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스페인어 : Fernando de Austria y Austria-Estiria
영어: Cardinal-infante Ferdinand of Austria, Ferdinand of Austria(Archbishop of Toledo)
1608 or 1609생 ~ 1642 (향년 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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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에서 테셴 공작 카를과 그 궤를 같이하는 최고의 명장.'''
'''나폴레옹 전쟁에 카를 루트비히가 있다면 30년 전쟁에는 이 사람이 있다'''
1608년 스페인에서 국왕인 펠리페 3세와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두 부부 역시도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처럼 6촌간이었다.
형제로는 형 펠리페 4세와 훗날 프랑스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어머니인 큰누나 안 도트리슈, 페르디난트 3세의 아내이자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인 작은누나 마리아 안나가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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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때의 문장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있는 남계 후손들은 성직자가 되게[2] 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아버지 펠리페 3세는 페르난도가 추기경이 되기를 바랐고, 그는 10살의 나이에 톨레도 대교구의 대주교가 된다.
곧 그는 추기경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은 Cardinal-infante Ferdinand가 되고 흔히 '카디날 인판테'라고 불리게 된다.[3] '''뭐, 여기까지라면 평범한 금수저 왕족 추기경의 이야기겠지만, 30년 전쟁은 그를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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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는 초반에는 백산 전투에서의 승리와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선전했지만, 뒤로 갈수록 스웨덴 군대와 프랑스의 리슐리외의 지원으로 틸리가 1631년 전사하고 발렌슈타인 역시 암살되어 물자가 부족해지고, 태산북두의 군 지휘관들이 전사함에 따라 밀리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장군이 부족해지자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추기경 왕족들을 장군으로 만들기로(...) 하여, 1630년 페르난도는 펠리페 2세의 딸의 뒤를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의 총독이 되고 군사 작전에 나서게 된다.
이후 총독직을 수행하다가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 나서게 된다. 당시 신교도 군대는 뇌르틀링겐을 수복하여 도나우뵈르트와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려 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페르난도는 당시 헝가리 왕이었던 페르디난트(훗날의 페르디난트 3세)와 연합하여 뇌르틀링겐 전투에 임한다. 이 전투에서 개신교 측은 상당히 자만하고 있었을 뿐더러[4] , 지휘관인 구스타프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는 서로를 정말 싫어해 원수 보듯 하였지만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소위 '''오래된 테르시오'''라고 불리는 정예병들과 충분한 병력 덕에 스웨덴-작센 군대를 무려 '''8번'''이나 막아내고 격파까지 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이 전투를 통해서 전세는 합스부르크 쪽으로 기울었다. 아울러 스웨덴 역시 전쟁에서 '''거의 이탈'''(!)할 뻔 했으니, 뇌르틀링겐의 승전의 영향은 그에게 지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페르난도. 그 이후 그는 네덜란드의 여러 지방을 위협하고 탈환한 후 급기야는 프랑스를 위협하지만 첫째 매형인 루이 13세와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1637년부터 패배한 후, 그의 위신과 명예는 떨어진다.
아울러 그의 명성을 질투한 궁정 내의 귀족과 펠리페 4세는 그가 루이 13세의 조카[5] 와 결혼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거기다가 스페인의 행정과 재정 역시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과 카탈루니아 반란으로 매우 좋지 않아서 페르난도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1642년 브뤼셀에서 병사한다. 사망 이후 총독이 된 프란시스코 데 멜로는 그만한 자질이 없는 인물인 탓에 로크루아 전투에서 대 콩데에게 대패하여 스페인이 무너지고 합스부르크가 쇠퇴하는 것(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이어진다.
영어: Cardinal-infante Ferdinand of Austria, Ferdinand of Austria(Archbishop of Toledo)
1608 or 1609생 ~ 1642 (향년 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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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에서 테셴 공작 카를과 그 궤를 같이하는 최고의 명장.'''
'''나폴레옹 전쟁에 카를 루트비히가 있다면 30년 전쟁에는 이 사람이 있다'''
2. 생애 초기
1608년 스페인에서 국왕인 펠리페 3세와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두 부부 역시도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처럼 6촌간이었다.
형제로는 형 펠리페 4세와 훗날 프랑스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어머니인 큰누나 안 도트리슈, 페르디난트 3세의 아내이자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인 작은누나 마리아 안나가 있었다.[1]
3. 추기경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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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때의 문장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있는 남계 후손들은 성직자가 되게[2] 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아버지 펠리페 3세는 페르난도가 추기경이 되기를 바랐고, 그는 10살의 나이에 톨레도 대교구의 대주교가 된다.
곧 그는 추기경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은 Cardinal-infante Ferdinand가 되고 흔히 '카디날 인판테'라고 불리게 된다.[3] '''뭐, 여기까지라면 평범한 금수저 왕족 추기경의 이야기겠지만, 30년 전쟁은 그를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 만든다.'''
4.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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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는 초반에는 백산 전투에서의 승리와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선전했지만, 뒤로 갈수록 스웨덴 군대와 프랑스의 리슐리외의 지원으로 틸리가 1631년 전사하고 발렌슈타인 역시 암살되어 물자가 부족해지고, 태산북두의 군 지휘관들이 전사함에 따라 밀리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장군이 부족해지자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추기경 왕족들을 장군으로 만들기로(...) 하여, 1630년 페르난도는 펠리페 2세의 딸의 뒤를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의 총독이 되고 군사 작전에 나서게 된다.
이후 총독직을 수행하다가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 나서게 된다. 당시 신교도 군대는 뇌르틀링겐을 수복하여 도나우뵈르트와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려 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페르난도는 당시 헝가리 왕이었던 페르디난트(훗날의 페르디난트 3세)와 연합하여 뇌르틀링겐 전투에 임한다. 이 전투에서 개신교 측은 상당히 자만하고 있었을 뿐더러[4] , 지휘관인 구스타프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는 서로를 정말 싫어해 원수 보듯 하였지만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소위 '''오래된 테르시오'''라고 불리는 정예병들과 충분한 병력 덕에 스웨덴-작센 군대를 무려 '''8번'''이나 막아내고 격파까지 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이 전투를 통해서 전세는 합스부르크 쪽으로 기울었다. 아울러 스웨덴 역시 전쟁에서 '''거의 이탈'''(!)할 뻔 했으니, 뇌르틀링겐의 승전의 영향은 그에게 지대한 것이었다.
5. 위협과 형의 시기질투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페르난도. 그 이후 그는 네덜란드의 여러 지방을 위협하고 탈환한 후 급기야는 프랑스를 위협하지만 첫째 매형인 루이 13세와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1637년부터 패배한 후, 그의 위신과 명예는 떨어진다.
아울러 그의 명성을 질투한 궁정 내의 귀족과 펠리페 4세는 그가 루이 13세의 조카[5] 와 결혼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거기다가 스페인의 행정과 재정 역시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과 카탈루니아 반란으로 매우 좋지 않아서 페르난도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1642년 브뤼셀에서 병사한다. 사망 이후 총독이 된 프란시스코 데 멜로는 그만한 자질이 없는 인물인 탓에 로크루아 전투에서 대 콩데에게 대패하여 스페인이 무너지고 합스부르크가 쇠퇴하는 것(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이어진다.
[1] 페르난도의 형제들의 아들들(펠리페 3세의 손자들)은 나중에 다 적이 되어, 팔츠계승전쟁과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서 죽어라고 싸운다[2] 대표적으로 페르디난트 3세의 동생 레오폴트 빌헬름, 요제프 2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 다만 예외적으로 레오폴트 2세는 토스카나 대공직을 물려받았고, 형 요제프 2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등극한다.[3] 여담이지만 가장 어린 카디날 인판테는 펠리페 5세의 아들 루이스 추기경으로, 7살에 카디날 인판테가 되었다. 루이스는 페르난도의 조카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증손자니 현손자뻘이다.[4] 병력 수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5] 앙리 4세의 작은 손녀 몽팡시 여공작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나중에 프롱드 난에 가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