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가 죽음으로써 세계는 훨씬 더 지리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진정 보석같은 인간이었다."'''
- '''아이작 스턴''' -
'''"그가 연주할 때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 '''쿠르트 잔데를링''' -
1. 개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힌다.
2. 생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나단 밀스타인[1] 을 길러낸 표트르 스톨리아르스키에게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 러시아는 거의 레오폴드 아우어(하이페츠의 스승이기도 하다) 악파가 독점하다시피 했을 때로, 그 스타일은 상당히 절제적이고 통제적이였다. 그에 비해 스톨리아르스키의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뒤 아주 어린나이인 1914년 데뷔한 후 이후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오데사 콘서바토리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1927년 그의 음악에 매료된 작곡가 글라주노프에 의해 키예프에서 그의 바이올린협주곡을 협연함으로서 진정한 고수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1934년부터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강사자리를 얻게되었고. 1935년에 소비에트연방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에서 2위를 차지했는데, 이때 참가자가 대단하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포함하여 콩쿠르 1위를 차지한 16세의 프랑스 소녀 지네트 느뵈[2] , 특별상을 탄 7세의 이다 헨델이 바로 참가자였던 것이다.
이후 이자이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단숨에 소련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당의 지시로 공장과 병원에서 연주를 펼쳤고, 배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대공방전의 와중에 그는 바로 레닌그라드에 남아 항쟁 의지를 북돋우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2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미아스코프스키와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고, 프로코피에프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으로 편곡을 의뢰하여 초연(1944)했으며 쇼스타코비치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헌정받아 초연하기에 이른다. 뛰어난 연주자가 상대적으로 사회의 영향으로 날개를 늦게 폈다고 할 수 있다. - 네이버캐스트 클래식 ABC 인용
후에 지휘자로도 활동하였으며, 고결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은 스승이자[3] 칭찬을 아끼지 않는 공정한 심사위원이었다.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를 필두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꼽히며, 커리어와 함께 교육에도 크게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을 듣는다.
1974년 암스테르담 연주여행 중에 사망하였고, 시신은 모스크바로 보내져 그곳에 묻혔다.
3. 연주스타일과 평가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시대를 풍미하였던 야샤 하이페츠와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자리를 놓고 다툰다.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정확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때로는 단호하고 매정하면서도 때로는 따뜻하고 구슬픈 다채롭고 서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대체로 하이페츠에 비해 인간적이고 따뜻하다는 평이다)
Leclair violin sonata no.3을 들어보자.
브람스 협주곡: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David Oistrakh
하이페츠와 비교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Jascha Heifetz
이작 펄만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Itzhak Perlman
탬포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이페츠가 기교를 적절히 과시하면서 곡 전체를 함축적으로 몰아치는 스타일이라면 오이스트라흐는 완급 조절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야구 선수로 비유하자면 하이페츠는 어마어마한 스터프의 포심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아롤디스 채프먼 같은 스타일이었고 오이스트라흐는 포심의 구위도 정상급이지만 완급 조절에도 능한 킹 펠릭스 같은 스타일.
소리도 하이페츠는 엄정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면 오이스트라흐는 서정적이고 따듯한 느낌이다. 그의 레코딩중에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것이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인데 오이스트라흐의 서정성과 따듯한 음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녹음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도 명연이다. 다만 위에 사진으로 나온 오이스트라흐 에디션 세트음반을 최후로 재출반이 안되고 있어 아쉬울 뿐.
4. 여담
-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 또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다. 참고로 손자인 발레리까지 3세대가 한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켠적이 있다고 한다. 음악인으로서 복받은 셈.
-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펴낸 이중주 음반이 꽤 있는데 두 바이올린이 잘 어우러져서(아빠와 아들이니까) 들을 만하다.
5. 관련항목
- 바이올리니스트
- 야샤 하이페츠 -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인물.
-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 같이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아래 합주하던 때도 있었다. 당시 EMI, 현재 워너 클래식 레이블로 음반을 구할 수 있다.
- 기돈 크레머 - 오이스트라흐의 대표적인 제자.
[1] 그런데 나단 밀스타인은 오이스트라흐보다 훨씬 절제적이다. 오죽하면 그 당시 대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지휘하는 그의 협주곡에서(나단 밀스타인의 정식 데뷔 무대였다.)어린 밀스타인은 이 작품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을 하여 연주했는데 글라주노프는 이에 대해 의아해하며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중얼거렸다. 리허설이 끝나고 글라주노프는 밀스타인의 해석이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조로 그러한 접근 방법에 대해 인정하였다고 한다. - 출처) Unquestionable 6. Glazunov Violin Concerto - Nathan Milstein, William Steinberg[2] 느뵈의 연주가 대단해서 심지어 소련의 심사위원도 그녀에게 점수를 더 줬다고 한다. 느뵈는 매우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3] 제자에게 '그분(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저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라는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