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토 토라지로
内藤 虎次郎(ないとう とらじろう, 1866년 8월 27일~1934년 6월 26일, 67세)
일본의 동양사학자로, 아키타현(秋田県) 출신이다. 호인 코난(湖南)과 합쳐 '나이토 코난'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자는 헤이케이(炳卿).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함께 2차대전 이전을 대표하는 동양학자로, 전전(戰前)의 야마타이국(邪馬台国) 논쟁과 중국사 시대구분 논쟁으로 학계에서 쿄토학파를 대표한 학자이다.
젊은 시절에는 신문기자였는데, 중국 관련 문제에 있어서 1인자로서 활약하였다. 6번 가량 중국에 방문하였고, 나진옥(羅振玉)과 왕국유(王国維) 등 청말의 학자, 웅희령(熊希齢) 등 중화민국의 정치가 등과 교유하였다.
1907년에 쿄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의 동양사학강좌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후로 쿄토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카노 나오키(狩野 直喜), 쿠와바라 지츠조(桑原 隲蔵) 등과 함께 동양사를 담당·지도하여 쿄토학파를 육성하였다. 중국학과 동양사학에서의 권위자로서, 제국학사원회원·동방문화학원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독특한 문화사관에 기초하여 중국사의 시대구분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과 송 사이에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당송변혁론'을 주장하여 그두 왕조 사이를 구분지었고, 진한시대를 상고로, 후한부터 서진 사이를 제1차 과도기로,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 중기까지를 중세로, 당 후기부터 오대십국시대를 제2차 과도기로 설정하였다.
야마타이국 논쟁에서는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야마타이국에 큐슈(九州)에 있었다고 주장한대 비해, 그는 키나이에 있었다고 주장하여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다. 시라토리는 "동쪽의 시라토리 구라키치, 서쪽의 나이토 코난", "실증학파의 나이토 코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풍을 이어받아 교토학파를 성장시켰던 사람이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이다.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들어있는 고문 명단 중 일부. 기간은 1925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934년까지였다.
일본의 동양사학자로, 아키타현(秋田県) 출신이다. 호인 코난(湖南)과 합쳐 '나이토 코난'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자는 헤이케이(炳卿).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함께 2차대전 이전을 대표하는 동양학자로, 전전(戰前)의 야마타이국(邪馬台国) 논쟁과 중국사 시대구분 논쟁으로 학계에서 쿄토학파를 대표한 학자이다.
젊은 시절에는 신문기자였는데, 중국 관련 문제에 있어서 1인자로서 활약하였다. 6번 가량 중국에 방문하였고, 나진옥(羅振玉)과 왕국유(王国維) 등 청말의 학자, 웅희령(熊希齢) 등 중화민국의 정치가 등과 교유하였다.
1907년에 쿄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의 동양사학강좌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후로 쿄토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카노 나오키(狩野 直喜), 쿠와바라 지츠조(桑原 隲蔵) 등과 함께 동양사를 담당·지도하여 쿄토학파를 육성하였다. 중국학과 동양사학에서의 권위자로서, 제국학사원회원·동방문화학원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독특한 문화사관에 기초하여 중국사의 시대구분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과 송 사이에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당송변혁론'을 주장하여 그두 왕조 사이를 구분지었고, 진한시대를 상고로, 후한부터 서진 사이를 제1차 과도기로,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 중기까지를 중세로, 당 후기부터 오대십국시대를 제2차 과도기로 설정하였다.
야마타이국 논쟁에서는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야마타이국에 큐슈(九州)에 있었다고 주장한대 비해, 그는 키나이에 있었다고 주장하여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다. 시라토리는 "동쪽의 시라토리 구라키치, 서쪽의 나이토 코난", "실증학파의 나이토 코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풍을 이어받아 교토학파를 성장시켰던 사람이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이다.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들어있는 고문 명단 중 일부. 기간은 1925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934년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