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타이국
邪馬臺國(邪馬台国(신자체), やまたいこく)
1. 개요
야요이 시대 말기에서 고훈 시대 초반인 2~3세기경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나라.
2. 상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卑弥呼)에 대한 내용과 이후 위 명제 연간인 경초(景初) 2년(238)에 나시메, 츠시고리 등을 사신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야마타이국이 중국에 조공한 내용 등의 기록이 나온다.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왜(倭)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합의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를 공동으로 여왕으로 옹립하여(共立) 나라들 사이의 분쟁을 수습하게 했고 야마타이국은 휘하에 30여 개 정도의 작은 나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삼국지 위서에서 말하는 나라(國)란 현대의 국가개념보다는 한국사의 성읍국가에 가까운 일종의 도시국가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즉 이 당시의 야마타이국은 일본열도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연합한 연맹체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중국 역사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야마타이국이 정작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 황실에서는 만세일계를 따지기 때문이다.
3. 위치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규슈 지역설과 긴키 지역설이 대립 중에 있다.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학자들은 규슈 지역설을 주장하고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학자들은 긴키 지역설을 주장한다. 이는 명문대학 사학과들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설은 규슈가 초기 야요이 시대의 중심지였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왜국으로 가는 경로가 구야한국에서 규슈에 도착할 때까지 3,000리인 반면 규슈에서 움직인 거리는 2,000리[1] 에 불과하므로, 규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방향도 남쪽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거리는 틀릴 수 있더라도 단순히 태양만 보면 알 수 있는 동쪽과 남쪽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규슈에서는 한 대의 거울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거울이 종교적 용도로 세습되어 사용된 것으로 제작 연대보다 오랜 기간 뒤에 매장되어 일어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긴키 지역설에서는 '야마타이(邪馬臺)'가 긴키 중심의 '야마토 왕권'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긴키 지역에서 발굴된 위나라의 삼각연신수경[2] 등으로 뒷받침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 나오는 야마타이국이 조공하여 얻어온 거울은 당연히 위나라의 거울이었으므로 이 유물이 바로 그것이라는 내용이다. 한편 위서 동이전은 김해에서 대마도로 가는 경로를 '동남쪽'이 아닌 단순한 '남쪽'으로 기록하는 등 동남향이 남향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맞춰 방향을 교정하면 왜국으로 가는 경로는 남쪽이 아닌 세토 내해를 거치는 동남향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 긴키 지역(오사카, 나라 부근)에서 야마타이국의 시대에 해당되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고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이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의 무덤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규슈 지역설을 흔드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다만 일본 궁내청에서는 하시하카 고분이 10대 스진 덴노의 선조로 7대인 고레이 덴노의 둘째 딸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倭迹迹日百襲媛命)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데 고레이 덴노부터 카이카 덴노(9대)까지의 시호는 '''야마토네코'''로 이 야마토네코라는 시호는 고레이 덴노가 재위했다고 하는 시절[3] 보다 후대에 '덴노'의 호칭이 확립되면서 생겨난 시호이기 때문에 야마토네코가 시호로 들어가는 이들은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정설이라, 고레이 덴노의 딸인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도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3.1. 야마타이국 위치
히미코가 여왕으로 있었던 야마타이국(사마대국 또는 사마일국, 邪馬臺/壹国, '臺'의 경우 やまたいこく)에 대해서는 규슈 지역설과 긴키 지역설이 대립 중에 있다.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학자들은 규슈 지역설을 주장하고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학자들은 긴키 지역설을 주장한다. 이는 명문대학 사학과들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설과 긴키 지역설은 에도 시대부터 히미코 관련 기록이 야마토 왕가를 기록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얽혀 아라이 하쿠세키와 국학자들 등이 열심히 싸우던 주제 중의 하나였다.
규슈 지역설은 규슈가 초기 야요이 시대의 중심지였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왜국으로 가는 경로가 한반도의 구야한국에서 규슈에 도착할 때까지 3,000리인 반면 규슈에서 움직인 거리는 2,000리[4] 에 불과하므로, 규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방향도 남쪽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거리는 틀릴 수 있더라도 단순히 태양만 보면 알 수 있는 동쪽과 남쪽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규슈에서는 한 대의 거울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거울이 종교적 용도로 세습되어 사용된 것으로 제작 연대보다 오랜 기간 뒤에 매장되어 일어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긴키 지역설에서는 '야마타이(邪馬臺)'가 긴키 중심의 '야마토'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긴키 지역에서 발굴된 위나라의 삼각연신수경[5] 등으로 뒷받침된다. 히미코가 얻어온 거울은 어디까지나 위나라의 거울이었으므로 이것이 히미코가 조공하여 얻어온 거울이라는 것이다. 한편 삼국지 동이전은 김해에서 대마도로 가는 경로를 '동남쪽'이 아닌 단순한 '남쪽'으로 기록하는 등 동남향이 남향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맞춰 방향을 교정하면 왜국으로 가는 경로는 남쪽이 아닌 세토 내해를 거치는 동남향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 긴키 지역(오사카, 나라 부근)에서 히미코의 시기에 해당되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어 규슈 지역설을 흔드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하지만 거울의 경우에는 야마타이국에서 다른 국가에 선물로 주거나 전쟁등으로 탈취당했을 가능성도 있고,긴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도시 유적도 야마타이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일 가능성도 있다. '''주의할 점이 야마타이국이 당시 왜 지역의 유열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오히려 당시 한반도나 중국과 교류하기위해서는 긴키 지역보다는 규슈지역이 지리상 훨씬 유리했다는 점이다.[6]
4. 야마토 왕권과의 관계
야마타이국 긴키설의 경우 야마타이국이 고훈 시대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의 기원이라 보고 야마타이(邪馬壹)라는 명칭 자체도 야마토를 음역한 것으로 본다. 야마타이국 규슈설의 경우 중국 사서의 邪馬壹라는 명칭을 읽는 방법이 야마타이가 아닌 다른 발음일 수도 있다고 보고 규슈에 존재한 邪馬壹國과 긴키의 야마토 왕권을 서로 다른 별개의 나라라고 주장하며 긴키의 야마토 왕권(야마토 조정)이 규슈의 邪馬壹國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정복한것으로 본다.
이 두 개 설을 절충하여 야마타이국이 원래 규슈에 있었으나 나중에 긴키로 이동하여 야마토 왕권이 되었다는 야마타이국 동천설이란 학설도 있다(...). 사실 중심지 이동설은 한국사에서도 가야 같은 데서 고고학적 근거가 조금만 애매하면 한 번씩 거쳐갈 정도로 전가의 보도로 써먹는 가설이라 그리 특별할 것도 아니다. 당장 고조선도 중심지 이동설이 정설이다.
5. 역대 국왕
[1] 육로 700리, 이외에 수로 30일/수로 30일과 육로 30일에 걸쳐 1,300리[2] 삼각형 무늬와 신, 짐승 등의 얼굴을 그린 금속제 거울.[3] 이때는 '''타라시'''라는 시호가 들어갔는데, 6대 고안 덴노와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의 섭정)까지의 시호에 타라시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는 10대 스진 덴노의 '''이리히코'''계와 15대 오진 덴노~18대 한제이 덴노까지의 '''와케'''계가 서로 다른 왕조이며 이를 연결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4] 육로 700리, 이외에 수로 30일/수로 30일과 육로 30일에 걸쳐 1,300리[5] 삼각형 무늬와 신, 짐승 등의 얼굴을 그린 금속제 거울[6] 당장에 신라도 중국으로 갈만한 서해 및 서남해 바다 쪽이 고구려와 백제에 막혀있는 나라의 위치 때문에 중국과 교류하기 어려워 신라가 중국에 첫 사신을 보냈을 때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갔을 정도다. 그리고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야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규슈는 중국까지 바닷길을 방해하는 나라가 딱히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시코쿠, 혼슈는 신라보다도 훨씬 더 멀다.[7] 중국의 봉호.[8] 후한서에 따르면 환제(후한)에서 영제(후한)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후한 말에 왜국에 대란이 있었고 이어 히미코가 즉위하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