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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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창리에 있는 남은의 묘.
1. 개요
남은(南誾, 1354년~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 토벌과 신진 사대부로 활동하였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 개국에 공을 세웠다.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뒤 의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호(號) 나 자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1]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행촌 이암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 형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이다. 남재, 남은 형제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추대하는 계략을 만든 책사로 보이며 남은의 경우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했으나 바로 태종에 의해 복권되어 태조실에 형과 함께 배향된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 이방석의 후사를 직접 부탁하고 그와 정적이 되어버린 태종 이방원조차 그의 사후 그를 그리워하고 정도전과는 달리 개국의 공은 모두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라고 하며 복권시켜 주는 등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떠나 태조 및 태종 부자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2. 일대기
2.1. 우왕 시절
남은은 공민왕(恭愍王) 3년인 1354년에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南乙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지만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렸을때 부터 기이한 계책을 좋아했으며, 천성이 호탕하고 자유분방 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후 벼슬에 나서 1374년에 성균시(成均試) 과거에 합격했고, 황산대첩(荒山大捷)이 있었던 우왕(禑王) 6년의 1380년에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었다. 이는 사직을 관리하는 일인데, 이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아져 나라에서는 곤란을 겪고 있었고, 또 삼척군(三陟郡)이 자주 왜구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은은 스스로 왜구가 자주 쳐들어오는 삼척군의 군수를 맡겠다고 자처했고, 고려 조정에서는 남은을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로 임명했다. 당시에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침입이 잦아지며 무장들이 조정의 중추에서 힘을 쓰고 유생들이 별다른 힘이 없어, 유생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왜구와의 싸움에 참전하거나 힘을 가진 무장의 빈객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2] 남은 역시 그러한 케이스 중에 하나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전혀 다른 군사의 일을 보게 된 남은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남은이 삼척군에 도착할 바로 그 무렵 왜구의 공격이 있었다. 그러자 남은은 '''도착하자마자 10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뛰쳐나갔고''' 이 기병들이 돌격하자 왜구들은 달아났다.
이 일이 위에서 꽤 좋게 평가되었고, 고려 조정에서는 지방에 보낸 남은을 다시 불러들여 사복정(司僕正)으로 임명했다. 이후로는 한동안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정도전이나 조준(趙浚) 등이 이성계와 정치적 친분 관계를 이루고 있었을때 남은 역시 그러한 행렬에 합류한 듯 보인다.[3]
1388년 드디어 2차 요동공격이 시행되고, 고려군이 위화도(威化島)까지 진군하게 되자 남은 역시 군대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 위화도까지 동행했다. 알던 왕명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아 돌아가고 싶은 상황에서 누군가가 회군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여 회군의 논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때 남은은 조인옥(趙仁沃) 등과 함께 회군하자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회군에 필요한 명분과 여론을 만들어주는 공을 세웠다.[4] 이후에 위화도 회군이 실제로 벌어지고 나자, 이때의 성과로 남은은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남은은 아예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조정을 갈아엎어버리고 난 다음에 '''이성계를 왕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회군 당시에는 입도 뻥끗 하지 않다가, 회군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에는 속내에 가지고 있는 계획을 미래의 태종. 이방원에게 털어놓았다. 훗날 이방원이 남은을 척살하게 되는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한 이야기. 우선 이방원은 조용히 하라면서 괜히 입을 열지 말라는 태도를 취했다. 어차피 이성계 세력이 힘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중에 이르면 왕위에 오르는것은 기정사실일텐데, 굳이 미리 입방정을 떨어 여론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이방원 역시 이러한 점을 생각한 듯 하다.
2.2. 공양왕 시기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 역시 폐위될 무렵까지 남은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공양왕(恭讓王) 즉위 이후 무진회군공신들이 책봉되자 회군공신 중에 하나였던 남은 역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토지와 녹권을 하사받음은 물론,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겸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되었다가 개성윤(開城尹)으로 승진, 여기서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는 등 고속 출세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라고 올려놓은 것이 공양왕이었는데, 의외로 공양왕이 정몽주(鄭夢周)와 협력하면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꽤 저항이 있고 이성계에 대한 공격도 들어오자, 진심이라기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일에 가까웠겠지만 이성계 역시 '''"아놔 다 때려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치 공세나 피하자."''' 고 할 정도였다. 이때 남은은 정도전, 조인옥과 함께 이성계를 좋게 좋게 설득 시켰다.
그런데 이 말이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에게는 정 반대로 전달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를 조종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 고 전해졌고, 이 말을 들은 강씨는 이성계를 만나 "정도전이나 남은이 하는 짓을 못 믿겠다." 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를 해명했고, 그 말을 들은 강씨는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에게 '''"정도전하고 남은 등은 우리 남편이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헛소리 하지 말아라!"'''라고 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 무렵에는 가히 최고 측근 중 한 사람으로써 이성계의 신임을 듬뿍 받은듯.
공양왕의 저항을 계속 방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 무렵 남은은 직접 총대를 메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괜히 옆에서 부추기는 애들 말 듣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라는 정도겠지만 영 반응은 좋지 못했고, 급기야 이성계 일파의 핵심 중 한 사람인 정도전 마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는 상황이 되었다. 남은은 나름대로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본인이 앞서 올린 상소 때문에 공격을 받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해버렸다. 이후 간관 김진양(金震陽)의 탄핵을 받아 '''아예 삭탈관직 되고 유배행을 받았다가''' 형세가 호전 되고 정몽주가 살해되면서 곧바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복직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정몽주 일파마저 끝장나고 난 뒤, 남은은 본격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여론 몰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 위화도 회군 이후에 말을 맞춘 이방원등과 더불어 여론의 추이와 이성계의 눈치를 살피며 정도전, 조준, 조인옥, 조박(趙璞) 등 52명을 끌어들여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준비했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하고 누구를 왕위에 올리려 하느냐고 화를 내었지만, 남은은 '''"다 우리가 현명한 임금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며 결국 공양왕을 폐위 시켜 버렸다.
마침내 공양왕이 정식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을때 이를 선포하는 교지를 읽은 사람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남은이었다. 공양왕이 폐위 되어 힘업이 걸어나올때, 남은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공양왕은 힘없이 이렇게 대답했다.“우현보(禹玄寶) 부자는 신우를 맞이하려고 모의하였으며, 김종연과 일당이 되어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신(大臣)과 성헌(省憲)들이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 우현보 부자를 치죄하라고 청했으나 인척이라는 이유로 우유부단하셨으니, 5백 년 우리나라의 왕업이 우씨의 생사에 달려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옛날 상나라의 왕인 태갑(太甲)은 욕심과 방종으로 법도와 예의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이윤(伊尹)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았으나 얼마 후에 태갑이 인의(仁義)로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맞아다가 성왕(成王)과 탕왕(湯王) 같은 왕업을 잇게 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개과천선하시기만 하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복위될 것입니다."
이후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들과 이지란(李之蘭), 조영규(趙英珪) 등의 신흥 무인세력들은 모조리 모여,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권유하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상 대세를 따른 대소신료들이 모조리 모인 행차라 엄청난 행렬이었는데, 유독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고려의 종말 때문에 슬퍼하며 기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남은은 그게 고까워보였는지, '''민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의리를 생각하면 죽일 수 없다." 는 이방원의 말 과 이를 반대하는 조준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다."'나는 본디 너희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억지로 왕위에 올렸다. 게다가 내가 불민하여 일의 기미를 몰랐으니 어찌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어긋남이 없었겠는가? 우씨가 내 원수가 되었구나!"
2.3. 조선 건국 이후
이제 바야흐로 개국공신이 된 남은은 거칠 것이 없었다. 개국 이후 곧바로 좌명 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의령군(宜寧君)이 된 남은은 자신의 위치도 위치지만, 당시 실력이 컸던 정도전 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몽주 일파가 숙청당할 당시 이성계는 비교적 온건하게 대하려고 했는데, 어쨌든 정몽주 세력을 강경하게 처벌은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죽이기는 싫었기에 곤장을 치는 정도에 그치려고 했다. 곤장을 맞는 형벌도 굉장히 큰 편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것.
이후 이성계를 계속 수행하던 남은은 1393년에는 느닷없이 이지란 등과 함께 경상도에서 왜구를 방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한양 천도 준비에서도 활약했다.[6]
1395년에 남은은 부친상을 당했는데, 일반적이라면 벼슬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뤄야 하겠지만 이성계는 남은을 기복(起復)시켜 계속 벼슬을 가지고 일을 보게 했다.
이때까지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은 비교적 한 세트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헌데 정도전이 마침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1397년부터는 이러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은의 경우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했던 반면에, 조준 등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것.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에게 군사를 출병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준은 병중에서도 일어나서 나타나 '''"사대의 예로써는 말할것도 없고, 사실 까놓고 이해관계로 놓고 말하더라도 명나라의 위세가 개쩌는데 무슨 공격임?"''' 이라고 말했고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기 얼마 전에는 '''"천도가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노역 등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있는 마당에 걔네들 요동으로 끌고 들어가면 퍽이나 좋다고 호응해주겠다?"'''하고 반대하는 의지를 보인다.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조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는데, 남은은 화가 나서 조준에게 '''"댁들 같은 작자들하곤 큰일을 논할 수 없다."''' 고 디스를 했다. 이때부터 남은은 조준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성계 앞에서 조준을 험담하기도 했다.
한편 요동 공격 문제에서 정도전과 함께한 남은은 사병 혁파의 문제에서도 정도전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이성계에게 '''"왕이 사병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처럼 왕이 될 수 있었으며, 나 같은 사람도 어떻게 이런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앞으로 그런 일이 더 안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병을 혁파해서 관군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다[7] .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남은에게 따라 세자 이방석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결국 무인정사 1차 왕자의 난 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과정도 유별나다.
정도전과 남은, 그 외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남은의 첩의 집에서 자주 만나며 여러 계획을 세우고 술을 마셨는데, 비록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만 먼저 이성계의 병세를 핑계로 여러 왕자들을 불러 들였고, 속셈을 눈치챈 이방원이 그들을 기습했다고 한다.
이방원 등이 기습하여 공격을 가했을때 정도전 등이 머물고 있던 곳이 남은의 첩의 집이었다. 당시 시간은 꽤 늦은 시간이라 다른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정도전과 남은 등만 등불을 켜놓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기습을 당해 완전히 뒤집어져 정도전 등은 도망치다 죽었다.
그런데 남은은 하경(河景)과 최운(崔沄)이라는 수행원을 데리고 '''도주에 성공했다.'''
남은은 도주에 성공하여 성 밖으로 빠져나온뒤에 잠시 숨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일단 지방이건 어디건 도주를 해서 목숨이나 부지하는게 가장 나은 판단이었겠지만, 남은은 도주에 성공하고도 '''알아서 감옥으로 출두하였다.''' 그때 이유가 걸작인데,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죽었지만 나는 미움 받을 짓을 안했으니 괜찮다"''' 는 것. 결국 남은은 이를 만류하는 수행원들의 반대도 뿌리치고 나서 '''스스로 감옥으로 가다가 참형을 당했다.''' 이방원은 남은을 끝까지 모시던 하경과 최운은 충성스럽다고 하면서 처벌을 하진 않고 발탁해서 임용을 했다.[8]
태종 이방원에 대한 남은의 평이 실록에 남아있다.남은은 도망하여 성(城)의 수문(水門)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으니, 최운(崔沄)·하경(河景)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巡軍獄)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에 스스로 순군문(巡軍門)밖에 이르렀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또한 태종의 남은에 대한 평도 실록 내내 후하다남은(南誾)이 매양 태종(太宗)을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
하였다.
태종실록 총서
이와 대비되는 정도전에 대한 태종의 평.'''"이씨(李氏)가 개국(開國)한 공(功)은 오로지 조준(趙浚)과 남은(南誾)에게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언사(言辭)를 잘하여 공신(功臣)의 열(列)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功臣)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功)으로 논하면 마땅히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父王)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몽주(夢周)이고, 하나는 도전(道傳)이었다. 몽주는 왕씨(王氏)의 말년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도전은 부왕(父王)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중략)
"태상전께서 계룡산(鷄龍山)의 터를 보고 돌아오실 때에 내가 남은의 장막(帳幕)에 들어가니, 은(誾)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장막에 들어오지 마시오.’ 하기에, 내가 드디어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었다. 이때에 태상전께서 세자(世子)를 남은에게 부탁하시었다."
하였다. 숙번이 말하기를,
"근자에 남재(南在)를 만났는데, 재(在)가 말하기를, ‘태상전께서 세자를 은에게 부탁하셨으면, 은(誾)의 죽음은 마땅하지마는, 진실로 부탁하신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은(誾)은 곧은 사람이어서 나이 어린 후사(後嗣)[六尺之孤]를 부탁할 만하기 때문에 부탁한 것이다."'''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5일 (1403년)
임금이 남재를 불러 말하였다.
"개국(開國)에 대한 일을 경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이종학(李種學) 등의 일을 어째서 모르는가? 임신년 이전의 일은 내가 모두 알지마는, 그 뒤는 나를 꺼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동북면(東北面)에 출사(出使)하였었다. 그런데 경이 어째서 모른다고 하는가?"
남재가 대답하였다.
"임신 연간의 일은 신이 그때 대언(代言)이었으니, 어찌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이 일을 알았다면 어찌 이미 죽은 아우를 위해서라도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개국의 공은 남은(南誾)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고, 고 황제(高皇帝)에게 득죄(得罪)함에 이르러서는 굳이 피하고 가지 않고 사(私)를 끼고 임금을 속이었고, 흉포(凶暴)한 짓을 자행하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함부로 죽이어 그 입을 멸하였으니, 죄가 공(功)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田民)을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일 (1411년)
남은의 형인 남재(南在)의 경우에는 평소에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남은과 뜻이 같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러한 점이 인정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9] 동생이었던 남지(南贄)는 화를 피하지 못하고 잡혀서 참수형을 당했다.[10]명하기를,
"정도전(鄭道傳)·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은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남은(南誾)은 논하지 말라."
하였으니, 남은은 개국의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남을번(남은의 부친)은 4명의 아들들을 두었는데 아들들 중에 장남과 차남이 개국에 공을 세워 장남인 남재와 차남 남은이 개국 1등공신에 이르렀고, 3남 남실은 보문각제학(시호 문의공)에 이르렀으며 4남 남지가 우상절제사로 둘째 형 남은과 뜻을 같이 하다가 무인정사 때 살해당했다.
태종 이방원은 그의 삼족을 멸하지 않고 자식들도 그대로 살려두었다. 그의 차남 남경우는 판중추원사, 병조판서에 이르고 봉조하가 된후 시호 [11] 까지 받았다. 태종이 남은을 마음속으로는 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또하나의 방증.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근일에 유사(攸司)에서 수교(受敎)하였는데, 난신(亂臣)의 자손은 서용(敍用)을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난적(亂賊)의 당에 엄하게 하고 후인을 경계한 것입니다. 간절히 보건대, 난신 남은(南誾)·이근(李懃)·박위(朴葳)·변남룡(卞南龍)·심효생(沈孝生)·유만수(柳曼殊)의 아들이 현달한 벼슬을 두루 거치어 안팎에 퍼져 있으니, 심히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무인년(戊寅年) 이후부터 난신의 자손은 그 벼슬을 파면하소서."
임금이 보고,
'"'''남은은 섬기던 이에게 충성하였으니, 어찌 난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왕규(王珪)·위징(魏徵)을 썼으니, 지금 말한 것이 심히 무리하다. 너희들이 혹은 알지 못한 것이니, 도리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하고,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빨리 이 소(疏)를 봉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 15년 8월 20일
태상왕 (태종) 이 변계량·조말생·이지강·김익정에게 묻기를,
"고려의 시조(始祖)에게 배향(配享)된 공신(功臣)은 모두 6명인데, 지금 우리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은 다만 4인뿐이다. 공이 있는 사람을 의논하여 더 배향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나라를 세울 때에 공이 크고 작은 것은, 내가 다 알고 있다. 남은(南誾)은 밖에서 주창(主倡)하였고, 이제(李濟)는 안에서 도왔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내가 예전에 남은·이제·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앉았었는데, 남은이 밖으로 나간 후에, 인옥이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것은 이 사람의 힘입니다. ’라고 하였다.''' 남은과 이제가 공이 큼이 이와 같은데도 태조에게 배향(配享)되지 않으니, 하'''늘에 계신 태조의 혼령이 어찌 그들을 배향시키고 싶지 않겠느냐. 후에는 비록 죄가 있지마는, 공은 폐할 수 없다.'''"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1월 7일
태상왕(태종)이 유정현·이원·변계량·허조·조말생·이지강·이명덕·김익정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을 의논하니, 유정현 등의 의논은 태상왕의 뜻과 같았다. 이에 김익정을 보내어 박은의 집에 가서 물으니, 박은이 말하기를,
"남은(南誾)은 비록 공이 있으나,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으므로, 지금의 신자(臣子)로서는 함께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태상왕 전하께서는 아주 공변되고 지극히 발라서 공을 생각하여 죄를 용서하며, ‘태조의 하늘에 계신 영(靈)도 또한 〈남은을〉 배향(配享)시키고자 할 것이라. ’고 하니, 홀로 남은만의 영광이 아니라, 전하의 아름다운 명예도 또한 뒷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익정이 돌아와서 아뢰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이 큰 때문이다."
라고 하며, 이에 당나라 태종이 위징(魏徵)113) 을 썼던 일로서 개유(開諭)하였다. 이명덕은 아뢰기를,
"남은은 비록 공이 있지마는, 태조만 섬길 줄 알고 오늘날이 있을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그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배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사사 원망으로써 큰 공을 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남은과 이제(李濟)에게 시호(諡號)를 주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1월 8일
임금이 신궁에 문안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등의 사당(祠堂)에 사제(賜祭)하고, 장차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알렸다. 남은에게는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강의 과감(强毅果敢)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화란(禍亂)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이제에게는 경무(景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큰 계책에 뜻을 둔 것을 경(景)이라 하고, 화란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남은과 이제는 죄를 지어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배향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대궐 안에 머물게 하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남재(南在)에게 내린 교지(敎旨)에,
"대업을 처음 일으키는 임금은 반드시 여러 대(代)만에 나는 현인에게 힘입게 되며, 큰 공을 세우는 신하는 마땅히 무궁한 보답을 누려야 될 것이다. 이는 곧 공변된 의리이며 사사의 은혜는 아니다. 경은 학문이 고금(古今)의 사적을 통달하고, 식견은 기미(幾微)의 일까지 환하게 알았다. 활달한 높은 생각으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원대한 계책을 쌓았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쇠진한 때를 당하여 천명(天命)의 거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공들과 더불어 의논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고 성조(聖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억만년 무궁한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배향할 신하를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卿)이라. ’고 하였다. 지금 봄 제사를 거행함에 있어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특별한 공훈에 보답하니, 상상컨대, 알음이 있거든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남은에게 내리는 교지(敎旨)는,
"천운(天運)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하의 큰 공렬이요, 공을 기록하여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정이다. 경은 영매(英邁)한 자질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략(方略)을 가졌었다. 식견은 정치의 방법을 통달하고, 총명은 기미(幾微)를 환히 알았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잔함을 당하여, 천명이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었다. 큰 계책을 먼저 세워 우리 성조를 추대하여 처음으로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다.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어 무궁한 경사를 계승하였다. 맹부(盟府)002) 에 기재되어 있으니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이로써 경을 올려서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에 종사하게 하여 특별한 훈공에 보답하니,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아아,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嘉尙)히 여겼으므로 포숭(褒崇)을 극진히 하였고, 우리 선왕을 도왔으니 마땅히 길이 보필에 힘쓸 것이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5일
3. 평가
남재와 남은 형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졸기를 보면 대체로 책략을 많이 낸 것으로 보인다.
남재의 졸기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에게서 많이 나왔다 라고 하는 부분이나 남은의 경우 이씨가 건국한 데에는 조준과 남은의 공이다 라고 하는 태종의 말과 개국의 공은 모두 남은에게 있다 라고 태종에게 상언한 조인옥의 말 등 남재, 남은 형제의 조선개국 당시의 활약이 알려진 것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에게 대해 부정적인 평을 내린 태종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당대의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제도, 행정, 법제 등에 대한 틀을 세우는 행정가의 면모가 강하다고 한다면 남재, 남은 형제는 태조/태종 등을 추대하기 위한 책략 (모략) 을 내는 책사의 면모가 강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남재는 태조~세종의 사랑을 받으며 조선조 4명의 임금을 섬기고 영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죽은 후 왕 (세종)이 직접 사저로 문상을 나오는 영예를 누린다. 남은의 경우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하지만 사후 태종으로 부터 직접 복권을 받고 태조 묘정에 배향된다. 또한 태종이 남은을 그리워하는 기사나 남은을 계속 비호해주는 것을 볼 때 당대 태조-태종 부자와 막역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남은이 공양왕에게 강경한 어조의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나 폐위 시키는 모습은 조금 각색이 들어가면 삼국지연의 화흠(華歆)의 축소된 오마주.
아래의 기사를 보더라도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을 태종 이방원과 함께 내는 주체적인 모습이 보이며 그가 주동하여 정도전 등과 모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타 드라마에서 정도전에게 모든 역할을 몰아주다보니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정도전게 집중되지만 실록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 실제 책사의 역할은 남은, 남재 형제가 더 강하다.6월, 공양왕이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南誾)이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 (태종) 에게 알리니, 전하 (태종) 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하 (태종) 가 이에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는데, 남은이 비밀히 평소부터 서로 진심으로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성계 / 이방원 부자하고는 굉장히 가까웠던 사이로 보인다. 같이 술을 마시며 예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데 '''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고 하며, 공격을 받을 일이 있어도 이성계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라 그런걸 묻지도 않았다. 한번은 이성계가 남은과 남은의 아버지인 남을번을 불러 같이 배를 타고 노는데, 늙은 남을번이 술이 거나하게 올라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니 그 모습을 본 이성계는 울컥해서 남은에게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라며 울었을 정도.
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와는 달리 남은의 경우 태종 이방원 혹은 그 일파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남은에 대한 태종과 신료들의 태도는 정도전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호의적인 것으로 실록에 남아있다.
태종조에 태조의 배향공신을 선정할 때 남은이 후보로 올라왔다가 떨어졌는데, 만일 남은이 역적으로 규정되었다면 감히 태종 앞에서 후보에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때는 탈락했지만 세종 즉위 후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과가 없는것은 아니다. 다만 공이 더 크다."'''라고 말하며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배향공신에 추가시켜 준다. 또한 조선 초기 곤장 백 대를 때려 조선 건국을 반대하던 이숭인 일당들을 죽여버린 사건에 대해 태종 시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태종은 정도전, 손흥증, 황거정 등에 대해서 벌을 내리면서도 유독 남은에 대해서는 "개국의 공이 있으니 논하지 말라"라고 넘어가며 죄를 묻지 않았다. 대간에서 수차례나 "남은에 대해서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지만 태종은 끝까지 이를 묵살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문제에 대해 서로 논의했다는 기록이나 위에 제시된 왕자의 난 후 자진출두를 하는 자신감, 나중에 태종이 아예 "'''이럴 때 남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대놓고 그리워했다는 점으로 볼 때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과격한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친화력도 대단했던 모양.
4. 사극
사극에선 정도전의 충실한 동반자의 면모는 그려지는데 반대파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친화력은 그려지지 않아 정도전의 전위대 정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 오백년 - 추동궁 마마에서는 변희봉이 연기했다.[12]
용의 눈물에서는 김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이영후가 열연하였다. 남은은 정도전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데, 이영후는 정도전 역을 맡은 김흥기보다 나이가 더 많다. 또한 형 남재 역을 맡은 손호균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작중에선 매우 열혈스럽고 행동력이 넘치는 인물로 사료에 나오는 남은의 여론몰이와 전위대장 역할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했다. 선날승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이는데 기여하고 공양왕을 무릎 꿇리고 폐위교서를 낭독했으며, 재미로 본 사주를 역모로 튀겨 왕씨 몰살에 앞장섰다. 고려 왕실 입장에선 위진 교체기 가충이 저랬을까 싶은 간신모리배. 정도전이 망설이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이는 일을 독단적으로 실행한다. 문제는 이것이 발각되어 역관광으로 이어졌다는 것... 무사히 도망쳤다가 제발로 출두해 죽은 실록과 달리 여기서는 심효생과 함께 정도전보다 먼저 이방원 앞에서 죽음을 맞는데 위축되지 않고 이방원을 역적 중의 대역적이라며 마구 비난했으나 이방원은 쿨하게 씹고(...) 조온을 시켜 그를 죽인다.[다만]
하지만 실록에서처럼 이방원은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없어서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을 살려주면서 남은의 가족들 역시 살려주라는 명을 내려 삼족이 몰살당하는 일을 면한다.
정도전에서는 임대호가 맡았다. 해당 문서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진선규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