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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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창리에 있는 남은의 묘.
생몰년도
1354 - 1398
이름
남은(南誾)
시호
강무(剛武)
고향
진주(晉州) 의령(宜寧)
1. 개요
2. 일대기
2.1. 우왕 시절
2.2. 공양왕 시기
2.3. 조선 건국 이후
3. 평가
4. 사극


1. 개요


남은(南誾, 1354년~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 토벌과 신진 사대부로 활동하였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 개국에 공을 세웠다.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뒤 의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호(號) 나 자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1]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행촌 이암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 형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이다. 남재, 남은 형제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추대하는 계략을 만든 책사로 보이며 남은의 경우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했으나 바로 태종에 의해 복권되어 태조실에 형과 함께 배향된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 이방석의 후사를 직접 부탁하고 그와 정적이 되어버린 태종 이방원조차 그의 사후 그를 그리워하고 정도전과는 달리 개국의 공은 모두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라고 하며 복권시켜 주는 등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떠나 태조 및 태종 부자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2. 일대기



2.1. 우왕 시절


남은은 공민왕(恭愍王) 3년인 1354년에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南乙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지만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렸을때 부터 기이한 계책을 좋아했으며, 천성이 호탕하고 자유분방 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후 벼슬에 나서 1374년에 성균시(成均試) 과거에 합격했고, 황산대첩(荒山大捷)이 있었던 우왕(禑王) 6년의 1380년에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었다. 이는 사직을 관리하는 일인데, 이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아져 나라에서는 곤란을 겪고 있었고, 또 삼척군(三陟郡)이 자주 왜구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은은 스스로 왜구가 자주 쳐들어오는 삼척군의 군수를 맡겠다고 자처했고, 고려 조정에서는 남은을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로 임명했다. 당시에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침입이 잦아지며 무장들이 조정의 중추에서 힘을 쓰고 유생들이 별다른 힘이 없어, 유생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왜구와의 싸움에 참전하거나 힘을 가진 무장의 빈객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2] 남은 역시 그러한 케이스 중에 하나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전혀 다른 군사의 일을 보게 된 남은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남은이 삼척군에 도착할 바로 그 무렵 왜구의 공격이 있었다. 그러자 남은은 도착하자마자 10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뛰쳐나갔고 이 기병들이 돌격하자 왜구들은 달아났다.
이 일이 위에서 꽤 좋게 평가되었고, 고려 조정에서는 지방에 보낸 남은을 다시 불러들여 사복정(司僕正)으로 임명했다. 이후로는 한동안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정도전이나 조준(趙浚) 등이 이성계와 정치적 친분 관계를 이루고 있었을때 남은 역시 그러한 행렬에 합류한 듯 보인다.[3]
1388년 드디어 2차 요동공격이 시행되고, 고려군이 위화도(威化島)까지 진군하게 되자 남은 역시 군대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 위화도까지 동행했다. 알던 왕명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아 돌아가고 싶은 상황에서 누군가가 회군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여 회군의 논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때 남은은 조인옥(趙仁沃) 등과 함께 회군하자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회군에 필요한 명분과 여론을 만들어주는 공을 세웠다.[4] 이후에 위화도 회군이 실제로 벌어지고 나자, 이때의 성과로 남은은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남은은 아예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조정을 갈아엎어버리고 난 다음에 이성계를 왕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회군 당시에는 입도 뻥끗 하지 않다가, 회군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에는 속내에 가지고 있는 계획을 미래의 태종. 이방원에게 털어놓았다. 훗날 이방원이 남은을 척살하게 되는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한 이야기. 우선 이방원은 조용히 하라면서 괜히 입을 열지 말라는 태도를 취했다. 어차피 이성계 세력이 힘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중에 이르면 왕위에 오르는것은 기정사실일텐데, 굳이 미리 입방정을 떨어 여론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이방원 역시 이러한 점을 생각한 듯 하다.

2.2. 공양왕 시기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 역시 폐위될 무렵까지 남은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공양왕(恭讓王) 즉위 이후 무진회군공신들이 책봉되자 회군공신 중에 하나였던 남은 역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토지와 녹권을 하사받음은 물론,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겸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되었다가 개성윤(開城尹)으로 승진, 여기서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는 등 고속 출세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라고 올려놓은 것이 공양왕이었는데, 의외로 공양왕이 정몽주(鄭夢周)와 협력하면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꽤 저항이 있고 이성계에 대한 공격도 들어오자, 진심이라기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일에 가까웠겠지만 이성계 역시 "아놔 다 때려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치 공세나 피하자." 고 할 정도였다. 이때 남은은 정도전, 조인옥과 함께 이성계를 좋게 좋게 설득 시켰다.
그런데 이 말이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에게는 정 반대로 전달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를 조종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 고 전해졌고, 이 말을 들은 강씨는 이성계를 만나 "정도전이나 남은이 하는 짓을 못 믿겠다." 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를 해명했고, 그 말을 들은 강씨는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에게 "정도전하고 남은 등은 우리 남편이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헛소리 하지 말아라!"라고 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 무렵에는 가히 최고 측근 중 한 사람으로써 이성계의 신임을 듬뿍 받은듯.
공양왕의 저항을 계속 방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 무렵 남은은 직접 총대를 메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언을 물 흐르듯 순순히 좇는 것은 임금의 덕이며,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권유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태도입니다. 옛날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주어 나의 덕을 도우라.’라고 분부하자, 부열이 왕에게 ‘나무를 먹줄에 따라 자르면 반듯해지고, 군주가 신하의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됩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옛날의 군신이 서로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후세의 군주가 어찌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정전(正殿)에 앉아 백관들을 나오게 하여 하늘의 경고와 여덟 가지 일의 폐단에 대하여 자책하신 다음 하교하여 직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직언으로 극간한 자가 한 명이 아니었는데도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시니, 전하께서 마음속으로는 딴 뜻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과 의를 베푸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옛날 가의(賈誼)가 한나라 문제(文帝)에게 ‘통곡할 일이 하나요, 눈물 흘릴 일이 둘이며, 길이 크게 탄식할 것이 셋입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문제(文帝)의 시대는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기강이 확립되어 있었는데도 가의가 이같이 말했는데, 하물며 지금에는 할 말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신은 용렬한데도 불구하고 전하의 큰 은혜를 입고 전하의 후한 녹을 받았으니 보고 들은 것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불충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악한 무리들이 이를 갈며 음해하는 데 따른 재앙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감히 몇 마디 말로 전하의 밝으신 귀를 더럽히려 합니다.
갑인년 이후로부터 충신과 의사가 항상 가짜 성씨에 대해 절치부심하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우의 광태와 망녕됨이 나날이 심해지다가 드디어 무진년에 요동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였으나 장수들이 대의에 따라 회군하여 신우를 퇴위시키고 최영(崔瑩)을 내쳤으며 종실 가운데 어진 이를 세우자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장 조민수(曹敏修)가 영원히 전해질 규범을 무시한 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극력 저지하고 한 사람의 큰 유학자[5]와 모의하여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리니 충신과 의사들의 울분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뒤에 윤승순(尹承順)과 권근(權近)이 가지고 온 천자의 교지에는, ‘고려국의 사정이 복잡한데 그 신하된 자들 가운데 충신과 역적이 뒤섞여 있으며 비록 다른 성을 내세워 왕으로 삼았지만 그 또한 삼한이 대대로 나라를 지켜나갈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공신이 개연히 난을 뿌리 뽑고 나라를 다시 올바르게 만들 뜻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대의를 부르짖고 전하를 추대해 공민왕의 후사로 삼아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하늘에 계시는 조종들의 신령이 밝혀 인도한 것입니다.
역신 변안열은 권근이 황제의 조서를 사사로이 열어보고 밀지를 미리 알게 되자 왕의 외척들과 결탁해 도리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의 명맥을 영원히 끊으려 했습니다. 하마터면 성스러운 천자께서 멸망한 나라를 살려주고 끊어진 명맥을 이어주려는 은혜가 실행될 수 없을뻔한 것입니다. 그들의 역모는 김저와 정득후(鄭得厚)의 진술에서 명백히 드러났으며, 이는 관리와 나라 사람들이 함께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대간들이 글을 번갈아 올려 끈질기게 말씀 올렸던 것입니다. 변안열은 죄를 받았으나 나머지 무리들은 처형을 면하였으니 나라 사람들 가운데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변안열의 음모가 실행되었더라면 전하의 왕업은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김종연은 몰래 간사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악한 짓을 함께 하고 서로 도와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윤이와 이초를 시켜 명나라에 나쁜 소문을 흘렸으며 친왕에게 중국의 군사를 동원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그 결과 천자께서 우리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사신 왕방(王肪)과 조반(趙胖)이 돌아와서 한 증언이 명백한데도 어찌하여 버려두고 국문하지 않으십니까? 사신 정도전과 한상질(韓尙質) 등이 황제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 황제께서는 ‘고려는 제법 땅덩이가 크니 현명한 자도 있고 어리석은 자도 있을 텐데, 식견이 얕기 때문에 저런 소인을 오게 했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런 즉 김종연이 반역을 꾀한 것은 명백하며 애초 모의했던 일당들도 드러났습니다.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하여 그 정황을 국문하여 법의 엄격함을 명백하게 보이신 후 천자께 사정을 아뢰는 것이 옳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은 달리하여 어떤 자는 처형당하고 어떤 자는 벗어나게 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번에 김종연 일당의 계략이 실행되고 천자께서 만 리 밖의 일을 환히 내다보지 못했더라면 우리나라의 백성은 씨도 없이 다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조유의 말은 한 가지인데 어떤 자는 멀리 쫓아 보내고 어떤 자는 가까이 유배보내며, 어떤 경우에는 곤장만 때리고 어떤 경우에는 처형시켜 버리며, 어떤 자는 수도로 되불러 위로까지 했으니 이것은 어떤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지난번에 조유 일당의 계략이 마침내 실행되었더라면 충의로운 사직의 공신들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진년 회군 당시 지용기가,‘친왕의 자손이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과연 왕익부(王益富)의 사건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지용기가 왕익부를 부추겨 몰래 모반을 도모했음이 뚜렷이 드러난 것입니다. 전하께서 왕익부를 죽이고 그 집안까지 멸족시키면서도 지용기를 살려 그의 목을 온전하게 한다면 공정한 형벌의 원칙에서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왕익부가 죽은 것이 죄가 있기 때문이라면, 지용기가 살아 있는 것은 무슨 행운입니까? 지용기가 살아 있는 것이 죄가 없기 때문이라면, 왕익부의 집안은 무슨 죄를 저지른 것입니까? 지난번에 지용기의 계략이 실행되어졌더라면 전하가 나라를 향유하는 것이 꼭 보장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대역 불충한 무리들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법이며 우리나라 신하들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그들을 사사로운 정으로 다루십니까? 관숙(管叔)은 성왕(成王)의 숙부였지만 주공(周公)을 위태롭게 만들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상관안(上官安)은 소제(昭帝)의 장인이었지만 곽광(霍光)을 모해하려다가 멸족 당했습니다. 가령 주공과 곽광이 성왕과 소제로부터 의심을 받았더라면 주나라와 한나라의 역사는 훨씬 짧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는 국법을 고려하지 않고 임시 방편적인 자애만 베풀려하시니 대간은 탄핵하다가 도리어 쫓겨났고, 사악한 무리들은 목숨을 보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임용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충과 불의를 후세 사람들에게 권하고 5백 년을 이어온 조상들의 사직을 망각하는 짓입니다. 이는 하늘이 전하를 아껴 천명을 내린 뜻에 어긋나며, 천자가 왕씨를 다시 왕위에 올린 뜻과 어긋나며, 조종들께서 전하를 도와주시는 뜻과 어긋나며,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전하를 추대한 마음과도 어긋납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하께서 그와 인척 관계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셨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한 말이 공변되다면 변안열·김종연·조유의 무리와 지용기 등을 즉시 헌사에 회부해 그들의 죄를 공명정대히 처리하시고, 그 결과를 내외에 알림으로써 사람과 귀신의 분노를 씻어주고 장차의 난신적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한 때의 마음이지만 옳고 그른 것은 만세에 공변된 것이니 제가 어찌 짧은 생명을 아껴서 만세의 법을 고려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숨김없이 극언하는 까닭은 차라리 전하로부터 죄를 받을지언정 조종으로부터는 죄를 얻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해보면 군자는 떳떳한 부류이므로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으니 구차하게 꾸미거나 변호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을 등용하면 국가를 밝고 창성한 곳으로 만들기 때문에 신하들은 조정에서 화합하고 만물은 들에서 조화를 이루며, 소소(簫韶)가 아홉 번 연주되어 봉황이 와서 춤추게 됩니다. 그러나 소인은 음흉한 부류이므로 그저 아부하고 순종만 하여 옳고 그른 것을 혼동하게 만드니 이들을 등용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이 자꾸 생기고 샘물이 끓어오르며 산과 골짜기가 위치를 바꾸고 철도 없이 서리가 내리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시정(時政)의 득실을 상의하고 고금 정치의 선악을 물으시며, 그와 조용히 담소하시면서 덕성을 함양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모든 일을 행하시며, 법도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예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마십시오. 환관을 끊고 소인을 멀리 하며, 이단을 배척하고 하늘의 이치를 간직하여 사람으로서의 욕심을 없앤다면 정치와 교화를 모두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러러 하늘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재앙이 사라지고 땅의 도가 평안해지며 상벌이 분명해지고 예악이 흥기할 것입니다. 또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바람과 비가 때에 맞게 내릴 것이니, 천명이 더욱 새로워지고 인심이 더욱 따를 것이며 이웃나라도 더욱 사모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말씀드린 바를 심사숙고하소서.”
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괜히 옆에서 부추기는 애들 말 듣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라는 정도겠지만 영 반응은 좋지 못했고, 급기야 이성계 일파의 핵심 중 한 사람인 정도전 마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는 상황이 되었다. 남은은 나름대로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본인이 앞서 올린 상소 때문에 공격을 받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해버렸다. 이후 간관 김진양(金震陽)의 탄핵을 받아 아예 삭탈관직 되고 유배행을 받았다가 형세가 호전 되고 정몽주가 살해되면서 곧바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복직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정몽주 일파마저 끝장나고 난 뒤, 남은은 본격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여론 몰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 위화도 회군 이후에 말을 맞춘 이방원등과 더불어 여론의 추이와 이성계의 눈치를 살피며 정도전, 조준, 조인옥, 조박(趙璞) 등 52명을 끌어들여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준비했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하고 누구를 왕위에 올리려 하느냐고 화를 내었지만, 남은은 "다 우리가 현명한 임금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며 결국 공양왕을 폐위 시켜 버렸다.
마침내 공양왕이 정식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을때 이를 선포하는 교지를 읽은 사람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남은이었다. 공양왕이 폐위 되어 힘업이 걸어나올때, 남은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현보(禹玄寶) 부자는 신우를 맞이하려고 모의하였으며, 김종연과 일당이 되어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신(大臣)과 성헌(省憲)들이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 우현보 부자를 치죄하라고 청했으나 인척이라는 이유로 우유부단하셨으니, 5백 년 우리나라의 왕업이 우씨의 생사에 달려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옛날 상나라의 왕인 태갑(太甲)은 욕심과 방종으로 법도와 예의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이윤(伊尹)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았으나 얼마 후에 태갑이 인의(仁義)로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맞아다가 성왕(成王)과 탕왕(湯王) 같은 왕업을 잇게 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개과천선하시기만 하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복위될 것입니다."

그러자 공양왕은 힘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본디 너희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억지로 왕위에 올렸다. 게다가 내가 불민하여 일의 기미를 몰랐으니 어찌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어긋남이 없었겠는가? 우씨가 내 원수가 되었구나!"

이후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들과 이지란(李之蘭), 조영규(趙英珪) 등의 신흥 무인세력들은 모조리 모여,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권유하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상 대세를 따른 대소신료들이 모조리 모인 행차라 엄청난 행렬이었는데, 유독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고려의 종말 때문에 슬퍼하며 기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남은은 그게 고까워보였는지, 민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의리를 생각하면 죽일 수 없다." 는 이방원의 말 과 이를 반대하는 조준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다.

2.3. 조선 건국 이후


이제 바야흐로 개국공신이 된 남은은 거칠 것이 없었다. 개국 이후 곧바로 좌명 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의령군(宜寧君)이 된 남은은 자신의 위치도 위치지만, 당시 실력이 컸던 정도전 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몽주 일파가 숙청당할 당시 이성계는 비교적 온건하게 대하려고 했는데, 어쨌든 정몽주 세력을 강경하게 처벌은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죽이기는 싫었기에 곤장을 치는 정도에 그치려고 했다. 곤장을 맞는 형벌도 굉장히 큰 편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것.
이후 이성계를 계속 수행하던 남은은 1393년에는 느닷없이 이지란 등과 함께 경상도에서 왜구를 방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한양 천도 준비에서도 활약했다.[6]
1395년에 남은은 부친상을 당했는데, 일반적이라면 벼슬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뤄야 하겠지만 이성계는 남은을 기복(起復)시켜 계속 벼슬을 가지고 일을 보게 했다.
이때까지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은 비교적 한 세트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헌데 정도전이 마침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1397년부터는 이러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은의 경우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했던 반면에, 조준 등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것.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에게 군사를 출병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준은 병중에서도 일어나서 나타나 "사대의 예로써는 말할것도 없고, 사실 까놓고 이해관계로 놓고 말하더라도 명나라의 위세가 개쩌는데 무슨 공격임?" 이라고 말했고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기 얼마 전에는 "천도가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노역 등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있는 마당에 걔네들 요동으로 끌고 들어가면 퍽이나 좋다고 호응해주겠다?"하고 반대하는 의지를 보인다.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조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는데, 남은은 화가 나서 조준에게 "댁들 같은 작자들하곤 큰일을 논할 수 없다." 고 디스를 했다. 이때부터 남은은 조준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성계 앞에서 조준을 험담하기도 했다.
한편 요동 공격 문제에서 정도전과 함께한 남은은 사병 혁파의 문제에서도 정도전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이성계에게 "왕이 사병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처럼 왕이 될 수 있었으며, 나 같은 사람도 어떻게 이런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앞으로 그런 일이 더 안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병을 혁파해서 관군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다[7].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남은에게 따라 세자 이방석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결국 무인정사 1차 왕자의 난 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과정도 유별나다.
정도전과 남은, 그 외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남은의 첩의 집에서 자주 만나며 여러 계획을 세우고 술을 마셨는데, 비록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만 먼저 이성계의 병세를 핑계로 여러 왕자들을 불러 들였고, 속셈을 눈치챈 이방원이 그들을 기습했다고 한다.
이방원 등이 기습하여 공격을 가했을때 정도전 등이 머물고 있던 곳이 남은의 첩의 집이었다. 당시 시간은 꽤 늦은 시간이라 다른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정도전과 남은 등만 등불을 켜놓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기습을 당해 완전히 뒤집어져 정도전 등은 도망치다 죽었다.
그런데 남은은 하경(河景)과 최운(崔沄)이라는 수행원을 데리고 도주에 성공했다.
남은은 도주에 성공하여 성 밖으로 빠져나온뒤에 잠시 숨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일단 지방이건 어디건 도주를 해서 목숨이나 부지하는게 가장 나은 판단이었겠지만, 남은은 도주에 성공하고도 알아서 감옥으로 출두하였다. 그때 이유가 걸작인데,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죽었지만 나는 미움 받을 짓을 안했으니 괜찮다" 는 것. 결국 남은은 이를 만류하는 수행원들의 반대도 뿌리치고 나서 스스로 감옥으로 가다가 참형을 당했다. 이방원은 남은을 끝까지 모시던 하경과 최운은 충성스럽다고 하면서 처벌을 하진 않고 발탁해서 임용을 했다.[8]

남은은 도망하여 성(城)의 수문(水門)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으니, 최운(崔沄)·하경(河景)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巡軍獄)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에 스스로 순군문(巡軍門)밖에 이르렀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태종 이방원에 대한 남은의 평이 실록에 남아있다.

남은(南誾)이 매양 태종(太宗)을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

하였다.

태종실록 총서

또한 태종의 남은에 대한 평도 실록 내내 후하다

"이씨(李氏)가 개국(開國)한 공(功)은 오로지 조준(趙浚)과 남은(南誾)에게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언사(言辭)를 잘하여 공신(功臣)의 열(列)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功臣)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功)으로 논하면 마땅히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父王)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몽주(夢周)이고, 하나는 도전(道傳)이었다. 몽주는 왕씨(王氏)의 말년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도전은 부왕(父王)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중략)

"태상전께서 계룡산(鷄龍山)의 터를 보고 돌아오실 때에 내가 남은의 장막(帳幕)에 들어가니, 은(誾)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장막에 들어오지 마시오.’ 하기에, 내가 드디어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었다. 이때에 태상전께서 세자(世子)를 남은에게 부탁하시었다."

하였다. 숙번이 말하기를,

"근자에 남재(南在)를 만났는데, 재(在)가 말하기를, ‘태상전께서 세자를 은에게 부탁하셨으면, 은(誾)의 죽음은 마땅하지마는, 진실로 부탁하신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은(誾)은 곧은 사람이어서 나이 어린 후사(後嗣)[六尺之孤]를 부탁할 만하기 때문에 부탁한 것이다."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5일 (1403년)

이와 대비되는 정도전에 대한 태종의 평.

임금이 남재를 불러 말하였다.

"개국(開國)에 대한 일을 경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이종학(李種學) 등의 일을 어째서 모르는가? 임신년 이전의 일은 내가 모두 알지마는, 그 뒤는 나를 꺼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동북면(東北面)에 출사(出使)하였었다. 그런데 경이 어째서 모른다고 하는가?"

남재가 대답하였다.

"임신 연간의 일은 신이 그때 대언(代言)이었으니, 어찌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이 일을 알았다면 어찌 이미 죽은 아우를 위해서라도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개국의 공은 남은(南誾)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고, 고 황제(高皇帝)에게 득죄(得罪)함에 이르러서는 굳이 피하고 가지 않고 사(私)를 끼고 임금을 속이었고, 흉포(凶暴)한 짓을 자행하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함부로 죽이어 그 입을 멸하였으니, 죄가 공(功)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田民)을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일 (1411년)

명하기를,

"정도전(鄭道傳)·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은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남은(南誾)은 논하지 말라."

하였으니, 남은은 개국의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남은의 형인 남재(南在)의 경우에는 평소에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남은과 뜻이 같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러한 점이 인정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9] 동생이었던 남지(南贄)는 화를 피하지 못하고 잡혀서 참수형을 당했다.[10]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남을번(남은의 부친)은 4명의 아들들을 두었는데 아들들 중에 장남과 차남이 개국에 공을 세워 장남인 남재와 차남 남은이 개국 1등공신에 이르렀고, 3남 남실은 보문각제학(시호 문의공)에 이르렀으며 4남 남지가 우상절제사로 둘째 형 남은과 뜻을 같이 하다가 무인정사 때 살해당했다.
태종 이방원은 그의 삼족을 멸하지 않고 자식들도 그대로 살려두었다. 그의 차남 남경우는 판중추원사, 병조판서에 이르고 봉조하가 된후 시호 [11]까지 받았다. 태종이 남은을 마음속으로는 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또하나의 방증.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근일에 유사(攸司)에서 수교(受敎)하였는데, 난신(亂臣)의 자손은 서용(敍用)을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난적(亂賊)의 당에 엄하게 하고 후인을 경계한 것입니다. 간절히 보건대, 난신 남은(南誾)·이근(李懃)·박위(朴葳)·변남룡(卞南龍)·심효생(沈孝生)·유만수(柳曼殊)의 아들이 현달한 벼슬을 두루 거치어 안팎에 퍼져 있으니, 심히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무인년(戊寅年) 이후부터 난신의 자손은 그 벼슬을 파면하소서."

임금이 보고,

'"남은은 섬기던 이에게 충성하였으니, 어찌 난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왕규(王珪)·위징(魏徵)을 썼으니, 지금 말한 것이 심히 무리하다. 너희들이 혹은 알지 못한 것이니, 도리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하고,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빨리 이 소(疏)를 봉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 15년 8월 20일

태상왕 (태종) 이 변계량·조말생·이지강·김익정에게 묻기를,

"고려의 시조(始祖)에게 배향(配享)된 공신(功臣)은 모두 6명인데, 지금 우리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은 다만 4인뿐이다. 공이 있는 사람을 의논하여 더 배향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나라를 세울 때에 공이 크고 작은 것은, 내가 다 알고 있다. 남은(南誾)은 밖에서 주창(主倡)하였고, 이제(李濟)는 안에서 도왔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내가 예전에 남은·이제·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앉았었는데, 남은이 밖으로 나간 후에, 인옥이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것은 이 사람의 힘입니다. ’라고 하였다. 남은과 이제가 공이 큼이 이와 같은데도 태조에게 배향(配享)되지 않으니, 하늘에 계신 태조의 혼령이 어찌 그들을 배향시키고 싶지 않겠느냐. 후에는 비록 죄가 있지마는, 공은 폐할 수 없다."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1월 7일

태상왕(태종)이 유정현·이원·변계량·허조·조말생·이지강·이명덕·김익정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을 의논하니, 유정현 등의 의논은 태상왕의 뜻과 같았다. 이에 김익정을 보내어 박은의 집에 가서 물으니, 박은이 말하기를,

"남은(南誾)은 비록 공이 있으나,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으므로, 지금의 신자(臣子)로서는 함께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태상왕 전하께서는 아주 공변되고 지극히 발라서 공을 생각하여 죄를 용서하며, ‘태조의 하늘에 계신 영(靈)도 또한 〈남은을〉 배향(配享)시키고자 할 것이라. ’고 하니, 홀로 남은만의 영광이 아니라, 전하의 아름다운 명예도 또한 뒷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익정이 돌아와서 아뢰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이 큰 때문이다."

라고 하며, 이에 당나라 태종이 위징(魏徵)113) 을 썼던 일로서 개유(開諭)하였다. 이명덕은 아뢰기를,

"남은은 비록 공이 있지마는, 태조만 섬길 줄 알고 오늘날이 있을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그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배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사사 원망으로써 큰 공을 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남은과 이제(李濟)에게 시호(諡號)를 주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1월 8일

임금이 신궁에 문안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등의 사당(祠堂)에 사제(賜祭)하고, 장차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알렸다. 남은에게는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강의 과감(强毅果敢)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화란(禍亂)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이제에게는 경무(景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큰 계책에 뜻을 둔 것을 경(景)이라 하고, 화란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남은과 이제는 죄를 지어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배향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대궐 안에 머물게 하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남재(南在)에게 내린 교지(敎旨)에,

"대업을 처음 일으키는 임금은 반드시 여러 대(代)만에 나는 현인에게 힘입게 되며, 큰 공을 세우는 신하는 마땅히 무궁한 보답을 누려야 될 것이다. 이는 곧 공변된 의리이며 사사의 은혜는 아니다. 경은 학문이 고금(古今)의 사적을 통달하고, 식견은 기미(幾微)의 일까지 환하게 알았다. 활달한 높은 생각으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원대한 계책을 쌓았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쇠진한 때를 당하여 천명(天命)의 거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공들과 더불어 의논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고 성조(聖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억만년 무궁한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배향할 신하를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卿)이라. ’고 하였다. 지금 봄 제사를 거행함에 있어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특별한 공훈에 보답하니, 상상컨대, 알음이 있거든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남은에게 내리는 교지(敎旨)는,

"천운(天運)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하의 큰 공렬이요, 공을 기록하여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정이다. 경은 영매(英邁)한 자질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략(方略)을 가졌었다. 식견은 정치의 방법을 통달하고, 총명은 기미(幾微)를 환히 알았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잔함을 당하여, 천명이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었다. 큰 계책을 먼저 세워 우리 성조를 추대하여 처음으로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다.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어 무궁한 경사를 계승하였다. 맹부(盟府)002) 에 기재되어 있으니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이로써 경을 올려서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에 종사하게 하여 특별한 훈공에 보답하니,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아아,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嘉尙)히 여겼으므로 포숭(褒崇)을 극진히 하였고, 우리 선왕을 도왔으니 마땅히 길이 보필에 힘쓸 것이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5일


3. 평가


남재와 남은 형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졸기를 보면 대체로 책략을 많이 낸 것으로 보인다.
남재의 졸기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에게서 많이 나왔다 라고 하는 부분이나 남은의 경우 이씨가 건국한 데에는 조준과 남은의 공이다 라고 하는 태종의 말과 개국의 공은 모두 남은에게 있다 라고 태종에게 상언한 조인옥의 말 등 남재, 남은 형제의 조선개국 당시의 활약이 알려진 것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에게 대해 부정적인 평을 내린 태종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당대의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제도, 행정, 법제 등에 대한 틀을 세우는 행정가의 면모가 강하다고 한다면 남재, 남은 형제는 태조/태종 등을 추대하기 위한 책략 (모략) 을 내는 책사의 면모가 강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남재는 태조~세종의 사랑을 받으며 조선조 4명의 임금을 섬기고 영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죽은 후 왕 (세종)이 직접 사저로 문상을 나오는 영예를 누린다. 남은의 경우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하지만 사후 태종으로 부터 직접 복권을 받고 태조 묘정에 배향된다. 또한 태종이 남은을 그리워하는 기사나 남은을 계속 비호해주는 것을 볼 때 당대 태조-태종 부자와 막역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남은이 공양왕에게 강경한 어조의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나 폐위 시키는 모습은 조금 각색이 들어가면 삼국지연의 화흠(華歆)의 축소된 오마주.
아래의 기사를 보더라도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을 태종 이방원과 함께 내는 주체적인 모습이 보이며 그가 주동하여 정도전 등과 모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6월, 공양왕이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南誾)이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 (태종) 에게 알리니, 전하 (태종) 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하 (태종) 가 이에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는데, 남은이 비밀히 평소부터 서로 진심으로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

여타 드라마에서 정도전에게 모든 역할을 몰아주다보니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정도전게 집중되지만 실록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 실제 책사의 역할은 남은, 남재 형제가 더 강하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성계 / 이방원 부자하고는 굉장히 가까웠던 사이로 보인다. 같이 술을 마시며 예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데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고 하며, 공격을 받을 일이 있어도 이성계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라 그런걸 묻지도 않았다. 한번은 이성계가 남은과 남은의 아버지인 남을번을 불러 같이 배를 타고 노는데, 늙은 남을번이 술이 거나하게 올라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니 그 모습을 본 이성계는 울컥해서 남은에게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라며 울었을 정도.
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와는 달리 남은의 경우 태종 이방원 혹은 그 일파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남은에 대한 태종과 신료들의 태도는 정도전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호의적인 것으로 실록에 남아있다.
태종조에 태조의 배향공신을 선정할 때 남은이 후보로 올라왔다가 떨어졌는데, 만일 남은이 역적으로 규정되었다면 감히 태종 앞에서 후보에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때는 탈락했지만 세종 즉위 후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과가 없는것은 아니다. 다만 공이 더 크다."라고 말하며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배향공신에 추가시켜 준다. 또한 조선 초기 곤장 백 대를 때려 조선 건국을 반대하던 이숭인 일당들을 죽여버린 사건에 대해 태종 시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태종은 정도전, 손흥증, 황거정 등에 대해서 벌을 내리면서도 유독 남은에 대해서는 "개국의 공이 있으니 논하지 말라"라고 넘어가며 죄를 묻지 않았다. 대간에서 수차례나 "남은에 대해서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지만 태종은 끝까지 이를 묵살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문제에 대해 서로 논의했다는 기록이나 위에 제시된 왕자의 난 후 자진출두를 하는 자신감, 나중에 태종이 아예 "이럴 때 남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대놓고 그리워했다는 점으로 볼 때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과격한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친화력도 대단했던 모양.

4. 사극


사극에선 정도전의 충실한 동반자의 면모는 그려지는데 반대파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친화력은 그려지지 않아 정도전의 전위대 정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 오백년 - 추동궁 마마에서는 변희봉이 연기했다.[12]
용의 눈물에서는 김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이영후가 열연하였다. 남은은 정도전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데, 이영후는 정도전 역을 맡은 김흥기보다 나이가 더 많다. 또한 형 남재 역을 맡은 손호균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작중에선 매우 열혈스럽고 행동력이 넘치는 인물로 사료에 나오는 남은의 여론몰이와 전위대장 역할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했다. 선날승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이는데 기여하고 공양왕을 무릎 꿇리고 폐위교서를 낭독했으며, 재미로 본 사주를 역모로 튀겨 왕씨 몰살에 앞장섰다. 고려 왕실 입장에선 위진 교체기 가충이 저랬을까 싶은 간신모리배. 정도전이 망설이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이는 일을 독단적으로 실행한다. 문제는 이것이 발각되어 역관광으로 이어졌다는 것... 무사히 도망쳤다가 제발로 출두해 죽은 실록과 달리 여기서는 심효생과 함께 정도전보다 먼저 이방원 앞에서 죽음을 맞는데 위축되지 않고 이방원을 역적 중의 대역적이라며 마구 비난했으나 이방원은 쿨하게 씹고(...) 조온을 시켜 그를 죽인다.[다만]
하지만 실록에서처럼 이방원은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없어서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을 살려주면서 남은의 가족들 역시 살려주라는 명을 내려 삼족이 몰살당하는 일을 면한다.
정도전에서는 임대호가 맡았다. 해당 문서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진선규가 연기했다.

[1] 드라마에서 서로 호나 자를 부르는 것과 달리 그냥 이름이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2] 『고려 우왕대 이성계와 정몽주 • 정도전의 정치적 결합』 김당택[3] 유생들이 이성계를 원한만큼 이성계 역시 이러한 유생들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썼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 우왕대 이성계와 정몽주 • 정도전의 정치적 결합』[4] "그는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 갔다가 회군 모의를 주도함으로써 이후 이성계일파의 정권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한남, 「고려왕조의 멸망」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96, 201~202쪽[5] 이색을 말함이다.[6] 이성계는 "사대부들 기반이 여기에 있는데 그렇게 옮기면 사대부들 중에 누가 좋아하겠어?" 하며 운을 떠봤는데, 남은은 "신이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라며 이성계에게 순순히 동의했다.[7] 당연한 소리지만 이후 귀족이나 지방 호족이 소유하던 사병은 조선 3대 태종인 이방원이 혁파해버린다.[8] 근데 사실 남은이 스스로 자진출두를 할 결심을 할 정도로 처신을 잘 했느냐 하면 그렇다. 태조, 태종 부자 모두에게 사랑을 받을 정도였고 철혈군주 태종 이방원조차도 왕이 된 후 '죽이지 말걸 그랬다. 살아 있다면 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9] 이때 남씨 형제들의 어머니가 형제가 모두 죽은 줄 알고 슬퍼하자, 남재가 자신의 수염을 잘라서 어머니에게 보내 생존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10] 사실 이 당시 남재는 이방원 쪽 사람이었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 정종 즉위 직후에는 정안군 이방원을 당장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로 이방원을 추종하였고, 덕분에 이때 참변을 당한 두 동생과는 달리 영의정, 부원군에 봉해지는 등 달리 태종(이방원) 대를 거쳐 세종 대까지 등 천수를 누렸다. 여담이지만 남재는 산학(산술)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남산(南算)'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하며, 바둑의 고수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대감은 왜 바둑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묻자, 남재는 "산 사람은 그 기운이 남아 있어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다 보면 조정에 관한 이야기가 꼭 나오더군. 바둑을 두게 되면 그 꺼려야할 말들(정치 이야기)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바둑을 두는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1] 안호공[12] 후에 정도전을 연기하기도 했다. 관련 영상 [다만] 실록의 기록을 아예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자고 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는 하였다. 정도전이 쿨하게 씹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