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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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이자, 냉전 시대 제2세계의 종주국이다.[4]
1922년에 건국되어 1991년에 해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5] 와 3번째로 많은 인구[6] 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의 전신 국가로서 여겨지고 있으며 냉전 시대 미국을 상대로 대립했던 초강대국이었다.
2. 상징
3. 역사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10월 혁명을 계기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할 것을 우려한 열강들이 잔존한 황제파, 즉 백군을 지원하며 적백내전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일부 중심도시를 제외한 영토 전역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를 거두면서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현 벨라루스), 자캅카스(현 아제르바이잔) 4개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하면서 탄생하였다.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세계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이건 카를 마르크스 선생이 생각한 혁명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한 혁명(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빠진 반쪽짜리 혁명)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낳을 것이다'라며 강하게 디스를 했고, 이에 소련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부하이자 이론가였던 레프 트로츠키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라며 카우츠키의 지적을 강하게 쏘아붙였다.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7] 의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혁명은 단계적인 절차(민주적 절차)를 통해 점차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은 자본주의가 부후화되어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불가능해졌으므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켜, 폭력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낮은 생산성과 이로 인한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처음부터 소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까지만 해도 소련의 공업 생산량은 미국의 8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8] 이었고 러시아 제국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말~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었다. 소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소련의 최고 권력자(최고 인민회의 의장)가 되었던 레닌은 소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소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레닌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 일부를 도입하였다.
1924년 레닌 사후부터 시작된 공산당내의 혼란기에 세계혁명을 주장한 트로츠키를 위시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928년 최고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소련을 공업국가으로 바꾸기를 원하였다. 1931년 스탈린은 '''"우리는 서방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소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서구권을 위협할 만큼 급격하게 성장했다.
대공황으로 서방이 무너져 갈 때 소련은 대공황을 무시하고 성장하였으며 1930년대 중후반에는 유럽 제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스탈린 시대 소련 국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스탈린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하여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시베리아나 서부 러시아에 있는 굴라그에 강제로 끌고 갔다.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 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야말로 철권독재를 했다. 스탈린의 강력한 정적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도망을 갔으나, 1940년 스탈린이 보낸 라몬 메르카데르라는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물론 스탈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죽었고, 후임자인 흐루쇼프가 트로츠키 암살자인 라몬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여했다.[9]
어쨌든 서구권의 열강들이 세계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스탈린의 소련과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나란히 약진했고, 스탈린은 초기에는 반공을 외치는 독일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안 풀리자[10]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나치 독일과 폴란드를 양분하고 핀란드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는 등 잘 나가다가, 1941년 6월 독일에 의하여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잉여가 된 군 지휘 체계로 인해 초반에 크게 밀렸으나,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을 사수하고 1943년 8월 지상 최대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까지 승리하면서 전황이 반전되었고 이후 대반격하여, 결국 1945년 5월 베를린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소련 역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부터 진격해 내려왔고, 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했다.[11] 그 과정에서 2,700만에 달하는 국민들이 희생되었긴 하지만.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하는데, 약 5년간 전쟁하느라 공업과 농업의 기반이 전부 날아가버려서 재건하는 데 또 국민이 갈려야 했다.
하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았다. 사실 소련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방대한 강역에서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는 전세계에 소련과 몽골 인민 공화국, 그리고 1921년부터 1944년까지 존속하며 끝내 소련에 편입된 투바 인민 공화국이 끝이었던 것. 하지만 소련은 2차 대전의 승리로 그 잃었던 영토를 거의 다 되찾음은 물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을 전부 영향권으로 집어삼켰으며,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잭팟이 터졌다. 한편으로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권으로 갈아타고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아프게 하며, 먼로 독트린 이후 계속 미국의 앞마당 취급 받았던 중남미에서 대규모 좌익 운동, 좌파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 등 '''자본진영의 총본산 턱 밑에 공산주의의 칼을 들이대는''' 성과를 거둔다. 그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소련은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서 약 50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과 보이지 않는 대결을 반복하였다. 통칭 냉전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 한반도와 베트남,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온갖 지역 국가들이 이념 대립의 대리전장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 확실하게 개박살을 내버리려고 양 진영의 주요 도시에 항상 ICBM을 겨누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게 강대한 군사력과 매혹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소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부족한 가운데 사적 소유가 철폐된 결과 등장한 '비민주적인 계획경제'에 내재된 효율성 부진으로 인해 전면적 대립보다는 데탕트, 공존 경쟁이 추구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서기장이 된 사람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였으나 곧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만에 사임하였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잔인한 독재자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며 신격화의 영역까지 갔던 스탈린의 격하 운동을 주도했다. 또 스탈린 시대에 억압받았던 사회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권력투쟁에서 지면 처형이나 다름없던 스탈린 체제의 정치를 크게 순화시켰다. 굴라그에 수감된 정치범들의 수도 스탈린 때 300만명에서 1956년에는 100만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러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서방과 소련 내부는 물론이고 공산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중국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 비판하였고, 결국 중소 국경 분쟁까지 벌어지는 등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졌다. 동유럽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났고 소련은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였다.
스탈린 때까지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했음에도 정작 국민의 삶의 질은 낮은 수준이었지만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 국민의 삶의 질도 상당히 나아졌다. 생활 수준도 올랐고 미국의 잡지를 비롯해 일부 영화, 책, 음악, 예술의 자유[12] 등이 허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허용되었고 서방과의 교류도 늘어났다. 다만 미국과의 냉전과 체제 경쟁 자체는 이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특히 우주 분야에 있어서 흐루쇼프 때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를 날려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개를 우주에 보냈고,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와 1962년 인류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를 탄생시켜 경쟁국 미국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결국 농업정책에서 큰 실패를 했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다가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으며, 끝내 권력 기반이 약해져 실각되어 버렸다.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된 인물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그의 통치 하의 소련은 서방에서 '회색의 시대'라고 불렸고, 브레즈네프 사후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의 시대를 '''침체의 시대'''(Эпоха Застоя, Era of Stagnation)로 불렀다. 이는 근본적으로 경제력이 서방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명하복식 관료주의의 체제로 인해 사회가 천천히 무너져갔다. 경제 성장은 둔화되었으며, 떨어져가는 노동생산성으로도 증명되었다. 이는 브레즈네프의 시대엔 별다른 개혁도 없었고, 개혁 시도를 흉내내더라도 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아져 사람들의 삶은 편안해졌고, 특별히 피를 부르는 사건이나 숙청도 거의 없었다. 한편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국방비가 GNP 대비 12%나 될 정도로 늘어나고 비대칭 전력의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물론 침체의 시대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 후 동유럽에 개입하여 프라하의 봄과 폴란드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해버렸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인도-아라비아해의 주도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소 봉쇄를 시작하였다.
최초로 시도된 것은 식량 봉쇄였다. 소련의 농업은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로 박살난 이래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대대적인 농지 개간과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자급을 하지 못 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이는 소련의 농·축산업 체계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만 해도 중유럽을 먹여살렸던 과거[13] 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미국에서만 매해 2,500만 톤이 넘는 곡물을[14] 수입해야만 했으며, 이 막대한 수입량을 다른 곳에서 대체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카터 행정부는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수출 중단으로 인해 소련으로 흘러가던 막대한 곡물들이 시장에 풀리자 식량 가격이 대폭락하여 미국의 농가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일시적인 식량 위기를 벗어난 소련은 폭락한 국제 곡물 가격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통해서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15]
다른 한편으로, 카터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스팅어 지대공미사일 등의 각종 무기를 지원했다. 교외를 장악한 반군이 소련 손아귀의 도시들과 거점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소련군은 수송과 교통을 위해 항공편을 사용하여야 했는데, 미국의 물밑지원으로 상당한 무장력을 갖춘 무자헤딘 반군이 게릴라전으로 헬기 전력에 대항하자 소련은 빠져나갈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저 국방비만 쏟아부을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전면적인 경제 봉쇄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막대한 재정 출혈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원자재 수출로 간신히 명줄을 연장하던 취약한 소련 경제를 붕괴시키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석유값이 일정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 취약성은 극대화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장기 집권은 그의 사후 권력을 이어받을 만한 실력자들이 함께 폭삭 늙어버렸으므로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1년씩 재임하고 바로 죽는 혼란기가 찾아와서 권력의 공백은 심화되었다.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등극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그는 1985년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시행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해 하반기에 사우디 아라비아와 미국-영국의 치킨게임으로 1986년 석유값이 폭락하여 세수가 크게 줄어버린데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터지면서 결국 소련의 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버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라스노스트는 소련 체제 하의 온갖 비리와 범죄를 드러내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다. 한번 시장의 고삐가 풀리자 인플레이션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혁신 정책은 원래의 의도는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붕괴를 초래했고,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발트 3국 등지에서 처음으로 독립을 외치며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탈퇴와 민족국가로써의 자주독립,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환원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소련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 체제만은 유지하려 하였고,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7.8%의 지지를 얻었지만, 8월 쿠데타가 터졌다.
8월 쿠데타 이전만 하여도, 당시 소련은 초강대국이라 외부의 위협은 미국밖에 없고 자원도 많으며 내부 통제도 잘 이뤄지고 있는데다가 중진국 수준의 1인당 GDP에다가 괜찮은 수준의 복지수준을 보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이런 나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9년에 동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붕괴되는 와중에도 소련은 아직 건재했기에 1991년 초만 해도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국제사회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만 생각하고 망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8월 쿠데타가 드러낸 현실은 소련을 지킬 내부 엘리트는 아무도 없다는 진실이었다.
보리스 옐친이 이를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입지가 더욱 커지자 소련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쿠데타는 민중의 저지로 인해 실패로 끝났으나, 권력은 옐친에게 쏠렸다. 1991년에 이미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쿠데타 진압으로 정치적 스타가 된 보리스 옐친은 이미 진작에 소련을 탈퇴한 공화국[16] 을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한 소련 소속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기로 밀약했다.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련을 탈퇴하는 바람에 소련은 가입국 하나도 없는 빈사 직전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소련은 공중분해되었다.
소련이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는 러시아 연방이 계승하였으며, 소련의 공화국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모조리 독립국가가 되어버렸다. 이후의 상황은 러시아 참조.
4. 국토와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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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국가였다.''' 현재의 러시아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지만, 소련은 그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그 땅 넓다는 캐나다, 미국, 중국보다 2.3배, 브라질보다 2.6배, 호주보다 2.9배 정도 더 넓은 나라가 소련이었다!''' 현재의 신생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고작 76%에 불과하다.''' 참고로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17] 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금도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은 경제적 가치가 꽤 높은 편이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그 크기는 '''북아메리카에 버금갈 정도였다.''' 물론 그런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다만,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다. 게다가 그 거대한 국토 중에서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18]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19] ,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20] 파키스탄과도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그러나 거대한 영토에다 정작 식량만은 자급자족을 못 했다. 사실 소련의 경지면적이 국토 크기에 비하면 좁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계 1위의 경지면적이었고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있기 때문에 농업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기만 했다면 식량 역시 자급자족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당장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크론쉬타트를 통해 수출되는 우크라이나의 밀은 러시아의 대영국 외교 카드로 사용될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21] 즉, 소련의 식량 자급이 힘들었던 것은 경지면적 등 천연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방(특히 미국)을 따라잡고자 무리해서 중화학공업에 몰빵한 결과로 발생한, 농업 시스템 · 농업 기술 · 농자재[22] 산업의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비효율 탓이 큰 것이다. 특히 소련의 밀 생산량은 당시 세계 1위였지만 정작 가축 사료용으로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해야 했다. 전략무기를 위한 자원도 엄청나게 생산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 속했으나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고[23]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24] 으로 높이는 무려 7,495m로 세계에서 50번째로 높은 높이를 자랑한다.[25] 그리고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인 산이다.
소련의 각 공화국 영역은 그대로 현재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26]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27]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소련 해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5. 행정구역(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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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 당시 행정구역일람. 굵은 선 안쪽이 소련 당시의 영역이며, 분홍색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그 이외의 색의 지역은 현재 독립된 국가들로 귀속되었다.
소련을 이루는 구성체 중에는 '공화국' 이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28]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의 권력기구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러시아인이었고, 헌법상으로'''만''' 보장되는 소수민족의 권리는 소련 초기에는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소련은 다음과 같은 구성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 소련의 연방 구성체인 공화국
소련 바로 아래 단계의 공화국이다. 소련이 처음에 세워졌을 때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의 7개의 연방 구성체 공화국들로만 이루어졌었다. 후에 생긴 아래의 여러 연방 구성체 공화국들은 이 7개의 공화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자캅카스 SFSR은 아래 적혀있듯 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화국으로 분리되고, 중앙아시아 5개국인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화국도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에서 분리된 것이다. 또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화국처럼 기존의 독립국가를 흡수해 편입시킨 것도 있다.
- СФСР(SFSR)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29] 그러니까 소련이라는 연방 국가 산하에 또 연방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30] 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1936년부터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소련의 유일한 SFSR였다. 정식 명칭으로 부르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ССР(SSR)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그런 거 없었다.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 공화국에는 연방을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으나 1936년 헌법 이후부터는 -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에 속하는 지역
- АССР(ASSR) -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약칭 자치공화국)
헌법에 따라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 연방 공화국같이 땅덩이가 워낙 크거나 캅카스 지역처럼 복잡한 민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소련 자체도 나라(독립국가)이고, 소련을 구성하는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들도 나라(속국)로 볼 수 있으며, 소련을 구성하는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한 공화국들도 나라(속국의 속국)로 볼 수 있다. 결국 소련이라는 국가는 '나라 안의 나라 안의 나라'(...)라는 기이한 형태로 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소련 붕괴 후에 SFSR과 SSR이 독립국으로 찢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했는데, ASSR 개념은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 안에서 '자치공화국'이나 '자치주' 등의 개념으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그은데다가 민족분포를 고려했다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이주로 민족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41]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 АО(AO) - 자치주
5.1. 단명한 공화국들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1924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22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36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
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1924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
오데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1918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40~1956
6. 괴뢰국·위성국
7. 정치
8. 경제
소련의 경제적 특징은 아래와 같다.
소련의 경제는 1960년대까지는 미국보다 성장속도가 2배 이상 빨랐지만[42] , 코시긴 개혁 실패 이후 서서히 공산주의 국가의 한계를 보이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는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1985년까지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였고[43] , 1990년에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9,300달러 정도였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 절반 정도인 약 5,800달러 정도였다. 다만 이는 심각한 오류가 있는데 국민 소득은 소련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교환가격으로 계산했는데, 이는 루블을 지나치게 평가절상한 것이다. 소련은 GNP나 GDP를 발표하지 않아 대부분의 통계 자료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내전 직후 소련의 산업시설은 거의 전무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신경제 정책을 도입했고 농업과 상업은 활성화 되었지만 공업이 발전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집권 이후에 테러, 폭력에 기반한 무자비한 산업화를 추진했으며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1차, 2차 5개년 경제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소련은 2위 경제/공업대국이 되었다. 비록 나치 독일의 침공 이후로 다시 초토화되었지만 1950년대 중반에 전후복구를 끝냈다. 스탈린 이후, 특히 흐루쇼프~고르바초프 집권 초반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중진국~선진국 수준으로 꽤 살만한 국가에는 속했다. 특히 1950~6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당시 기준으로 못해도 미국의 2배 이상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국인들이 진지하게 소련 위협론을 논했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이 제시된 것도 체제경쟁에서 적어도 밀리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비해 이러저러한 문제점은 많았지만 사실 소련 경제는 전반적인 체급은 튼튼했다. 비록 경공업이 빈약해 생필품 부족이 빈번했고 식량 역시 미국, 아르헨티나[44] 등지로부터 막대한 양을 수입했지만[45] 중공업/화학공업이 튼실하여 공업 생산량은 세계 5분의 1이나 되었다. 의료와 교육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서비스는 국가가 무상으로 지원했으며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도 이루어져 생활수준도 전체적으로 높은 편에 속했다. 실업률은 약 1%~2%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며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CIA 자료를 포함해 몇몇 사료에서는 1인당 GNP를 1990년 기준으로 9,300달러로 당시 기준에서 중진국과 선진국의 사이 정도의 소득은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세계 3위에 달하는 3억의 인구 덕에 국민총생산(GNP)은 1985년까지 세계 2위(1977년 당시 국민총생산 8,200억 달러), 1986년에 일본에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로 추월당했으나 1990년까지 3위를 유지하였다.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통계에는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련의 공식 환율이나 가격 등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특히 CIA의 방법론은 냉전에 따른 정보 제약 등으로 말미암아 GDP 조사 등에 관해 소련의 공식 가격이나 환율에 기초하였는데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간의 차이가 있었고, 사치품을 비공식 환율대로 수입했다는 것이다. 이는 GDP를 포함해 실업률, 지니계수를 위시한 소득분배지표에도 적용된다. 관련문서 1980년대만 하더라도 당시 소련은 공식적으로 루블 환율을 0.6 대 1 수준에서 유지했었고 이는 당시의 암시장 환율에 비하면 비정상적으로 고평가된 수치였다. 1980년대 후반 루블/달러의 암시장 환율은 4~5 대 1 수준이었고 이는 10배가 좀 안 되는 수준이었다. 관련문서 이 외에도 상품가격의 경우 공식가격에 비해 2~3배는 비쌌다.
UN의 통계에 따르면 1인당 GDP는 1983년에 3,650달러로 가장 높았고(당시 시장가격을 반영한 수치다.) 관련자료 그 이후로는 대체로 감소 추세였다. 이에 기초해 GDP를 따지면 1978년부터 일본보다 그 수치가 낮아졌다. 1980년에는 서독에도 일시적으로 역전당했고, 1986년에 다시 역전당했다. 미국에 비교하자면 1970년 기준으로 약 절반 수준인 GDP, GNP를 자랑했으나 80년대에는 1/3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교육이나 의료는 무상이었기 때문에 돈이 일절 안 들었고, 보조금을 통해 기본적인 생필품 가격이나 식료품 가격, 외식비용도 싸게 유지했던데다가 주택임대료 같은 부동산 비용과 전기료. 교통비 같은 공공요금도 매우 싼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실질 구매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이기는 했다. 1980년대 소련인들의 평균 월급 수준이 200루블 정도로[46] 당대의 공식환율로 쳐도 좀 사는 중진국 수준에 불과했지만 교통비의 경우에는 버스, 지하철, 트램을 한번 타는데 5코펙이고 아파트 월세비도 대략 5루블로 보드카 1병값(1980년대 후반에는 반병값) 정도면 충분했다. 또한 빵값이 워낙 싸다보니 농촌 지역에서 빵을 아예 '''가축사료'''로 쓸 정도였고, 고기는 미국보다 비싸기는 했지만 감당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라서(1980년대 후반 기준으로는 고기 1kg 가격이 2루블) 육류소비량의 경우에는 남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비록 사치품의 가격이 비싸다해도[47] 기본물가가 무척이나 싸다보니 각 가정마다 수천루블에 달할 정도의 예금자산을 보유할수 있었다. 즉, 명목월급은 200루블이지만 실질구매력은 그의 몇배 이상이었다는 얘기이다. 1:1로 대응하기는 힘들지만 지금으로 치면 대졸초봉이 100만원대에 좀 자리잡은 직장인들도 월 300만원대 벌면 잘번다는 소리 나올정도로 한국보다 훨씬 밀리는 수준이지만 1인당 PPP는 일본을 넘는 대만이나 월급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을 넘어서고 PPP는 10만 달러로 세계 3위를 찍는 싱가포르와 얼추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48] 그러나 수입품이나 사치품은 암시장 가격을 적용받았기에 '''몇 배 이상씩 바가지를 써야 한 것이 문제였고''' 또한 상당수의 공산품을 구매할 때에도 길게 줄을 서거나 자동차나 카페트, 전화기같은 물품의 경우에는 받는데까지 몇달에서 최대 몇년씩 기다려야되는 등 구입에 불편함을 감수해야했다. 높은 구매력을 지녔던것과는 반대로 소비수준이 그리 높지 못했던 것이었다. 소련인들이 체제에 가졌던 불만의 이유도 국민들의 대다수가 중산층인데다가 은행에다가 돈을 어느 정도 저축할 정도로 여력이 있으니 자연히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음에도 정작 사치품을 구하려면 발품을 수없이 팔아야 되었다는 점이었으며, 그 때문에 공식상점에서 제때 공급해주지 못하는 사치품을 대신 공급시켜 주는 지하경제 규모도 엄청나게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암시장이나 농민시장에서 가볍게는 다차(별장)에서 생산한 작물들을 교환하거나 판매하는 건 물론이고, 물론 직원들이 몰래 몇개씩 빼돌린 제품도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공산당 당원이거나 국영기업에서 주요직책을 맡을 정도가 되면 인맥이나 뇌물 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서방에서 비디오테이프나 음반 같은 걸 수입한 다음에 웃돈에 팔아서 짭잘하게 용돈벌이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암시장에서 파는 수입품의 가격이 암시장 환율에다가 추가적인 이윤이 붙기때문에 물건값은 왕창 비쌌다. 잡지나 만화같은것을 조금만 골라살려도 해도 한달치 월급이 날라가는것은 물론, 옷같은 경우에는 이것저것 골라사면 1년치 봉급을 날려야될수도 있었다. 소련에서 1980년대 최저임금인 월 70루블 정도만 받아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금액이지만 암시장으로 가서 환전할 경우에는 루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49]
즉, 당시 소련의 생활상을 요약해 본다면 '''확실히 일하기는 괜찮았고[50] 나라에서 보조해주는 것은 많았기 때문에[51] 개인이 돈을 모으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52] 고작 그렇게 해서 모아둔 돈 가지고 새 차를 뽑으려면 몇 년씩 기다려야 하거나[53] 카페트를 구하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 구매력을 충족시킬 만큼의 고품질의 소비재가 제대로 공급 안되었기 때문에 그 구매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2억을 넘는 거대한 중산계층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54] 경공업의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대한 중산계층의 구매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석유값 상승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그 돈을 경공업 확충보다는 서방 및 제3세계 국가에서 양질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데 썼고, 이로 인해서 1980년대에도 경공업의 자립이 난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55] 석유값이 폭락하자 국가 재정도 나빠지면서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성장률의 경우 스탈린, 흐루쇼프 시절에는 미국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계획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경제가 침체되었다. 다만 1960년~1989년까지 소련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전 세계에서 평균 이상이었고 1980년대에도 미미하게나마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1986년 이후에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저유가로 말미암아 -2~2% 수준의 저성장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낮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훨씬 높았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의 경제상태가 워낙 개막장이라 묻히는 것이지 소련 말기의 경제 상황도 결코 좋지는 않았다.
8.1. 과학기술 및 산업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린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에 개(라이카)[56] 를 보낸 나라이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와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배출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루나 9호)[57] 시킨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을 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을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최초로 금성에 착륙(베네라 7호)한 나라이기도 하다.
소련은 국가가 계획경제에 의거해서 과학기술을 중점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에[58] 기초과학, 우주과학기술, 군사공학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항공우주공학 분야는 '''넘사벽이었다.'''[59] 세계 최초의 무인우주선, 유인우주선 모두 소련이 날렸고 당장 화성, 금성, 수성에도 탐사선을 보내고 소련 붕괴 직전까지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 물리학, 수학, 군사 기술에 있어서 소련은 고급 인력이 다수 있었으며 중공업은 우랄 콤비나트 등 막대한 군수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발전시켰다.[60] 특히 핵물리학이나 화학, 천문학에 있어서 소련의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니콜라이 세묘노프는 소련 성립 이후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벨화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소련 시절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경우가 총 4번 있었고 노벨화학상은 전술한 경우 한 번이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소련 시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노벨물리학상을 2차례 더 받은 바가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들이 외부로 유출되어 현재 러시아의 기초과학 수준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는데,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다. 몇cm도 아니고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9. 군사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РККА, 1918–1946)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С СССР, 1946–1991)이 있다.
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그 미군 육군을 뛰어넘는 최강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10. 외교 및 안보
외교·안보적 특징은 아래와 같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소련 해체까지 미국과 양극체제를 구축하여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으나, 실제론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자 공업 대국인 미국을 압도할 능력을 갖춘 적이 없었고 단지 위협 정도에만 그쳤을 뿐이다. 그래도 전성기에 미국 경제의 40%를 넘는 경제를 자랑하며[61] 역사상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나라긴 했다. 국제연합(UN)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으나, 타 상임이사국들(미국·프랑스·영국·중화민국)이 모두 서방세력이어서 반대권(Veto)을 행사하는 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대부분의 시기를 서방세력(미국)과 신경전을 벌였다. 197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이 된 이후로는 좀 나아졌다.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이외에도 헌법으로 소속 공화국들의 외교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소련과는 별도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 벨라루스)도 유엔에 창설멤버로서 가입했다. 처음에는 유엔에서 16개(소련+15개 공화국)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한 속셈으로 모든 공화국을 가입시키려 했다.[62] 애초에 소련은 자국 내부의 공화국들도 일종의 나라라고 인식했기에 약간의 외교권을 인정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공화국들이 자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소련의 실상을 알고 있던 미국이 50개 주를 모두 가입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자[63] 최종적으로는 소련의 창설멤버였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가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예상대로 소련 해체 전까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철저히 소련의 거수기 역할을 했다. 그나마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예외적으로 가입시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은, 초기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 중 오직 소련 혼자만이 사회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나라였기에[64] 소련을 위한 일반 유엔 회원국 자리라도 늘려 줘서 불만을 달래려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10.1. 남·북한과의 관계
대한(對韓) 수교관계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이 승계하였다. 소련 존속 당시 수교관계 형성연도는 다음과 같다.
10.1.1. 북한과의 관계
10.1.2. 남한과의 관계
11. 사회
11.1. 주요 도시
11.2. 민족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3위를 추월당해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가지에 달했었다.[65]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명), 우즈베크인(1,670만명), 벨라루스인(1,004만명), 카자흐인(814만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66] 도 각각 204만명, 138만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 파탄을 겪었던 탓이다.
11.3. 복지
복지제도는 공산국가라는 특성답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탁아소는 전국적으로 체계적인 수준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매우 잘 되어 있었고[67] , 아이를 기르는데에도 보조금을 충분히 지급해주어 적어도 아이를 기르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다. 또한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는데,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다만 의료는 급할때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었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공짜로 받을수있어 접근성은 높았지만, 그 높은 접근성에 비해서 질은 다소 떨어진다는 평이었다.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소련의 모든 의료 기관에 무료로 입장할 권리가 있다.
소련 헌법(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 제42조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에는 "새나토리움"(Санаторий)이라는 시설들이 있었는데, 일종의 복지기관으로, 노동자들이 휴식과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68] 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또한 무상의료가 실질적인 형태로 구현된 인류 역사상 유일한 국가였다. 실제로 소련이 붕괴된 직후 러시아가 극도의 혼란기에 있던 시절인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였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소련 시절의 무상의료 제도는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였다.
11.4. 교육
[69]
소련의 교육정책은 광대한 영토에 수백여 가지 민족[70] 이 공존하던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과 러시아인 차이 할 것 없이 보통 교육을 실시하여 문맹을 완전 퇴치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대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아랍/베르베르 현지인 초등학생 취학률이 6%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의 교육 체계는 3단계로 구분되었다. 초등학교는 '시작' 단계로 불렸고, 3~4개의 과목을 교육했다. 중학교는 '불완전한 중등교육'으로 불렸고 7~8개의 과목으로 운영되었다. 중학교까지는 사실상 의무교육이었으며, 이 단계를 모두 마치는데는 10~11년이 걸렸다.
중등교육은 '2차 교육'으로 불렸다. 일반고등학교는 10개의 과목이 있었다. 또한 PTU라는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기계공, 미용사 등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술을 훈련시켰다. 중등교육을 마쳐야만 전문기술직이나 하급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고등교육은 대학, 연구소, 사관학교를 일컬으며, 이 기관들은 VUZ라는 약자로 불렸다. 중등교육까지 마친 사람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전반적인 교육수준은 높았다고 평가되나, 교육내용이나 수업방식이 다소 보수적이고 딱딱한 면이 있었다고도 평가된다. 소련 학생들은 공산당의 직접 간섭을 받아야하는 인문학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은 이공계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71] 물론 그렇다고 인문학 쪽이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근본주의 국가처럼 완전히 엉망진창 망가진 것은 아니고 우수한 수준을 유지하였다.
12. 문화
오늘날 중국 문화가 중국 공산당의 지나친 중화주의로 반감을 크게 사며 중국 외 국가에서는 외면받는 것과 달리 냉전시대 소련 문화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소련 영화의 경우 상업적으로는 미국 영화에 밀렸을지 몰라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 유수의 영화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이 계속 쏟아져나왔다. 오늘날 중국 영화가 양적으로는 규모가 커져도 아직 세계 영화사에 상업적 규모 외에는 질적으로 영향을 준 적이 없고 아직 중국 출신 유명 작곡가들이 현대 음악계에 영향을 준 적도 없다는 점과 비교 가능하다. 소련의 애니메이션 역시 애니메이션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었다.
소련의 문학은 러시아 제국 시대에 비해 약화되었을지언정 소련은 푸시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체호프, 고골, 투르게네프의 문학작품을 민간에 보급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72] , 러시아 혁명 당시 해외로 피난간 러시아계 난민들이 러시아 문학을 전세계에 보급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통계조작 의혹이 있긴 하지만 소련인의 독서율은 미국인 평균보다 전반적으로 더 높은 편이었다. '''2021년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중문화가 미국보다 우월하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제적으로 엄청난 조롱과 비웃음을 감수해야 하지만, 냉전 시대에는 소련 문화 혹은 소련 대중의 문화 생활이 미국의 그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73] 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나름 오페라나 순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이런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 문화 수요가 질적으로 하락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74] 러시아 사람들 중에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소련 해체의 결과가 체호프의 책을 읽던 아이들이 겨우 해리포터 읽거나 이상한 핸드폰 게임 하는게 다냐?'고 푸념하면, 소련 해체를 긍정하는 사람들도 이 부분 만큼은 한숨쉬면서 동의해줄 정도.
13. 소련 해체
1991년 소련의 해체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소련의 갑작스런 붕괴는 러시아의 경제몰락을 일으켰으며, 지식층에서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실패했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CIA를 비롯하여 학자들의 예측이 모두 실패하여, 예측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실패로 끝나 버린 소련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65%의 러시아인이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행인가?"라는 질문에 긍정하고 있고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같은 소련 구성국들, 심지어 반러감정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조차도 러시아는 몰라도 소련에는 상당한 향수를 가진 인구가 많다는 걸 보면 러시아와 옛 소련 구성국들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막상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공산당의 득표율이 별로 높지는 않고, 소련 해체 이후로 한 번도 선거를 통한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다.[75][76] 반소, 반러감정이 심한 폴란드에서도 옛 공산당이 사민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뒤에 재집권에 성공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묘한 일.[77]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1999년 러시아 총리에 재임할 때부터 체첸 반군을 쓸어내면서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한데다가 러시아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로는 미국에 맞서는 이미지를 만들어서 옛 소련에 향수를 느끼는 유권자들의 표를 휩쓸어서 그렇다. 정치적 자유도 생각보다는 어느 정도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당과 정부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허용되었다.
14. 대중매체에서의 소련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대부분 악의 제국으로 묘사된다. 특히 냉전시기 제작된 미디어에서는 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007 시리즈등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에 제작된 매체라도 냉전기가 배경이라면 주인공은 대부분 서방측 인물이기 때문에 소련 등 동구권은 십중팔구 악역으로 그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외적으로 2차대전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서방이 소련과 동맹하여 공공의 적인 나치와 싸웠다는 역사 덕분에 선역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에너미 앳 더 게이트나 콜 오브 듀티처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선입견에 따른 왜곡[78] 이 가미되어 안티히어로 역할을 주로 맡고 있다.
비틀즈의 Back in the U.S.S.R.이란 곡도 있다. 여기선 소련에 대한 그런 거 없고 동유럽 여자를 찬양하거나 농장이나 자연 등의 이야기를 한다.
14.1. 영화
냉전과 제2차 세계 대전, 그 중에서도 동부 전선을 '''조금이라도''' 다룬다면 반드시 등장한다.
-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소련군 측을 주인공삼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철저히 서방의 시각에서 소련을 묘사했기 때문에 영화초반 돌격장면 등 소련군에 대한 왜곡과 고증오류가 담겨있어 실제 구 소련 출신 참전용사들이 해당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런 꼴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블랙 코미디 영화 아이언 스카이 속편 엔딩에서 뜬금없이 화성 표면에 있는 '''낫과 망치''' 모양의 기지를 보여주면서 떡밥을 뿌렸다.
14.2. 게임 & 애니메이션
FPS 역시 동부전선이 배경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며, 대표적인 등장하는 게임으로 레드 오케스트라와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있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는 원래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스턴 프론트 모드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아예 배경이 독소전쟁이다.
- 벽람항로에 소련을 모티브로 한 세력인 노스 유니온(북방 연합)이 등장한다. 모티브답게 소속 인원들이 전부 하얀 털코트를 입고 있다.
- 월드 오브 탱크와 워 썬더 에서는 소련 국가가 등장하며 대전기 및 냉전기 장비들이 등장한다. 은근슬쩍 소련장비를 버프하고 미국 영국을 너프하는 등 소련 밀어주기를 하고있다.[79] ] 물론 최근에는 강력한 골탱의 등장으로 소련의 위세는 많이 꺾인 편.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HOI시리즈에서는 배경이 배경인만큼 1936년부터 1944년까지 빠지지 않고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국력이 국력이다보니 게임에서의 성능은 미국과 투탑급이다. 물처럼 쏫아나는 인력으로 독일을 상대로 인해전술을 선사하는데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다. 다만 게임의 밸런스를 위해 공업력이나 테크는 현실에 비해 딸리게 설정되어 있다.
- 심슨 가족 시즌 9의 영화 크림슨 타이드를 패러디한 에피소드에선 러시아 연방이 위장이었고 소련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성 바실리 성당에 낫과 망치 소련깃발이 걸리고 퍼레이드는 장갑차들로 가득차고 소련 보병들이 길을 행진한다. 또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좀비가 되어 관을 깨고 뛰쳐나온다(...).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자본주의를 처부수자."(...)
- 애니메이션 걸즈 & 판처에 등장하는 학교 중 하나이자 전차도 4대 강호 중 하나이며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제 63회 전국 전차도 대회 준결승전 상대였던 프라우다 고교의 모티브가 되었다. 학교 이름 자체 부터 러시아의 일간지 프라우다에서 따온 명칭이고 학교의 엠블렘도 소련 국장의 패러디다. 별이 가위로, 낫과 망치가 제도용 자로 바뀐게 포인트다. 학원함도 키예프급 항공모함이고 보유/사용 전차들도 모두 소련제 전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전차도 부 대장 카츄샤도 강철의 대원수와 닮은 점이 많다.
-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AKIRA 에서 원작 만화 후반부에 네오도쿄에 개입하는 모습이 보인 미국과 함께 세계의 질서를 양분하는 국가로 나온다. 설정상 일본 간토 지구 폭격 이후로 제3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것으로 보이고, 후반부에 네오도쿄의 통제권을 잃은 일본 정부가 교토로 이전함에 따라 홋카이도를 재빠르게 점거하며, 일본 국방군과 해상대치 중이라는 언급만 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시리즈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히틀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소련이 나치 독일의 포지션이 되고 미국, 유럽 등 자유 진영이 연합군이 되어 소련군에 대항을 한다.
- 폴아웃 시리즈에서는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존재하여 있었다라는 것 외에는 언급된 게 없다. 아마 독자적인 유전을 보유한 덕분에 대륙이 자원 부족문제를 겪을 때도 생존이 가능했던 것 같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장기에프가 소련 대표로 나온다. 장기에프와의 대전 장소도 소련(USSR)으로 나온다.[80]
- 워게임 시리즈에선 당연히 레드 포 세력의 리더로 등장.
-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선 플레이어가 소련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주제이다. 다만 실제 러시아는 아니고 가공의 동유럽 국가이다. USSR은 따로 등장한다.
- 크레믈린의 위기에선 소련의 서기장이 되어 소련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 Warhammer 40,000에서는 소련에서 발사한 로켓을 본뜬 장난감이 4만년이 지나서도 남아 감상평을 남기게 된다. C.C.C.P라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로켓의 구조가 너무 원시적이라는 식이다. #
14.3. 드라마
미국 드라마에서는 주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 내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다만 비슷하게 미드에서 적성국으로 등장하는 나치 독일과는 달리 나사빠진 모습은 별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어쩔 때는 미국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 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는 마인드 플레이어 다음가는 주적으로 등장한다. 미국보다 먼저 뒤집힌 세계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 넓은 국토 내에서 제대로 된 '관문'을 찾지 못했고 결국 외국으로 눈을 돌리다가 이미 문이 열린 적이 있었던 호킨스 마을에 비밀 기지를 세워서 다시 관문을 열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지를 FBI의 눈에 들키지 않고 운영한 것이나, 마지막화의 쿠키 영상을 보면 미국 연구기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모도그까지 길들이는 등 만만치 않은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암호 통신을 보내다가 더스틴 일행에게 감청당하고 암호가 뚫리는가 하면 비밀스러워야할 적성국의 아지트에서 버젓히 소련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등[81] 은근히 허당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즌 4에서도 등장할 확률이 크다.
- 아폴로 계획보다 먼저 소련이 달착륙에 성공했다는 배경의 Apple TV+의 미국 드라마 For All Mankind에서도 달착륙은 물론 최초로 여성을 달까지 보내고 달 기지까지 노리면서 주인공인 NASA를 계속 긴장시킨다. 일단 미국이 달의 얼음지대에다가 먼저 달 기지를 짓고 여성 우주비행사까지 배출하면서[82] 소련을 따라잡았으나, 소련 또한 미국의 기지 인근에다가 달 기지를 지으며 우주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14.4. 기타
오늘날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른다면 언제적 얘기냐며 아재라든지 시대에 뒤쳐졌다는 둥 옛날 사람 취급을 받으며 웃음거리가 된다.[83] 예시로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러시아 선수들을 언급할 때 쏘련 선수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머지 멤버들한테 마구 까인 바 있다. 한편, 러시아에서 소련이라는 말을 꺼내면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아무래도 러시아인들에게 호불호가 엇갈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15. 관련 자료
[1]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사용중이다.[2] Soviet Union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3] 이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이 국제 전화 코드를 사용하게 된다.[4]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는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다. 짧은 기간이고 기존 정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지만 이는 소련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5] 약 2,200만km².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히는데,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역사상 4번째로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소련이다.[6] 약 2억 9,000만 명.[7] 사적 유물론은 유물사관이라고 불리며, 사회의 발전단계가 '원시공동사회 → 고대노예사회 → 중세봉건사회 → 근대자본주의사회 → 공산주의사회' 순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중간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논의점이 되었다. 카우츠키와 같은 온건파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자"는 입장인 반면에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급진파는 "절차 따위는 적당히 무시하고 다음 단계로 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극심히 견해 대립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8] 물론 이건 소련이 공업화가 안 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괴물이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 1개 주에서 생산하는 철강 생산량이 나름 세계구급 공업 강국이었다는 독일 전체의 철강 생산량과 맞먹었다고 하니...[9]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격하운동을 했지만 레프 트로츠키는 극혐했다.[10] 동맹 대상이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을 못 믿는데다 폴란드의 눈치도 봐야 해서 협상에 미적지근했다.[11] 그때의 진격으로 소련은 1905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섬 전역을 차지하기에 이른다.[12] 그러나 종교의 자유만큼은 엄청나게 탄압하였다.[13]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식량 수출국이었던 이유는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의 무역구조상 수입품을 사기 위해서는 식량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막대한 식량을 수출할 때도 여전히 러시아의 평민들은 굶주렸다. (식량 수입국이었던 2000년대 초반의 중국이 한국에 쌀을 판매하려 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 비교 우위, 즉 가격 차이에 의한 교역이었지 미국처럼 잉여 생산력이 넘쳐나 할 수 있었던 교역이 아니었다.[14] 사실 소련의 밀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가축 사료용으로 대부분의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했다. 또한, 소련은 어찌 됐든 공산권의 맹주로서 친소 공산국들에게 어느 정도는 배푸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곡물을 싼 값으로 식량이 부족한 공산 국가들에게 대량으로 원조하고는 했기에 곡물이 더더욱 필요했다. 그런 소련의 입장이 엄청난 잉여 곡물을 떠맡을 시장이 필요했던 미국의 입장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숙적과 식량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어색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냉전기 미소 관계가 단순한 적대 관계라기보단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였음을 잘 보여준다.[15] 유가 하락을 대소 봉쇄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카터 행정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가 안정화 대책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6] 발트 3국, 조지아, 몰도바, 아르메니아[17] 소련은 20세기 초엽 혁명 직전의 러시아 제국보다도 작았다.(즉, 제정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팔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핀란드와 폴란드 동부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로 넘어가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18] 그 11%밖에 안 된다는 경작지 넓이도 환산해 보면 '''콩고민주공화국과 알제리 넓이'''에 필적한다.[19] 정확하게는 지금의 슬로바키아 쪽이 소련과 접한다.[20] 일본 제국이 사할린 섬의 남부, 소련이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괴뢰국인 만주국이 사실상 일본 제국의 영토에 가까웠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길게 접하고 있던 셈이다. 실제로 만주국 국경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충돌이 자주 있었으며, 그 충돌이 크게 번진 것이 할힌골 전투이다.[21] 다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밀 수출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들의 낮은 식생활 수준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특히 러시아 제국이 밀을 수출하는 동안 농노들이 풍족하게 먹기는커녕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식생활을 했다.[22] 비료, 농약, 농자재, 농기계 등[23] 소련의 원유 생산량은 1974년 미국을 추월하고 세계 1위가 되었다.[24]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25] 50번째로 높다고 해서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히말라야와 카라코룸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이다.[26] 고려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이외에도 체첸인이나 크림 타타르, 불가 독일인, 칼미크인들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27] 물론 이것도 인구가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러시아 출산율이 1.9-2.0명 대 수준으로 떨어져서(물론 소련 전체의 출산율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일대 공화국의 출산율이 높은 덕택에 2명대 중반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개발도 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이주를 권유하는 정책을 중단했다. 그렇지만 타 공화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온 건 아니라서 여전히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인 비율은 상당한 편이고. 소련 붕괴 이후에 상당수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복귀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러시아인들이 많은 편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민족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28] 동유럽 국가들 중 최상위 행정구역을 '공화국'으로 지칭한 나라로는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지금은 그 공화국들이 전부 독립국가가 됐다. 저런 최상위 행정구역 자체가 사실상 국가였던 단위를 더 큰 연방 국가를 만들어서 묶어놓은 것들이라 구심력이 없어지면 분리주의가 커지는터라 그냥 국가가 된 것이다. 특히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은 미국과는 달리 이전부터 나름의 체제와 정부,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연방이라는 형태로 묶어서 더 큰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부터 그냥 갈라서면 남남인 상황이었다.[29] '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약칭 РСФСР/RSFSR[30] 'Закавказ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약칭 ЗСФСР/TSFSR[31] 소련이 존재했던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벨라루스'가 아니라 '백러시아'로 불렀다. 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를 거쳐 벨라루스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백러시아라는 표현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벨라루스를 러시아어로 표기하면 Белоруссия인데 앞에 붙는 Бело는 Белая에서 따온 것으로 '하얀', 즉 '백'의 뜻이다. 뒤에 붙는 руссия는 Россия에서 따온 것으로 러시아를 뜻한다. 즉 이 두 단어를 합쳐 벨라루스(키릴자로는 벨라루씨야)라 하는데 뜻이 서술되었듯 백러시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말에 있어서는 오히려 백러시아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독일어와 중국어로는 여전히 'Weißrussland', '白俄罗斯' 즉 '백러시아'라고 쓴다.[32]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33] 카라칼파크 자치공화국이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이 된 것은 1936년이었다. 그 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34] 1990년 10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35]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36] 1990년 11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37] 1956년 7월 성립. 상술한 카렐리야-핀란드 SSR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탄생했다.[38]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39] 1941년 해체[40] 나히체반 주민들은 본국인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들과 동족인데도 자치공화국이 된 점에서 특이한 사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인 듯. 정작 이민족인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한 등급 낮은 자치주였다.[41] 물론 스탈린 시절에 강제이주 당한 소수민족 가운데 상당수는 스탈린이 격하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기는 했다만 전부 되돌아온것이 아닌데다가, 되돌아온다 해도 이미 타민족이 거기에 눌러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42] 그럼에도 미국이 항상 소련보다 경제력에서 앞섰고, 두 국가의 경제격차가 가장 적었던 시기 소련의 GDP는 미국의 50%(명목)~70%(NMP) 수준이었다.[43] 1986년부터는 일본에 밀려 3위로 떨어지긴 했었다. 다만 이 때의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경제 규모가 꽤 부풀어져 있긴 했으나 소련 역시 루블이 실제 가치에 비해 엄청나게 평가절상된 경우라 대부분 소련은 순위에서 제외하거나 독일보다 낮게 보는 경우가 많다.[44] 당시 아르헨티나는 극우 군부 정권이 집권했음에도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정치적 스펙트럼에 비해 의외로 사이는 괜찮았다.[45] 그래도 북한 같은 동네보다는 훨씬 개념이 있어서 식량 등은 철저히 제값을 주고 치렀으며 식량을 포함해 명색이 공산권 큰 형님이라 이것저것 제2세계 국가들에게 퍼다준 것이 적지 않았다. 또한 단순히 타국으로부터 수입을 많이 했다는 것이 그 분야의 생산량이나 공급량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순수입으로만 보면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보다 더 많은 식량을 수입했던 적이 더 길다.[46] 이것도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며 1980년대 전반기에는 평균월급이 200루블에 못미치는 수준이었지만(상여금까지 포함하면 200루블을 넘기는 한다.) 1980년대 후반에는 월급이 200루블을 훨씬 넘어선다.[47] 예를 들어 1970~80년대 소련의 국민차인 쥐굴리를 한대 사는데 2~3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던가 컬러TV 가격이 몇달치 봉급에 해당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소련에 대중용으로 처음 출시되었을때도 살려면 몇년치 급여를 써야했다.(사실 한국도 1980~90년대의 컴퓨터값이 그리 싸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또한 암시장에서 외제품을 살려고 할때는 200루블의 가치가 1/5로 추락하는 기적(?)을 만끽할수 있었다. [48] 좀 극단적인 예시로, 기본 봉급은 한화 몇만 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사회복지제도와 보조금으로 공공요금과 기초생필품, 국산품 가격을 매우 싸게 유지해서 실질 생활수준은 중진국 수준인 쿠바도 있다. 월급은 수만 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구매력은 열 배가 훨씬 넘는다.[49] 특히 소련 붕괴직전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1991년 기준으로 20~100루블이면 1달러로 교환이 가능해졌으며 1992년에는 루블의 가치가 아예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면서 러시아 경제가 달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50] 물론 스탈린 시절처럼 지옥 같은 노동환경에서 일해야 한 적도 있었지만, 흐루쇼프 시대와 브레즈네프 시대부터는 직장 분위기가 크게 여유있게 변하면서 소위 복지천국이라고 불리는 북유럽보다도 일하기는 괜찮았다고 하며, 휴가도 길게 배정받았고, 입만 잘 맞추어서 며칠씩 결근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다만 일하기는 괜찮은 대신에 서비스업의 친절도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 후반기에는 너무 풀어져서 꾀병을 핑계로 며칠씩 결근을 한다거나 아예 출근도장만 찍고 실제로는 일도 안하고 그냥 노는 경우도 허다하다보니 노동생산성을 깎아먹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점이 되었다. 그래서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등극하고 나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잠시 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 사망 후 브레즈네프파인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하면서 다시 느슨해져서 소용이 없게 되었다.[51] 기초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주택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설책이나 애들 옷값, '''여행비용'''까지도 보조해 주었다.[52] 그래서인지 소련 말기에는 소련인의 저축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특히 소련 후기로 갈수록 저축률이 매우 높아져서 각 가정마다 수천 루블 가량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53] 사실 공산주의 유머에서 자동차 1대를 구하려면 몇 년씩 걸린다거나 하는 식의 유머가 소련에도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구매 신청을 해서 크는 동안 돈을 모은 뒤 성인이 되었을 때쯤 구매 허가가 되면 선물로 자동차를 사주는 등의 상황이 빈번했다.[54] 다만 미국이나 서방국가들 기준으로는 대체로 중하층 정도에 속했다. 집을 보유하기는 했다만 소득수준이 서방의 그것에 크게 뒤졌던 것은 엄연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개발도상국들 기준으로는 충분히 중산층에 속하고도 남기는 하지만.[55] 물론 미국도 의류품이나 자동차 등 상당수의 공산품이나 생필품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기는 하지만, 값이 싸거나 품질이 좋아서 수입했지 소련처럼 생필품 수요를 충당하려고 수입하는 수준은 아니었다.[56]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은 아니다. 그 전에도 초파리를 인공위성에 띄워 보냈었기 때문.[57] 이보다 앞선 루나 2호는 착륙이라기보다는 충돌시킨 것이다.[58] 애초에 공산주의의 옛날 이름이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유물론철학을 중시한 자연변증법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로 과학성을 중요시했다.[59] 이들이 어떻게 그런 기술력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음모론적 설명도 있다. 숱한 우주인들을 보내놓고는 입 싹 씻고 모른 체하면서 그런 거 없다는 반응으로 일관해 왔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사라진 소련 우주비행사 문서 참고.[60] 다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기,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다.[61]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일본 제국을 넘는 수치였다.[62]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LON)에서는 영국 본국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의 자치령들과 최대 식민지인 인도 제국에도 개별적으로 회원국 지위를 주어서 영국이 사실상 여러 표를 행사했다. 소련이 유엔에서 이걸 흉내내려 한 것(...). 참고로 국제연맹 설립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사실상 최대 강대국 지위가 미국으로 넘어가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까진 영국이 최강자로 인식되었기에 이런 특례를 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세한 내용은 국제연맹 문서를 참조.[63] 약간 억지인 것이 미국의 주는 소련의 공화국에 비해 이론적으로도 외교권이 없고 군사력도 중앙정부가 제한하는 등의 제약이 많다. 남북전쟁 이후로 미국 내 state가 나라(country)라는 인식이 소멸하기도 했고. 물론 미국은 소련의 반박에 "헌법을 바꾸면 된다"고 맞받아쳤다.[64]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 내 '중국'의 지위를 중화민국(대만)으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면서 소련의 외교적 열세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지만 격렬한 중소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꼭 그랬다고 단정적으로 평가하긴 어렵다. 그래도 1971년 소련은 중국의 UN 가입을 환영했고, 투표에서도 항상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중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UN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직접 찾아가서 악수도 했다.[65] 오늘날 러시아만 해도 새로 이민 온 인구를 제외하고도 180~200여 가지 민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66] 독일인들은 소련 초기에 볼가강 유역에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탈린 시기에 인구의 대다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면서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명목상의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고 추워서 정작 유대인들은 얼마 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자치주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기는 하다.[67] 임산부-어린이 전용좌석이 형식적이었지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졌던 국가였다 [68] 장기 근로자의 경우에는 여름 별장도 주어졌다.[69] 1987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소련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소련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70] 오늘날 러시아 연방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민족집단만 180여 가지이다.[71]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이 랴자노프스키 저[72] 다만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기독교적 성격 때문에 소련과 성향이 잘 안 맞는 이유로 소련 사회에는 불온 서적으로 간주되었고, 대신 러시아의 반공 성향 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다.[73] 한국만 해도 케이블 TV가 보급되기 이전 다큐멘터리 등등의 시청률이 높았다가 케이블 TV 보급 이후 채널 선택권이 폭증하면서 결과적으로 교양 관련 프로그램 시청률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하락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었다.[74] 이러한 연유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학 등은 검열 문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과거 러시아 제국 시대만큼의 포텐을 못 내는 중이라고도 한다.[75] 물론 부정선거 의혹은 감안하고 보자.[76] 사실 소비에트 연방의 사상이나 이상에 대해 향수를 느끼기보다는, 막연하게 "미국과 맞짱뜨던 최강국" 시절의 국력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에 가깝다. 러시아의 일반 시민들 입장에선 사회주의 실험 같은 것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한데, 현재 러시아는 과거만큼 통제와 탄압이 여전한데 국력은 미국보다 못 미치고 미국의 계속된 경제제재로 경제력이 약화되다 보니 여기에 아쉬움을 느끼는것도 있다.[77] 여담으로 해당 폴란드 공산당은 부패 스캔들로 2005년 이후로는 일개 근소정당으로 몰락했다.[78] 사실상 자살돌격이나 다름없는 우라돌격이나 후퇴하는 병사를 즉결처형하는 정치장교 등[79] 월드 오브 탱크를 만든 워게이밍넷, 워썬더를 만든 가이진 둘 다 옛 소련 지역에 있는 회사이다. 특히 가이진은 돈바스 전쟁에서 노보로시야를 후원했다는 의혹이 있다.[80]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련이었다.[81] 이걸 보고 스티브 해링턴은 레드 던 드립을 쳤다.[82] 이 때문에 현실의 역사보다 성평등이 더욱 가속화했다. NASA의 수장이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의 제자인 여성이고,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도 등장한다. 어찌보면 체제경쟁의 의도치 않은 순기능이었던 셈.[83] 하지만 의외로 러시아를 소련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노년 층은 물론 장년층, 심지어 1980년대생들도 무의식 중에 소련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