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비산동 출토 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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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모바일 비산동 출토 금동관
1. 개요
2. 내용


1. 개요


1971년 대구시의 유물 조사 시행 결과 비산동 고분군 제37-2호분에서 발견된 5세기 중엽 신라시대 금동관 2점. 현재 두 점 모두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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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출토된 대구 지역의 금동관 2점으로, 비산동 고분군 제37-2호분에서 금동관 두 점이 동시에 발견되었다. 유물의 제작 연대는 5세기 중엽(서기 400년대)이다.
비산동 고분군은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위치한 내당동 고분군(內唐洞 古墳群)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87기의 5세기 중엽 신라시대 고분이 밀집해있는 곳이다. 달성의 남단에서 남서로 뻗는 가지능선에 분포하는 제1군집의 28기(6~33호), 그 남동쪽에 작은 계곡을 두고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게 뻗는 구릉에 존재하는 제2군집의 북서부 일부 16기(34~49호), 달성의 서편에 접해 있던 제3군집의 5기(1∼5호) 등 총 5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은 일제강점기 때 한번 파헤친 34호와 37호분 단 2개 뿐이다.
철기시대로부터 신라시대까지 대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거주했던 곳이 지금의 비산동, 평리동 일대였다. 연구비 문제로 현재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비산동에는 다양한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1971년 12월 21일 대한민국 국보 제137호로 지정된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大邱飛山洞出土銅器類)’를 시작으로 그 외 부속 문화재로 ‘동검검경 및 동모부속구(국보 137-1)’, ‘광봉동모 및 검장(국보 137-2)’ 등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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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동 37호분은 하나의 봉분 내에 유사한 2개의 앞트기식돌덧널이 나란하게 배치되었다. 양 돌덧널의 사이가 좁은 점으로 미루어 두 돌덧널 가운데 하나의 돌덧널을 먼저 구축하고 봉토를 씌운 다음, 그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제2의 돌덧널을 구축한 두 사람 무덤(兩葬墳)으로 판단된다. 남아 있던 봉토는 원형이었고 직경이 19.7m였다. 제1돌덧널은 4.27×1.27×1.56m의 크기로 세 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고 나머지 한 벽은 냇돌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판석을 세워 입구로 삼았다. 유물의 출토상태로 보아 2인 이상이 추가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제2돌덧널은 3.8×1.42×1.56m의 크기이고 구조는 제1돌덧널과 동일하다. 2돌덧널에도 원피장자 이외에 1인이 추가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제1돌덧널에서는 금동관 2점을 비롯하여 유리목걸이(琉璃頸飾)·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세고리자루칼(三環頭刀)·쇠도끼(鐵斧)·쇠낫 등의 이기류, 재갈·말띠드리개·말띠꾸미개(雲珠) 등의 마구류와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제2돌덧널에서는 백화수피관모(白樺樹皮冠冒)·금동제조익형관식(金銅製鳥翼形冠飾)·금제가는고리귀고리(金製細環耳飾)·은제허리띠(銀製銙帶)·금동제신발(金銅製飾履) 등의 장신구,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세고리자루칼(三環頭刀)·쇠도끼·쇠낫 등의 이기류, 말안장(鞍橋)·재갈·말띠드리개·발걸이 등의 각종 마구류와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비산동 37호분에서는 약 8천여점에 이르는 1,600여년 전 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 총 87기의 무덤 중 단 한기에서 나온 유물이 이 정도라는 사실에 다들 놀랐고, 이로써 다른 고분에 소장되어 있을 유물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지만 현재 다른 고분을 출토할 계획은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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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발견되었으며, 대구 지역에서 금동관이 출토되기로는 대구의 내당동 고분, 경산의 임당 고분, 대구 수성구 가천동 고분군에 이어 4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대구 지역의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