경제 개발사의 기초를 아주 무시해선 곤란하다.[43] 사실상 진나라는 사마염 이후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황제가 없다.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으며 팔왕의 난에 휩싸여 혼란 속에 죽었다. 진 회제, 진 민제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전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진 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였으며 진 명제 때 황제권을 회복한듯 싶었지만 요절하였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 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지만 효무제가 어이없게 죽고난 후 진 안제와 진 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고 유유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고 이후 진나라 황족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