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
1. 개요
段熲
(? ~ 179)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기명(紀明).
무위군 고장현 사람으로 공숙 단[1] 의 후손이자 단회종[2] 의 종증손(형제의 외손자)이며, 장환, 황보규와 함께 강족을 토벌하는 일에 힘써 양주삼명(凉州三明)으로 불린 인물이다. 단영(段潁)이라고도 부르고 강족에 대해 온건적으로 대처하는 장환, 황보규와 달리 강족에 대해 매우 강경하게 대처했다.
2. 생애
2.1. 서강 토벌
어려서부터 활쏘는 것과 말 타는 것을 배워 유협의 의기를 소중히 하면서 재화에 관심이 없었으며, 자라서는 학문에도 힘썼고 처음에는 효렴에 천거되어 헌릉원[3] 의 승, 양묘[4] 의 령 등을 역임했다.
요동속국도위가 되었고 선비족이 침입하자 공격했고 이로 인해 선비족들이 놀라 도망갔고 이로 인해 역참기사에게 조서를 허위로 꾸며내 단경을 소환한다고 하게 했는데, 단경은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선비족이 이를 믿고 추격했지만 단경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풀어 선비족들을 격파했는데, 조서를 사칭한 죄로 인해 중형에 처해졌지만 세운 공로가 있어 2년 형에 처해졌다.
형기가 끝나자 의랑이 되었고 156년에 태산군, 낭야군에서 도적들이 일어나 3만 명이 민가를 공격하자 윤송의 천거로 중랑장에 임명되어 공손거, 동곽두 등을 격파해 그들을 참수했으며, 이 싸움에서 1만 여 급을 얻었고 단경은 열후에 봉해지면서 50만 전을 받고 자식 한 명이 낭중으로 임명되었다.
159년에는 호강교위로 있으면서 소당, 소하, 당전, 늑저 등에 사는 여덟 종족의 강족이 농서의 금성을 침입하자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면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넜는데, 신속한 도하가 필요하다면서 선발대를 모으기로 한다. 선발대가 황하를 건너고 나머지 군대가 공격하는 강족을 잡기로 하지만 선발대는 황하에서 전멸하는 역할이지만 성공하면 은상을 주겠다고 하자 군사들이 나서기로 하며, 추격에 성공하면서 나정에 이르러 우두머리 2천 급을 베거나 만 여 명의 포로, 1만 명의 노예를 획득했고 강족들은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160년에 서강의 남은 무리가 소하에 사는 큰 호족과 함께 장액을 약탈하고 새벽에 단경을 공격하자 단경은 말에서 내려 정오까지 싸웠는데, 단경이 가지고 있던 칼이 부러진데다가 화살마저 다 쓰고 강족들도 피로해서 물러갔다. 그러나 단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2천여 리 밖까지 국경을 넘어 추격하면서 고기를 잘라먹고 눈을 녹여먹은 지 40여 일만에 적석산에 이르렀으며, 요새를 나와 2천여 리 되는 곳에서 소하의 강족 대장의 목을 베고 나머지를 항복시켰다.
군사를 구분하니 석성에서부터 참수되거나 익사한 사람은 1600명, 백석을 공격하다가 죽거나 포로가 된 사람은 3천여 명, 겨울에 거리를 습격한 강족을 토벌해서 수백 명을 죽였다.
161년 겨울에 선령, 침저에 사는 강족이 여러 종족의 강족과 더불어 병주, 익주를 노략질했는데, 단경이 황중 출신의 의용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했다. 양주자사 곽굉이 공적을 함께 하려고 욕심내면서 단경의 군대는 나아가지 못하다가 시간이 오래 끌자 의용병들은 고향과 친구를 그리워해 모두 도망쳤으며, 곽굉이 그 죄를 단경에게 씌우자 단경은 이 일로 인해 하옥되었다가 좌교로 보내져 노역을 하게 되었다.
곽굉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강족이 여러 현을 침입하자 서주[5] 의 관리와 백성들이 궁궐에 와서 단경을 위해 원통함을 호소했고 전나 등 여러 부락의 강족이 강성해져 양주가 거의 망할 지경이 되었으므로 단경은 호강교위에 임명되었으며, 162년에 병주자사를 지내면서 동탁을 공부에 추천했다. 164년 봄에 355명의 추장들이 3천 가족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지만 따르지 않는 사람도 많았는데, 겨울에 당전의 강족들이 집결하자 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4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165년에는 한저 지역의 강족을 공격해 400여 급의 목을 얻고 2천여 명의 항복을 받았으며, 단경이 3일간 강족에게 포위당했다가 변지장이 동남방에는 군사가 없다면서 빈 틈을 틈타 적을 쳐서 백 리 정도 나갔다가 군을 되돌려 공격하면 승리할 것이라 조언했다. 그 말대로 해서 강족을 격파했으며, 군대를 진격시켜 끝까지 추격해 산과 계곡 사이에 돌아다니면서 뒤졌다.
봄에서 가을까지 싸우지 않는 날이 없자 강족이 패해서 도망갔고 목을 벤 것이 2만 3천급이나 되고 산 채로 잡은 포로가 수만 명이며, 항복한 자는 1만 여 부락이 되었고 단경은 이 공으로 도향후에 책봉되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167년 봄 정월에 동부 지역의 강족인 선령의 4천여 명이 무위군을 공격해서 대우를 포위하고 운양을 공격하자 당전의 여러 종족들이 봉기했는데, 단경은 이들을 난조에서 공격해서 격파해 3천여 명의 목을 얻었고 이로 인해 서부 지역의 강족을 평정했다.
2.2. 동강 토벌
단경은 서부 강족은 평정했지만 동부 강족에 속한 선령이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황보규, 장환 등이 이들을 불러 위무하자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반복했는데, 환제가 이에 대한 전략을 묻자 기병 5천, 보병 1만, 병거 3천 량을 주면 세 번의 겨울과 두 번의 여름이면 격파해 평정할 수 있다고 요청하면서 환제가 이를 허락했다.
단경은 군사 1만 여 명을 거느리고 15일분 양식을 가지고 팽양에서 고평으로 향해 168년 2월에 선령의 여러 종족과 봉의산에서 싸웠는데, 이들이 강성해 단경의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자 단경은 군중에 긴 화살촉, 예리한 칼 등을 지니게 하고 세 겹으로 긴 창 부대를 배열하면서 강한 쇠뇌를 가지게 했다. 또한 경기병을 좌우측 날개로 삼고 장졸들에게 고향까지는 수천 리 떨어져 진군하면 성공하지만 도망치면 모두 죽을 것이기에 노력해서 함께 공적과 명예를 이룩하자고 했으며, 군사들이 이를 듣고 말을 타고 공격하면서 기병이 양측에서 질주해 강족을 궤멸시켰고 가을 7월에는 선령의 강족을 경양에서 격파했다.
강족과의 싸움으로 8천여 급을 얻으면서 동부 지역의 강족이 평정했으며, 이 때 환제가 죽고 영제가 즉위한 지라 두묘가 조서를 내려 이 공으로 단경은 20만 전을 하사받고 그 집안에서 한 사람을 낭중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중장부에 내린 칙령을 통해 금전, 채물 등을 조달받아 군비를 더 늘렸고 단경은 파강장군이 되었다.
이 해에 경무장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족을 추격해 교문을 나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사연택, 낙천, 영선의 물가에서 싸워 이들을 연속으로 격파했으며, 이 때 장환이 영제에게 동부 지역의 강족이 격파되었지만 나머지 종족까지 진압하기 어렵다면서 단경의 성품은 경솔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지만 패배시키는 일이 늘 있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은덕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하자 단경은 이에 반박한 상소를 올렸다.
169년에 조정에서 알자 풍선을 보내 한양에 흩어진 강족을 설득해 항복시키게 했지만 단경은 봄 농사철이라 백성들이 들에 퍼져 있어서 강족이 잠시 항복했더라도 조정에서 공급해줄 것이 없어 다시 도적질할 것이므로 허점을 틈타 병사를 풀어서 그 기세로 반드시 진멸시키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단경은 군사를 이끌고 범정산에서 4, 50리 떨어진 곳에 가서 기사마, 전안, 하육 등에게 5천 명을 거느리게 해서 이들을 격파했다.
강족의 무리들이 궤멸되자 동쪽으로 달아나 사호새외곡으로 모였고 병사를 나누어 사호곡의 상하의 문을 지키자 가을 7월에 책략으로 이들을 단번에 궤멸시키고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했으며, 가을 7월에는 단경이 1천 명을 서현에 파견해 나무를 엮어 넓이가 20보, 길이가 40리가 되는 목책을 세워 막았다. 소리내지 않고 밤중에 서쪽 산으로 올라가서 병영을 짓고 해자를 팠는데, 강족들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1리 정도로 장개를 파견해 3천 명을 거느리고 동쪽 산에 오르게 했지만 강족이 알아챘다.
이어서 단경은 장개 등과 함께 동쪽, 서쪽 산을 끼고 병사를 풀어 그들을 격파하고 추격해서 사호곡의 상하의 문에 이르렀으며, 궁벽한 산과 깊은 골짜기에서 가는 곳마다 격파해 그들의 두목 이하 1만 9천급의 목을 얻었다. 단경은 180회의 전투를 하면서 획득한 것은 3만 8천여 급의 목, 42만 7천여 마리의 여러 종류의 가축 등을 얻었으며, 44억전을 소모하고 군사들 중에서 사망한 자는 4백여 명으로 단경은 신풍현후로 책봉되고 채읍을 1만 호로 받았다.
단경은 변방에서 10여 년간 하루도 자리를 깔고 잔 적이 없으며, 장사들과 동고동학하자 모두가 기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서 향하는 곳에서는 공로를 세웠다.
2.3. 경사에서 환관들의 수족이 되다
170년에 징소되어 경사로 돌아왔고 진호[6] 5천 명, 한혈마, 노예병 1만 명을 이끌었으며, 단경은 시중이 되었다가 집금오, 하남윤을 역임했다가 풍귀인의 능이 파헤쳐진 사건으로 인해 동의대부로 좌천되었다가 사예교위가 되었다. 일찍이 장환과는 강족을 공격하는 문제로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돈황으로 돌려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장환이 서신으로 간청하자 죽음을 면하게 했다.
이고가 소겸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그 아들인 소불위가 이고를 죽였는데, 소씨는 장환과 친했고 단경이 소불위를 불러 사예교위부의 종사로 삼았다. 그러나 소불위가 두려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분노해 장현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했는데, 장현의 아버지에게는 짐독을 던져주면서 장현이 소불위를 잡지 못하면 마시라고 했지만 장현이 소불위를 찾은 덕분에 장현의 아버지는 무사했다.
172년 7월에는 환관들이 간하자 단경은 태학생 천여 명을 체포했으며, 10월에는 왕보가 유회, 정삽, 동등 등이 반역을 일으킨다는 무고를 하자 이들을 체포했다.
173년 여름 5월에는 태위가 되었다가 겨울 12월에 파직되었으며, 태중대부를 역임하다가 179년 3월 22일에 교현이 태위에서 파직되자 태위가 되었다. 단경은 환관 왕보, 조절 등에게 아부했고 일식이 일어나자 자신을 탄핵했는데, 양표가 왕보의 부정을 적발해 이를 양구에게 알려주자 양구가 단경, 왕보, 순우등, 원사, 봉탑 등의 죄악을 상주하고 감옥에 투옥되자 짐독을 먹고 자살했다.
3. 창작물에서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아만전의 조숭 호위전에서 172년에 당고의 금 때 탈출한 하옹을 발견했다는 소식으로 인해 조숭의 집으로 들어가서 수색하는데, 조숭과 말싸움을 벌이다가 조조가 막아서자 공격해서 조조를 부상입히며, 하후돈이 난입해서 공격하자 부상을 입고 물러나서 부하들에게 지시해 다시 조숭의 집을 공격했다가 저항하고 조숭이 설득하자 물러간다.
4. 기타
가후가 효렴으로 천거되어 낮은 벼슬을 하다가 병에 걸려 낙향하는 길에 저족에게 붙잡힐 때 저족에게 큰 위세를 떨쳤던 단경의 외손자로 사칭해서 풀려놨다.
마사토끼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이 일화를 각색해 단경의 외손자인 오신이라는 창작인물을 만들었고 저족에게 붙잡힐 때 오신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가후가 머리를 써서 저족과 짜고 그의 정체를 까발리게 한 후에 오신만 살해당하고 나머지 붙잡힌 사람과 가후는 살아남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