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2세 아돌프

 


'''Gustav II Adolf'''
'''왕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Gustav II Adolf)
'''출생'''
1594년 12월 9일
스웨덴
'''사망'''
1632년 11월 6일 (37세)
-
'''장례식'''
-년 -월 -일
-
'''재위'''
스웨덴 국왕
1611년 10월 30일 ~ 1632년 11월 6일
'''배우자'''
마리아 엘레오노라 (-년 결혼 / -년 사망)
'''자녀'''
크리스티나 여왕
'''아버지'''
-
'''어머니'''
-
'''형제'''
-
1. 개요
2. 생애
3. 업적
3.1. 군사적 업적
3.1.1. 징병제의 도입
3.1.2. 전술단위편제
3.1.3. 전투방식 개편
3.1.4. 기병전투
3.1.5. 포병전투
3.1.6. 3병 협동 전술
3.1.7. 전술적 혁신
3.1.8. 전술 외적 혁신: 총력전의 원형
3.1.9. 상비군의 탄생
3.2. 내치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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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내 생명을 내걸고 그대들과 함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

바사 왕조 제6대 스웨덴 국왕, 핀란드 대공(1611~1632). 영미권에서는 라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로 더욱 알려졌다. 별칭은 '''대왕(Gustav Adolf den store)'''
별명은 '''북방의 사자(Der Löwe aus Mitternacht)'''[1]이나 '''황금의 왕'''[2]으로 불렸다.

2. 생애


나중에 스웨덴 왕 칼 9세가 되는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스웨덴의 독립 시조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손자이자 외가로는 덴마크-노르웨이의 올덴부르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개신교와 가톨릭 세력간의 균형에 큰 영향을 끼쳤고, 스웨덴을 향후 1세기 동안 유럽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군주로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일부 사람들은 군사적 혁신에 있어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비단 전술만이 아닌, 전술 외적 부문의 혁신역시 뛰어나다. 향토예비군 형식으로 각지에 편성한 예비간부단과 국민개병제 등 나폴레옹도 7대 명장 중 한 명으로 뽑기도 했다.[4]
나폴레옹 전쟁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전의 토대는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전술적 업적 뿐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업적도 특출난데 체계적인 호구 조사에 기반한 지역별 징병 시스템을 통해 근대적 중앙 상비군 양성을 통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확실한 행정적 장악이란 면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그 시대상 큰 발전의 정점을 찍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델을 남겼다는 점은 학계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
특히 인구나 자원 같은 물적 악조건을 내부적 시스템 개선을 통해 만회하는 정도를 넘어 패권을 행사할 만큼 끌어 올리는 '''강소국의 탄생'''이란 면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치하의 스웨덴은 먼 훗날 독일 제국을 만든 프로이센의 모델이 될만큼 중요했다. 당장 구스타프 아돌프보다 한 60년뒤 스웨덴 제국의 패권을 대북방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모델도 역설적이지만 이 시기 스웨덴이었다. 30년 전쟁에서 뛰어난 무훈을 펼쳤고 뤼첸 전투에서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여기서 전사한다.

3. 업적



3.1. 군사적 업적


구스타프 2세는 '''근대전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군사천재'''라고 할 수 있다. 하술된 전술적, 전술 외적 부분 양쪽에서 실행한 방안들은 시대의 혁신인 것도 있었고, 현대전의 원류라고 해도 될 만한 것들이 있었다.

3.1.1. 징병제의 도입


유럽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국가단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국가위기상황에서 민병대가 조직되는 것에 불과했었으며, 제대로된 '국가상비군'으로서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스웨덴이 처음이었다.

3.1.2. 전술단위편제


160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주요 전투였던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스페인식 테르시오가 마우리치의 선형진에게 한번 격파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네덜란드 군의 피해도 컸던 데다, 30년 전쟁 초기 틸리 백작의 테르시오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우리츠의 선형진을 개량했다.
연대의 규모를 축소하면서 전술적 유연성은 증대되었지만 실제 전투에서 테르시오를 상대하려면, 테르시오의 거대한 규모의 충격력을 상대할수있는 방안이 필요했고 이러한 연대급 편성의 한계를 극복하기위해 그 상위개념으로서 새롭게 도입된 것이 바로 '여단'이었다. 여단은 연대를 반으로 나눈 전대가 여러 개 모여서 이뤄졌고, 여단은 3개의 전대가 삼각형 모양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소규모 전술단위까지 예비대를 편성했다. 예비대를 전투 도중 어려움을 겪는 아군 진형에 가세하게 하거나 별동대로서 사용되는 등, 변화하는 전장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끔 개편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실제로도 효율을 발휘했다.

3.1.3. 전투방식 개편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마우리츠의 선형진의 특징인 전투진형 편성시, 부대의 종심을 줄이고 횡열을 증가시킨 머스킷 병을 비중을 높여 화력을 강화하는 것은 그대로 따라갔으나, 마우리츠의 선형진과 달리 횡열의 숫자를 10열이 아닌 6열로 줄였고, 무엇보다 사격을 마친 머스킷병이 장전시간 동안 대열의 뒤로 돌아가는 역진(countermarch)를 사용하는 대신, 6열 횡대의 머스킷 병 중 3열이 동시에 사격하는 일제사격(salvo)을 사용하였다.
이는 네덜란드의 역진 사격방식이 분명 연사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아돌프는 이런 일제 사격을 통해서 개전초기에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한편, 정신적으로 충격을 가해 사기를 떨구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스웨덴 머스킷병들은 3열중 첫번째 열을 무릎을 꿇고 두번째 열은 다리를 구부려 세번째 열은 서서 사격하였다. 여기에 머스킷 병의 일제사격후 전과확대를 위해 파이크 병과 머스킷병이 일제히 돌격하는 전술이 덧붙여졌었다.

3.1.4. 기병전투


당시 기병전술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통해 전통적인 창기병이 점차 사라지고 총을 사용하는 라이터 기병을 이용한 사격전술인 카라콜 전술이 일반화 되었었다. 이때 당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과의 전쟁에서 윙드 후사르의 돌격에 고전을 한 이후, 창기병의 돌격에 의한 충격 효과를 돌입하기 위해, 카라콜을 버리고 원거리 사격의 아르케버시어도 과감히 없앴다. 대신 윙드 후사르와 같이 창기병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흉갑만 착용한 기병이 권총과 칼을 들고 돌격하도록 훈련시키도록 선회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전투가 개시되면 카라콜의 연속사격을 포기한 대신, 초기부터 돌격하면서 적과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면 일제히 피스톨 사격을 가하고, 돌격하는 기세를 이용해 칼을 뽑아들어 돌격하는 전술을 돌입했던 것이다. 화약무기 등장이후 사라진 기병대의 돌격전술을 다시 도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라콜은 실제로는 구스타프의 혁신이 아니라 원래 유럽에서 카라콜이 기병의 주된 전술이었던적 자체가 없었다. 17세기 초 제국의 군사 매뉴얼에 카라콜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1612년에 제국군 기병 장군인 조르지오 바스타와 야곱 폰 웰하우젠도 모두 카라콜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앙리 4세 등도 이미 한두발 쏘고 돌격하는 식으로 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헤르만 위고가 카라콜을 언급한 적이 있으나 이것은 아쿼버시어가 보병에 대항하여 한 것으로만 나오지 기병전술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근세의 기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것처럼 무의미하게 카라콜을 하지 않았고 총격과 돌격을 병행하며 싸웠다.[5]

3.1.5. 포병전투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장에서 점차 사용빈도가 높아지고 있던 대포에 주목하였는데, 당시 통일된 규격없이 제작되던 것을 규격화한 것이 그의 업적이기도 하다. 무게 0.8~3.2톤 내외의 공성용 대포와 무게 0.9~1.4톤 내외의 야전용 대포로 구분하였고, 4파운드짜리 작은 야전용 대포, 즉 연대포를 새롭게 도입하였다. 특히 이 연대포는 대포의 화력을 줄이더라도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개발되었는데 포병연대의 선두에 배치되었고 보병이 전진할 경우에는 함께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유럽 전역에서 야전 활용도가 높아졌다. 또한 나무 상자로 된 탄약통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포탄의 보급을 손쉽게 만들었기 때문에 대포의 장전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 때문에 공성전이 아닌 야전에서도 포병대가 독립부대로 운용될수 있었던 것이다.

3.1.6. 3병 협동 전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장 이전까지 가장 일반적인 전술은 보병기병의 협동전술로 고대 시대 부터 시작되어진 오래된 방법이었다.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에도 이러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전술은 병함이 없었으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보병과 기병의 전술을 개혁하고 포병을 독립된 부대로 운영하면서 이들 세 병과를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3병 협동전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전방의 중앙에 위치한 소총병들이 3개열씩 일제사격을 가하는 동안 후방의 포병이 엄호 사격으로 적의 피해를 확대시키고 양측에 위치한 기병대도 적 기병대를 제압하기 위해 돌진하면서 피스톨 사격을 가한 후, 칼을 들고 돌격, 이후 뒤이어 자창보병과 포병대도 뒤따르는 방식이었다.
이는 보병, 기병, 포병이 모두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시대에 그 화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고도의 전술운용이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브라이덴펠트 전투에서 자신이 고안한 3병 협동전술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테르시오와 카라콜 기병전술로 맞선 백전노장이었던 틸리 백작에게 대승을 거둔 전적이 역사적 사실로서 남아있다. 그의 전술 도입의 실효성을 실전에서 증명해내었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근대 전술의 효시로서 추존하는 것이다.'''

3.1.7. 전술적 혁신


그는 시대를 앞선 전술상의 혁신을 도모했는데,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순간화력의 극대화를 위해 직선형 대형을 사용[6]하거나, 파이크 길이 단축, 머스킷 경량화[7], 중기병의 갑옷 간소화[8], 경무장으로 일제사격 후 돌격격하던 기병 하카펠리타트 육성[9]
경량화된 소구경 대포의 도입으로 기마포 부대를 운용, 야전에서 신나게 근거리에서 대포를 쏴재끼는 등 아예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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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액트먼트로 재현한 구스타브 2세 당시 머스킷 총병. 버디슈를 들고 허리에 레이피어를 차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아이러니한 건 정작 본인이 머스킷 소총을 경량화시켜서 총검 사용의 가능성을 연 것과는 별개로 머스킷병들이 일제사격을 하고나면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차지마냥 한손검을 들고 육탄전에 돌입하는 발검돌격을 선호했다는 거다. 사실 이쪽이 원조다. 스코틀랜드 고지인들은 먹고 살 게 부족한 지역 특성상 용병 활동 비율이 높았는데, 30년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한 하이랜더들이 이 스웨덴군의 일제사격 후 발검돌격에 깊은 인상을 받고 차용해와서 자코바이트 전쟁 때 영국 정부군을 상대로 잘 써먹었다는 게 정설.
반자이 돌격과 단순 비교를 한다면 스웨덴의 전술 또한 무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관총[10]이 없던 당시 상황'''과 당시 머스킷의 '''연사속도가 분당 1발 내지 2발'''이고 '''유효사거리가 100m 정도'''였다는 것, 성인남성 100m 달리기 속도가 대략 10초대 중반 내지 20초대 초반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총검돌격발도 돌격을 보면 번쩍거리는 칼날이 일으키는 심리적 충격 효과가 매우 크다.
상상해 보라. 스웨덴군의 2열 일제사격과 근거리 기마포 사격으로 한순간에 픽픽 쓰러져 나가는 동료들을 보고 멘탈에 금이 가는 상황인데, 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총을 장전하는 사이에 스웨덴 보병들이[11] 일제히 칼이나 버디슈 같은 냉병기를 들고 괴성에 가까운 함성을 우아아아~~~!!! 지르면서 돌격하는 장면을. 당연히 이런 상황에 처한 적들은 어어어 하는 사이에 심리적 공포가 확산되면서 전열이 붕괴될 확률이 높았기에 더더욱 쓸 만했다.

3.1.8. 전술 외적 혁신: 총력전의 원형


전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전술 외적인 국방행정에서도 혁신을 이뤘는데, '''근대적인 개념에 가까운 국민개병제와 예비군제도, 상설직업군인제도를 최초로 실시'''해 '''현대시대 총력전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거다. 어쩌고 보면 '''이 부분이 전술적 혁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스웨덴은 영토는 그럭저럭 넓지만[12] 척박한 기후와 토양 때문에 인구가 200만을 훨씬 밑도는 소국이었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적은 인구에서 비롯된 군의 숙련도와 규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을 일정 규모의 행정단위로 편성해 각지의 군 간부들[13]로 하여금 단위지역별 백성들에게 주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고[14], 한편으로는 군의 근간을 이루는 부사관과 장교단을 상설편제로 둬서 언제든지 인구 대비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15] 덕분에 그가 이끌던 스웨덴군은 각국의 예상보다 훨씬 많고, 혁신적인 군대를 전선에 투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면 전략목표까지는 달성했지만, 동시에 총사령관인 자신이 전사하면서 아이러니한 결과를 남겼다. 구스타프 아돌프 사후 스웨덴군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 제국테르시오에게 대파 당하면서 잠시 주춤거리지만 요한 바네르,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악셀 옥센셰르나 같은 구스타프 생전 그와 함께 스웨덴의 국정과 전투를 수행한 명장, 명재상의 통솔 아래 다시 상승세에 돌입하며,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슈트랄준트를 비롯한 포메라니아 지역과 비스마르, 브레멘 일대를 할양 받으며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물론 굉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왕이라서 최후도 역시 영웅적이라고 경의를 받았다.

3.1.9. 상비군의 탄생


'''전체적인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업적을 높이 추존하는 이유'''는 당시에 전략/술 적인 체계적인 전술 시스템이 문서나 작전형식으로 구체화되지 않고, 각 국가의 대부분이 군편제가 용병 위주로 구성되어 제대로된 '상비군' 시스템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용병 위주의 군대에는 전술을 도입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속된말로, 돈주고 고용을 하는 식의 군대는 급여가 공급되지 않으면 언제나 고용주를 배신하고 다른 국가에 고용될 위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6][17] 전술이 아직 체계화 되지 않은 시점에서 용병대에게 전술이나 전략을 공유하면, 용병대가 고용주를 버리거나 배신하고 그것이 타국으로 넘어갈 경우, 자국의 군 시스템이 노출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러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다듬기 위해서 용병위주가 아닌, 자국의 '상비군' 시스템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을 시스템화, 군편제화 하여 최초로 자국 위주의 병사 시스템을 문서화 및 편제화한 인물이다. 그리고 포병의 기동력과 경량화된 보병포는 스웨덴 군의 군편제가 확립되어감과 동시에 이뤄진 체제였다.''' 자국 상비군의 숫자가 늘어나니, 이전 처럼 용병에게 전술을 굳이 넘겨주거나 공유하는 위험부담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럽 내부에서 첫 시작점을 띤 것이다. '''오히려 근대 포병 체계를 확립했다는 근거 자체가 없다는 식의 논제야말로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애시당초 용병은 급여가 공급되는 동안에만 아군일뿐, 돈이 공급되지 않으면 배신하고 떠나거나 오히려 도적질을 일삼는 문제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용병의 단점 항목 참고. 실제로 배신을 일삼아 나라 하나를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카탈루냐 용병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만 봐도 상식적인 선에서 돈만주면 고용되는 식의 용병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여 도입하기는 당시 시대에는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업적이 높이 추존되는 것이다. 상비군 시스템을 체계화하여 자국의 용병 위주의 군편제를 개선하고 당시시대에 있어서 신시대적인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여 유럽 상비군의 시작점 및, 경량화된 보병과 포병 전술의 개발 및 도입이라는 혁신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상비군 편성 업적을 폄하하는 의견은 대체로 당시의 유럽의 큰 역사적 흐름이 그러했다고 막상 그런 흐름을 핵심적으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갈고 닦으며 실질적 국력 향상으로 이끄는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걸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폄하적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보다 먼저 상비군의 발전을 주도했다고 평가받는다고 주장하는[18] 당대 스페인군이나, 네덜란드군이나 주력은 여전히 국제 용병대 세력이었고, 스웨덴 수준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국가 내 지방 행정 장악과 군사 시스템 발전이란 두마리 토끼를 스웨덴 만큼 동시에 효율적으로 잡지 못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당시 스웨덴 이전 육상전에서 가장 전적이 뛰어나고 다른 나라 군제 개혁의 모델을 제시한 테르시오가 대표하는 스페인군만 하더라도 막상 스페인 본토에서 중앙 정부가 징발하고 훈련시킨 스페인 출신 병력은 네덜란드 전역을 담당했던 주력군 플랑드르 군대 기준으로나, 스페인 전체로나 한번도 20% 이상을 넘긴적이 없다. 다른 대부분 병력들은 전역에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싸울땐 이탈리아 현지 병력, 네덜란드 전역에선 재정복한 17개주 중 10개주에서 모집한 친합스부르크 현지인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용병'은 16세기 콘도티에리나 30년 전쟁 당시 만스펠드, 발렌슈타인 같은 지휘관 한명에게만 충성하며 계약이 끝나면 군대 통째로 연장을 하던 고용인을 바꾸든 하는 전업 용병 군대 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은 아니지만 이해관계나 연고, 종교 등에 의해 스페인군에 종군한 병사들 전반을 의미한다.
현대 외인부대가 외국인들이라 해서 프랑스군 아닌건 아니냐고 반문할수 있겠지만, 이 시기는 아직 근대적인 의미에서 체계적인 국민 국가와 정부 시스템이 정착하기 이전 시대이다. 당장 그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마저도 법적으로 따지면 사실 '스페인'이란 나라는 없고, '카톨릭 군주국' (monarquia catolica) 아래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백국, 나폴리 왕국 등 수많은 중세적 정치체들이 여전히 자치권을 유지하던 시대에 통상적으로 '상비군'이란건 이제 막 존재하려고 하던 참이었고, '정부군'이란건 엄밀하게 따지면 그 나라 최고 권력자, 즉 대부분의 경우 왕이 봉건 의회와의 협의로 거둔 예산+사적으로 조성한 비자금으로 굴리는 군대가 즉 정규군이지, 애초에 왕실도 계승에 따라서 덜컥 '외국인'이 왕이 되던것도 흔하던 시대에 법적인 의미에서 한 정부에만 속한 관군과 계약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용병이 명확하게 구별되었던 시절이 아니다. 르네상스와 근세 시절 군대의 대부분은 '용병'이었다는 말은 이런 문맥에서 기원한다. 동시대 군사 관련 공문서, 글들을 읽어보면 그냥 "무슨 무슨 전투에서 누구누구의 군대에 몇천명의 이탈리아인, 몇천명의 독일인이 종군했다"라는 식으로 병사들의 대략적인 출처만 언급하지, 현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적 지위에 따라 용병, 정규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흔히 역사학자들이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제개혁, 특히 선대로 부터 이어받아 완성시킨 스웨덴식 지역구 모병제를 통해 '용병의 비중을 줄이고 상비군을 키웠다'는건 사실 단어의 오용이다. 엄밀하게 풀어 말하자면 유럽 보편적으로 국왕 직할령에서 모병한 자국인보다 전장 현지에서 주로 현지 귀족 혹은 성직 봉건 권력을 통해 고용한 다국적군이 일반적이던 시절, 스웨덴식 징집제도를 통해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령이 닫는 스웨덴 본토와 핀란드 일대에서 현지 모병관이 아닌 조정 자체의 관료들이 모병한 자국인의 비중을 크게 키웠다는 말이 맞다. 그리고 이러고 나서도 30년 전쟁에서부터 대북방전쟁까지 스웨덴은 쭉 자국의 국력,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넒은 전선에서 거의 항상 전시였던 만큼 이리 흔히 '용병'이라 불리는 스웨덴-핀란드 본토 출신 병사가 아닌 개신교계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동원한 외국인 병력의 숫자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인구 비중에 비하면 스웨덴군은 자국 내 직할령, 즉 스웨덴과 핀란드 '본토'에서 징집한 병사들 비중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았기에 근대적 의미에서 상비군의 탄생과 군사 행정의 역사에서 큰 변화를 이끈 혁신가로 업적이 인정 받는 것이다.''' 상술한 당대 최강 육군국이었던 스페인의 경우 최정예 스페인인 부대가 많아도 20%를 넘기지 못했고, 네덜란드도 그보다 조금 높은 30%대 정도에서 놀았던 반면 '''스웨덴은 구스타프 아돌프가 30년 전쟁에 직접 군대 끌고 참전할 무렵 4만이 조금 안됐던 그의 군대중 2만은 주로 현지 독일인들이 가장 많은 전형적인 '용병' 군대였던 반면, 무려 50%에 가까운 만오천은 바로 그 스웨덴-핀란드 본토에서 직접 징발한 근대적 의미에서 '중앙군'이었다.''' [19][20]

3.2. 내치


한국에서는 30년 전쟁의 주요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내 치적을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렇게 쌓아올린 국가적인 역량을 다 전쟁에 쏟아부었다는 것이지만.
전국에 재판소를 세워서 법치주의의 근간을 마련했고, 웁살라 대학을 다시 부흥시켜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네덜란드에서 차관을 빌려 구리광산을 개발했는데, 이 대목은 경제적, 군사적인 면 모두 중요하다. 스웨덴의 무역 규모를 10배 가까이 끌어올리는 동시에 대포의 대량 보유를 가능케 해서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당시 대포는 내열성 때문에 포신을 청동으로 주조해서 그렇다.
참고로, 철제 주물 대포 같은 것도 있었으나 청동제 대포에 비해 훨씬 저렴했지만 신뢰성이 낮아 초기엔 거의 해적들이나 쓰는 용도였다. 그러나 그런 주철 대포를 헨리 8세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아르마다를 격파하는데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강철 포신으로 된 대포는 19세기 독일의 크루프 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다.

4. 기타


불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당대 최측근이 그 성격을 두고 '모두가 왕과 같이 뜨겁다면 다 타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런 성격 탓에 누가 자기 앞에서 말을 얼버무리거나 더듬는 것을 참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게 적국이 보낸 사신이라고 해도 도로 내쫓아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하인이 자신의 앞에서 우물쭈물거리고 답답하게 굴자 빰을 때렸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런 불 같은 성격 탓에 만약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죽지 않았다면 30년 전쟁은 30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전쟁을 임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조금 유리한 상황에서 황제와 조약을 맺는 선으로 끝내려는 개신교 제후들과 다르게, 구스타브의 경우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입장이라 같은 편인 개신교 제후들과 마찰이 많았다.
근대식 상비군의 시초답게 자신이 직접 키워낸 상비군에 애정이 많았던지 자신의 병사들과는 숙식을 같이 했고 발이 가라앉는 진창에서도 직접 병사들 사이를 시찰하고 안부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고 웬만하면 병사들의 실수는 그냥 넘어갔다는 언급도 있다. 당시 시대에는 병사들에게 줄 돈이 체불되거나 미뤄지는 건 거의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경우, 돈이 밀리면 보급품이라도 잘 챙겨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수는 한참 미뤄다가 주는 게 당연하고 보급품은 자비로 챙겨가야 하는 시대인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병사들에게 잘 해줬는지 전장에서 왕이 죽었을 때, 그 소식에 모랄빵이 난 게 아니라 병사들이 분노에 차서 돌격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를 이겼다.
왕비는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이며 그 친정집에서 먼 훗날 먼치킨 황실이 나타난다. 다만 문제는 정작 본인은 30년 전쟁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죽은데다 후계자는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였다. 전쟁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수준을 넘어 일을 몇 배로 벌려놓고 죽은 셈이라서 30년 전쟁 종료까지 스웨덴은 구스타브 본인이 키워놓았던 국력 중에 상당히 많은 힘을 전쟁을 끝내는데 소모해야 했다.
이 외동딸 크리스티나 여왕은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아들 낳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외동딸에게 남자 옷을 입혀 키웠는데 고대로 자랐는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죽은 이후에는 왕비가 탑에 가둬놓고 키웠다. 스물이 넘어서까지 신하들이 결혼은 언제할꺼냐는 닥달에 결국 원래 꿈이었던 배우가 되고 가톨릭으로 개종 하려 왕위를 버리고 로마로 떠나면서 한때 유력 결혼 후보였던 외사촌 오빠[21]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바사 왕조는 단절된다. 그 후 퇴위할 때 왕실의 귀금속을 몽땅 들고 나갔어도 호화 사치생활을 하고 금방 탕진한데다가 금새 본국에 손을 벌려 본국에선 아버지와 달리 불평을 엄청나게 샀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크리스티나를 귀빈으로 대우했고,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묘소를 마련해줬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투가 벌어지면 늘 앞장서서 싸웠으며, 이 때문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끝내 죽는 순간까지도 앞장서서 싸우는걸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선두에서 싸우다 폴란드군 저격수가 쏜 총에 어깨를 맞아 팔과 손가락에 장애가 왔으며[22] 이후 무거운 금속 갑옷을 입지 못해 소가죽으로 만든 버프 코트만을 걸치고 다녀야 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군대가 늘상 뛰어난 사기와 전투력을 자랑했던 이유가 바로 그의 이런 행동에 힘입은 것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나쁘게 볼 수는 없지만, 상술한 뤼첸 전투에서 그를 전사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해당 전투 이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다시는 갑옷을 입지 못하게 되면서 말단 스웨덴군의 지휘관들 사이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본받기 위해 점차 금속 갑옷을 입지 않는 퐁조가 퍼지기 시작했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또한 이를 알고 병사들을 이끌어어야 할 지휘관들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에 경악하고 갑옷을 착용하라고 명령했으나 해당 명령에 복종하는 장교들이 없었다고 한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에서 득세할 때,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사이에는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추대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구스타브 자신도 비공식적인 언급으로 메클렌부르크 공작에게 "내가 만약 황제가 된다면'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스웨덴인인 황제를 뽑느니 차라리 미친 사람이라도 독일인인 황제가 더 괜찮다는 제후들의 결사적인 반대 탓에 어영부영 무산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독일 내에서 개신교의 보호자로는 환영을 받았지만 쭈구리가 된 독일 개신교 제후들을 향해 소리치거나 겁박하고 겁쟁이라 구박을 주는 탓에 정작 황제후보로는 평이 좋지 않았다. 구스타브가 독일에 상륙하기 전까지 개신교 제후들은 카톨릭 세력에게 가루가 될 정도로 개박살이 나서 항복 직전이었기에 겁쟁이 아니면 쭈구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23]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스웨덴의 메탈밴드 Sabaton의 The Lion From The North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사람을 다룬 곡이다.
문명 5에서는 스웨덴의 지도자로 등장. 문명 5/등장 문명/스웨덴 문서 참조. 문명 6에서는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하며, 확장팩에서 스웨덴의 지도자가 딸 크리스티나로 낙점되어 지도자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1419년에서 1819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는 게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유로파 유니버설리스 2에도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9, 9, 9[24]에지휘관으로서의 능력치는 6/6/5/1로 동시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등 30년 전쟁의 지휘관들을 발라먹는 위엄을 자랑한다. 4에서도 마찬가지로 6, 6, 6의 최대 수치를 가진 군주로 나온다.[25]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여러 퀘스트와 이벤트에서 얼굴을 비추고, 또 가나돌 NPC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모바일 게임 라스트오리진에서 이 인물을 본딴 철혈의 레오나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1] 30년 전쟁 당시의 맹활약으로 개신교군이 붙여준 별명.[2] 이탈리아 용병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 원어로는 일 레 도로(il re d'oro)라고 한다.[3] 대 콩데와 함께 당시 프랑스 육군의 전성기를 이끌던 인물이다.[4] 나폴레옹이 꼽은 명장 나머지 6명은 알렉산드로스 3세, 한니발 바르카,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국의 튀렌 자작[3], 오스트리아의 사부아 공자 외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이다.[5] 출처:Imperial Armies of the Thirty Years' War: Cavalry v. 2[6] 무릎쏴, 서서쏴 자세의 2열이나 서서쏴로만 1열로 쫙 서서 한꺼번에 사격했다고 한다.[7] 10kg에 달해서 받침대 없이는 쏘지도 못할 머스킷을 절반으로 경량화 했다. 이는 훗날 총검의 도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8] 당시 큐이레시어들이 주로 입던 쓰리쿼터 아머(3/4갑옷- 풀 수트에 비해 1/4에 해당하는 부분이 줄어들었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음)를 더욱 간소화해 흉갑과 투구로, 혹은 심지어 흉갑조차 입지 않은 기병을 육성했다.[9] 당시 기병의 대세는 권총 사격으로 치고 빠지는 카라콜이었고 총기병과 돌격기병들도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둘을 하나로 합쳐 사격후 돌격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기병대. 기병대 병종 통합은 당시 스웨덴이 기병대를 대량으로 육성하기 힘든 환경이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카라콜은 실제로는 구스타프의 혁신이 아니라 원래 유럽에서 카라콜이 기병의 주된 전술이었던적 자체가 없었다. 17세기 초 제국의 군사 매뉴얼에 카라콜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1612년에 제국군 기병 장군인 조르지오 바스타와 야곱 폰 웰하우젠도 모두 카라콜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앙리 4세 등도 이미 한두발 쏘고 돌격하는 식으로 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헤르만 위고가 카라콜을 언급한 적이 있으나 이것은 아쿼버시어가 보병에 대항하여 한 것으로만 나오지 기병전술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근세의 기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것처럼 무의미하게 카라콜을 하지 않았고 총격과 돌격을 병행하며 싸웠다. 출처:Imperial Armies of the Thirty Years' War: Cavalry v. 2[10] 반자이 돌격을 망했어요로 만든 주범.[11] 바이킹의 후예인 이들은 주적으로 상대했던 남부 독일계 가톨릭 영주민들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인 등에 비해 덩치도 큰 편이었고, 이 시기 스웨덴은 아직도 혹한에서 수렵, 사냥, 어업으로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이킹 시대가 끝난지는 오래지만 바이킹스러운 생활상은 오래 유지되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그 인상도 좀 더 지중해 중심의 '문명'에 가까웠던 가톨릭 세력의 중심인 남부 유럽의 사람들보다 더 거칠고 험악했을 것이다. 여기에 묵묵히 아군의 사격을 루터교회 기도를 낭송하면서 버티다가 갑자기 다가와서 샛노랗거나 시뻘건 수염까지 휘날리며 달려 온다고 생각해 보면...[12] 메르카도르 도법 기반의 지도에서는 한반도의 10배 이상으로 보이지만, 극지방에서 적도로 갈수록 위도 10도 당 간격이 좁아지는 특성을 고려하면 실제 면적은 한반도의 서너 배 정도다.[13] 대체적으로 귀족들이었다.[14] 물론, 난이도와 비용 문제가 있던 머스킷 사격 훈련이 아니라 제식이나 파이크병 훈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5] 굳이 비교하자면 구소련군이 실시했던 제 2 편성제도가 있다.[16] 오늘 날의 군체제와 당시의 군체제를 비슷하게 놓고 생각하면 안된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문서화, 서류화로 체계적이게 분리되고 모병이 쉬운 시대가 아닌, 전반적으로 인구수 부족과 문서화의 수준이 미비했던 시대다. 특히나 스웨덴처럼 기후가 척박하고 추운 곳에서는 작물이 자라기 어려워 인구수 증가에 필요한 농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병을 할려해도 인구가 부족하니, 필수적인 노동인력을 제하면 제대로된 부대를 편제하는 것도 머리 아픈 일이었다. 이 때문에 농업을 보급해서 인구수 증강을 통해 자국 상비군 수를 늘린 것 역시 높이 평가 받고 있다.[17] 이 시기에 용병이라 함은 독일 개신교계열 쪽 용병이 흔했다.[18] 명확한 근거는 없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스웨덴은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억지로 끼워맞춰 스페인이나 네덜란드가 먼저했다고 주장하는 프로불편러들이 존재한다.[19] 첨언으로 본문에서 현대 스웨덴과 핀란드를 모두 '스웨덴 본토', 혹은 '스웨덴-핀란드'로 퉁치는 이유는 당시 핀란드는 상술한 아라곤 왕국, 동군연합 아래 영국의 스코틀랜드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처럼 실제 주권을 가진 군주 가문, 왕실은 다른 나라로 날랐다 해도 법적으로 독립적인 정치체와 자치권은 유지했던 국가 연합 내 속국, 주니어 파트너들과 달리 행정상으로 전혀 독립적인 정치체가 없는, 중세에 스웨덴이 직접 '발견'하고 '정복'하면서 '확장'한 '본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중세시대까지 현대 핀란드 일대를 가리키던 말은 스웨덴어로 '동부 지방'을 의미하는 '외스테를란드(Österland)'였고 '핀란드'는 외스테를란드 남서부에 위치한 조그마한 지방에 불과했는데 이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핀란드'가 '외스테를란드'를 점차 대체하게 된 것이다. 법적인 의미에서 공식 국호에 '핀란드'란 글자를 내걸고 현대 핀란드 일대만을 대표하는 핀란드 '민족'의 국가 비스무리한 대표적 정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웨덴이 핀란드를 상실하고 이를 빼앗은 훗날의 러시아 제국이 만든 19세기의 핀란드 대공국이 처음이다.[20] 참조문헌: Parker, Geoffrey, The Army of Flanders and the Spanish Road, 1567–1659 Glete, Jan, War and the state in early modern Europe: Spain, the Dutch Republic and Sweden as fiscal-military states, 1500-1600[21] 구스타프 아돌프의 이복누나 카타리나 공주의 아들인 칼 10세 구스타브. 비텔스바흐 가문 방계의 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22] 오른쪽 어깨에 맞았는데 저격수의 총알이 워낙 깊이 박히다보니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도저히 제거할수가 없어 수술이 실패하고 만다. 어꺠에 박힌 총알은 신경을 자극하여 구스타브가 죽을때까지 고통스럽게 했고 팔과 손가락을 못쓰게 되었다.[23] 그들의 적이자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지독하게 자비없는 인물인 것도 한몫했다. 일례로 보헤미아 전쟁에서는 반역한 팔츠를 빼았아서 자신의 대학 동창인 막시밀리안 1세 한테 쥐어주고 반역한 신교 귀족들의 땅을 죄다 몰수해서 땡처리 했다. 덴마크 전쟁에서는 반역한 메클렌부르크 공국을 회수해서 자신의 충신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한테 하사했다. 이렇듯 유서 깊은 영지들도 조차 마구잡이로 몰수하는 황제를 제후들은 매우 두려워하고 증오했다.[24] 4편에서는 6,6,6이 능력치 한계지만 2편과 3편에서 군주 능력치는 3-9 사이였다.[25] 캠페인 내 최대 수치를 가진 군주는 구스타프를 포함해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