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 개요
'''신라'''(新羅)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약 992년간[20] 56명의 국왕을 거치며 한국사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 왕국'[21] 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
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동남쪽에서 발원했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백제 전역과 고구려 남부를 병합했으며 이후 삼국통일 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676년 이후의 신라는 통일신라로 지칭된다.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은 당대에 불완전했으나 이후 고려왕조가 계승하고 훗날 한민족 의식까지 이어지는 원형이 된 의미가 있다.[22]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 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어를 기반으로 하며[23] ,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 역시 다수가 신라 경덕왕 시절 붙은 이름에서 유래했다.[24] 현대 한반도의 완성은 조선 시대라면,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은 다수가 신라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2. 국호
3. 독자적 연호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연호를 걸고 내린 기간이 가장 명확하게 확인된다.
4. 역사
5. 왕실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여러 번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어떻게 박, 석, 김이라는 성씨가 다른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게 가능한가. 또한, 왜 그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료에서도 신라의 특이한 3성 정치 체제와 역성 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사실 신라 초창기에는 성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는 김(金)씨 진흥왕(540~576년)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 내에 있던 3개의 다른 집단인 박혁거세 후손, 석탈해 집단, 김알지 집단이 이때부터 성씨를 '''소급'''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성씨가 3개가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마치 성이 바뀌듯 나오게 된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초반부는 불완전한 고대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대목이 많고, 초기 왕들의 지나치게 긴 수명 등 연도에 오류가 너무 많아[29] 진흥왕 이전의 박씨, 석씨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왕실은 대부분의 기간을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 모두 시조인 박혁거세를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은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집단이 991년의 대부분 기간인 586년을 지배했지만, 모시는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였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서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외부, 그리고 머나먼 후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왕의 성씨가 김(金)씨여서 김씨 왕조가 세운 왕조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처남이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잠깐 다시 부활하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하고 신라는 991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왕이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20대 자비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들 모두 박혁거세 신당을 자신들의 시조로 참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같이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시조 박혁거세에 대한 신성함이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래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는 보다 위의 개념이었고,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개념이었다. 즉, 신라에 적용을 해보면 성(姓)은 신라왕실이 공동시조로 모셨던 박혁거세의 박(朴), 씨(氏)는 성(姓)의 하위 개념인 석(昔), 김(金)이 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朴) 왕실이었고 역성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씨가 통치했던 시기에도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같이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분은 원래 중국에도 있었지만 진나라, 한나라 대에 이르러 없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통합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라시대를 보면 마치 박, 석, 김의 서로 다른 성씨가 왕위를 쟁탈하는 전쟁터, 역성혁명인 것처럼 비춰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성과 씨가 현재와 같이 통합되지 않은 다른 개념이었고[30] 다른 어떤 나라의 사료에서도 신라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을 역성혁명처럼 보는 기록이 전무한 것을 고려해보면 신라가 건국된 박혁거세 때부터 멸망했던 김부왕 때까지 약 991년간 역성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모시면서 '''같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朴)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실 안에 박(朴)씨 외에 석(昔)·김(金)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었고, 이 3개의 분파 중에서 김(金)씨가 왕위를 가장 오랫동안 많이 차지해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31] 박씨 집단은 신라 초기에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이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다른 성씨 집단의 경우에도 박씨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석·김 혈통의 남성이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991년 동안 지속적으로 배출이 됐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하며, 나중에는 728년 만에 왕권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사회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중국과 교류하기 어려운 한반도 동남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대륙에서 전해지는 문물이 늦게 도착했고, 율령에 기반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 및 정착한 시기도 더 늦은 편이었지만 지증왕과 법흥왕의 내부 개혁과 진흥왕의 대외 정복전쟁을 거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나 백제, 발해나 고려, 조선과 달리[32]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서로 내전없이 평화적으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었다, 이는 신라 주변 일본, 중국, 만주 지역뿐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보기 드문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다. 삼국 시대 중기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는 동시에 불교를 장려하여 중앙 집권 국가가 되는 것에 힘썼다.
6.1. 골품제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이는 수직적 신분제도로, 물론 고구려나 백제도 엄연히 세습 귀족제 국가였고 기록이 부족할 뿐 골품제와 유사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33] 신라의 신분제는 더 단단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이는 신라 특유의 높은 중앙집권화(왕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 고구려, 백제는 역사 내내 이성 귀족과 토착 호족의 권한이 대체로 신라보다 강해서, 무슨 일이 나면 군사를 동원할 때 국력에 비해서 모든 군사가 동원되지 못했고 지방세력의 도전이나 내부 분란도 신라보다 훨씬 심했으며 멸망하는 순간까지 걸림돌이 되었다.
신라의 골품제는 삼국통일, 나당전쟁 시기에 높은 왕권을 바탕으로 신라가 살아남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이후 평화 시기엔 수도 경주와 귀족세력에게만 이익이 편중되어 내전을 유발하고 지방 호족의 불만이 커지는 결과가 되었다.[34]
6.2. 관직
신라 중앙 정치는 귀족들의 합의 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의 권력이 강했고, 중기에는 시중이,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신라의 관직은 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당 최대한으로 승진할 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인데 1천 년 역사 동안 몇 명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을 세운 사람만을 임명했다. 신라 땅에서 일어난 태봉과 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 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6.3. 화랑
신라는 청소년들을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인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체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화랑을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전국의 유명한 산과 큰 강, 고유신앙의 성지를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무예를 닦으며, 유교와 불교, 도교 경전을 익히면서 문무를 겸비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했다.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 낭도와 같이 생활하면서 유대감을 쌓았고[35] 수련 중에 눈에 띄는 뛰어난 인재는 추천해서 문무 관직에 추천했다. 이런 화랑제도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삼국 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만 통일 신라기엔 그 과정에서 옛 백제 및 고구려 지역까지 낭도 수십~수백 명을 데리고 쏘다디면서 화랑들이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현상이 일어났고, 화랑들이 딱히 옛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 등을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지방민들은 결국 반신라 감정을 키우게 된다.[36]
6.4. 원화
진흥왕 시대(576년)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일종의 아이돌로 삼아 수백명의 젊은이가 보좌하게 하여 인재를 등용하려 한 것이 원화의 시작이다. 그 뒤 준정이 남모의 미모를 질투한 나머지 남모를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만든 다음 익사시킨 게 발각되어서 준정도 결국 사형당했다. 이로써 원화 제도가 없어지고 용모가 뛰어난 꽃미남들을 모집했는데 그것이 화랑 제도의 시작이다. 준정이 남모를 따르던 무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물론 화랑세기는 그 진위가 매우 의심스러운 작품이지만 나중에 미실이 원화제도를 부활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시 시가지를 종단하는 도로 이름이 여기에서 따 온 원화로다.
7. 언어
현대 한국어의 뿌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진국과 마한, 변한, 진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언어 교류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의 융화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562년 7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7.1. 백제어와 고구려어, 일본어와의 관계
백제어와 고구려어, 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라 생각된다. 다만 이 삼국의 언어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상호의사소통성이 있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일단 최근 언어학계에서 한국어 자체에 대해서는 고립어거나 한국어의 방언끼리 자체적으로 한국어족을 이룬다고 보는 추세라 삼국간 언어는 유사동종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정확히는 아주 초기에는 다른 민족들이라 언어도 꽤 달랐겠지만 수백 년간 서로 부대끼면서 말도 서서히 닮아가지 않았을까라는 것.
신라와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목간 해석에 따르면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비다츠 천황조에 의하면 백제어는 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학자들은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소통이 가능했거나, 적어도 같은 한국어족에 속하는 비슷한 언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학자 중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고구려어의 각종 어휘가 현대 한국어와 중복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소를 나타내는 首 *su)
과거에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어 지명에서 수사나 토끼를 뜻하는 일본어와 유사한 단어가 발견된다면서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유사하고 신라어를 별개로 놓기도 하였으나, 이는 증거에 맞지 않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어와 유사한 지명은 대동강 이북 즉 고구려 중북부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고구려가 나중에 정복한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또한 이렇게 일본어와 유사한 단어는 제주[37] 나 가야를 비롯해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도 발견되며, 신라의 경우 본고장인 대구경북이나 인근의 지명에서도 일본어와 유사한 미지(彌知)가 발견되기도 하고, 밀양이나 현풍의 옛 이름에서 오늘날 훈이나 음이 밀인 글자가 3의 뜻으로 쓰이는 등 일본어와 유사한 지명이 발견된다.
다만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의 일부 지명에 신라어나 현대 한국어와 이질적인 단어가 있는 점, 야요이 이주가 삼국시대 초기까지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쓰는 지배층과 다른,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쓰는 소수국민이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중남부에 어느 정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어 연구에서도 지배층은 북방계의 언어, 피지배층은 남방계의 언어를 쓰는 양층언어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도 한것처럼 말이다.
일본어의 경우 야요이 이주 전의 원주민이 쓰던 미크로네시아계 언어로 보는 학설도 있으나, 현대에는 위에 설명했듯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다가 야요이 이주 때 넘어간 주민이 쓰던 언어라는 설도 있다. 현대에는 후자가 강해지고 있다. 신라어와 일본어 사이사이의 관련성은 야요이 이주를 할 때 신라어 사용자도 일부 같이 건너가서 흡수되면서 신라어나 한국어와 유사한 단어를 건네주었고, 일본어족 언어를 쓰던 주민이 한국어족에 동화되면서 일부 단어를 남기고간 정도로 생각된다.
8. 공업
신라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세세한 분야의 공예 전담 관청을 설치해 관영 수공업을 운영했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분업 공정 관계로 얽혀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소전(䟽典) - 고치실을 켜는 작업을 담당.
- 표전(漂典) - 뽑아낸 실의 표백을 담당.
- 염궁(染宮) - 염색 작업을 담당.
- 홍전(紅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폭전(曝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금전(錦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기전(綺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마전(麻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직방국(織紡局)으로 미루어보아 삼베 의류 제조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모전(毛典) - 모직물 제조를 담당.
- 침방(針房) - 바느질을 담당. 여성 16명이 배속되었다.
- 왜전(倭典) - 일본 수출용 물품 제작 담당.
- 철유전(鐵鍮典) - 철기, 유기 제작 담당.
- 칠전(漆典) - 옻칠 담당.
- 타전(打典) - 가죽 무두질 담당.
- 피전(皮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포인방(鞄人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제품을 다루는 곳으로 추정된다.
- 추전(鞦典) - 안장 등 마구 제작.
- 피타전(皮打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운공방(䩵工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북을 제작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 탑전(鞜典) - 가죽 신발 제조 담당.
- 화전(靴典) - 가죽 장화 제조 담당.
- 마리전(麻履典) - 짚신 제작 담당.
- 마전(磨典) - 과녁, 악기 등 제조 담당.
- 궤개전(机槪典) - 밥상, 탁자 제작 담당.
- 와기전(瓦器典) - 기와 제작 담당.
- 채전(彩典) - 건물의 단청 등 그림을 담당.
- 남하소궁(南下所宮)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잡공사(雜工司)로 미루어보아 이런저런 잡다한 공사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는 민간 수공업도 성행했다. 상원사 동종에는 725년(성덕왕 24)에 조남택(照南宅) 집안에 소속된 장인 사▨(仕▨) 대사가 주문을 받아 이 종을 주조했다고 새겨져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대종을 35대 금입택 중 하나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장인이 주조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들은 저택의 이름을 내걸고 각자 장인을 보유해 수공업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일본에 수출해 지금도 남아있는 정창원 신라 양탄자 중 하나에는 자초랑택(紫草娘宅)이란 제조업체명이 남아있어, 이 양탄자를 제조, 판매한 곳이 자초랑이란 신라 귀족 여성의 저택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물품들은 오로지 수출용 사치품은 아니라, 양탄자는 5두품의 수레용 깔개로 사용될 정도로 흔히 사용되는 소비재였다.##
국가 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 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 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 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지방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주요 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신당서 신라전이나 삼국유사 왕력편의 유시(油市) 등의 존재를 근거로 각 지방 향시의 존재를 추정하는 설도 있다.
9. 경제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지금은 넓은 김해평야나 호남평야는 치수와 간척이 이루어지기 이전 고대에는 아직 얕은 바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신라의 시작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38]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주변 진한 지역을 흡수해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 그리고 가야 땅 낙동강 전역을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 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 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신라가 차지한 한강과 낙동강,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 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 설비를 정비하며 논 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 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 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 / 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 / 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 / 민유지는 전체논의 10% 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귀족들이나 중류층, 그리고 농민들의 사유지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 기준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 형태는 정전제를 볼 때 오늘날 사유 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 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 농민보다 서구 농노나 조선 시대 노비나 조선 초기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 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 경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 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 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 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 지역을 무주 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39] 산림의 나무가 몇 그루인지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변동을 정기적으로 기록하며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 시설이나 수공업 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숯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비단 생산에 필요한 뽕나무 재배 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 문서에서 다루는 청주 인근 4개 촌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 자료가 촌락 문서 하나 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 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 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 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 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 문서의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문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 채집 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 동원 체제 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산지가 대부분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육로개발 보다는 수로와 인력을 통한 물류 운반을 중시했던 후대왕조 조선과는 달리 육지에서의 도로와 수레 사용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다양한 유물이나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 등의 발견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주 서봉총에서 4세기~5세기 경 신라인들이 먹었던 음식들이 출토되었는데, 안동 간고등어의 예에서 보듯 소금으로 짠지 수준의 염장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신선한 음식을 조달하기 힘들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갓잡은 듯한 신선한 해산물들이 잔뜩 들어가있어 당시 내륙 지방의 물류체계가 굉장히 원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YTN 뉴스
말 등을 기르는 목장도 전국적으로 운영되었다. 민정문서에서는 청주시 주변 4개 마을에서 말 61마리를 사육하고 그 두수를 기록해 둔 것이 남아있고,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전라남도 다도해의 여러 섬에서 귀족 소유의 목장이 운영되었으며, 지금의 부산광역시에 있는 절영도산 말은 명마로 이름이 높아 성덕왕이나 견훤이 구해서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말들은 군마나 수레를 끄는 역마로 쓰였을 것이다.
어업도 발달해, 예를 들어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우물에서는 붕어, 잉어, 연어, 민어, 복어, 가오리 등의 다양한 어종의 뼈가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민어는 경주시가 위치한 동해 바다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고 서해에서 잡히는 생선으로, 당시 어류의 장거리 보존과 유통 체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경주보다 더 깊은 내륙 지역인 경산시 임당 유적에서도 고등어, 전갱이 등 바다 생선의 뼈가 다수 출토되었다.
어업 및 하술할 무역에 필요한 조선업 역시 발달하여, 특히 일본 측 기록에서는 신라 배의 우수함을 말하는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신라가 왜에 파견한 배 만드는 장인이 훗날 야마토 조정의 목공기술 전문 집단 이나베(猪名部)의 시조가 되었고, 일반 배는 바람과 파도에 약해 신라 배를 나누어 달라는 기록##이나 신라식 배를 따로 만들도록 주문한 기록## 등이 있다. 먼 바다를 치고 나갈 수 있는 배는 해상 무역을 활성화시켜 8세기 경덕왕 무렵에 이미 해상에서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9세기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한 신라방 사회 및 장보고, 장영(張詠), 김자백(金子白), 유상희(劉相晞), 유천궁, 왕건 가문 등 해상 세력가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9.1. 무역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는데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 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40] 다만 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맥은 동남아에도 서식한다.동유럽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제국산 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과 유리잔, 보물 제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세기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공무역이 주축이 되었지만 9세기 이후 신라, 당, 일본 3국의 중앙 집권 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 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 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 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 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 공예품과 금속 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 촌락 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공무역으로는 주로 금, 은, 우황, 인삼 등을 수출하고 당에서 비단과 당삼채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각종 외래 사치품은 주로 사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보는데 목도리, 중앙 아시아산 에메랄드로 상감한 빗과 모자, 바다 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 페르시아산 카페트 등이 있었다. 매신라물해 등 일본 기록에 남아있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신라금(琴, 악기), 신라도((新羅刀, 칼), 구리 그릇 등이 있었다.
다만, 중국과 달리 금속화폐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견포, 즉 옷감을 상품화폐로서 사용하였다.[41]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의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飛鳥板蓋宮), 카와라데라(川原寺) 등에서 신라의 은화로 추정되는 무늬 없는 은전이 출토되어 옷감보다 높은 교환가치가 필요한 경우 고액 현물화폐가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9.1.1. 신라의 국제 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일람
-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서역)
-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서역)
-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지중해, 로마제국)
- 경주 계림로 보검(지중해, 로마제국)
-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일본)
-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인도네시아)
- 경주 동궁 출토 신라 수세식 화장실(서역)
-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금귀걸이, 양산 금조총 금귀걸이, 양산 부부총 금귀걸이,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신라 금귀걸이, 호림박물관 소장 신라 금귀걸이, 이왕가박물관 소장 신라 금귀걸이 등의 누금제품(서역)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2층에서 출토된 오키나와산 열대조개 조공품(오키나와)
-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서역, 중동, 페르시아)
- 경주 월성 안계리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경주 월성로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일본)
- 경주 월지 꽃·새무늬 뼈장식(일본)
-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일본)
- 경주 월지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경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페르시아)
-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지중해, 로마제국)
- 군위 인각사 금동사자형 병향로(일본)
- 금관총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금관총 이모가이 말띠꾸미개(오키나와)
- 금령총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나전 화문 동경(일본)
- 노산대불-김교각(중국) - 신라시대의 유물은 아니고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닝보 천봉탑 금동불입상(중국)
- 민정문서(일본)
- 반가사유상(일본)
-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수정화주(서역)
- 상주 금동관(일본)
- 서봉총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서봉총 유리팔찌(서역)
- 세금착감 화문 대모 머리장식빗(페르시아)
- 식리총 금동신발(페르시아)
-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인도네시아)
- 신라 대방광불화엄경(일본)
- 왕오천축국전(중국, 인도, 중동 일대)
- 은도금 꽃새무늬 작은항아리(일본)
- 정창원 비파(일본)
- 정창원 신라 먹(일본)
- 정창원 신라 숟가락(일본)
- 정창원 신라 양탄자(일본)
-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일본)
- 정창원 신라 유기접시(일본)
- 정창원 신라 인삼(일본)
- 정창원 신라금(일본)
- 제2신라문서(일본)
- 천마총 야광조개국자(오키나와)
- 천마총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청동 금은입사 소호(일본)
- 청동 금은입사 향로(일본)
- 쿠시나메(페르시아)
- 판비량론(일본)
- 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중국)
- 황남대총 남분 앵무조개잔(인도양 일대)
- 황남대총 남분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황남대총 남분 유리제곡옥부 목걸이(서역)
-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서역)
- 황남대총 북분 은잔(페르시아, 서아시아)
- 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서역)
-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황남대총 북분 커트장식 유리잔(지중해, 로마제국)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말안장 뒷가리개, 발걸이, 허리띠 꾸미개, 화살통 장신구 및 멜빵, 호우총 귀면문 화살통, 쪽샘 44호 금동 장식품 등의 비단벌레 날개 작품(일본-옥충주자)
- 황남대총 야광조개국자(오키나와)
- 황룡사 금은제 사리항아리(일본)
10. 행정구역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영토가 머물러 있던 지증왕대인 514년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행정구역) + 소경식의 비슷한 행정 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1. 문화
11.1. 문화,정치,의복,결혼,장례
(북서열전)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북서열전)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처자의 상까지 일년간 복을 입는다.
11.2. 문학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중국과 다르게 사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향가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향찰은 해석이 복잡하지만 고대 한국어의 성분을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진성 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 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대에는 중국식 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11.3. 미술
- 고구려나 백제 고분 같은 횡혈식보단 도굴이 어려운 구조 덕에 다양한 고분 출토 유물이 남아있으며, 황금 왕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유물들로 미루어보아 기초적인 수준의 유리 공예를 통해 장식품을 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42]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코발트 유리를 재가공한 흔적으로 보아 페르시아 및 동로마 제국 문명과 교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경주 등 옛 신라 지역에는 봉황대, 금척리 고분군과 같은 미발굴 유적들이 매우 많고, 계속 발굴 중이므로 앞으로도 신라의 미술품은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관은 전반적으로는 스키타이 양식을 상당히 많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과 같이 유리 제품이나 일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양식이 로마 제국, 레반트 및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동일한 것도 있는데, 이는 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로 불가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식과 달리 무덤의 양식이 달라서, 고분 벽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회화의 수는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적은 편이다. 천마총에서 나왔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신라 회화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른 두 그림(또 다른 천마도, 기마 인물상)이 발굴 이후 2014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천마총 백화수피제 채화판,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문서 참조.
- 지금까지 전해지는 통일신라 시대의 그림으로는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다. 링크
- 일본 도다이지 정창원에서 신라 모전(양탄자) 45점을 소장하고 있다.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전부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유물들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신라 때 것이라기엔 믿기 힘들 만큼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1999년 2월 6일분 역사스페셜 14회에서 신라모전을 다룬 적이 있다.
- 공예로는 굽다리(고배)양식의 신라토기가 유명하며 토우 역시 예술성이 높다.
- 신라의 불교미술은 한국사 불교예술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83호 반가사유상이라던가[45] 통일신라대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을 비롯한 작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균형미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한국 고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11.4. 음악
신라 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를 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 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 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의 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46]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악기이나 현을 바이올린 현 비슷한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도 한국의 대표적 악기로 전승됐다.
신라의 음악은 정작 한반도보다 기록이 풍부한 중국, 일본 기록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 때도 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나라 때도 신라 음악의 당나라 궁중 연주가 이뤄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이 종종 공연됐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의 악보 인지요록(仁智要錄)에 수록된 신라릉왕(新羅陵王, しんらりょうおう)이라는 아악 노래의 복원 연주 영상이다.
11.5. 건축
목조 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 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 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은 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이 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황룡사 금당 치미, 남한산성 행궁지 대형 숫기와, 경주 성건동 신라 창고 유적 등의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후대 왕조의 것에 비해서 상당히 컸다. 이러한 대형 유물들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법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11.6. 여성
지금으로부터 1,500~2,000여년 전 고대인들의 여성관을 현대의 의식과 연결해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신라의 여성관은 동시기의 한반도 국가(고구려, 백제)나 후대 왕조(고려, 조선)와는 분명히 다른, 굉장히 특이한 점이 많았다.
일단 역대 한반도 왕조 중 유일하게 여왕이 나온 국가다. 그것도 셋이나.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한 왕조가 오고간 중국 대륙 내에서도 공식적으로 여왕 직위를 단 사람은 측천무후 단 한 명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여자가 왕이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으로 보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신라의 여왕 배출은 한국사에서 굉장히 특이하게 받아들여진다. 단순히 여왕만 나왔다고 특이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단 카테고리에서도 설명되었듯이 박·석·김 혈통의 신라 왕실은 기본적으로 모계를 우선적으로 깔고 갔다.
왕실 뿐만 아니라 민간 집단 또한 모계 계승 의식을 보이는데 당장 경주 호장인 거천의 가계를 밝히면서 그 어머니는 아지녀(阿之女),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 그 어머니는 적리녀(積利女)라고 하여 어머니쪽 가계로 거슬러올라가고 있다. 그 외에도 재매정댁, 자초랑댁 등 한 집안의 택호를 여성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박혁거세와 알영(閼英)의 탄생설화를 동등하게 두고 제사를 지내며 숭배했다. 건국 시조의 신성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탄생 설화가 여성에게 부여된 유일한 사례다. 알영은 혁거세와 함께 신라 멸망 때까지 이성(二聖)으로 존숭되었는데, 이는 그저 남성 왕의 배우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二聖)의 한축을 담당하는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에서 최초로 시조제사를 지낼 때 남해왕의 여동생인 아로(阿老)가 사제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무녀들이 왕조 내내 신궁을 이어나갔고, 후대에 다양한 여성들이 성인으로 지정되어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며 사망한 뒤에는 국가의 제사로 모셔졌다. 선도산 성모를 시작으로 박제상의 아내인 치술성모, 석탈해가 성군이 될 것임을 알고 바닷가에서 끌어 올리는 노구(老軀) 등의 여성들이 신라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숭되었다. 화랑제도 또한 초창기 진흥왕의 원래 계획으로는 원화가 화랑들을 이끄는 형태였다. 온갖 병크가 생기며 취소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른 왕조의 경우 가끔 가다 큰 힘을 취한 여성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ex. 인수대비)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기형적 형태의 권력을 얻었을 뿐 관작질서(官爵秩序) 시스템 하에서의 공적인 직책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던 것과는 달리 신라는 여성들이 공적인 분야에서도 진출이 가능했다. 먼저 신라에서는 남성 관리들이 임지로 부임할 때, 부인이 같이 임관하여 관직을 제수받고 임지로 나가는 규정이 있었는데, 수로부인이 강릉으로 가다가 노인으로부터 꽃을 받은 때가 바로 이 임지로 가는 도중이었고, 관련 유물로는 울주 천전리 각석에 당시 남편과 공동으로 부임받고 임지로 향하던 신라여성이 가던 도중 귀족들과 들놀이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공을 세우고 죽은 여성과 그의 자식들에게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은전과 함께 관작을 내렸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어 신라시대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관작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신라에서 최초로 선산 모례(毛禮)의 누이 사씨라는 여성이 불가에 귀의한 후 다양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불교가 공인되자 공식 중앙관직으로 신라 전체의 불교 교단을 영도하는 국통과 함께 도유나랑(都唯那娘)이라고 하는 직책을 같이 두었는데, 이 도유나랑에는 오직 여성만이 임명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여성 불상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또한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측 사료에서 ‘신라 시장에서는 모두 부녀자가 사고 판다’라고 하여 여성들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정창원 신라 양탄자, 황룡사 활석 남근석, 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 경주 황남동 1호분 금귀걸이, 쪽샘 44호 고분 비단벌레 금동 장식품 등의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이러한 신라여성들의 경제권이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이러한 요상한 여성관은 후대인들, 특히 유학자들에게는 실로 참혹한 일이었다. 당장 바로 다음 왕조인 고려에서 나온 삼국사기에서부터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인데 어찌하여 늙은 여인으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국가 정사를 휘두르게 하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처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다. "서경"에 이르되 암탉이 새벽을 알림이요, "주역"에 이른바 암퇘지가 껑충껑충 뜀과 같으니 이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닌가." 하며 극딜을 박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삼국사기
11.7. 역사기록
545년 진흥왕 때 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국사는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 시대 후반 원 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47]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11.8. 종교
11.8.1. 고유 토착신앙
신라의 조상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묘'에 대한 기록이다. 신라의 시조 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로써 일년에 사시로 이를 제사하였다.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하늘의 아들 또는 손자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시조 묘를 세우고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삼국 및 남북국 시대의 지신신앙은 땅과 하늘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행하였다.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전래가 늦은 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 도입 이전 신라 토착신앙의 성지로는 신성한 숲 천경림을 비롯해서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이라는 곳들이 있었다.
사원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이었던 여기에 불교 공인 이후 중요 국가사찰을 만들었다.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 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 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전에는 박혁거세나 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역을 신성한 성지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으며[48]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 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 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11.8.2. 불교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때 묵호자, 아도 등의 외국 승려를 통해 일단 전해졌으며, 이 때 불교를 법흥왕 공인 이전에 전래된 불교라는 뜻에서 초전불교(初傳佛敎)라고 한다.[49] 이 때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외래 신앙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 대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와 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50]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
11.8.3. 유교
유교의 경우 화랑(역사)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나 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거기서 오경을 가르치고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내성에서는 대부전(大傅典)이란 전담 관청을 설치해 왕실 자녀에게 유교적 제왕학을 가르쳤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s-2.4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s-2.4 문서 참조.
11.9. 과학
자연 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 신라 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51] , 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고 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 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의학 관련으로는 공봉의사(供奉醫師), 약전(藥典) 등의 관청을 설치해 의술과 제약을 관리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의과대학격인 의학(醫學)이란 관청을 설치해 본초경, 갑을경, 소문경, 침경, 맥경, 명당경, 난경 등의 한의학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1.10. 명절
11.10.1. 정월 대보름
한국의 정월 대보름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 중에 사금갑(射琴匣)이 있다. 원전은 삼국유사 기이 제1편 소지왕 이야기다.
임금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임금은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신하가 까마귀를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신하는 돼지 싸움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잠시 후에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서 신하에게 편지 봉투를 주고는 "그 봉투 안의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읽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신하는 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편지 봉투를 주면서 연못의 노인이 한 말을 전했다."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지 않으려 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말하였다.
일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을 말하고, 한 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하는 것이니, 편지의 글을 읽으시옵소서."
임금은 곧 거문고 갑을 활로 쏜 다음 열어 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숨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왕비와 어떤 중이었는데, 중이 왕비와 한통속이 되어[52] 임금을 해치려 했던 것이다. 그 뒤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시오)'
이후 이 찰밥이 발전해 약밥이 되었다. 왜 소지왕을 도와준 동물 중 까마귀만 챙겨주냐면 쥐, 돼지는 십이지신에 들어가서 따로 기리는 일이 있었으나 까마귀는 그렇지 않기 때문.
11.10.2. 행사,잔치,풍속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십칠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팔월십오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처자의 상까지 일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11.10.3. 추석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조에서는 왕이 나라 사람들을 두 팀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6부 각각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길쌈하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서 패배한 편이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 길쌈놀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지속됐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는데 이 가배가 한가위의 '가위'의 기원이라고 한다.
한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신라인의 추석 풍습을 전한다. 현대처럼 3일간 놀았다고 한다.절에서 박탁(餺飩, 밀떡 종류의 음식)과 병식(餠食, 쌀, 보리, 떡 종류의 음식) 등을 마련하여 8월 15일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여러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유독 이 명절이 있다. 노승 등이 말하기를 “신라국이 발해국과 서로 싸웠을 때 이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서 음악과 춤을 추며 즐겼다. 이 행사는 오래도록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3일 만에 끝이 난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지냈다. 그 발해는 신라에 토벌되어 겨우 1천명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되돌아와 옛날대로 나라를 세웠다. 지금 발해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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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구법순례행기 2권 개성4년 8월 15일
한편 저 말대로면 음력 8월 15일이 신라의 전승기념일이 되기도 하는데, 원문은 당시 시대상 발해로 돼있지만 발해와 신라가 8월 15일에 싸워 신라가 이긴 사건을 특정하기 어렵고[53] 말미에 멸망 후 발해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와의 어떤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 외교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혈연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다. 서로 국가에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로 장수왕 즉위 후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과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 하지만 국가의 이익을 따라서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54] 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였고 또는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 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하려고 하였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다.[55]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56] 는 신라인에 포함되게 되었다.[57]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58] 당나라에 의해 한때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년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고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큐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게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이나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하였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기록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하였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참조)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일본과 신라는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일본과 신라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본의 건국설화에서도 신라가 자주 등장하고[59] 신라의 설화에서도 일본이 등장한다.[60] 사실 이건 신라와 일본간의 연대감 여부와는 별개로 가까운 위치였다보니 인적 교류가 잦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에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ㅈ기후인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백 ~ 5백 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 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하였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이 몇십명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61]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내었다.[62]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63]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 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3. 군사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군사력은 결국 중앙 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흥왕 때까지 분권화되어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의 변화가 있었으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만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기록상 과장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지만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십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 신라 중앙군
- 신라 지방군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의 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을[65]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링크 참조.
14. 평가
15. 외국사서의 기록
북서열전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註 ·不耐註 ·韓註 ·濊註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隋書》作[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其王姓<金>名<眞平>], 引《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眞平]上當脫[金]字.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십칠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팔월십오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처자의 상까지 일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16. 시기 구분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000여 년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 → 태종 무열왕계 진골 → 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66]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67]
676년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인 991년보다 불과 1년 더 긴 기간이다. 고려와 조선조차 당대 중국 왕조들보다 2배 가량 더 존속한 장수 왕조들임을 감안하면 신라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나라를 영위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17. 왕사
- 신라/왕사 문서 참고.
17.1. 왕비
- 신라/역대 왕비 문서 참고.
18. 신라의 인물들
- 신라/인물 문서 참고.
19. 신라/문화재
20. 신라부흥운동
21.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21.1. 현대
21.1.1. 남한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명명하여 신라가 적통이고 한국사가 통일 신라에서 이어짐을 명시하였다.[68]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여전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신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 삼국 사이에 민족 의식이 없었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면서[69] 차 이러한 비판도 차츰 줄어들고 있다.
21.1.2. 북한
북한은 신라를 한국 고대사의 한 국가로서 인식하기는 하나 지리적 위치상 거리가 멀고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심지어 통일신라시대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그 시기를 발해 중심으로 서술한다. 또한 강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외세를 끌어 들인 점과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대적이었던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1.2. 현대 이전
21.2.1. 고려
- 고려는 경주를 동경으로 명명하고 수도로 삼았다. 또한 만월대 내 별궁들의 이름을 한국 고대국가들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계림궁(鷄林宮)이라 명명 하여 신라를에 대한 계승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 제후를 봉작할때 고려 전대의 한국사 국가들의 이름을 제후명으로 삼았는데 그 중 왕족인 계림공(鷄林公)도 있었다.[70] 계림공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데 그게 바로 숙종이다. 남자에게 공후백자남을 봉작했다면 여자에게는 부인(夫人)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고려중기 문벌귀족의 대부 이자연의 부인 김씨가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 또한 경주 인근에서는 신라부흥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를 부활시키려는 계승 움직임이 있었다.
21.2.2. 조선
- 조선은 삼국을 모두 계승하기는 하지만은 본류는 신라라고 의식하는 기사가 있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22.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23. 기타
24. 같이보기
- 가야
- 경상도
- 경주시
- 계림
- 계림대도독부
- 고구려
- 고려
- 골품제
- 국립경주박물관
- 국선
- 금입택
- 금척
- 나당전쟁
- 남북국시대
- 녹읍
- 발해
- 백제
- 보덕국 - 신라가 익산시에 세운 괴뢰국.
- 사로국
- 삼국시대
- 삼국통일
- 삼국통일전쟁
- 삼기팔괴
- 상수리 제도
- 시중
- 신궁
- 신라구
- 신라/왕사
- 신라왕릉
- 신라/인물
- 신라삼보
- 신라사선
- 신라삼최
- 신라십성
- 신라/추존왕
- 신라토기
- 신라/후삼국시대
- 신사
- 우산국 - 이사부가 정벌한 국가.
- 원화(신라)
- 장안국 - 김헌창의 난 때 세운 국가.
- 진한
- 처용가
- 탐라국
- 태봉
- 통일신라
- 풍월주
- 화랑
- 화백회의
- 후백제
- 후삼국시대
-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