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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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제26대 군주.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618년 승하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영양왕의 재위 기간은 여수전쟁 기간과 일치한다. 덕분에 조선시대에도 인정받아 을지문덕과 함께 제삿밥을 먹기도 했다.
2. 생애
2.1. 기나긴 태자 시절
평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565년(평원왕 7년)에 태자로 봉해졌고 590년 10월 평원왕이 승하하자 즉위했는데 무려 25년을 동궁으로 지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대개 강호동처럼 생겼으면 용맹하게 생겼다 유재석처럼 생겼으면 영민하다는 식의 수사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킨다는 부분은 수나라와 벌인 전쟁을 상기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던 이세민도 백성을 사랑한 군주라고 평가한 걸 보면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2.2. 수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589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와 북주를 부려먹던 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동아시아에 수나라의 패권이 구축되어 가는듯 보였고 남은 것은 요동의 고구려 뿐이였다. 평원왕은 사신을 보내는 한편 간첩을 파견하기도 하며 여러모로 수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이 쇼크사했다는 식으로 적혀있다. 결론적으로 수나라는 고구려를 가만 냅둘 생각이 없었고 국력을 소진해가면서까지 고구려 침공을 강행했다.
2.2.1. 1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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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쟁은 598년 영양왕이 직접 말갈군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요서의 영주를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일으키는 것으로 응전했다.이듬해에 원(영양왕, 고원)이 말갈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량(諒)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 대다수가 전멸하고 때마침 영양왕도 수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고원[2] 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의 기록이 전해진다.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六軍)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隋軍이] 遼水에 진주하자, 元도 두려워하여 使臣을 보내어 사죄하고 表文을 올리는데, ‘遼東 糞土의 臣 元 云云’하였다. 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그러나 실제로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패한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3]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나 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4]
1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00년에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해 신집 5권을 편찬하도록 했는데 국초[5] 부터 전해지는 유기 100권을 압축한 것이었다. 설화, 전설 등 잡다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만을 선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5권이라고 해서 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글자 크기나 1권의 쪽수 등에 따라 분량에 차이가 난다. 제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목간에 기록하던 것을 종이에 옮길 경우 부피와 분량이 대폭 압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2.2.2. 2차 전쟁 : 살수대첩, 평양성전투
수 양제는 돌궐 계민가한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돌궐에 간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다.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왕을 입조시키라 명했으나 입조는 당연히 없었고 사실상 선전포고로 간주한 수 양제는 고구려를 다시 침공해왔다. 그 수만 무려 113만. 참고로 전투병만 무려 113만이다. 중국 특유의 허세도 있었겠지만 정사에 기타 병사들은 몇 배라고 적혀있다. 수송병과 군속까지 다 포함하면 300만 정도 될 것이다.
수 양제는 먼저 요동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수군 10만 명과 육군 30만 명을 별동대로 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육군은 우중문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바로 평양성으로 침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수군은 내호아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산둥 지역에서 바로 평양성으로 침투하도록 명령하였다. 수 양제는 두 별동대가 평양성에 모여 합동 작전을 펼치도록 명했지만 수군 내호아는 이를 거역하고 먼저 평양성을 침투하다가 약 5만여 명의 군사를 잃고 말았다. 육군 쪽의 별동대 역시 살수대첩에서 약 30만여 명의 군사를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2.2.3. 3차 전쟁 : 양현감의 난
수나라는 또다시 쳐들어왔으나 역시 요동성 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국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퇴각한다.
2.2.4. 4차 전쟁 : 수나라의 멸망
수나라의 4차 침입 당시에 비사성이 함락되며 수나라의 막대한 물량전에 따른 피로도가 누적됨이 드러났다. 이에 영양왕은 고구려로 넘어온 곡사정을 수 양제에게 돌려보내며 화친을 요청한다. 수 양제 또한 수나라 내부 사정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회군하게 된다. 이후 잇따른 실정과 폭압으로 수 양제가 피살당함으로써 수나라는 패망하게 된다. 그리고 수나라가 망한 해인 618년 영양왕도 승하했다.
2.3. 이후
수나라와 연결하려는 백제를 공격하고, 603년에는 고승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 공격은 신라 진평왕이 1만 병력을 직접 친정해서 실패했지만 608년 다시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해 우명산성을 함락하였다.
또한 선왕인 평원왕 때부터 이어져오던 강한 압박의 영향으로 영양왕 초중기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거의 한강에 근접하였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문자명왕에 이르는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면 연개소문 이전까지 고구려가 가장 많이 남진한 시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연개소문은 한강 이북 거의 전부와 강원도까지 차지하고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일본에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와 먹을 전파하고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를 그리게 하는 등 문물 교류에도 이바지했다.
3. 평가
최대 업적은 역시 수 문제와 수 양제 도합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을 철저히 막아낸 것이다. 고려 현종처럼 직접 적을 물리친 신하쪽이 왕보다 더 유명하긴 하지만 실상은 위기관리, 외교, 내정 등 어느분야에서든 밀리는 것 하나 없는 고구려 후기 최고의 명군이다. 또 영토 측면에서는 흔히 고구려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 시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거란, 말갈 등의 이민족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6] 수나라의 압박과 침공도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먼저 선빵을 친 것이라 볼 여지도 충분한 대목.
영양왕은 통일된 중국의 등장을 상대로 고구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총력전을 위해 온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실제 영토가 늘어난 것도 거란이나 말갈을 활용하여 수나라의 도발을 적극적으로 응징한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백만에 달하는 수나라 대군을 상대로 경직된 정면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보급로 차단 및 보급손실을 충분히 한 연후에 결정타를 날리는 것만 봐도 전략적인 안목이 꽤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멸망 때까지도 고구려를 배신하지 않은 말갈이나 거란 등 북방 세력들을 보면, 부용 세력들을 다루는 수완도 상당히 뛰어났던 듯 보인다.
게다가 전쟁통이고 기록이 부실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내치에서도 기근이나 폭동, 반란 등의 큰 문제가 특별히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 선제공격으로 수문제를 도발하여 상대에게 무리한 공격을 유도한 점이나, 훌륭한 인재 등용 능력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수양제의 2차 침입때는 을지문덕과 동생 고건무[7] 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큰 승리를 두 차례 거두는 등 성과를 낸다.
4. 기타
- >(고구려의) 땅은 후한 시기에 2천리 정도였다.
>위나라에 이르로 남북으로 좁아져 겨우 천여리에 불과했으나
>수나라에 이르러 동서로 6천리에 달했다.
>
> 통전
대체적으로 고구려가 요하를 장악한 이래로도 고구려는 멈추지 않고 팽창적인 정책을 지속하였고 흔히 고구려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 시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요서 방면으로 팽창하고 서북쪽의 거란, 동북쪽의 말갈 등의 이민족들을 흡수한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8] 아직 고고학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역사부도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에서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는 점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은 매우 많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다.[9] 북한의 조선력사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고구려 7세기 영역을 넓게 표시하고 있다.
>수나라에 이르러 동서로 6천리에 달했다.
>
> 통전
대체적으로 고구려가 요하를 장악한 이래로도 고구려는 멈추지 않고 팽창적인 정책을 지속하였고 흔히 고구려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 시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요서 방면으로 팽창하고 서북쪽의 거란, 동북쪽의 말갈 등의 이민족들을 흡수한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8] 아직 고고학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역사부도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에서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는 점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은 매우 많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다.[9] 북한의 조선력사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고구려 7세기 영역을 넓게 표시하고 있다.
5. 관련 인물
아버지는 평원왕이고 어머니는 친모와 계모 둘이 있었다. 이복동생으로 고건무(영류왕)가 있었고 동생으로 고대양, 여동생으로 평강공주, 매제로 온달이 있었다. 온달, 을지문덕, 이문진, 혜자, 가서일, 담징 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이 영양왕 대에 활동한걸 보면 사람보는 눈은 높았던 것 같다.[10]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 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다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7. 대중매체에서
-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나온 이효정씨가 연기했다. 외세에 강경하게 맞서는 강단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수 양제의 침공 즈음해서 노환으로 앓아누워 동생 고건무에게 국정을 맡기면서 비중이 급감소하며 심지어 고건무와 무장들 간의 알력 조정조차 못하는 안습한 면모를 보인다.
[1] 6세기 말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 시대 주요 불상인 국보 제119호 연가 7년명 여래입상에서 쓰인 '연가'가 바로 영양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2] 영양왕의 이름.[3] 두건덕은 수문제 때 100만 대군을 일으켰으나 고구려에 패배했다 했으며 독고황후와 수양제 역시 전쟁을 복기하며 당시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서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한다. 고당전쟁 때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피해를 축소한 정황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모로 의심을 사는 부분.[4]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5] 소수림왕 대에 편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6] 영양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6천리였다는 기록이 통전, 태평환우기에 등장한다. 당서에는 6천리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동서 2천리보다 커진 3,100리라는 기술이 등장하며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를 넘어 요서의 영주에 이른다는 설명까지 더해져 단순히 수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를 기준으로도 영토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거란과 말갈에 대한 통제력 강화, 그리고 요서 일대의 중원 세력 거점의 미약함 등이 관련되어 분석되는 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이인철, 윤용구, 윤병모, 정원주 등은 동서 6천리라는 수치를 당서 등과 연관지어 보통 고구려 동북쪽과 서북쪽에 위치한 거란과 말갈 방면으로 뻗은 것으로 보고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 ~ 연해주 방면으로 추정한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수 전쟁 이후 수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7] 훗날 영류왕.[8] 또한 구당서에는 6천리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동서 2천리보다 커진 3,100리에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를 넘어 요서의 영주에 이른다는 설명까지 더해져 단순히 수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를 기준으로도 영토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9] 이인철, 윤용구, 윤병모, 정원주 등은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대릉하, 의무려산, 연해주, 내몽골 방면으로의 팽창을 연구하기도 하였다.[10] 다만 온달은 영양왕 원년(1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