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창선대교 붕괴사고
1. 개요
1992년 7월 30일 오후 5시경,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에 위치한 창선대교가 붕괴된 사건으로 다음날에 신 행주대교 붕괴사고가 잇따라 일어났다. 도서낙도에서 벌어진 일인데다가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도 통행이 활발한 시간이 아니었기에 사상자 수가 적어 임팩트가 깊은 사고는 아니었지만[1] 2년 2개월여 뒤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전조판이 될 사건이라고 생각치도 못했다.
2. 사고 원인
1차 조사결과 사고는 붕괴된 교각의 기반이 바닷물의 염분에 의해 조금씩 부식되면서 콘크리트가 부식, 탈락된 데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건설교통부는 전문적인 구조분석기관에 의뢰해 붕괴된 교각의 해저부분에서 채취한 콘크리트 조각을 분석, 정확한 사고원인을 밝혀내는 한편 나머지 교각들에 대해서도 정밀 안전진단을 실시하였다.
진단 결과 붕괴사고의 원인은 영세업체 및 미경험업체에 의한 시공과 유속(V=2.76m/sec)이 심한 수중에 우물통 기초의 위치를 부정확하게 시공하므로써 편심을 야기시켰으며, 우물통 기초의 심도가 낮았고 해수 중에 있는 염분성분에 의한 콘크리트의 중성화로 교량의 기초가 부식된 데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3. 피해
2명이 사망하고, 통화선도 끊겼으며 창선도 주민들은 창선대교가 재개통될때까지 한 동안 불편을 감수해야되었다.[2] 그나마 사람이 자주 다니는 시간대는 아니라서 사상자가 그리 많지않았던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4. 조치
붕괴사고 후 신창선교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신규 건설기간 중 주민들의 교통 통행과 편의를 위하여 자주식 대형 바지선을 상시 비치하여 차량을 포함한 인원, 화물수송에 대비하였다. 경상남도측 은 창선면 1만여 주민들이 유람선, 도선으로 육지와 통행하고 있으나 승선인원이 30명 내외로 불편을 겪자 군수송선인 LGM 8선을 추가 투입하였다.
국방부에 지원을 건의하여 2억 5천만원을 들여 차량 10대, 승객 50명을 운송할 수 있는 40톤 규모의 페리선을 건조하였고, 유류, 생필품, 가스 등은 도선을 이용해 하루 2차례 공급이 되었다.
[1] 거기에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연일 선전하여 많은 국민들의 관심이 올림픽에 쏠려 있던 것도 한몫했다.[2] 당시에 삼천포 대교가 개통되지 않았을때라서 창선대교만이 유일한 육로교통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