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조선시대)

 


1. 개요
2. 생애
3. 평판
4. 여담


1. 개요


남간 (1400 ~ 1440)은 조선시대 세종조의 문신이다. 할아버지는 개국1등공신 영의정부사 남재이며 종조(작은할아버지)는 남은, 외할어버지는 참의 방순, 아버지는 남경문 [1] 큰 형은 좌의정 남지, 동생은 부마도위 의산군 남휘이다.
세종조에 등과하여 주로 대간의 업무를 맡았으며 예문직제학에 이르러 지사간원사를 제수받았으나 신병으로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사헌이 추증되었다.

2. 생애


1419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형조좌랑 [2] 이 되고 1424년에는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427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좌정언 [3] 이 되었다.
1430년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어 공법(貢法) 제정에 관여, 전품(田品)을 9등으로 구분하여 징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1432년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해 바로 좌헌납 [4] 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1433년에는 이조정랑 [5], 1435년에는 사인 [6], 1436년 사헌부 장령 [7] 을 지내고 1439년 예문관직제학 [8] 에 올랐다.
1440년(세종22년) 지사간원사 [9] 에 제수되었으며 이때 병이 심해 세종에 상언하여 사직하였고 얼마 후 졸 하였다.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남간(南簡)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한열(寒熱)의 병을 앓아 수십 일 휴가 중에 있는데 신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제수하였으나, 침면(沈綿)하여 낫지 않고 병 뿌리가 날마다 깊어져서 회복할 기한이 없어 직사를 비우고 폐하니, 신의 직책을 면하여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병이 이렇게 심한 줄은 알지 못하였다."

하고, 이조(吏曹)에 내리었다. 간(簡)이 사람된 것이 청렴 정직하고 단아 성실하여 바른 것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으니, 제배들이 그 절행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간은 언제든지 풍헌(風憲)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2년 (1440년) 5월 20일 신유 1번째기사


3. 평판


청렴하고 품행이 단정하기로 이름이 높아 실록에서
'''남간이 사람됨이 청렴정직하고 단아하고 성실하며 바른것을 지키고 아첨하지 아니하니 모든 사람이 그 절행에 탄복하였다. 남간은 언제든지 풍헌 [10] 에 있어야 한다''' 라 평했다.

4. 여담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자주 등장 (25건) 하며 풍헌에 있어야 한다는 실록의 평 처럼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대간(대관/간관)의 직을 역임했다. 그의 형 남지 도 사헌부 감찰부터 대사헌까지 모든 직을 역임하고 대언(승지)의 직을 두루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두 형제 모두 세종의 간관으로서 활동하며 총애를 받았다.
형과 더불어 남간도 청요직 (이조정랑, 대간)을 거치며 예문직제학, 지사간원사(훗날의 사간)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11]
형 남지가 세종,문종조에 삼공(정승)의 자리에 올라 선배였던 김종서의 시기를 받기도 했는데 오히려 아우였던 남간은 도대평의 일로 사직상소를 올려 세종의 처분을 기다릴 때 좌대언으로 있던 김종서가 상언하여 변호를 해 준 인연이 있다.
[1] 병조의랑 역임, 영의정부사 추증, 요절[2] 정6품[3] 사간원의 정6품관직[4] 사간원의 정5품관직[5] 청요직[6] 의정부 정4품 관직[7]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장령을 포함한 대간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직무가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직배(直拜)하거나 승문원·성균관·홍문관 등을 거친 자들이 임명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령(掌令))] [8] 조선초기 정3품(당하) 관직으로 주로 승정원의 지신사(후의 도승지)가 겸임하였다[9] 조선초기 사간원의 종3품 관직. 성종조에 사간으로 개칭[10] 풍기(風氣)를 바로잡고, 관리의 정사청탁(正邪淸濁)을 감찰 규탄하는 직임(職任)[11] 형인 남지도 10년후에 풍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