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르틀링겐 전투

 

1. 개요
2. 전투 전
3. 개전
4. 결과


1. 개요


1634년 9월 6일에 벌어진 페르디난트 3세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연합군과 구스타브 호른과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한 신교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서 구교군이 승리하고 스웨덴군은 남부독일의 지배권을 잃었으나 한편으론 프랑스가 참전하는 계기가 된다.

2. 전투 전


신교도 군대는 뇌르틀링겐을 수복하여 도나우뵈르트와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려 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는 당시 헝가리 왕이었던 페르디난트(훗날의 페르디난트 3세)와 연합하여 뇌르틀링겐 전투에 임한다. 이 전투에서 개신교 측은 계속된 승전으로 상당히 자만하고 있었다.

3. 개전


신교군의 작전계획은 대단히 형편없었는데 좌익의 호른은 언덕에 지휘소를 마련해 참호를 구축한 페르디난드 국왕이 지휘하고 있던 제국군 군대의 우익을 공격하고 베른하르트는 평원에서 스페인 군대를 포함한 제국 군대의 좌익을 저지하기로 되어있었다. 처음 호른의 공격으로 스웨덴 군사들이 참호를 강타해 제국군대의 화포를 노획했지만 노획한 화약이 폭발해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는 전 역량을 집중해 언덕 정상부에 역공격을 가했고 스웨덴 포병이 포격을 실시하자 이를 눈치챈 스페인 보병들은 바닥에 엎드려 피해를 보지 않고 스웨덴 포병이 장전하기 전에 일어나 사격을 가했다. 스웨덴군이 언덕 정상부에서 밀려나게 되자 호른은 베르하르트에게 전갈을 보내어 계곡을 통과하여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고 전갈을 보냈지만 스페인과 제국의 군대가 베른하르트의 군대를 공격해 그들을 격파하고 물러나게 했다, 스웨덴 군은 대부분 전사했고 호른은 포로가 되었다.

4. 결과


스웨덴군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황제군은 중,남부 독일에서 신교군을 몰아내었고, 동시에 스페인은 라인 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오리지널 테르시오의 위력을 한 번 보여줬고 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공백이 뼈 아팠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이 전투는 프랑스의 전면 참여를 불러오게 되었다. 패배한 신교 세력은 프랑스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합스부르크 군대들이 프랑스를 포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신교 측을 막후에서 지원하던 프랑스의 추기경 리슐리외는 1634년에 신교 측과 파리 조약을 맺고[1] 마침내 스페인에 대항하여 30년 전쟁에 직접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1] 이 조약의 핵심은 '''프랑스를 배제한 휴전과 강화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를 몰아내려는 프랑스의 목적이 대부분 휴전을 원하던 신교 측을 눌러버리고 30년 전쟁이 외국 국가들의 패권 싸움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