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후

 





'''賈詡
가후
'''
'''시호'''
숙후(肅侯)
'''작위'''
괴리후(槐里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賈)
''''''
(詡)
''''''
문화(文和)
'''아버지'''
가습(賈龔)[1]
'''생몰기간'''
147년 ~ 223년
'''고향'''
양주 무위군 고장현(姑臧縣)
'''태위 재임기간'''
220년 2월 16일~223년 6월 27일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동탁 휘하
2.3. 이각 휘하
2.4. 단외 휘하
2.5. 장수 휘하
2.6. 완 전투
2.7. 양 전투
2.10. 관중 평정
2.11. 조비에게 조언
2.12. 조비 휘하
2.13. 죽음
3. 연의
4. 평가
4.1. 처세술
4.2. 지략
4.3. 도덕성
4.4. 인생은 가후처럼?
5. 미디어 믹스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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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는 문화(文和). 무위군 고장현 사람.

2. 정사



2.1. 초기 생애


젊은 시절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으나, 오직 한양 사람 염충만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가후에게는 장량진평의 기계(奇計)가 있다고 평가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郎)이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서쪽으로 돌아가다 병현에 이르렀다.

도중에 반란을 일으킨 저족을 만나 동행했던 수십 명이 모두 잡혔다. 가후가 말했다.

나는 단공(단경)의 외손이니, 죽이거든 너희들은 나를 따로 묻어라. 우리 집에서 필히 후하게 값 치르고 가져갈 것이다.

당시 태위가 단영(단경)이었는데, 예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로 있으면서 그 위엄이 서쪽 땅에 떨쳤기에, 그래서 가후가 그 명성을 빌어 저족을 겁준 것이다. 저족들이 과연 해치지 않고 함께 맹서를 맺고 그를 보내 주었고, '''나머지 동행들은 모두 죽었다.''' 가후는 실제 단공의 외손이 아니었으나, 임시방편으로 일을 해결한 것이니, 모든 일을 하는 게 이와 같았다.

2.2. 동탁 휘하


동탁이 낙양에 입성해서, 가후를 태위연으로 평진도위로 삼았다가 토로교위로 옮겼다. 동탁이 중랑장 우보에게 섬현에 주둔하게 했는데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2.3. 이각 휘하


동탁이 패망하고 우보 또한 죽자,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 하니, 태위인 이각과 곽사, 장제 등은 군대를 해산하고 무사히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후가 말했다.

듣자하니 장안 내의 의론이 양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데, 여러분들이 군대를 버리고 가시면, 한 명의 정장(亭長)이라도 여러분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군대를 서쪽으로 향해 가는 곳마다 병사를 거두어 장안을 공격하면 동공(동탁)의 원수를 갚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때 달아나는 것도 늦지 않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각이 이에 서쪽으로 장안을 공격했다.
후에 가후를 좌풍익으로 삼고 이각 등은 그의 공을 생각해 제후에 봉하려 했는데, 가후가 말했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계책일 뿐인데 무슨 공이 있습니까!

완고히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로 삼으니 가후가 말했다.

상서복야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제 명성은 무겁지 않아 남을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제가 명예와 이익에 눈이 어둡게 하시면, 나라와 조정은 어찌 하시려 합니까!

이에 가후를 상서로 고쳐 배수하여 관리의 선발과 임용을 맡게 하자, 많은 것을 바로잡아 제어하니 이각 등이 그를 친근히 하면서도 꺼려했다.
헌제기에 따르면 곽사와 번조는 서로를 미워하여 자주 다투었지만, 가후가 도리를 앞세워 책망하자 그의 말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후한서 영사하황후전에 따르면 나중에 이각이 장안을 함락한 후, 군대를 보내 관동 지역을 노략질했을 때 당희를 사로잡았다. 이각이 그녀를 아내로 취하려고 했지만 정녕 들어주지 않았으며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상서 가후가 그 사실을 알고는 상소를 올려 헌제에게 고했다. 헌제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조서를 내려 당희를 맞아들이고 능원을 설치해 주고는 시중에게 지절을 주어 보내 홍농왕의 비로 임명했다.
이각, 곽사전 주석 헌제기에 따르면 이각이 하사품을 모두 실어가서는 자신의 진영에 두었다. 가후가 말했다.

황상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각은 따르지 않았다.
모친의 상을 만나 관직을 떠나자 광록대부로 배수했다. 이각과 곽사 등이 장안에서 싸웠는데, 이각이 다시 가후에게 요청하여 그를 선의장군으로 삼았다.
헌제기에 따르면 이각 등과 가후는 천자(헌제)를 관중에 모셔두고자 상의를 했다. 그러나 가후는 반대하였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천자를 협박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각은 듣지 않았다. 장수가 가후에게 물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닌데 그대는 왜 떠나지 않는가?

가후는 대답했다.

나는 국가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의리상 배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떠날 수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각은 당시에 강족호족 수천 명을 불러 먼저 그들에게 선물로 아름다운 비단을 주고 관리들의 부녀자를 아내로 삼도록 허락한 다음 곽사를 공격하도록 했다. 강족과 호족은 몇 차례나 성문을 살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천자께서 안에 계십니다. 이장군(이각)이 우리에게 관리의 여자들을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천자가 그것을 걱정하여 가후에게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가후는 몰래 강족과 호족의 중수들을 불러서 음식을 대접한 다음 관작과 귀중품을 주고 물러나도록 했다. 이후로 이각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각 등이 화해하고 천자를 내쫓았을 때, 대신을 도와 보호함에 가후의 힘이 있었다.
헌제기에 따르면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이각은 그들을 추격하여 천자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사도 조온(趙溫), 태상 왕위(王偉)와 주충(周忠), 사예교위 영소(榮邵) 등은 모두 이각에게 미움을 받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이각은 이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 가후는 이각에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천자의 대신들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그들을 해치려 하오?

그러자 이각은 그만두었다.
천자가 장안을 나오자 가후는 자신의 관직의 인수를 돌려 바쳤다.

2.4. 단외 휘하


이때 장군 단외가 화음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후와는 같은 군 사람이어서, 마침내 가후가 이각을 버리고 단외에게 의탁했다. 가후는 본래 이름이 알려져 있어 단외의 군대에서 우러러 받들어 졌다. 단외는 내심 자기 위치를 빼앗길까 두려워했지만 겉으로는 가후를 매우 깊이 받들었는데, 가후가 더욱 스스로 불안해했다.
장수가 남양에 있었는데, 가후가 은밀히 장수와 결탁하니 장수가 사람을 보내 가후를 맞이하게 하였다. 가후가 막 떠나려 하자 어떤 이가 가후에게 물었다.

단외가 그대를 후하게 대해줬는데 그대는 어째서 그를 버립니까?

가후가 말했다.

단외의 성품은 의심이 많고 제 뜻을 기피하는 바가 있어, 예는 비록 후하였지만 믿을 수 없고 오래 있으면 그에게 도모 당하게 될 것이오. 내가 가면 반드시 기뻐하며, 내가 외부의 큰 원군과 결탁하길 바라고 있어 필히 내 처자를 후하게 대할 것이오.

가후가 마침내 떠나니, 장수는 자손의 예를 행했고, 단외는 과연 그의 가솔들을 잘 봐주었다.

2.5. 장수 휘하


가후가 장수를 설득해 유표와 우호 관계를 맺게 했다.
부자에 따르면 가후가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뵈니, 유표가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우했다. 그런데 이후 가후가 유표를 평하길, 평상시라면 능히 삼공(三公)이 될 재주가 있으나 일의 변화를 살피는 데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없으니 난세에는 무능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유표는 제법 큰 세력을 갖췄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2.6. 완 전투


장수전에 따르면 조조가 남쪽으로 정벌해오며 육수에 주둔하니, 장수는 이길 수 없다 여겨 항복했다.
그런데 조조가 장제의 아내이자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취했다.[2] 이에 장수는 한이 맺혔고, 조조는 장수가 기뻐하지 않음을 듣고 은밀히 죽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누설되었고, 장수는 선수를 치고자 했다.
장수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장수는 측근 호거아가 있었는데 용맹이 군을 뒤덮었다. 인재를 좋아하는 조조는 그 날랜 것을 아껴 금을 건네주었는데 장수가 이를 듣고 조조가 측근으로 자기를 찌르려 한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결국 장수는 조조가 무방비할 때 급습하고자 했다. 장수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가후의 계책에 따라 군이 이동중일 때 장수가 조조에게 수레가 적으나 무거워서 병사들에게 갑주를 입혔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조조가 별 의심없이 허가하자 그렇게 무장을 한 병사를 이끌고 조조를 습격했다. 조조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기에 크게 패했다. 이 과정에서 조조의 장수 전위, 아들 조앙, 조카 조안민이 전사하였고, 조조는 겨우 목숨을 구했다.

2.7. 양 전투


조조와 장수가 한참 대치하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조조의 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적을 치는 건 전술의 기본인 만큼 장수가 직접 추격하려 했는데, 가후는 지금 추격하면 크게 패할 것이라며 만류했다. 장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쫓아갔는데, 가후의 예상대로 크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온 장수더러 가후는 '''이번에 추격해 다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이번엔 오히려 다시 가라고 재촉했다. 장수는 앞서 대패해서 지금 이 모양이 됐는데 어떻게 지친 군사를 데리고 다시 가냐고 했지만, 가후는 군의 형세는 일정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니 자신의 말대로 하라 했다. 결국 장수는 병사들을 다시 모아 공격했는데, '''또 다시 가후의 예상대로''' 이번엔 장수가 크게 승리하고 수많은 군량과 전리품을 획득했다.
감탄한 장수가 대체 어떻게 가후의 말대로 정예병을 이끌고 추격했을 땐 졌고 패잔병을 이끌고 추격했을 땐 이긴건지 물었다. 그러자 가후가 답했다.

장군께서 조조의 적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군대가 막 퇴각할 무렵에는 조조가 추격에 대비하였으므로 필히 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크게 이겼는데도 힘을 다 하지 않고 장군을 물러나게 하는데 그쳤으니, 이는 분명 어떤 변고가 있어 급히 퇴각해야 했던 탓입니다. 한 번 추격을 끊어 만족한 조조가 더 이상 후방을 돌보지 않고 병사들을 급히 재촉하였으니, 패잔병을 써도 이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조조는 원소군이 뒤를 칠 조짐이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퇴각하던 차였다. 원소의 위협에 비하면 장수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 물론 이런 이유로 퇴각하는 것인 만큼 장수의 추격을 미리 예상했지만, 설마 한 번 혼쭐을 내 줬는데 다시 올 줄은 몰랐다가 가후에게 제대로 예상당해 털린 것이다. 하여튼 장수는 이에 감복하였다.

2.8. 관도대전


이 이후,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원소가 사람을 보내 장수를 끌어들이고 아울러 가후에게도 원조를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장수가 이를 허락하려 했는데, 가후가 장수의 자리 위에 나타나 원소의 사신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원본초(원소)에게 말씀 올리되, 형제끼리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서, 천하의 국사(國士)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전하시오.

이 말에 장수조차 어찌 그렇게까지 말하냐며 두려워했다.
이후 가후에게 어느 편에 들어야 할지 물어봤는데, 가후는 조조를 따르는 게 낫다고 했다. 앞의 완 전투, 양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장수는 벌써 조조를 두 번이나 물먹이고 아들, 조카, 아끼던 장군까지 죽인 원수 사이다. 게다가 원소는 강성한데 조조는 약하고. 그런데도 가후가 원소의 사절은 저렇게 대하고 조조에게 귀순하는 게 낫다고 하니 의아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었다. 이에 가후가 답했다.

조조는 천자를 받드니 첫째입니다. 원소는 강성한데 우리는 군사가 적어 그를 따른다 해도 필히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조조는 군사가 약한데 우리를 얻게 되면 필히 기뻐할 것이니, 두 번째입니다. 패왕의 뜻을 가진 자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어버리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결국 장수는 이 말을 따라 조조에게 귀부했다. 조조는 정말로 기뻐하며, 가후의 손을 잡으며 내 신의를 천하에 중하게 해준 자가 그대라 했다. 표를 올려 가후를 집금오로 삼고 도정후에 봉하였다가, 기주목으로 옮겼다. 기주가 아직 평정되지 않자, 유임시켜 사공군사에 참여케 했다.
참고로 장수는 조조에게 귀부하고 관도전투 당시 유표를 견제했고[3], 이후 하북정벌에서도 공을 세웠으나,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수차례 핍박받다가 오환 정벌 와중에 죽었다. 이후 장수의 가문은 위풍의 난에 연좌되어 멸문까지 당하니 결과적으로는 장수가 아닌 가후 본인에게 최상의 판단이 되었던 셈이 되었다. 상식적으로 원수에게 붙으라는 게 굉장히 위험한 결정인데 그걸 말빨로 실현시킨 가후도 참 대단하다. 위와 같이 조조와 원소로의 라인타기에서 장수의 의견을 물은 것도 아니고[4] 일방적으로 가후가 밀어붙인 것으로 보아 장수와 가후의 관계가 사실상 역전된 종속관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했는데, 조조의 진영에는 군량이 막 다 떨어지니 가후에게 이를 헤쳐 나올 계책을 묻자, 가후가 말했다.

공은 명철함에서 원소를 이기고 용맹에서도 원소를 이기며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도 원소를 이기고, 기회를 보아 결단하는 데서도 원소를 이깁니다. 이 4가지 승리 조건을 가지고도 반년토록 적을 평정하지 못한 것은 단지 아주 안전함을 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기회를 결단함에 빨리 정해야 합니다.

조조가 옳다고 하고 이에 아울러 병사를 출동시켜 30여 리 떨어진 원소의 군영을 포위해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원소의 모신인 허유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달아나 조조에게로 와서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 가후는 조조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원소군이 크게 궤멸되었고, 하북은 평정되었다. 조조가 기주목을 맡고, 가후의 벼슬을 옮겨서 태중대부로 삼았다.

2.9. 적벽대전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강동을 따라 내려가고자 했다. 가후가 간언했다.

명공(明公)께서 예전에는 원씨를 격파하였고, 지금은 형주를 거두어서, 그 위명은 멀리까지 드러냈고, 군세 또한 큽니다. 만약 형주의 풍요로움을 타서, 관리와 군사들을 먹이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면,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강동은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는 잘 알다시피 불타는 적벽...
다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했으니 가후의 말이 옳았다는 건 다소 결과론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배송지는 다른 건 몰라도 이 간언만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적벽대전은 패해서 문제였지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고 평했다. 아닌게 아니라 서량의 마초와 한수를 비롯해 다른 곳에도 적이 많은 상황에 강하에 유비를 뻔히 내버려두고 내실을 다질 틈은 없었다. 10만이 넘는 원정군을 형주에 장기 주둔시키며 내정을 다지긴 힘들고 그렇다고 원정군을 물리면 유비나 손권이 구심점 잃고 텅빈 형주를 그냥 둘 리가 없다.
다만 가후 쪽을 편들만한 의견도 있는게, 약간 다른 건수지만 형주를 평정하기 전 순욱은 조조 세력이 강성함을 남쪽의 세력들도 알고 있으니 크게 전쟁을 벌이기보다 가볍게 위협한다면 충분히 이익을 거둘 것이라는 진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규모 전쟁을 벌일 필요 없이, 세력을 안정화하면서 국지전 정도를 벌이면 형주와 강동에게 크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킬 필요 없이 형주를 안정화 시키면 된다는 가후의 의견과 통한다.
또 결과론적이라 반론했지만, 결국 보면 적벽에서 패배하여 조조세력은 형주에서의 통제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머지 않아 형주가 유비-동오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다. 만약 가후의 의견대로 동오를 바로 치지 않았다면 형주에 대한 조조의 당시 통제력은 어느정도 유지되는 상태에서, 조조를 패퇴시킨 경험이 없어 기세등등하지는 않은, 동오-유비 연합을 맞이하는 셈이고 이는 실제 역사보다 매우 좋은 상황이다. 유비와 손권이 조조가 물러간 형주를 냅둘리가 없다고 하였지만, 적벽에서의 패배로 크게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도 조인이 1년 넘게 강릉을 수호하였었는데, 만약 적벽이 없었다면 이보다 크게 상황이 좋았음은 당연한 일이고 어쩌면 온전히 막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이다. 굳이 끝까지 막아내지는 못하더라도 보다 오랜 기간이 걸렸거나 동오 세력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음은 당연한 일이고, 이는 차후 조조가 재차 남쪽을 정벌할 때 더 나은 입장을 낳아준다. 이 결과론적이라는 부분이 중요한데, 만약 적벽에서 패배하지 않고 동오를 평정한다면 결과론적으로 천하 통일이 이루어짐은 간단한 문제다. 그런데 가후는 이러한 방법을 추천하지 않았다. 즉 현재 상황을 보건데 그 결과론적 승리가 매우 불분명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추천한 것이다. 반면 동오를 치지 않는 선택은 동오 세력을 없애는 결과를 낳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형주 침략에 대해 보다 안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하이리스크 하이 리턴보다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 더 좋은 상황이라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2.10. 관중 평정


조조가 후에 한수,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웠는데, 마초 등이 땅을 갈라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요구하였다. 가후가 이를 괜찮다고 여기니 거짓으로 허락했다. 또 가후에게 계책을 물어보자 가후는 이간질을 시키면 된다고 답했다.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버리면 된다는 것.
무제기에 따르면 한수가 조조와 서로 만날 것을 청하자 조조는 이에 응했다. 참고로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동년배였다.[5]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자, 조조는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 등 시덥잖은 이야기만 손뼉을 치면서 환담했다.
그래서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조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한수는 별 말 없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전쟁 중인 두 진영의 대표자들이 만났는데 별 말이 없었다? 당연히 마초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무제기에 따르면, 뒷날 조조가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 서신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놨다. 한수가 마초에게 이걸 보여주니, 당연히 마초는 한수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어 뜯어고친 줄 알고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가후의 계책에 의해 한수와 마초의 동맹이 깨졌고, 조조에 의해 격파된 것이다.

2.11. 조비에게 조언


이때 조비가 오관장이 되었고, 임치후 조식은 재주와 이름이 한창 융성하여, 각자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고,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의론이 있었다. 조비가 사람을 시켜 가후에게 자신을 굳건히 지키는 방법을 묻자 가후가 말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덕과 도량을 널리 존숭하시고, 몸소 선비의 본업을 지니시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하시어, 자식 된 도리를 어기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됩니다.

조비가 이 말을 따라 스스로 깊이 수양했다. 사실 무슨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차피 당신이 지금 적장자로서 가장 승계의 명분이 강하니 괜히 일 벌이다 실수하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하라는 정석에 가까운 조언이다. 당시 조식의 재능과 추종자들의 규모에 내심 초조해하던 조비에게 있어선 최고의 조언이자 핵심을 꿰뚫는 정답이었고 이는 후에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어 위왕이 됨으로써 증명되었다.
조조가 또 한 번은 주위를 물리치고 후계 문제에 대하여 가후에게 물었는데[6], 가후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조조가 말했다.

경과 같이 얘기를 나누려 했는데 대답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

가후가 말했다.

적자 자손의 계통을 계승하는 데 생각한 바가 있어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조조가 무슨 생각이냐고 묻자, 가후가 말했다.

원본초(원소)와 유경승(유표) 부자를 생각했습니다.[7]

조조가 크게 웃으며, 이에 마침내 태자를 정했다.


2.12. 조비 휘하


가후는 스스로 조조의 옛 신하가 아니라 하여, 책모가 깊고도 길었으나 시기와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해,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물러나서는 사사로이 통교하지 않고, 자식들이 시집 장가드는데 고위직의 집안과는 사돈을 맺지 않으니, 천하에서 지모와 계획을 의론하는 것이 그에게 돌아갔다.
조비가 즉위하자, 가후를 태위로 삼았다(220년 2월 16일~223년 6월 27일). 작위를 올려 위 수향후로 하고 식읍 3백 호를 늘려 이전과 합쳐 8백 호로 하였다. 또 식읍 2백 호를 나눠 어린 아들 가방을 열후로 봉했다. 장자인 가목은 부마도위로 삼았다.
위략에 따르면 조비가 가후가 조조에게 대답한 것을 얻었기에, 즉위하자 제일 먼저 상사로 올려준 것이라고 했다.
태위가 되었지만 군권은 대사마 조인에게 있어서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8] 가후 특유의 처세가 더해져 조비 시절에는 그냥 국가 원로로서 대접받으며 조용히 지냈다. 사실 이 시점에서의 가후는 70 넘은 노인이었을뿐더러 얼마 후 태위와 그 역할이 겹치는 대사마 직을 신설해 군부 최고참인 조인에게 제수했기 때문에, 이 인사는 단순한 '공로상' 느낌이 강하다.
문제기에 따르면 221년 6월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가후)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하니 조칙을 내렸다.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면 그 우두머리를 견책하는 것이거늘, 신하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의로움과 부합되겠는가? 지금 명하노니 백관들은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할 것이며, 이후에 천지의 재난이 있어도 다시 삼공을 탄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비가 가후에게 물었다.

내가 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벌해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데, 오와 촉 중에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하오?

가후가 말했다.

오와 촉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험준한 산과 물에 의지하여 있는 데다, 유비에는 웅대한 재주가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은 허실을 알아보며 육손은 병세를 잘 보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요해지를 지키고 강과 호수에 배를 띄워 두고 있으니, 모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조비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에 강릉의 전역을 일으키니, 군사들이 많이 죽었다.

2.13. 죽음


가후는 나이 77세에 죽었는데 80세 가까이 살았으니 당시로 치면 정말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시호를 숙후(肅侯)라 했다. 아들 가목이 후사를 이었다.
순욱 별전에 따르면 진나라(서진)에서 사도가 궐석이 되자 진무제(사마염)가 순욱#s-2(荀勗)에게 어떤 사람이 좋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순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삼공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위 문제(조비)가 가후를 삼공으로 삼자, 손권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병서 중 가후의 주석서로 초손자병법(鈔孫子兵法), 오기병법(吳起兵法) 등이 존재했다는데 현대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과 여포 등에게 동탁이 죽자 죽음을 두려워 하는 동탁의 수하들에게 조언을 하면서 첫 등장. 양주인들을 모두 동탁 잔당으로 몰아 죽인다는 헛소문이 연의에서는 가후가 병사를 모으기 위해 퍼트린 것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도 이각의 부하 노릇을 하지만 헌제를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조언을 들은 헌제가 마침 가후가 혼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겠나?"라고 했더니, 가후가 "그것은 소인이 원하는 바이옵니다. 저 나름대로 해볼 것이니 폐하께서는 언행을 조심하시옵소서."라고 물러났다. 이 직후 이각이 들어와 그들 앞에서 깝을 친 것은 논외. 그러다가 이각의 모사로 있는 중에 조조가 쳐들어온 것을 보고 항복하라고 간언했다가, 이각이 죽이려 하자 행적을 감춘다.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다시 장수의 모사로 재등장. 연의에서는 조조가 장수를 공격하자 가후가 "기왕 질 거면 미리 항복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간언한다. 그러나 조조가 추씨와 동침하자 장수는 분노하며 가후의 계략에 따라 조조를 야습하여 패퇴시킨다.
이후 조조군과 장수군 + 유표군이 싸운다. 여기서 창작된 장면이 하나 있는데 조조는 서벽을 치는척 하면서 동벽을 공격하는 위격전살지계(僞擊轉殺)를 사용 했으나 가후는 허유엄살지계(虛遺掩殺)로 격퇴시킨다. 조조는 원소가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후퇴하는데 이를 보고 장수와 유표가 추격하려 하자 "지금 추격하면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진짜로 졌다. 그들이 돌아와서 한탄하자 가후가 "한번 더 추격해보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이깁니다."라고 했다. 유표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남았지만 장수는 그 말을 믿고 추격했더니 진짜로 이겼다. 가후는 "처음에는 적(조조)도 추격을 예상하고 방비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졌죠. 하지만 패한 군사를 이끌고 다시 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저렇게 급히 돌아갈 정도면 후방을 정리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추격해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후 장수에게 조조에게로 귀순을 진언하고 조조군에 합류, 나머지 행적은 정사와 비슷하다. 단 가후의 처세술에 대한 묘사는 딱히 나오지 않는다.

4. 평가



4.1. 처세술


적어도 난세에 '살아남는' 처세술에 있어서는 가후만 한 인물이 따로 없다.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다른 사람과 극히 어울리기를 꺼려하여, 사적으로 가후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자식의 혼인도 권문세족과는 맺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조조 정권 내에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한때라고는 해도 동탁, 이각, 곽사라는 역적들 밑에 있었던 것도 정치적으로는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정황으로 보자면 가후는 장수 휘하에서 조조 세력을 2번이나 박살내놓은 전력이 있는 만큼, 조조 세력 내에서 가후의 계략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일단 조조의 친아들인 조앙과 조카인 조안민이 완성에서 가후의 책략 때문에 죽었고, 조조의 호위를 맡았던 전위도 마찬가지. 게다가 이들이 별거 아닌 인물이었다면 몰라도, 기록이 적은 조안민을 제하면 조앙이나 전위는 훌륭한 인재들이었다.[9] 비록 조조에게는 용서는 받았다고 해도 조조 세력 내부에는 가후에게 잠재적으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비가 자신의 형인 조앙에게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장수는 이 일로 수차례 핍박을 받다 죽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 계책을 낸 당사자인 본인은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이처럼 가후는 큰 권력을 노리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조조라는 거인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신임과 용서 덕분에 안전할 수 있겠지만, 조조 사후까지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후계자인 조비는 사소한 원한조차 기억하는 인물이었고 일단 눈 밖에 나면 우금, 조홍의 사례처럼 과거의 공훈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구든 조비에게 "저놈은 옛날에 동탁, 이각, 곽사 밑에서 한나라 황실을 핍박한데다[10], 장수 밑에 있을 때는 폐하의 친족들과 전위 장군도 죽인 불충불의한 자가 아닙니까?"하며 바람만 넣으면 그야말로 한순간에 훅 가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권력을 탐하지 않고 숙이고 지내는 방법을 택했다.[11]
후계자 문제로 조비가 조식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가후에게 가르침을 구하기도 했다.[12] 참고로, 가후의 계책으로 조조를 한 차례 배신했던 장수는 원소군의 잔당을 토벌하는 중 조비에게 친근함을 보이려다가 조앙의 일에 대해서 면박을 당하고 상심해서 죽었다거나 심지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그 조비가 가후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가후에 대한 주변의 평가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후가 몸을 사린 이유기도 하다. 조비의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그냥 지금처럼 제 본분만 열심히 하라'인데, 언뜻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상당히 자신감을 북돋고 안정을 주는 종류의 것이며, 또 조식의 재능에 초조해져서 삽질하는 게 제일 큰 실책이 된다는 어떻게 보면 핵심을 꿰뚫는 성질의 정답이었다.
또 앞의 '조비에게 조언' 문단에서 보이는 것처럼, 조조가 그에게 후계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원소와 유표가 모두 장남을 후계자로 안 하고 차남이니 삼남이니 갈팡질팡하다가 나라를 왕창 말아먹은 것을 빗대어 둘러서 간언했다. 까딱하면 신경을 거스를지도 모르는 위험한 질문인데 그 감정기복 심한 조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자기 뜻을 제대로 전달했고, 조조도 뜻을 이해하고 웃은데다가 결국 그 말대로 했다.[13] 이처럼 다른 강골의 문사들과 달리 가후는 주군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거나 나아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모사였다. 그 덕분인지 왕위에 오른 조비는 가후를 태위로 올려놓았다. 다만 가후는 자신은 이 벼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주위의 눈길이 무서워서 얼른 이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하였다. 한편 손권은 가후가 태위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비의 안목을 비웃었다.[14] 아무리 공이 크다지만 이각, 곽사에게 붙어 역적질을 거든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15]
업무에서도 다른 일정 없이 직장-집-직장-집이라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으며, 사소한 일을 원인으로 공연히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얼마 안 있어 은퇴하고 조용히 살다가 곱게 죽었다.

4.2. 지략


가후는 능력과 처세 면에서는 뛰어난 모사였음은 분명하다. 아예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s-1는 가후를 그의 책략과 안목은 빗나간 일이 없다며 높이 평가하여 순욱#s-1, 순유, 가후를 묶어 한 열전에 집어넣었다. 조조의 3대 모사로 띄워 준 것.
모략의 정확성 면에서는 정사 기준으로 매우 날카롭다. 이각에서 여러 군주를 거쳐 조조, 조비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선택에 있어서는 단 한번도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를 않는다. 장수에게 조조 휘하로 들어가라고 한 조언이나, 후계자 구도에서 조비에게 해준 조언을 감안하면 권력 감각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가후가 한 조언들이 실패한 경우는 없다시피했다. 전쟁이든 뭐든 일단 어떤 건수에 대한 조언은 대부분 이익을 가져온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위의 양 전투 일화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후가 순욱이나 제갈량, 주유와 같은 삼국지의 특급 책사들과 비교할 때 가장 대비되는 점은 거시적인 계획의 부재 및 수동성이다. 이들 특급 책사들은 한 세력이 나아갈 근본 방향을 잡고 이를 능동적으로 실천했던 인물인 반면, 가후는 어떤 사건이 닥쳐 선택의 갈림길에 서거나 군주들에게서 문의를 받을 시에 거기에 맞는 계책을 짜내었던 인물에 불과하다. 실제로 행적을 보면 명확한 점이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기묘한 점이 있는데 '''이각 곽사 시기에만 잠시 이러한 행보를 보였으며 나머지 시기에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우선 동탁에게 등용되었을 시절에는 경력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16] 이각과 곽사와 함께할 때는 위기의 순간에 반격의 의지를 만들고 계획을 세운 1등 정변 공신이었기 때문에 입지가 크게 좋았고 또한 세력이 천자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권한 또한 상당했다. 때문에 이 때는 거의 유일하게 가후가 진영 관리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각 곽사의 행동에 실망하여서인지 이들과 대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 견제를 하다가 아예 황제 친위 세력으로 돌아서더니 다시 사라졌다가 이각, 곽사의 한패인 장제의 잔당에 합류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표홀함이 두드러진다. 장제 때야 마찬가지로 세력 내 입지를 알 수 없으니 넘어가고, 장수 때로 오면 세력의 1등 책사로서의 입지가 다져졌음에도 순간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뛰어난 기록이 있으나 장기적 행보에 있어서 얼마나 영향을 행사했는지는 기록상 미지수이다. 이 때는 이각 곽사 때와 달리 세력이 크지 않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조위 때를 보면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결정에만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조조에게 넘어간 직후에는 항장 + 후계자를 죽인 입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안정적이지 않은 세력 상황상 이상하게 없고 당연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후 1등 책사로 입지가 다져진 조조 후반부 ~ 조비 치세에서도 일순간의 선택지에서의 존재감이 두드러질 뿐, 세력의 장기적 행보에 대한 지속적 영향은 그다지 기록에 없다. 이렇듯 가후는 단기적 문제이든 장기적 문제이든 순간 순간의 "선택"에서만 모습을 드러낼 뿐'''본인이 충분히 가능한 순간에도 세력의 지속적인 관리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를 않는다.''' 오로지 이각 곽사 때의 잠깐의 경우가 예외적.
이렇게 가후는 일생을 천하 대세니 국태민안이니 하는 이념이나, 특정한 인물에 대한 충절과는 무관한 인생을 보냈다. 그 와중에 조조의 회유를 거부하고 장수가 조조를 치는 걸 돕는 모습에서 보여지듯이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것만도 아니었으나 자신의 안전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위험을 피했다. 가후의 능력과 식견이 거시적인 정략까지 미쳤는지도 불분명하다. 그의 능력이 법령이나 행정에 이르기까지를 두루두루 아울렀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으며 기록 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 입지가 애매해, 나설 수가 없던 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순간마저도 일관되게 행동하였다. 게다가 기록상 남은 언행에서의 식견을 보면 그러한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닌 것이 이각 곽사때는 본인이 어필하여 적절한 자리를 얻어내었고, 관리를 행하였다. 이렇듯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후 본인이 장기적 관리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이유로 행동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였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정리하면, 주요 세력의 1인자급 책사들에게 필요한 모사로서의 능력에서 거의 모든것이 최상에 가까웠으나, 장기적으로 지속해야 하는 행보에서는 절대적으로 몸을 사리는 결점이 있었다. 분명 본인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고, 이각 곽사때의 행보를 보면 그런쪽으로 의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후 크게 문제될게 없는 환경에서 마저도 끝까지 몸을 사린다는 점에서 이각 곽사 이후로는 무언가들을 이유로 각각의 세력들에 있을 때 마다 포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논박들을 감안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조조군 휘하의 참모진들의 공적과 서열을 메긴다면, 부동의 서열 1위인 순욱과 부동의 서열 2위인 순유와 함께 언급될 만큼 위나라 세력에서 중요한 위치인 것은 틀림이 없다. 사마의나 곽가의 존재감도 꽤 있지만 사마의는 조조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곽가의 경우 조조 때 짧게 활동한 반면 가후는 조조의 오랜 기간을 함께한 것은 물론이고 조비 때까지도 활동하였다.

4.3. 도덕성


삼국지 시대에는 비록 도덕성을 지키려다가 제 몸 간수도 못하고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그 상황을 제외하고 봐도 가후는 삼국지에서 가장 문제 있는 책사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삼보의 난의 원인 제공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 동탁이 사망한 직후에는 왕윤이 동탁의 잔당은 예외없이 처벌하겠다고 하자 이 때 이각과 곽사 등은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런 이각과 곽사로 하여금 왕윤과 맞붙어 싸우라고 조언한게 가후다. 결국 이각과 곽사가 왕윤을 이겼고 왕윤을 살해한 뒤 동탁 Mark.2가 되었다. 이각 + 곽사 패거리가 연 지옥도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동탁이 죽은 이후 가후가 없었으면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보좌하는 왕윤이 무서워서 그냥 줄행랑을 쳤으므로 후한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과론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가후의 이러한 행동은 삼보의 난의 비극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17] 비록 가후가 동탁 밑에서 큰 벼슬에 오른 것도 아니고 이각, 곽사의 집권 후 이들이 내리는 상을 꺼리고 황실을 도우며 황제와 대신들을 보호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왕윤이 황실을 한 번은 살려냈는데 그걸 묵사발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또한 그렇게 새로 세워진 이각-곽사 정권이 장안의 민생을 붕괴 수준으로 파탄냈는데 가후 역시 이각-곽사 정권의 일원이므로 그 폭정의 책임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남북조시대배송지는 가후가 이각 일당을 도와 여포, 왕윤을 물리치고 천자를 강탈한 사건에 동탁이 죽어 민중들이 겨우 평안을 찾았는데 이각 등을 도운 일은 비판받아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이어서 가후는 순욱, 순유와 같은 열전에 들어갈 인물이 못되고 정욱, 곽가 등의 열전에 들어가야 한다며 가후의 도덕성에 엄격한 비판을 가했다.
개인의 위신을 생각하는 것이 비범한 수준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장수의 예다. 장수를 조조에게 항복시킨 것을 관점을 바꾸어서 보면, 이것은 가후 본인에게 이득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장수에게는 끝내 비참한 최후와 가문의 멸족이 남겨진 결단이 되었다. 장수는 조비의 핍박으로 자살했다.[18] 후에 장수의 아들 장천이 위풍의 난에 연루되었을 때도 가후는 그를 위해 구명 시도를 한 기록이 없다.[19] 이런 상황인데도 가후 본인은 조비의 총애를 받아 삼공까지 오른다. 이러한 전적들이 평생 행실을 조심하여야 했던 주요 원인이자, 조비가 가후를 삼공에 올렸을 때 손권이 비웃은 원인으로 여겨진다.[20]
성리학 이전의 유학에서도 결국 가후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이리 붙고 저리 붙으면서 각종 계책을 내놓으며 연명하였던 인물이다. 그나마 이것을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라고 현대 관점에서는 옹호가 가능하긴 하다. 그런데 동탁이나 이각, 곽사 패거리가 한 짓이 무엇이고 그걸 거든 게 어떤 의미인지는 차치하더라도 현대적인 '관료 윤리'에서 봐도, 어느 정도 권세와 부귀를 얻은 뒤에도 행정이나 민생, 정책 면에서 별다른 실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그리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오대십국시대풍도가 있는데, 풍도는 그나마 고관으로서 '조정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 일이라는 옹호가 있고, 관료로서는 민생 행정 분야에서 평가가 좋았고, 경전을 인쇄하는 등의 문화적인 업적도 있다. 하지만 가후는 자기 개인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개인적인 보신을 위한 복지부동을 우선해서 관료로서의 업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4.4. 인생은 가후처럼?


국내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가후를 고평가 하며 ''''인생은 가후처럼''''을 슬로건처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갖가지 이유로 떼거지로 죽어나가던 난세에 주군을 계속 바꾸면서도 끝내 천수를 누린 점을 보면, 가후는 '살아남는' 처세술만큼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후는 설명하자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윤리를 저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런 점만으로 가후의 삶이 과연 '본받을만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위에 '도덕성' 문단에서 말한대로 가후는 삼국시대의 수많은 책사 중에 도덕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인물로, 고대의 윤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대의 시선으로 봐도 삼보의 난을 부추기거나 장수를 이용해먹고 나몰라라하며 떠난 것은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도덕성을 제외하고 '난세에 살아남는' 것만을 최중요시 한다고 봐도, 그런 면에서 보면 가후의 상위호환격인 인물이 따로 있는데 바로 '''유선'''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황제로 살았으며 심지어 망국의 군주가 된 후에도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서 말그대로 안락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다. 그러나 삼국지 팬덤의 어느 누구도 '인생은 유선처럼'을 외치지 않는다.[21]
둘의 차이라면 가후는 능력자로 유명하고 유선은 무능력자의 아이콘으로 유명하다는 건데, 이런 점에서 보면 '인생은 가후처럼'을 외치는 팬덤은 살아남는 처세술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명성을 떨칠 능력도 중시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눈에 띌 정도로 잘난 것도 바라지 않고, 반대로 욕먹을 정도로 못난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자기 보전은 중시하는 현대 소시민적 감성에 들어맞는 인물이기에 가후를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도덕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인물이고 현대인들도 도덕성에 문제가 있기를 바라지는 않으니, 가후의 삶이 지나치게 고평가 받는 것은 이런 도덕성 문제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가후는 시기와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해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며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 한명 없이 지냈는데, 현대 소시민이라고 해도 친구 한 명 없는 이런 삶을 롤모델로 삼을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다.[22]

5. 미디어 믹스



6. 관련 항목




[1] 신당서세계표[2] 정사에서도 조조가 이 과부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추씨라는 성은 연의에서 추가한 것.[3] 그래서인지 유표는 원소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지만 직접적으로 군사를 내어 돕지 않았다. [4] 위 일화의 순서를 잘 보면 장수가 뭘 어쩌기도 전에 가후가 독단적으로 원소의 사신을 쫓아버렸다.[5] 애초에 낙양에서 장막, 원소 등과 함께 어울리던 사이였다.[6] 몇몇 연의의 판본에선 조조가 잠시 원정을 나갈 때 조식은 화려한 문장으로 시를 지어 아버지 조조를 찬사하는 글귀를 지어 주변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조비는 가후의 충고대로 그저 울며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길 비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본 조조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조비밖에 없다고 생각해 이를 계기로 가후에게 후계 문제를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서는 조비에게 출정하는 조조 앞에서 울라고 충고한 사람은 오질의 행적이지 가후의 충고가 아니었다.(오질전 주석 세어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연의의 판본에서는 오질의 행적을 가후의 행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7] 둘 다 첫째 아들후계자로 삼지 않아서 내분 때문에 망했다는 뜻이다. 다만 유표의 경우엔 어차피 첫째 유기는 불과 유표가 죽은 지 1년 만에 죽고 그 세력은 유비에게 흡수되었고 유종의 경우엔 유표가 죽자 곧바로 형주를 조조에게 바친 인물이니 유표가 누구에게 후사를 물려줘도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고 원소의 경우엔 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긴 했는데, 우선 한참 전부터 원상을 후계자로 생각하였고 후계자로 지목된 원상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원담을 죽이거나 모든 권한을 제거해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원담을 청주자사로 보내거나 한술 더 떠서 관도대전에 참가시켜 공을 세울 상황을 만들어주는 등 후계자 구도를 자신이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며 재앙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다. 덕분에 원소 사망 후 원담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어진 것. 신격화까지 될정도로 엄청난 카리스마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터질 수밖에 없는 불씨를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사후에 그 문제들이 터져나와 멸망한 것이다. 자세한 건 원소(삼국지)문서 참조. 뭐 그렇다곤 해도 넓은 의미로 보면 결국 '후계자 문제는 확실하게 결정지어놔야 문제가 생기지 않고, 명분이 확실한 장남을 후계자로 삼는 게 좋지 않겠나' 정도의 의미는 통하고, 결과적으로 장남을 후계자로 삼지 않아 멸망한 예시로는 적합하긴 하다. .[8] 위 군부는 조인 사후 대사마 조휴, 대장군 조진의 투톱에 표기장군 사마의가 받치는 체제로 재편된다.[9] 조앙은 능력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인성은 자기를 희생해서 아버지를 살렸다는거 하나만으로도 대인배가 확실하다. 이후 후계자감으로 낙점된 조비가 가장 부족했던게 이것이였던것, 그리고 그 조비 때문에 조위 멸망의 길이 깔렸다는것을 감안할때 조앙의 부재는 조위에게 치명적이였다.[10] 조조는 속내야 어쨌든 한황실의 보호자로서 이각과 곽사를 역적으로 지목했다. 그 이각과 곽사가 삼보의 난을 일으켰을 때의 상황과 그 둘이 장안을 장악하는 데 1등공신이 누구였는지 생각하면 가후가 조조 밑에서 있는 것 자체로도 대단하다.[11] 하지만 이것들이 꼭 가후가 자신의 의지로 남들을 멀리했다고 생각할 근거라 보기는 힘들다. 공융원소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대 호족들 사이에서 유교의 가르침은 이미 교조화되어 융통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탁의 패거리에 몸을 담고, 이각과 곽사를 선동해 난을 일으켜 황제를 핍박하게 만든 가후란 인물의 평이 대체 어땠을까? 당장 일식같은 것을 이유로 탄핵을 받거나 조비가 가후를 태위에 올려놓자 손권에게 비웃음을 사거나 사마염의 질문에 순욱이 대답한 내용만 보더라도 호족들의 가후에 대한 평가가 결코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니 가후와 사돈지간을 맺으려던 호족들도 없었을 것이고. 즉, 가후의 처세술은 그 개인적인 경계심으로 얼마든지 친분을 쌓을 수 있는데도 스스로 거부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면도 크다고 볼 수 있다.[12] 이 또한 가후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 행동이다. 또한 가후가 후계자 문제에 참여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13] 물론 조조가 자기 주관으로 선택한 거지 무작정 가후의 말을 따랐다는 뜻은 아니다.[14] 가후의 능력을 비웃은 게 아니라, 역적들 아래에서 종군했던 그의 출신성분을 비웃는 것이다.[15] 그렇지만 손권의 아버지 손견은 황제를 참칭한 역적 원술 휘하 장수였으므로 누가 누굴 비웃을 처지는 아니다.[16] 나이는 40대 초반으로 제법 되는 편이지만, 동탁 진영에 언제 합류해서 능력을 보인지는 알 수 없다.[17] 다만 당시 왕윤은 동탁의 잔당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가후는 당시 커리어가 부족했음으로 이각과 곽사를 돕지 않았으면 숙청되거나 그저그런 인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18] 이건 위략에서 인용한 주석으로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정황상 실제였을 가능성이 제법 있는 일이다. 사실 조비가 핍박하지 않았다고한들, 조위가 유지되는 동안 장수의 혈족들은 언제고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의 다른 자식이 왕위를 이었던들 장수를 후대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조가 죽는 시점에서 장수의 미래는 이미 막다른 길이나 진배 없었던 것이다. 가후씩이나 되는 모사가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상 못했을 리 없는데도 장수를 설득해 조조에 투항케 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장수를 이용해 먹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장수는 조조에게 구박을 받은 적이 없고 어디까지나 조조와는 별개로 조비에게 핍박받아 죽은 것이니 가후가 이것을 미처 예상못했을 거라는 옹호론도 있으나, 과연 조비의 핍박에 조조의 의도가 없었을지는 의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장수 항목 참조[19] 몇몇 연루자는 다른 인물들의 구명 시도 끝에 살거나, 연루자 본인은 처벌되더라도 그 이상으로는 연좌되지는 않게끔 처리된 경우도 있었다.[20] 정욱 역시 조조의 식량 조달 과정에서 약탈 및 인육 조달로 인해 삼공에 오르지 못했다고 세설신어에 나온다. 물론 여기에 대한 근거는 적지만, 초기 조조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반드시 배제할 수 만도 없는 일이다.[21] 다만 이건 출신 차이가 심한데,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는건 매우 일부이지만, 가후의 출신 성분은 매우 평범했기에 일반인의 슬로건으로는 가후가 좀 더 적합하긴 하다. 사고쳐서 뉴스에 나오는 재벌 3세들에게는 인생은 유선처럼 같은 충고가 더 적절할 지도...[22] 물론 가후는 대인관계에서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을 일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므로 '혼자서 순탄하게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후의 삶은 롤모델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