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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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정치가. 자는 중영(仲穎). 아버지는 동군아(董君雅), 어머니는 지양군. 참고로 동탁은 동군아의 둘째 아들이고 형은 동탁(董擢), 동생은 동민.
황제나 추존황제도 아니었던 주제에 망탁조의의 멤버 중 하나. 하진과 더불어 삼국지의 첫 단추를 꿰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현대 중국어로는 '둥줘(Dong Zhuo)'로 읽지만, 후한 당시에는 상고한어로 대략 ‘통 트레욱(tongʔ trewk)’, ‘통 르테욱(toongʔ rteewg)’ 정도로 읽혔을 것이다.
2. 비대한 체구
후한서 동탁열전에 의하면 궁기마술은 뛰어나지만 체구 자체는 뚱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창작물에서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에 걸맞게 욕심사나운 얼굴을 한 뚱보로 묘사된다. 죽고 나서 배꼽에 불을 붙이자 배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며칠이나 불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다만 사서에서 동탁이 비대했다는 묘사는 딱 동탁이 죽은 후에 시체상태일 때 나오는 묘사이다. 사람의 체형은 언제든지 변하기 마련이기에 이 묘사 하나로 동탁이 평생 비만이었다고는 볼 수 없고 무장일 때는 근육질 체질이라 마상무예의 극치를 보여줄 정도로 날렵했는데 노년에 살이 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 이 점을 감안해서인지 토탈 워: 삼국 등의 매체에서는 동탁의 체격을 나이에 따라 변화시키기도 한다.[2]
2.1. 연의에서
연의에서도 지속적으로 비대한 몸집에 대해 묘사된다. 몸이 비대해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드러누웠다는 묘사까지 있다. 조조가 이때를 틈타 암살하려고 했다가 거울에 비쳐 실패했다. 여포가 초선과 밀회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여포를 쫓았으나, 몸집이 비대한 탓에 따라잡지 못하기도 한다.[3]
뚱뚱한 외모와, 힘 쓰는 일은 여포에게 맡기는 이미지 때문에 싸움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연의에서는 손꼽히는 장사며 몸놀림도 잽싸다.''' 오부가 자기를 암살하려고 단도를 들고 덤비자 순식간에 피하고는 팔을 붙잡아 막아냈으며,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고 할 때 뒤돌아 누울 때까지 기다린 것도 동탁의 강한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비만이라도 그냥 살만 뒤룩뒤룩 찐 것과 근육이 잡혀있고 그 위에 지방이 붙은 것은 전혀 다르다. 뚱뚱한 몸매를 지녔지만 굉장히 민첩한 빠른 강호동과 같은 씨름선수를 생각하면 된다. 동탁은 하술하듯 야전군인 출신이었기에 상당한 단련을 해서 강골을 갖췄을 것이고 그렇다면 뚱뚱한 체구임에도 민첩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양주(서량 지역) 농서(농군 임조현) 출신. 거칠고 지략이 있었으며, 덩치가 크고 대단한 완력을 가졌고 궁마술에 능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화살집 두 개를 차고 좌우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 패거리를 이끌고 다녔고 강족의 유력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훗날 고향#s-1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 때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을 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었기에 강족들이 감격했다는 일화도 있다.[4]
환제 말엽에 우림랑으로 천거되어 병주에서 전공을 세워 병주자사가 되었다. 그리고 포상으로 받은 전리품들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졌다.
이후로도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자주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했으며 하동 태수로 재임한다.
3.2. 황건적의 난
하동 태수로 재임하던 중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184년, 황건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노식이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소환당하고 동탁이 대신 동중랑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황건적에게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러 대충 싸웠다는 말도 있으나 본인이 이에 대해 매우 속상해했다는 기록도 나오므로 그냥 진 것이 맞는 듯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이 황건적에게 쫒기다가 당시 의용군에 불과했던 유비 삼형제 덕분에 목숨을 건지는데, 처음에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대하다가 그들이 의용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거만한 본색을 드러내어[5] 그의 인간성을 암시했으나 이는 연의의 창작 장면이다. 정사에서는 황건적의 난에서 유비와 동탁이 만난 적은 없다.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지만 불복했다. 병사들이 자신을 따른다는 이유를 내세웠는데, 실제로도 동탁의 핵심 부하들은 그의 사후까지도 배신을 하지 않았으므로 거짓말로 볼 수는 없다. 고대의 변경 지방과 중앙은 다른 국가와도 같은 수준으로 환경이 차이났으므로, 부하들의 입장에서도 중앙 지휘관들에게 빌붙어서 소모품으로 쓰이기보다는, 동향에서 함께 내려온 동탁을 계속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있다.
3.3. 변장·한수의 난과 복귀
그러나 184년 동탁이 면직된 바로 그해 겨울에 한수가 같은 마을 사람인 변장과 같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185년 봄에는 장안이 있는 삼보지역까지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한나라 정부도 좌거기장군 황보숭에게 진압명령을 내리는데 동탁도 복직되어 중랑장으로 황보숭을 따라 한수 진압작전을 진행한다. 하지만 황보숭도 뇌물을 바치지 않자 조정에서는 7월에 황보숭을 해임하고, 8월에 사공이던 장온#s-2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때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승진한다.
삼국지 오서 손견전에 따르면 장온은 조서를 보내 부하 동탁을 장안으로 불렀으나 동탁은 늦장을 피우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다. 특히 상관인 장온을 우습게 보아 불손하기 짝이 없게 대하였다. 이때 장온군에서 참군사로 종군하고 있던 손견은 동탁이 평소 무례하고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며, 반란 진압을 맡고도 몇 년이 지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데다, 군율을 무시하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하니 절대 살려두면 안 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6]
동탁은 장온과 같이 미양에서 변장과 한수를 방어했지만 고전을 거듭하였는데 11월 동탁이 포홍과 같이 분전하여 변장 등을 격퇴하였다. 이후 동탁은 장온의 명령으로 3만의 병력을 받아 선령(의 )강(족)을 정벌하지만 변장과 한수를 추격하러간 주신의 군대가 유중성에서 보급로가 끊기는 바람에 패퇴하였고[7] 결국 동탁도 선령강에서 강족에게 포위당한다. 이에 동탁은 식량이 떨어지지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이 보낸 여섯 군 중 다섯 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오직 동탁의 군대만이 무사하였다. 이 공로로 동탁은 전장군 태향후로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는다.
비록 동탁과 군대는 무사히 퇴각했지만, 한수의 반란군은 건재했고 186년 겨울에는 동료인 변장과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죽여 세력을 통합해 그 세력이 10여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군대로 농서지역을 공격한다. 187년 4월에는 이상(李相)에 마등, 왕국마저 합세하고 양주의 자사 경비의 군대를 패퇴시키고[8] 한양군을 공격해 태수 부섭을 죽일 정도로 한수의 반란군은 그 세력이 강해진다.
188년 11월에는 한수의 부하 왕국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이에 한나라 정부는 동탁을 전장군으로 임명하고 좌쟝군 황보숭과 함께 한수 반란군의 토벌을 지시한다. 189년 2월, 왕국 등이 진창에서 후퇴하자[9] 이를 추격해 크게 승리한다.
황보숭 열전에 따르면 동탁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고 한다. 그리고 황보숭의 말대로 왕국의 군대가 물러가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동탁은 장온, 황보숭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정권을 잡자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형을 부과해 죽게 하였는데, 황보숭은 아들 황보견수의 간청으로 살려주었다.
3.4. 낙양 입성
진창에서의 승리 후 동탁은 군대를 사병화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상관을 무시했으므로 조정에서는 동탁을 두려워했고 이에 189년에는 동탁을 소부로 삼아 중앙으로 부르고 군권을 박탈하도록 시도했지만 동탁은 지휘하는 군대의 생활고와 부하들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보내주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이에 대안으로 같은 해 동탁을 병주 목으로 임명한 뒤 동탁의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동탁은 자신이 통솔하는 병력을 병주로 데려가겠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고 얼마 뒤인 189년 4월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즉위하자, 소제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은 십상시 제거를 계획한다. 이때 태후 하씨의 반대로 십상시 숙청이 번번이 실패하자 원소 등이 위해 지방의 장수들을 소집해 낙양에서 무력시위를 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진림의 반대에도[10] 하진이 이 계획을 따르고 여기에 동탁이 참여해 군대를 낙양으로 진군시킨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직전 밤에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하진이 죽임을 당하자 하진 세력의 반격으로 궁궐이 불타고 황제와 진류왕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동탁은 불타는 낙양을 보고는 군대를 강행군시켜 하루 만에 낙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망에서 소제를 만난다. 이때 소제는 동탁과 그의 군대를 보자 겁에 질려 울었고, 반대로 진류왕 유협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11] 또한 동탁은 유협의 보호자가 자신과 같은 동씨인 효인황후 동씨였다는 점을 상기해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황제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당시 영사황후 하씨와 하진의 잔류세력들이 보호자로 있던 소제와 달리 유협에게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있건말건 동탁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에 훨씬 용이했으며, 사실 동탁과 효인황후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같은 성씨라는 것은 지금과 달리 그 의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신이 전권을 틀어쥐는 데 약간이나마 명분을 세울 수가 있었다.
3.5. 정권 장악
동탁은 황제 소제의 신변을 장악하긴 했지만 동탁의 병사는 3천명 정도로 원소 등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크게 강할 것도 없었던 데다 동탁 본인을 포함해 군사들 대부분이 변방 촌놈들이라 위엄이라곤 전혀 없었고 사람들이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탁이 꾀를 내서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 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서쪽에서 대군이 계속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더불어 십상시의 난 때 살해당한 대장군 하진과 거기장군 하묘 형제가 이끌던 낙양 중앙군을 모두 찾아 자신에게 귀속시킨다. 이로써 동탁은 낙양의 군사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주 자사이자 집금오[12] 정원(丁原)이 위협이 되자 정원 부하 가운데 주부였던 여포#s-1를 회유해 정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13] 정원의 군대마저 흡수하여 엄청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원소 등 경쟁자들은 데꿀멍하게 된다. 이후 동탁은 사공인 유홍을 면직하고 자신이 사공 자리에 오른다.
3.6. 소제 폐위와 폭정
정권을 장악하자 동탁은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그 뒤 동탁은 한 달도 안 되어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이틀 뒤 곧바로 이유[14] 를 시켜서 소제의 모후인 영사황후 하씨를 함께 시해[15] 하고 진류왕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 중에 양성에서 주민들이 지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몽땅 도적떼라고 괜히 뒤집어 씌워서 모조리 학살해 버리고, 여자와 재산은 탈취했다. 그리고 귀가해서는 "도적떼들을 소탕하고 오는 길이다."라고 쌩구라를 쳤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희롱을 하며 함부로 폭행을 가하거나 강간까지 했다. 또 영사황후 하씨의 시신을 영제가 묻힌 문릉에 묻었는데, 그 틈을 타서 문릉에 있던 부장품과 보물들을 모두 도굴했다.
이와 같은 만행들을 참다 못한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몄지만, 실패하여 처형되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曹操)도 (왕윤의)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는 일화가 나오지만 이는 정사에 없고 연의의 창작이다.
또한 하내 태수 왕광도 이에 반발하여 수도 근방에 병력을 배치한 뒤 동탁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자 동탁은 자신의 병력을 강을 건너는 것으로 눈속임한 뒤 몰래 정예병을 보내 왕광군의 배후군을 급습하고 대파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3.7. 장안 천도
그러나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안 그래도 황건적이었던 곽태#s-2(郭太) 등의 백파적이 봉기하여 그 규모만 자그마치 10여만 명이었는데,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매우 난감해졌다. 동탁은 화풀이로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장막#s-2(張邈) 등의 제후들을 천거했던 주비와 오경 등을 참수했다.
그리고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하고자 하였는데, 사도 양표, 황완 등이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며 반대하자 이들을 면직시키고 곧바로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유에게는 낙양성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고, 여포에게는 후한#s-1 역대 황제와 후비들의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심지어는 공경대부들의 무덤마저 도굴하자, 그의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도굴했다.[16] 이로 인하여 낙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인 낙양은 불태운 뒤 군사기지화시켰고, 자신도 낙양에 주둔하며 하내, 산조에 집결한 연합군과 대치한다.
따지고 보면 이는 동탁 입장에서는 반동탁 연합군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며 동탁을 포함한 당대인들도 그런 인식을 어느 정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훗날과 달리 이때의 장안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낙양 다음가는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인구만 해도 낙양의 몇분의 일에 불과했고 낙양과 달리 서쪽에 치우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안에서의 동탁의 행보만 보더라도 1. 미오 건축, 2. 상국 취임, 3. 기타 공포 정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억지로라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여 장안 천도로 인한[17] 정권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면이 있다(특히 상국 취임과 공포정치). 미오 건설의 경우 동탁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공손찬의 역경루와 유사한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반동탁군의 활동은 분명 동탁 정권에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힌 것으로 볼 수는 있다. 따지고 보면 동탁 시기 후한 조정은 형식적 권위는 있을지 모르나 사실상 함곡관 너머 군벌들에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동탁도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딱히 없다. 당장 화폐개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유발만 해도 이런 것은 정부가 조세 등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할 수 없을 때 하는 일이다.[18] 즉, 동탁의 중앙정부는 자기 이름으로 재정을 보전할 정도의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는 처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3.8. 동탁 토벌전
반동탁 연합군은 막상 모여놓고서는 동탁을 치는 것을 꺼려 지지부진했다. 조조, 포신 등이 그나마 동탁을 치러 나가봤지만, 동탁은 에이스 카드 서영을 꺼내어 조조와 포신을 털어버렸다. 한편 손견도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고 원술 휘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191년에 하남까지 이르렀으나, 손견도 서영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군대를 수습하였다.
동탁은 손견을 마저 몰아내기 위해 호진과 여포를 파견해 손견이 있는 양인성을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 등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원술의 든든한 물자지원을 등에 업은 손견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도위 화웅 등이 전사했다. 참고로 당시 원술이 웅거한 남양군은 광무제가 그곳에서 거병한 이래, 성세에는 36개 현 약 36만 호 194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 권역이었다. 낙양이 있는 '''수도권''' 하남군이 성시에 22개 현 약 28만 호 174만 명이었으며, 당시 인구가 집중된 연주, 예주, 기주 '''주요 군국''' 인구가 최대 70만~12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군국 2 ~ 3곳이 합쳐진 셈. 심지어 훗날 확인되는 촉한 전체의 인구가(서류상 누락된 인구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하나) 90만 정도였다. 훗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신야현을 포함한 남양군의 몇몇 현을 분리해 군 단위의 행정구역을 신설하였다.
동탁은 손견의 용진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동탁을 증오하는 손견이 오히려 온갖 굴욕을 주며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면서 이 화친제의를 거절했다. 손견과의 화친도 실패하자 동탁은 다시 손견과 싸웠지만 털려 결국 손견이 낙양에 입성하게 된다. 이때 동탁은 손견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손견에게 동탁군이 크게 패하고 낙양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낙양은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동탁은 동월, 단외, 우보를 배치하여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원술과 공손찬이 연합하여 공손찬의 동생 공손월을 지휘관으로, 손견을 부장으로 삼아 원소를 공격했으나, 원소군의 주앙에 의해 공손월이 전사하게 되었다. 손견은 이후 전투를 중단하였고, 이에 따라 연합군도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3.9. 막장 전횡
동탁은 황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착하여 푸른 덮개에 금 장식을 두른 수레를 탔는데, 위엄이 마치 천자와 같았다. 아우 동민(董旻)을 좌장군으로 삼고, 조카 동황(董璜)을 중군 교위로 삼으니 종족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나란히 섰으며, 손녀 동백은 위양군에 봉해지고 심지어 시첩(侍妾)의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제후에 봉해졌다.
자신이 사는 미(郿)에 만세오(萬歲塢)라는 성채를 쌓았는데, 당대 사람들이 흔히 미오(郿塢)라고 불렀다고 한다.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에 웅거하고, 일을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塢)는 거점 요새의 개념에 가까운데 유사한 군사거점인 진(鎭)과의 차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만세오는 미 땅에 세운 요새 또는 성채라는 의미로 훗날 위와 오가 대립하는 유수에 새워진 유수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미오성이란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사실 동탁의 이 장면은 동시대 인물의 훨씬 유명한 행동과 사실상 근본적 형태가 같은데 바로 공손찬의 '''역경루'''다. 공교롭게도 동탁과 공손찬은 공통점이 참 많은데, 이 짓 외에도 둘 다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며 폭정을 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악행도 대놓고 역적인 동탁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이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미오 관련 항목 정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피폐한 장안 일대의 여력으로는 2, 3년에 불과한 동탁의 치세 동안 그런 대규모 역사를 일으키거나,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로 동탁 옹호론이나 그의 폭정이 과장되었다는 축에서 주장되는 의견. 그러나 이는 애당초 중국이 동원할 수 있는 물량이나 전후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관중은 적어도 동탁 이전에 각 군벌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긴 했으나 이는 다른 중원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관중이 완전히 박살난 건 동탁의 2~3년 폭정과 그 뒤를 이은 이각, 곽사의 삼보의 난 등의 개짓거리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미오 축조 같은 폭정을 남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당장 공손찬도 비교적 단기간 만에 역경 테마파크를 잘만 지었다.''' 그리고 후한, 삼국시대의 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으로 빠르게 건축이 가능했다. 한나라 시대 기록으로는 현대 도량형 기준으로 한 사람이 한 달에 5미터 40센치에 이르는 방벽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전횡 외에도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의혹이 줄곧 제기되는데 그 절정을 찍은 의혹으로는 황제의 비빈들을 황궁 내에서 강제로 범했다는 것. 심지어 황실의 공주까지도 강제로 범했다는 의혹까지도 받을 정도이니 동탁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과 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 이외에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 와 '''혀와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심지어 장온의 경우는 원술과 내통한 죄를 뒤집어 씌운 뒤 '''자기가 직접 주먹으로 때려서 죽였다.'''[19]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하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황의백 저서인 《삼국지의 지혜》에서는 이런 '''사디즘'''을 보인 이유가 정서 불안이었거나 대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으로써라고 평하고 있다.
게다가 명절이 있어 백성들이 낙양 성 밖을 나와 축제를 즐기고 있는 곳에 뜬금포 병력들을 끌고 가서 남자는 죄다 학살하고 여자는 죄다 잡아다가 이 대학살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내렸다.
거기에다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관직을 따내버렸다. '''그래서, 황제의 옆에서도 칼을 들고 무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20][21] 이 전설의 관직을 따낸 이후 기록된 동탁의 행보는 '''말 그대로 눈 앞에 걸릴 것이 없는 기세.''' 동탁은 장안에서 '''위세를 떨치며''' 대신들을 능멸했으며, 아울러 원소의 숙부인 태부 원외(袁畏)와 원술의 형인 태복(太僕) 원기(袁基) 두 집안 사람 50여 명을 잡아 죽였고 거기에 사공(司公)인 장온도 매질을 가해 죽였다. 이때 원소와 원술은 오직 살기 위해 야반도주했는데 원소는 동쪽으로 도주해 남피에 정착했고 원술은 남쪽으로 도주해 남양에 머물렀다가 손견 사후 고향 근처인 수춘으로 이사갔다. 후한서에는 동탁이 상국이 되고나서 예종을 첩으로 삼으려한 일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예종 문서 참조.
특히 경제 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화폐개혁.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불량률이 심했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고 심지어는 불순물까지 잔뜩 섞여서 이게 돈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찍힌 개체도 있었다. 그 결과 저질의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후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화폐 경제는 이후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각 나라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항목이 화폐임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은 학계의 평이 일치하고 있다.
3.10. 최후
하지만 이렇게 떵떵거리던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사도였던 왕윤은 사손서 등과 동탁의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탁의 호위를 맡던 중랑장 여포가 왕윤의 집에 찾아온다. 당시 여포는 과거에는 동탁이 창을 던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이후 동탁의 호위로 미오성 합문을 호위하던 중 동탁의 시비와 간통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 때문에 여포는 동탁에 대한 원한과 두려움이 쌓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를 같은 동향 사람이라 친하게 지내던 왕윤에게 토로하자 왕윤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며 여포에게 동탁 암살을 권유한다. 처음에 여포는 양부자 사이의 정 때문에 거부했지만 왕윤이 과거 창사건과 동탁과 여포가 친부자가 아님을 주장하며 부추기자 여포도 동탁 암살에 참여한다.
연의에 등장하는 초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으로, 잡극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했다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시초다. 이후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양녀 초선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형태로 완성된다. 이 연환지계의 전개에 대해선 초선 항목 참조.
192년 4월 23일 황제가 병에 걸렸다가 낫자 신하들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궁궐의 미앙전에 모였고, 동탁도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여포에게 호위를 맡기고 궁궐로 입궁한다. 이에 여포는 기도위 이숙을 시켜 동탁을 암살할 병사 10여 명을 모아 호위병으로 위장후 궁궐의 액문 안쪽에 숨겨두었고, 동탁이 액문을 지나자 바로 급습한다. 동탁이 궁궐에 들어가자 호위병에게 제지당하였고, 이숙이 먼저 칼로 동탁을 베려 했으나 조복 밑에 갑옷을 입고 있어 팔만 베어낸다. 부상을 입은 동탁은 여포를 불렀으나 그 여포는 "(황제의) 조서가 내렸다!"라며 오히려 동탁을 공격했다. 이에 동탁은 "개 같은 놈(用狗),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는 말을 남긴 채 여포의 창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후한서나 삼국지 등 역사서에 따르면 동탁의 죽음을 암시하는 현상들이 많이 나온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이 당시에 천리초 십일복(千里草(千+里+艸=董) 十日卜(十+日+卜=卓))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온 천지에 난 풀은 열흘을 못 넘긴다"며 동탁의 이름을 파자한 것이었다. 또한 동도(董逃)라는 동탁이 달아난다는 뜻의 노래가 지어졌다. 또 후한서에는 어떤 도사가 포(布)[22] 에 여포의 성인 여(呂)자[23] 를 적어 동탁에게 여포를 경계할 것을 알렸지만 동탁은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사를 쫓아냈다고 한다. 더불어 죽는 날 말이 날뛰어 옷을 더렵힌다든가, 북액문 앞에서는 말이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지연의에서 이것을 각색해 이숙이 동탁의 죽음을 암시하는 징조를 둘러대는 장면으로 창작되었다. 이숙은 동탁 입장에서 보자면 여포를 데려온 1등 공신이었지만 어느새 잉여가 되어 있었다. 특히 동탁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포가 왕윤[24] 에게서 "동탁을 꾀어낼 인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이숙을 추천한다. 이리하여 동탁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이숙을 따라 궁궐로 간다. 동탁이 궁궐로 올 때 생기는 숱한 불길한 징조[25] 에 대해 이숙이 구라로 둘러대서 립서비스#s-1로 안심시킨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후한서에 따르면 뚱뚱한 몸의 배꼽에 누군가가 심지를 꼽고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26] 동탁의 시신은 그 뒤로도 수난을 겪어 여포가 장안에서 도주할 때 동탁의 머리를 챙겨서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27]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장안을 탈출하면서 원술에게 의탁하기 위해 선물로 동탁의 수급을 보낸 모양.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각 등이 동탁의 산소#s-1를 만들었지만 산소도 만들어지는 족족 3번이나 벼락을 맞았으며, 결국 그나마 남은 뼛조각 몇개도 깡그리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건 창작이다.
동탁이 죽고 동탁의 동생 동민, 조카 동황 등 다른 동씨 일족들도 참살되었고, 90세 먹은 동탁의 생모 지양군도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역시나 참수되었다.
여담이지만, 동탁 모살 사건은 훗날 북위의 효장제와 그 측근들이 연구하여 이주영을 살해하는 데 이용되었다.
4. 평가
伯業成時為帝王(백업성시위제왕) 천하를 거머쥐어 성공하면 제왕이 되고
不成且作富家郎(불성차작부가랑) 실패해도 부자는 될 줄 알았지만
誰知天意無私曲(수지천의무사곡) 하늘이 용서치 않을 줄 누가 알았으리
郿塢方成已滅亡(미오방성이멸망) 미오성을 쌓자마자 멸망하는구나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동탁의 최후를 평한 시
4.1.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인
제갈량과 노숙 등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면 동탁이 워낙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언급이 나오는 걸로 보아 당대에 동탁은 이미 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동탁이 해놓은 짓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탁이 이런 짓거리를 저지르자, 원소는 헌제가 황제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한 황실에서 대인배로 이름 높은 유우를 옹립하려 시도했고, 원술은 칭제, 유표는 자기 동네에서 황제 놀이를 했는데, 유언은 오두미교를 핑계로 조공을 끊고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대량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유표는 이를 조정에 고발하였는데, 유표도 피장파장이다. 정사 삼국지 위서 유표전에 이르기를 유표 역시 후한 황실 조정에 대한 조공을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동탁=원소=원술=유표'''라는 평가를 내렸다.1) 황제를 갈아치움으로서 정통성 붕괴 초래.
2) 이유야 어쨌건 군벌과 대치중 수도를 옮김으로써 중앙 권력 붕괴 초래.
3) 화폐를 마구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경제를 붕괴시켰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찍지 못해서 정규화폐가 위조화폐보다도 더 조잡한 상황이 되어 위조화폐가 난립함.
4) 본인의 계급장을 본인 맘대로 마구 달고 그걸로 전횡을 부린 탓에 중앙 관직의 권위를 붕괴시킴.
5) 이외에도 백성들을 학살하는 등 셀 수 없는 악행을 저지름.
그야말로 '''한 왕조를 마무리 지은 자'''. 이후 위진남북조는 동탁이 싸질러 놓은 걸 기반으로 이놈도 싸고 저놈도 싸고 난리가 났다. 물론 동탁 사망 직후에는 그래도 후한이 되살아날 여지는 있었지만 그 싹조차 동탁의 떨거지들인 이각과 곽사가 완전히 박멸해버렸다.
정치적으로는 권력을 차지하는 방법에만 뛰어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이나 사상에는 관심이 없어서 국가를 완전히 멸망시킨 악인, 폭군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정사를 보든 연의를 보든 유비,[28] 손권,[29] 원소[30] 등과는 정반대로, 진정한 의미로 조직폭력배 수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4.2. 장단점이 극명한 무인
'''변경 출신의 장수이지만 용병술은 미약했고 군사육성, 전략, 축성을 비롯하여 군사행정의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북방민족을 때려잡던 무인이라서, 무술실력은 궁술에도 뛰어났고 초인적인 완력을 보유한 싸움꾼이었다. 다만 황건적에게 패하고, 변장 토벌에 지지부진한 것 등 군사지휘에는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쿠데타 능력과 군대 유지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 무인으로서는 장점이 더 많았다.
전술보다는 사람을 꼬드기는 재주가 좋았다. 이 덕분에 강족들과 한족의 대립에서 평화로운 줄타기를 했고, 변경출신 제후와 부하들도 동탁을 좋아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즉 낮은 용병술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육성하고 성을 쌓는 능력은 대단했다. 당대의 군벌들이 중앙진출 이후에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다른 지역의 태수들을 도살하고 약탈하는 식으로 상비군을 유지했던 막장 상황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맞다.[31] 다만 인성 자체는 정적에게 잔혹했던 것도 사실이라서, 손견은 싸움도 못하고 인성도 개차반이라는 식으로 동탁을 엄청나게 비난했다.[32]
연의에서도 실제 역사상의 동탁의 이러한 면모가 잘 반영돼 있다.[33] 거구에 힘이 굉장해 자기를 암살하려고 칼로 찌르려는 오부의 팔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여 역관광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조조 역시 왕윤의 칠성보도를 받아 동탁을 암살하려고 할 때 동탁의 초인적인 완력을 두려워하여 무기도 없이 홀로 된 동탁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뒤로 돌아누웠을 때를 노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침대 반대쪽의 거울에 조조가 칼을 뽑아드는 모습이 비쳐 동탁이 그걸보고 놀라서 뭐하는거냐고 할 때 '''여포까지 안으로 들어오는''' 조조 입장에선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조조가 기지를 발휘해 "마침 제가 진귀한 보검을 얻어서 승상께 바치려고 합니다"라고 하며 칠성보검을 바치자 동탁은 흐뭇해하며 여포에게 좋은 말을 하나 내주라고 하고 조조는 그 말을 받고 튀어서 암살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여포가 "조조 그놈 뭔가 수상하지 않았나요?"이라고 하자 동탁은 "그렇긴 했는데 설마 걔가 나한테 무슨 짓 하겠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내심 수상하게 생각해서 이유에게 조언을 구하고 이유는 "승상이 갑자기 일이 생겨 조조를 부른다고 문지기에서 전한 뒤 조조의 반응을 보면 됩니다. 진심으로 승상에게 보검을 바치려 했던 거면 곧바로 돌아올 거고 진심으로 암살하려 했던거면 무시하고 튈 겁니다."라는 계책을 낸다. 과연 조조가 이유의 말대로 도망치자 열받은 동탁이 조조의 수배지를 전국에 뿌리게 된다.
그런 동탁이 유일하게 두려워한 사람이 손견이었다. 동탁은 손견 이외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육성한 군사력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만큼 업신여겼다. 하지만 동탁은 무인의 재능 중에서 딱 하나 용병술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손견은 용병술은 뛰어났으나 군사력 유지를 위한 경영능력에서 문제를 많이 드러냈으니, 두 사람은 여러모로 정반대라고 할 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동탁의 인생과 상당 부분 겹치는 인물이 손견의 핏줄에 있는데, 바로 손견의 종증손자인 '''손준'''이다. 동탁과 손준 모두 일신의 무용은 뛰어나나 군재는 형편 없으며 권력을 손에 넣기까지는 꽤 영민한 모습을 보여주나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는 온갖 학정과 폭정, 개인적인 방종을 일삼아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인물들이다. 그리고 둘 다 죽어서 받는 대우도 비슷하다. 동탁은 시체가 인간 양초가 되는 능욕을 당하고 무덤이 번개를 맞는 수난을 당했으며, 손준은 성이 고준(故峻)으로 갈리는, 즉 황족 족보에서 파이는 수모를 당했다. 게다가 故 자는 고씨라도 인명(성씨 포함)에 절대 쓰지 않음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4.3. 타락한 능력자?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는 젊을 때 이민족들과 친분을 맺고 주변인들에게는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으로 진출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권력구도를 개편하고 악인이 되었으니, 권력을 탐하고 타락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혹은, 애초부터 조조보다 빨리 나타난 '간웅'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동탁을 그저 미련한 돼지급으로 묘사하지만, 정사를 따지고 본다면 그는 서량지역의 변방 장수 출신 답지 않게 의외로 중앙조정의 권위와 힘을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정치형 군인'''이었다. 애초에 그냥 돈 좀 많은 중앙에서 파견된 돼지였다면, 그 미쳐날뛰는 변방 부하들이 당장 동탁부터 죽여버리고 재산을 뺏으면 빼앗았지, 그 밑에서 충실하게 부하로서 있다가 동탁이 죽은 뒤에야 날뛰지는 않았을 거다. 혹자는 그가 시골 촌놈답지 않게 황제를 이용하는 정치적인 센스가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조의 선배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 권력을 잡고난 이후에는 그걸 제대로 쓸 줄 몰랐던 자라고 할 수 있다. 조조는 동탁과 비슷한 경로로 협천자를 했지만, 확실히 질서를 잡고 치국을 실시했다. 하지만 동탁은 정권을 잡는 순간 폭정을 해서 국치를 문란하게 했고, 자신의 몰락도 재촉했다. 조조가 능력에 맞게 인재를 배치한 것에 비해 동탁은 '''갓난아기도 자신의 친척이면 태수 등 중요한 자리를 주는 기행'''을 저질렀다. 물론 조조도 군사적 능력은 연의와는 달리 별로 뛰어나다고 하기 힘든 하후돈을 대장군 자리에까지 앉힌 사례가 있지만, 대신 하후돈은 인덕이 있고 정치력도 괜찮은 인물이었는데다[34] 고대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 행정보급능력은 최고였기에 오히려 적절한 인사 배치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조의 선배는 선배이지만, 아무리 봐도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았다.
동탁은 물질적인 이득에만 집착하는, 매우 속좁은 통치를 했던 군인의 한계를 보였다. 정사에서도 전략적으로는 노련한 책략으로 연합군을 상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자폭이나 다름없는 바보짓을 반복했다. 특히, 낙양을 불태우고 요새화한 것은, 문과정치를 버리고 물리적인 이득만 보는 군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즉, 동탁은 권력투쟁에는 약삭빨랐으나 정치(문과)와 군사전략(군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은 1차원적인 독재군인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동탁은 권력을 잡는 재주는 빼어났으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조는 위선적인 행동을 잘했으나, 동탁은 의외로 위선을 전혀 부릴 줄 몰랐다. 때문에 권력을 편할대로 즐기면서, 천하를 망치고 자기 자신의 신세도 망쳤다. 차라리 스스로 천하를 다스리려는 야심이라도 있거나, 반대로 인간성만이라도 좀 더 겸손했더라면 유비처럼 민심을 휘어잡을 정치를 펼치고 부하들이 잘하는 관직을 주고 자신의 몫을 줄이면서 국가를 안정시켰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탁은 권력투쟁에는 뛰어나도 책임감이 없는, 흔해빠진 군인이 운좋게 정권을 잡았을 때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내용대로 동탁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남의 밑에서 국경수비대장 같은 걸 하면 적성에 맞지만, 모든 종류의 정책 현안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면 절대 안 되는 인물'''이다. 이는 동탁과 흡사한 형태로 독재 권력 체제로 폭주한 고대역사~현대사의 아시아 대륙의 군사통치자들의 사례(史例)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4.4. 동탁 재평가 시도와 반론
동탁이나 후한에 관련된 논의를 하다 보면 종종 동탁을 '진정한 충신'으로 미화하며 그는 역사의 승리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후 자신과 대립했던 조조와 연의를 쓴 나관중 등에 의해 역사적인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폄하당했다거나 혹은 동탁이야말로 개혁자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35]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탁에게 '변방 출신치고는 정치적인 센스가 뛰어났고 완력과 정권 장악 능력이 준수했다.' 정도의 재평가는 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대로 오수전을 남발해서 화폐 경제를 어지럽히고 한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서 무고한 백성들까지 학살하고 겁탈했다는 기록들이 엄연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재평가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동탁이 사후에 조조나 손견, 원소, 나관중 등에 의해 억울하게 역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미 동탁은 자신의 악행들로 인해 당대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미움과 원망을 받고 있었다. 오죽하면 동탁을 축출하기 위해 연합군까지 조직되었겠는가? 더군다나 이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적어도 동탁이 생전에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거나 하는 등의 긍정적인 기록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기록은 없다.
동탁이 진류왕(유협)을 옹립한 것도 그가 한나라 조정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훗날 동진 안제를 죽인 유유처럼 기왕 대권을 장악하려면 남들이 봤을 때 더 똘똘하고 유망한 쪽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는 것이 스스로의 정치적 위신이나 정통성 마련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잔혹하고 무도한 폭력성,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대한 기존 도덕관념과 남의 비판에 대해 완전히 무심한 독선적 태도를 영웅의 상, 최소한 그들 중 하나라 설정하고 거기에 인물들을 끼워 맞추는 경우도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동탁의 예라 할 것이다. 이는 조조를 현대에 평가할 때 쓰는 태도와도 유사하다. 물론 일반 백성들이나 자기 부하들, 이름이 널리 떨치지 못한 이들은 죽어나갔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꺼림칙한 상대였을 황보숭과 노식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한 순유조차도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생전에 해치우지 못했고 명망 높은 왕윤과 채옹을 우대하거나 심지어 이 시점에서 고작 20대 젊은이였던 사마랑에게도 회유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동탁이 당고의 금 해제 이후 슬슬 현실적 권력성을 띄기 시작한 '사대부 명사 사회의 여론'의 위력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약한 백성들에게는 포악하고 소위 '명사' 클래스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무른 면이 있는, 어떤 의미론 일종의 '강약약강' 성향을 가졌던 점에선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결국 동탁은 생전에 저지른 악행들로 사망한 후에도 꾸준히 비판받고 있으며, 동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조를 포함한 정적 및 나관중에 의해서 조작된 잘못된 평가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역사적 평가일 뿐이다.
5. 가족 관계
이외에도 우보와 혼인한 동탁의 딸, 동백의 아버지인 동탁의 아들도 있었지만 이름이 남지는 않았다.
6. 기타
《동도가董逃歌》는 후한 때 떠돌던 아이들이 지은 곡이다. 뒤에 동탁이 난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도망갔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익혀 가장(歌章)을 만들었다. 악부(樂府)에서는 이를 연주해 경계로 삼았다.
고금주 『음악』
7. 미디어 믹스
후한서 동탁열전에 비만이라는 기록이 있고 이 때문인지 동탁이 죽고 시체가 효시되었을 때 더운 여름에 뚱뚱한 몸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끓었다는 기록이나 배에다 심지를 꽂고 불을 붙이자 며칠 동안 타올랐다는 기록도 있어 대부분 창작물에서 뚱보의 모습으로 나온다.
8. 둘러보기(계보)
[1] 현대의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은퇴 후에도 식사는 현역 때처럼 먹는데 칼로리 소모는 안 되거나 만들어놓은 근육이 다 지방으로 바뀌어서 비대해지는 경우가 많다. 찰스 바클리라든가...[2] 박종관 화백이 그린 만화 삼국지에서는 이를 반영했는지 첫 등장시에는 덩치가 좀 있다 싶은 체형이었다가, 정권을 잡고 적대하는 세력이 많아져 스트레스로 인해 살이 점점 찐다고 묘사했다.[3] 그 대신 여포가 놓고 간 방천화극을 던졌으나, 여포에게 통할 리가 없다. 그냥 손으로 툭 쳐서 떨어트려 버린다.[4] 이게 동탁의 유일한 소였다는 설도 있다. 가끔 훈훈함을 더하기 위해 감격한 강족이 소를 보내줘서 오히려 소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5] 동탁과 반대로 조조는 유비 일행이 의용군이래도 정중하게 대했으며 훗날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다시 진압을 나섰다.[6] 삼국지 오서 손견전[7] 당시 장온의 부하였던 손견이 주신에게 보급로를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주신을 이를 무시했고 손견의 말대로 변장의 군대는 규원협에 주둔해 주신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한다.[8] 후한서 동탁열전에는 죽였다고 나오나 같은 후한서 효령제(본)기에는 단순 패퇴로 나온다.[9] 동탁열전에는 한수의 숙청 때문이라 한다.[10] 연의에서는 조조로 각색.[11] 다만 이 점은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우둔하다는 소제를 폐위하고 현명하다는 진류왕을 옹립한 데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현명한 황제보다 어수룩하고 우둔한 황제가 더욱 손에 쥐고 농락하기 좋기 때문. 이 탓에 다양한 추론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상식적으로 아무리 현명한 9살이라고 해봤자 어머니, 하태후의 보호를 받는 10대보다 손에 쥐고 농락하기 어려웠을까 하는 반론도 있다. 해당 반론대로라면 이미 진류왕이 어머니가 없단 점에서 합격점이었을 것이다.[12] 연의에서는 전직인 병주 자사의 오기로 형주 자사로 나온다.[13] 연의에서는 이 제거를 사주하는 역할을 이숙#s-2이 맡았다. 그리고 여기서 여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해진 선물이 바로 적토마. 물론 동탁이 여포에게 적토마를 선물한 것은 연의의 각색이다.[14]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유가 동탁의 사위로 나와서 여러가지 꾀를 내주지만 정사에서 이유는 동탁과 별 관련 없는 사람이었고 동탁의 명으로 소제를 독살한 것만이 사실이다.[15] 연의에서는 그 이유가 유폐된 이후 '날 구해줄 충신 어디 없나'라는 의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연의에서는 홍농왕과 영사황후 하씨 말고도 홍농왕의 아내인 당희까지 죽였다고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당희는 죽지 않았다.[16] 여기서 백성은 부유한 평민들이다.[17] 그리고 낙양 대겁탈과 폭정도 추가.[18] 이를 인플레이션 조세라 한다.[19]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장온의 뒷덜미를 잡아서 끌고 밖으로 나가는데, 얼마 후 여포는 쟁반에 담긴 장온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20] 상국은 본래 한나라의 관직 체계에 있어서 전설의 관직이자 일종의 영구결번과 같은 관직이었다. 한나라를 창시한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으로 전설적인 공로를 세운 소하, 조참 및 여후의 조카였던 여산 이후로는 상국을 지낸 사람이 없다가 약 400여 년 만에 동탁이 상국이 된 것이다. 물론 동탁은 그에 걸맞은 공을 세운 일이 없었으니, 그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상국이 되었을 뿐이다.[21] 삼국지연의에서는 고작 승상과 태사 정도에 오르는 게 전부라, 정사보다 너프된 것이다. '동태사'라는 별칭이 사실은 승상보다 낮다. 이 상국이란 관직 때문에, 동탁은 자신이나 후손이 황제가 되지 않았는데도 망탁조의 라인에 들어가게 된다.[22] 베 포(布) 자이다.[23] 판본에 따라 입 구(口)자 두 개를 위 아래에 적어 여(呂)자를 나타냈다는 말도 있다.[24] 및 황완 등.[25] 수레바퀴가 부서진다든지, 먹구름이 낀다든지. 이 중에는 동탁이 오래 못 살거나 여포에게 죽는다는 것도 있었다.[26] 이 때문에 살아서는 장안을 통치하던 동탁이 죽어서는 장안의 등불이 되어 며칠 동안 장안의 불을 밝혔다고 하는 농담이 있다.[27] 출처: 후한서 여포열전[28] 다른 군웅들과는 달리 일개 부대 정도의 병사만을 이끌고 시작했으나 백성들에게 칭송받을 정도로 민심 장악 능력이 뛰어났다.[29] 늙어서 실책을 좀 저지르긴 했어도 국가운영을 상당히 잘했고 부하들도 상당히 잘 관리했다. 여몽 역시 그가 직접 발굴한 인재다. 오히려 소패왕으로 불리던 손책이 더욱 사이코처럼 집권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30] 노비의 자식이었으나 자신을 희생하는 퍼포먼스로 원씨가문과 천하의 마음을 얻고 심지어 생모를 포함한 가문이 몰살당하게 냅둬도 효자로 칭송받고 악행을 저질러도 찬사를 받을 정도의 괴물같은 정치력을 보였다.[31] 하지만 자기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낙양과 장안을 엄청나게 약탈하였던 걸 보면...[32] 당시의 손견은 동탁을 죽여버리자고 간언할 정도였는데, 정작 손견이 동탁을 비난한 항목에 대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편이다. 정사의 손견 쪽은 동탁보다도 더 명분없는 식의 상관살해를 벌여서 땅을 빼앗았던 전적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손견과 유비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라를 일으켜세우려고 노력한 점이 있어서 동탁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동족혐오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손견은 황제를 위해서 정말 온갖 잔악무도한 짓을 서슴치 않은 반면 유비는 백성을 위해서 다른 군웅들에게 계속 엿을 먹여왔다. 반면 '''동탁은 나라를 일으켜 세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견을 동탁과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33] 다만 조조가 동탁 암살을 시도하는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라서 역사상의 동탁의 무력을 가늠하는 근거로는 사용될 수는 없다.[34] 어차피 대장군 급 보직씩이나 되면 직접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단 휘하 제장들을 통솔할 능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특히 조조처럼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목적이 있는 야심가한테는 더욱더.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 친한 친척이자 정치력이 뛰어난 하후돈은 휘하 제장들을 통솔, 포섭하는데는 오히려 안성맞춤격 인사가 된다.[35] 김운회도 삼국지 해제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