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뜨는 강/고증
1. 개요
KBS 월화 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고증을 다루는 문서.
2. 과거 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2.1. 고증 반영이 잘 된 부분
2.2. 오류 부분
2.2.1. 전체 설정
- 평강공주가 무인으로 나오는 것 자체부터 완전한 창작이다. 고래의 온달 설화, 설화소 가운데 평강공주가 이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신혼 초 바싹 마른 말을 헐값에 산 뒤 잘 먹여 준마로 키웠다는 것뿐이다.[1] 극작가가 서사 전개를 위해 창발한 설정이라고는 하나, 특히 살수, 살수집단이라는 개념 설정 역시 종래의 판타지 사극에서나 흔하게 쓴 소재이며, 고대 동아시아에 이러한 세력의 존재 여부는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극본의 개발 단계부터 작가 및 제작진이 별달리 큰 고민을 하지 않고 (클리셰에 가까운) 쉬운 선택으로 안주 했음이 여실하다.
- 고구려 초기인 고국천왕 대에 부족적 오부가 행정적 오부(동·서·남·북·중)로 개편되어 순노부는 동부(東部)로, 연노부는 서부(西部)로, 관노부는 남부(南部)로, 절노부는 북부(北部)로, 계루부는 중부(中部), 내부(內部) 또는 황부(黃部)로 불리게 되는데 평원왕은 고구려 25대 왕으로 그가 재위했던 시기는 고구려 말기에 속하는데도 극 중에는 과거 부족적 오부의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해당 설정이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평강공주의 나이 16살이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에게로 시집보내고자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고씨"라는 것 때문에 상부를 왕족인 계루부로 설정하였으나[2] 지극히 작가의 해석이 많이 담긴 것 같다. 이와 달리, 실제로 대략 66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원이라는 중국 사서에서는 고구려의 동부를 상부, 청부로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한원에는 고구려 내부(왕족, 즉 계루부)가 동부 밑으로 위치한다는 기술이 나와 있다. 따라서 한원이 쓰인 660년 전후, 고구려 말기에는 왕이 나오는 계루부조차도 동부의 아래에 있었다는 의미로 오부 중 가장 힘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상부라고 나타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온달이 활동했던 당시는 연개소문 가문의 힘이 강하던 때였는데[3] 연개소문의 부족을 많은 사서에서 동부로 보고 있다.[4] 따라서 상부는 동부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수 있고 동부는 예전의 순노부이며, 당시에는 연개소문 가문의 권력이 막강했으므로 동부 즉, 순노부 역시 세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온달의 부족이 동부인 순노부로 나오고 있고 부족의 힘이 약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연개소문 가문이 동부 대인의 지위에 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온달의 아버지가 순노부의 족장으로 나온다. 이러한 점들은 정확한 고증 반영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2.2.1.1. 복식
- 의상에 대한 시대 고증은 모두 잘못됐다. 태왕복, 관복, 평민복, 갑옷 심지어 갓까지 전부 시대를 구현하지 못했다. 고구려(더욱이 이와 같은 고구려 후기)는 벽화를 통한 자료가 많기 때문에 의상 고증을 하기 어려운 시대는 아니다. 특히나 관복이나 갑옷은 충분한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 어느 시대에도 사용된 적 없는 옷을 입고 있다.
- 평강공주의 아역이 입고 있는 옷은 고구려 벽화를 기반으로 고증된 옷이다. 보통 직령 형태의 한복을 떠올리기 쉽지만 단령(=곡령=원령)은 고구려 이전부터 쭉 입어왔던 복식이다. 단령은 내의(內衣)로 많이 착용했지만 외의(外衣)로도 착용했음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5] 무용총의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인을 보면 평강공주의 아역처럼 단령반비(團領半臂)를 입고 있다. 이런 복식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6] 또한 착용했다.
- ‘달이 뜨는 강’ 복식을 담당한 한복 전문가 한복나래솔 김정숙 대표는 이 논란에 대해 "한복은 시대별로 다른 복식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문서 사료를 근거로 하여 제작했습니다. 다만 드라마 의상의 특성상 고구려 시대 왕족이 입었던 의상에 입체 패턴을 접목시켜 제작했습니다"라고 해명했다.# 다만, 이러한 해명 및 주장이 (왕족 이상의 표징이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예의 삼족오 문양을 오부 예복의 가슴팍에 새긴 것 등 모든 복식 관련 고증에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7]
2.2.2. 1화
- 애초에 픽션인 드라마지만 문제는 이것이 기록된 사실까지 침범한다는 것이다. 평원왕은 역사서에 백성을 위했던 어진 성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데 1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신하한테 눌린 허수아비 왕에 왕후를 의심해 결국 왕후를 죽게 하고 월광을 잡기 위해 백성들을 죽이는 사실과 일단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8]
- 1화에서 절노부에 대한 자막 설명으로 북쪽 국경 방어라고 하였는데 절노부가 행정적 오부에서 북부에 해당하므로 맞는 설명이지만 다음 장면에서 순노부의 족장이라고 나오는 온협 장군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남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야말로 우리 순노부의 막중한 소임일세." 즉, 순노부가 남부에 해당한다는 뜻인데, 하지만 실제로 남부에 해당하는 오부는 관노부이며, 순노부는 동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동쪽 국경 또는 자막에 나온 것처럼 신라 쪽 국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2.2.3. 2화
- 훗날 영양왕이 되는 고원이 등장했는데 심약한 모습이었다. 고원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인한 왕이었던 걸로 기록되어 있다. 근데 이 드라마에선 설정부터가 태자의 자리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되어 있어 나중에 바뀔지는 의문이다.
2.2.4. 3화
2.2.5. 4화
2.2.6. 5화
2.2.7. 6화
3. 소설 원작 <평강공주>와의 비교
3.1. 고증 반영이 잘 된 부분
3.2. 오류 부분
4. 기타
[1] 그마저도 전승하는 문장 속 주어의 모호함으로 온달의 공인지, 평강공주의 공인지 확언하기 어렵다.[2] 고구려 왕족의 성씨가 고씨이고 계루부에서 왕을 배출하고 있었으므로[3] 온달은 590년에 죽었고, 연개소문의 출생은 594년쯤으로 보는 설이 가장 많기 때문에 590년대로 잡았어도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태조가 삼국사기에는 대대로(大對盧)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묘지명에는 아버지인 연자유(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더불어 왕에 다음가는 높은 벼슬인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미 온달이 살아 있을 때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연개소문이 연태조의 동부 대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영류왕 본기에는 연개소문이 서부 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기 힘들다. 다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기록이 구당서나 신당서 등에 더 많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동부 대인이었다는 설이 더욱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5] 논문참조 : 唐복식 도입 이전의 團領衣[6] [image] 논문에 따르면 교임이 있는 이 포(袍)를 곡령교임포(曲領交袵袍)로 지칭한다.[7] 더욱이 자수도 아니고 현대적 나염 프린팅에 가깝다. 하지만 제작비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방식이었을 것이다.[8] 시작 부분이기 때문에 이후 달라질 여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