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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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13 代》'''
'''忠定王 3年~
世宗 1年'''

'''제13대'''
'''1416.5.25~
1416.11.2'''

-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12대 하륜

'''13대 판의정부사 → 좌의정 남재
(1414 ~ 1415)
'''

14대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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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
5. 서적 오류


1. 개요


남재(南在, 1351 ~ 1419)는 여말선초의 인물로 관향(貫鄕)은 의령, 작위는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본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귀정(龜亭)으로 목은 이색의 문인이다. 동생은 남은(南誾), 아들은 남경문(南景文), 며느리는 참의(參議) 방순(方恂)의 딸 숙녕택주 온양 방씨(溫陽 方氏)이고, 손자는 좌의정을 지낸 남지(南智)와 예문직제학 및 지사간원사를 지낸 남간, 태종의 부마 의산위 남휘 (정선공주의 부군) 이며, 현손은 남이 장군 (남휘의 손자) 이다.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 올랐고, 종묘의 태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2. 생애


조부는 지영광군사 남천로이며 부친은 밀직부사를 지내고 검교시중을 역임한 남을번[1]이고 어머니는 최강(崔茳)의 딸이다. 본명은 남겸(南謙)이다. 이색의 제자로 학문을 배웠으며, 고려조 1371년 진사시에 5등으로 급제하여 좌부대언까지 지냈다.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동생 남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에 힘썼다. 한편 그의 숙부 남을진, 스승 이색, 동문 정몽주 등은 역성혁명에 반대하였다.
1392년 7월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자, 건국 직후 그는 포상을 피하여 지방에 있었는데, 그러나 태조는 사방을 수소문하여 그를 찾았다. 그를 찾아낸 후 이성계는 그가 별탈없이 건강함을 기뻐하여 재(在)라 하였다. 선기무기무양상재!(善其無恙尙在!)라 하고 여기서 따서 지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자(字)를 경지(敬之)라 하였는데, 경은 경군사(敬君賜)라는 뜻으로 태조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표한 것이다. 또한 개국 1등 공신으로 중추원 학사에 대사헌을 겸하게 하여 의성군에 봉했다.
조선왕조실록 남재 졸기에서 이르기를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남재에게서 많이 나왔다 한다. 한국판 화흠으로 불려지는 동생 남은과 더불어 책사로서의 역할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1393년 주문사가 되어 사이가 좋지 않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명나라 태조로부터 3년에 한차례씩 조공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1394년에는 당시 정안군(靖安君)이었던 태종을 따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무도 수행하려 하지 않았던 정안군의 호종을 자청했으며 어느 누구도 정안군을 예로 대하지 않았으나 그만 홀로 정안군을 예로써 대하였다.[2]

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1394년) 6월 1일

1395년 아버지[3] 의 상을 당해 은거하니 동생남은과 함께 기복되어 삼사좌복야에 임용되고 노비변정도감의 판사를 맡았다.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이 졸(卒)하였다. 을번의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의령(宜寧)이요, 영광 군사(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근신하며, 고려조에 벼슬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아들 넷이 있으니 남재(南在)·남은(南誾)·남실(南實)·남지(南贄)이다. 개국 당초에 재와 은이 개국 공신이 되었으므로 검교 시중을 받았다. 향년이 76세이며, 시호(諡號)를 경렬(敬烈)이라 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치렀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1395년) 2월 13일

1396년에 문춘추관 태학사로서 도병마사에 임명되어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정도전 및 그와 친분이 있는 동생 남은과도 거리를 두었는데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도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동생 남은과 달리 태종이 그를 자신의 사가로 보내어 목숨을 구했다. 이후 잠시 의령으로 쫓겨났다가 곧 복귀하였다.

정당 문학(政堂文學) 남재(南在)는 남은의 형이다. 일찍이 명령을 받들어 송악(松嶽)에 도사(禱祀)하다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서 여러 왕자를 알현(謁見)하였으나, 같이 죄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라, 우리 전하(殿下)(태종) 가 말하였다.

'''"남재는 평소에 남은과 마음을 같이하지 아니했으니 연관시켜 미치게 할 수 없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남재(南在)를 의령(宜寧)으로 내쫓았다. 처음에 우리 전하 (태종) 께서 남재를 보전하고자 하여 자기 제택(第宅)에 두게 했었는데, 그 어머니가 남은(南誾)의 난리에 죽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슬피 우니, 남재가 그 수염을 뽑아 어머니에게 보내었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재(在)는 죽지 않았구나."

난리가 평정된 뒤에 어머니를 과주(果州)의 전장(田莊)에서 뵈옵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남은 당여(黨與)의 죄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서, 남재는 두려워하여 미복으로 도망하였으나, 대장군 마천목(馬天牧)이 그를 완산(完山) 노상(路上)에서 만나 그 관아에 구치(拘置)하고, 조정에 와서 알리니, 그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년) 10월 26일

신루(新樓)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가 한경(漢京)에서 와서 시좌(侍坐)391) 하니, 임금이 농담으로 무인년(戊寅年) 가을에 아무도 죄를 논의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남재가 겁을 내어서 도망하였던 상황을 말하기를,

"남은(南誾)의 난(亂)에 경이 유후사(留後司)에서 와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 하여 쩔쩔매고 있었으므로, 내가 사람을 시켜 우리 집에 잡아다가 두게 하였는데, 우리 집에 이르자 지금 세자(世子)를 안고 홀로 대청(大廳)에 앉아서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말하기를, ‘내가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원컨대, 숨을 곳에 들여 주소서.’하니, 정비(靜妃) (훗날의 원경왕후 민씨) 가 말하기를, ‘절대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사건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통지(通知)하겠습니다.’하였다. 남재는 마침내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도망하여 갔는데, 나라에서 그 모양을 그리어 여러 군(郡)·현(縣)에 펴서 물색(物色)하여 이를 구(求)하여, 장차 의령(宜寧)에 부처(付處)하려고 하였다. 남재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걸어서 가다가 저녁에 한 촌사(村舍)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주인 노파가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객(客)의 생긴 모양을 보니, 방금 나라에서 찾는 남 정당(南政堂)과 같습니다.’하니, 남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이처럼 빈천(貧賤)한데, 만약 남 정당(南政堂)이라도 된다면 다행하겠다.’ 하므로, 노파가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마땅히 주관(州官)에 나아가서 이를 고(告)하겠습니다.’하고, 꼭두 새벽에 일어나 보니, 남재가 간 지가 이미 오래였다. 마천목(馬天牧)이 남원(南原)으로 가는 도중(途中)에 만났는데, 남재가 채찍을 때려서 말을 몰므로 마천목이 말에서 내려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였으나, 남재가 돌아보지도 않고 가면서 말하기를, ‘쳇!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하니, 마천목이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정지하소서. 내가 어찌 남 정당(南政堂)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남재가 뒤로 물러서서 바로 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남재인가?’ 하였으나, 마천목이 웃으면서 정지시키니, 남재가 망연(茫然)히 탄식하기를, ‘네가 정말 나의 3세(世) 원수로다.’ 하였다."

하니, 여러 경들이 다투어 이를 말하였다. 남재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허허허’ 할 뿐이었고, 임금도 또한 크게 웃으니, 여러 경들도 모두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1418년) 6월 10일

정종이 즉위하자 정안공(靖安公)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할것을 주장하였다.당시 정안공 이방원(태종) 은 매우 화를 내며 나무랐다고 하나 아무래도 이방원의 최측근인 남재가 일부러 나서서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으로 보인다.[4] 물론 아무리 거리를 두었다 해도 남은의 친형인 만큼 여기서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총대를 매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임금(정종)이 즉위(卽位)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곧 마땅히 정안공(靖安公)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었었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1400년) 1월 28일

1398년 정당문학이 되어 하륜과 함께 정안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의 서연관에 빈객이 되었다.
1403년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 찬성사, 1408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1414년 우의정,의령부원군에 제배되고 감추추관사로 과거를 관장해 권도, 성개 등을 시취햇다.
1415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가 되었으며 141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이던 시절 태종이 충녕대군을 통해 연회를 베풀어 대접케 했는데 모든 공경대부 앞에서 충녕대군에게 차기 보위를 이을 재목임을 넌지시 얘기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는 충녕대군의 반응과 웃음으로 넘긴 태종의 반응이다.[5][6]

충녕 대군(忠寧大君) 이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에게 연향[7]

하였다. 대군이 남재를 그 집에서 연향하는데, 남재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대군에게 이르기를,

"옛날 주상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내가 학문을 권하니, 주상께서 말하기를, ‘왕자는 참여할 데가 없으니 학문은 하여 무엇하겠느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왕의 아들이 누가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마음이 기쁩니다."[8]

하니, 뒤에 임금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과감하다! 그 늙은이가."

하였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12월 30일

조선왕조를 통틀어 3명의 임금을 추대하거나 추대하는 발언을 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을 내고 정종 재위 시에 정안공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대궐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했으며 충녕대군이 사저에서 베푸는 연회에서 공경대부들 앞에서 충녕대군이 차기 보위를 노릴 만하다고 넌지시 얘기를 건네는 등 현재 알려진 책사급인 정도전, 남은, 하륜 등 보다 어찌보면 더 경세에 통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9]
태조가 그의 부친인 남을번을 불러 연회를 했다거나 태종이 재위기간 내내 남재를 아끼고 보호한 측면 그리고 훗날에 그가 죽은 후 세종이 직접 사저로 문상을 와서 조사에서 '''옛 은혜의 교분'''을 언급하는 등 그는 조선 초기 3대 (태조, 태종, 세종)에 걸쳐 총애를 받은 재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형식에 거리김이 없었다고하며 산술에 능하여 별호가 남산(南算)이었다고 한다. 또한 평소에는 말이 없고 바둑을 좋아했는데 주위 사람이 공식 석상과는 달리 말 수가 적은 그에게 연유를 묻자 '쓸 데 없는 말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임금(태조)이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이르러 양원식이 말한 도읍할 만하다는 곳을 보았는데 모두 좋지 못하다고 말하여 그만두고, 장단 나루에 이르러 다락배를 타고 노니, 재상들과 노인들이 모두 헌수(獻壽)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검교 시중 남을번(南乙蕃)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임금이 남은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하고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물을 따라 내려와 아래 여울 가에서 유숙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394년) 8월 16일

남재의 졸기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가 죽었다. 조회와 저자[市]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서 쌀과 콩 각 70섬, 종이 2백 권을 주고 관에서 장사를 비호(庇護)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는데, 자신을 위태하게 하면서 윗사람을 받든 것이 충이고, 의(義)에서 행하면서 일을 이루는 것이 경이다. 재는 경상도 의령이 본관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 지금 일에도 밝고 옛일에도 통달하였다. 대성(臺省)을 역임하고 중외에 드나들어 경세 제민(經世濟民)하는 재간이 있었다.〈고려가 조선으로〉세상이 바뀔 무렵에〈태조를〉추대하는 모략이 재한테서 많이 나왔고, 갑술년139) 사이에 상왕 (태종) 이 왕자로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 재가 따라갔는데, 그때 함께 갔던 재상이 자못 불공하였으나 홀로 재만은 예로서 공경하였다. 무인년에 그의 아우 남은(南誾)이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과 더불어 여러 적자를 없애버리기로 모의하였으나, 상왕이 재는 모의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고 사저(私邸)에 두었다가, 사건이 평정된 뒤에 죽음을 면하게 하여 귀양보내고 다시 소환하였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하여 우의정에 이르고 부원군에 봉하게 되었는데, 상왕이 기구 대신(耆舊大臣)으로서 특히 예모(禮貌)를 더하여 대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그의 손자 남휘(南暉)는 상왕의 네째 딸 정선 공주(貞善公主)와 결혼하였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집이 가난하여 종 하나 말 한 필이었으며, 합문 지후(閤門祗候)로서 아홉 해나 승진하지 못하니, 그의 부옹(婦翁)도 예대(禮待)하지 않았다. 개국 공신이 되자, 세도를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탈취하였다. 무인년에 변정 도감(辨定都監) 제조(提調)가 되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재를 고소한 일이 있는데, 재가 성을 내어 딴 일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핍박하니, 그 사람은 분해서 죽었다. 그 까닭에 만년에는 재산이 제법 부유하였다. 또 그 아우 남실(南實)과 살림을 다투어서 종신토록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남실은 아침 밥을 겨우 먹는데도 구휼하지 않았다.[10]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4일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 이명덕(李明德) 등이 상소하였다.

"의령군(宜寧君) 남재(南在)는 남은(南誾)의 동모형(同母兄)이니, 깊은 모의와 비밀의 계책을 알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이 봉사(奉使)하던 날을 당하여 비밀히 사주하여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을 함부로 죽인 것은 남재가 어찌 알지 못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전일에 전하가 불러 함부로 죽인 까닭을 물었는데, 남재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여 천총을 기망(欺罔)하였으니, 원컨대, 유사에 내리어 국문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남재 형제가 평소에 우애하지 못한 것은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다. 어찌 남재가 알고서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겠는가? 다시는 묻지 말라."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1411년) 8월 11일


3. 여담


남재와 남은 형제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졸기를 보면 대체로 책략을 많이 낸 것으로 보인다.
남재의 졸기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에게서 많이 나왔다''' 라고 하는 부분이나 남은의 경우 ''' 이씨가 건국한 데에는 조준과 남은의 공이다''' 라고 하는 태종의 말과 ''' 개국의 공은 모두 남은에게 있다''' 라고 태종에게 상언한 조인옥의 말 등 남재, 남은 형제의 조선개국 당시의 활약이 알려진 것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에게 대해 부정적인 평을 내린 태종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당대의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제도, 행정, 법제 등에 대한 틀을 세우는 행정가의 면모가 강하다고 한다면 남재, 남은 형제는 태조/태종 등을 추대하기 위한 책략 (모략) 을 내는 책사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남재는 태조~세종의 사랑을 받으며 조선조 4명의 임금을 섬기고 영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죽은 후 왕 (세종)이 직접 사저로 문상을 나오는 영예를 누린다. 남은의 경우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하지만 사후 태종으로 부터 직접 복권을 받고 태조 묘정에 배향된다. 또한 태종이 남은을 그리워하는 기사나 남은을 계속 비호해주는 것을 볼 때 당대 태조-태종 부자와 막역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의령남씨는 원간섭기에 중앙으로 진출하여 남재의 부친인 남을번은 밀직부사 (관제 격하 전 추밀원사)에 이르렀는데 특히 남을번은 태조 이성계와 교유가 깊었고 이에 그의 아들 4형제는 모두 조선 개국에 참여를 하게된다.[11] 첫째 남재, 둘재 남은은 개국 1등공신으로 문하부및 중추원의 재신이 되었고 셋째 남실은 보문관제학에 이르렀고 넷째 남지는 우상절도사가 되는 등 4형제가 모두 재신 또는 당상의 반열에 오른다.[12]
다만 4형제간의 우애는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남재, 남은은 평소 우애하지 않았다는 태종의 말이 남아있고 남재와 남실이 화목하지 않고 다툼이 있었다는 남재의 졸기가 남아있다. 4남 남지에 대한 기사는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남재(南在)에게 내린 교지(敎旨)에,

"대업을 처음 일으키는 임금은 반드시 여러 대(代)만에 나는 현인에게 힘입게 되며, 큰 공을 세우는 신하는 마땅히 무궁한 보답을 누려야 될 것이다. 이는 곧 공변된 의리이며 사사의 은혜는 아니다. 경은 학문이 고금(古今)의 사적을 통달하고, 식견은 기미(幾微)의 일까지 환하게 알았다. 활달한 높은 생각으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원대한 계책을 쌓았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쇠진한 때를 당하여 천명(天命)의 거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공들과 더불어 의논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고 성조(聖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억만년 무궁한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배향할 신하를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卿)이라. ’고 하였다. 지금 봄 제사를 거행함에 있어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특별한 공훈에 보답하니, 상상컨대, 알음이 있거든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남은에게 내리는 교지(敎旨)는,

"천운(天運)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하의 큰 공렬이요, 공을 기록하여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정이다. 경은 영매(英邁)한 자질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략(方略)을 가졌었다. 식견은 정치의 방법을 통달하고, 총명은 기미(幾微)를 환히 알았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잔함을 당하여, 천명이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었다. 큰 계책을 먼저 세워 우리 성조를 추대하여 처음으로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다.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어 무궁한 경사를 계승하였다. 맹부(盟府)002) 에 기재되어 있으니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이로써 경을 올려서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에 종사하게 하여 특별한 훈공에 보답하니,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아아,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嘉尙)히 여겼으므로 포숭(褒崇)을 극진히 하였고, 우리 선왕을 도왔으니 마땅히 길이 보필에 힘쓸 것이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5일

태조의 건원릉 자리가 원래 남재가 봐 두었던 묘자리였는데 지세가 천하명당이라 태조가 무학대사 등과 도성 외부를 순시하며 넌지시 탐을 냈고 남재에게 원래 본인의 묘자리를 주고 남재에게서 양보를 받았따고 한다. 태조가 사은하며 현재의 남재 묘자리와 주위 전답을 모두 그에게 하사하였는데 남재가 묘자리가 명당이나 기세가 사납고 왕의 묘자리를 잘못 받으면 멸문을 당한다고 걱정을 하니 태조가 후손 중에 역적이 나와도 당사자만 벌을 하겠다는 유훈을 후대에 내리겠노라 약속을 했다한다. 그래서 현손 남이가 역모로 죽었을 때에도 멸문되지 않고 당사자와 그 어미만 벌을 내렸다는 말이 전한다. [13] 이와 별개로 이 때 태조와 남재가 서로 근심을 덜었다하며 이를 논한 곳을 망우리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14]
아들인 남경문이 요절하여 남재의 상주는 손자 남지가 되었다. 세종이 직접 조문을 하였고 봉사손인 남지를 문음으로 등용하였다.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임금이 그 집 문전 6, 7보 앞에서 말을 내려 악차에 들어갔는데, 상주(喪主) 남지(南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맞이하였다. 지에게 명하여 잔을 올려 제사를 드리게 하고, 소윤(少尹) 김상직(金尙直)이 교서를 읽었다. 제를 마친 다음 임금이 법가를 돌렸는데, 지(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애곡(哀哭)하니, 임금이 식(軾) 에 이마를 대어 예하고 지나갔다. 그 교서에 말하기를,

"듣건대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몸 한마음이라.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에게 살아서는 작록으로 영화를 주고, 죽어서는 조휼(弔恤)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고금에 통한 의리요, 국가의 떳떳한 법칙이다. 생각건대 경은 낭묘(廊廟)의 거룩한 자질과 산하의 뛰어난 정기를 타고 나서 백가(百家)의 학문을 다 닦고 세상 만사의 변화를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대[竹]를 쪼개고 물고기를 나누매 , 백성들은 바지[袴]가 다섯 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매 노래는 《감당(甘棠) 에 미쳤도다. 착한 정책을 건의하고, 아름다운 정치를 실시하여 후설(喉舌)의 책임을 맡으매,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을 드높였으며, 오대(烏臺)에 있을 때, 홀로 그 명망이 우뚝 솟았고, 암랑(岩廊) 의 영수(領袖)가 되어 만사를 조화하여 정내(鼎鼐) 와 같이 안정시켰으며, 중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성명(聲名)이 자심(藉甚)하였다. 옛날 고려 말기의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져 천명과 민심이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자, 경은 그 기미를 밝게 알고 성조를 추대하여 억만년 무궁한 큰 자리를 개창하였고, 우리 상왕께서 명나라에 조근(朝覲)할 때 경도 또한 배종(陪從)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상왕의〉 고생스럽고 어려움을 막았으매, 〈내가〉 왕위에 오르자 비익(裨益)함이 더욱 많아, 어린 나에게는 경과 같은 늙은이가 더욱 수감(水鑑)과 약석(藥石)이 될 것인데, 지금 그만이니 무엇으로 마음을 잡을까. 하물며 '''경은 과인(세종) 에게 옛 은혜의 교분''' [15]

이 있고, 경의 손자 [16] 는 인척의 경사가 있어, 장차 백료(百寮) 의 의표(儀表)가 되어 네 세대를 보필할 것이라 하였더니, 하늘이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심인지 갑자기 방아노래를 멈추게 하였으니 , 마음 아픔을 어찌 참으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삼가 상사(喪事)를 치르게 하고, 이제 박한 제물을 갖추어 소유(素惟)) 에 와서 제전(祭奠)을 드리노라. 어허, 국가와 함께 휴척(休戚) 을 같이하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두 어깨에 졌으니, 애도하고 영광을 주는 예도 존망간에 극진하리로다." 라 하였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9일

손자 남지는 문음 [17] 으로 출사 [18] 하여 후에 문종, 단종조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조에는 오랜기간 대언 [19]으로 왕의 곁에서 시종하며 사랑을 받았다. [20]

4. 대중매체


용의 눈물에서는 손호균이 맡았다.[21] 무인정사가 끝나고 정국이 안정 단계가 되어서야 첫 출연. 대궐 뜰에서 정안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외치는 에피소드가 확장되어서, 도당에 처음 들어온 그날부터 시도때도 없이 이방원을 등극시키자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가 간신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남은의 형인 남재가 살아있는 건 이방원의 자비 때문이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해석이다.

5. 서적 오류


이덕일의 한국통사에서 남재, 남은 형제를 일컬어 "어린시절 몹시 가난하여 노비와 말과 같았다" 는 빈한한 가문출신이라 표현을 하고 있다. 실록에는 남재의 졸기에서 "집이 가난하여 노비1명, 말1필 있었다" "합문지후로서 여러해 승차하지 못해 장인과 부인이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라는 기록은 있지만 노비와 말과 같았다라는 기록은 없다. 이는 서술상의 오류이므로 수정이 필요하다.
빈한한 가문이라는 부분도 부친인 남을번이 밀직사 부사 (관제격하전 추밀원부사, 정3품) 로 재추의 반열에 있었으므로 이른바 '재상지종'은 아니었으나 빈한한 가문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1] 시호 경렬공[2] 실록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정안군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그에게 학문을 계속 권했다 한다. " 옛날 주상(태종)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내가 학문을 권하니, 주상께서 말하기를, ‘왕자는 참여할 데가 없으니 학문은 하여 무엇하겠느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왕의 아들이 누가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하였는데 (중략) [3] 남을번 - 검교시중[4] 실록에서 보면 태종 / 세종 부자는 평생 남재, 남은 형제를 비호하였다.[5] 충녕대군 역시 어느 정도 차기 보위에 대한 생각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 이에 대한 태종의 반응이 더 흥미롭다. 대역으로도 처리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 태종은 껄껄 웃으며 "과감하다 늙은이가"라고 하며 넘긴다.[7]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다[8] 충녕대군이 다음 보위를 노릴만하다라고 남재가 넌지시 얘기한 것이다 [9]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이 그에게서 많이 나왔다는 실록의 졸기 내용을 증명하는 부분.[10] 그의 아우인 남은, 남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듯 하다 [11] 동생 남을진이 고려조에 같이 벼슬을 하다가 개국에 반대한 것과 대조가 된다.[12] 남은과 남지는 무인정사에 참살되었으나 복권되었고 남재와 남실은 태종, 세종조에 종사했다. [13] 실제 남이와 그의 모친인 남양 홍씨만 처형되고 그의 딸은 노비로 갔다가 뒤에 풀려나고 양반가로 출가한다. 남이의 동생도 귀양으로 그친다. [14] 남재의 묘역훈적비에 후손 남구만(* 숙종조 영의정)이 쓰고 남공철(순조 대 우의정)이 새긴 비석에 전해지는 일화[15] 충녕대군으로 잠저에 있던 시절 남재는 그가 왕의 재목임을 보고 공개석상에서 차기 보위에 대한 욕심을 가지라 넌지시 얘기한적이 있다 [16] 의산군 남휘. 태종의 부마[17] 고려 음서제 [18] 사헌부 지평[19] 후의 승지[20]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종서가 세종의 사랑을 받은 남지를 질투하였다는 기사가 남아있다.[21] 동생 역을 맡은 이영후보다 '''23살 아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