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발바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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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악의 연쇄 강간사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전대미문인 강간 사건. 2006년에 검거된 이중구[1] 는 1998년 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7년에 걸쳐 110차례에 걸쳐 150명의 여성을 성폭행했다.
결국 법정에선 77건의 강간과 강도, 절도 등의 죄목만이 인정되어 피해자는 127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욕구를 총족시키기 위해 거리를 활보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언론에선 연쇄 강간 사건은 발바리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향이 많아졌다. 발바리란 연쇄 성폭행범들을 이르는 은어로, 범행을 한 후 발 빠르게 흔적을 감춘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현재 발바리 사건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전만 하더라도 지역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약자 대상의 손쉬운 상습 범죄인 데다, 모방성이 강하고 피해자들이 숨기고 싶어한다는 특성상,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할 수 밖에 없다.
사건 참조 출처 #1 #2 #3 #4
2. 사건 전개, 수사 과정
1996년부터 대전광역시 일대에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은 원룸촌을 노린 성범죄가 들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신고가 이어졌다. 이에 경찰은 1999년부터 피해자들에게서 채취한 범인의 정액과 체액을 채취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수십건의 사건의 범인이 동일인물이란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범인검거는 쉽지 않았다. 워낙 몸놀림이 날렵해 신출귀몰하는데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마치 동네 여기저기를 발빠르게 쏘다니는 ‘발바리’ 같았다. 이때부터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범인을 발바리라고 불렀고 이때부터 귀엽기만 하던 발바리란 단어는 연쇄강간범을 일컫는 말이 됐다. 대전 일대에선 누구누구가 당했다라는 식의 루머도 나돌았고, 자체적으로 성폭행 경계령을 내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언론도 발바리 사건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지부진 하던 수사의 실마리가 풀린건 그로부터 6년 후였다. 2005년 1월 10일 대덕구 중리동에서 강간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2004년 10월 대전동부경찰서 형사계장으로 부임한 유동하 계장은 오랜 미제로 남아 있던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갖고, 1999년 자료부터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동부서 관할인 중리동에서 침입 강간 사건이 발생한 것. 그러나 피해자들은 “창문으로 칩입해 범행을 저질렀고, 범인의 옷에서 냄새가 심하게 났다”면서도 “범인이 20대 초반으로 보였다”고 진술했다.
동일범 소행으로 확인된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은 범인의 인상착의를 40대로 묘사했기에 경찰은 일단 이 사건을 별건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한 달만에 나온 국과수의 유전자 감식 결과는 이 사건의 범인을 발바리로 지목했다.
2005년 4월 17일 용문동에서 3명이 한 번에 성폭행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액의 유전자 역시 발바리 것으로 판명됐다. 3개월 전 사건과 달리 이 사건 발생은 언론에 포착됐다.
그러나 역시 범인을 특정하긴 어려웠고, 그러는 사이 같은해 6월 17일 논산에서 발생한 강간사건 현장에서 발바리 유전자가 또 다시 발견됐다. 경찰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기사 쏟아졌고, 경찰의 압박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허탈과 좌절 속에 고민을 거듭하던 동부서 형사들은 전국에서 발생한 강간 사건 자료를 모조리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시스템 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2000~2005년 성폭행 사건 자료를 스크랩해 하나 하나 분석했다. 발바리의 유전자가 발견된 사건들에 대한 검토도 이잡듯 꼼꼼히 다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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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분석 결과 발바리는 2003년도 6월까지 대전에서 범행을 하다, 그 해 7월부터 청주로 옮겨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해 6월 지상파 방송의 한 프로그램은 발바리 사건과 관련한 집중 취재 내용을 1시간 동안 방송했고, 이 방송 화면에 현장에서 흐릇하게 찍힌 범인의 사진까지 나왔다.
2004년부터 발바리는 범행 영역을 전국으로 넓혀갔다. 발바리의 유전자는 전북 전주, 경기도 용인, 대구 등 전국의 성폭행 사건에서 확인됐다. 이같은 이전 사건들의 패턴을 분석하면서 동부서 형사들은 유전자 없는 다른 사건들에도 주목했다. 일단 키가 유독 작다는 피해자들의 공통된 진술을 토대로 키가 170㎝ 이상인 범인은 제외했다. [2]
이와 함께 침입 후 집 안에 있던 수건을 칼이나 가위로 잘라, 그것으로 피해 여성의 손가락을 묶는 발바리만의 특이 수법을 추려진 사례들에 적용했다.
그 결과 수사팀은 광주에서 2004년 1월 4일 발생한 강간 사건에 주목했다. 유전자가 검출되진 않았지만, 자른 수건으로 손가락을 묶는 범행 수법이 동일했던 것. 경찰은 2004년 광주 사건의 현장과 2005년 논산 사건의 현장 CCTV를 분석했고, 한 대의 차량을 두 현장 모두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유전자를 대조해보기 전까진 이 차량의 주인을 피의자라 단언킨 일렀다.
2.1. 특정된 용의자
형사들은 건물 앞에 해당 차량이 주차돼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용의자 집을 찾았다. 맨발로 현관문을 열고 나온 차량 주인인 이중구(45세)는 “날이 추우니 양말을 신고 나오겠다”며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창문으로 도망친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그가 범인임을 직감했다.
수사팀은 이중구(당시 44)의 주거지를 급습해 이중구의 대학생 아들(21)이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확보한 뒤 유전자 감식작업을 벌여 미리 확보돼 있던 '발바리'의 유전자와 대조해 본 결과, 발바리의 유전자가 서로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 동부경찰서에서 본격적인 재수사에 돌입한 지 1년만인 2006년 1월 10일. 그렇게 발바리가 특정됐다.
2.2. 도주극,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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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이중구가 아내에게 거액의 돈을 처가에 갖다주라고 한 뒤 그리고 그 길로 논산의 처가집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은 한 발 앞서 그 돈을 모두 압수했다. 논산에 도착한 이중구는 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온다는 걸 알고는 청주로 향한 후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범인 특정 3일 후 지역 언론에 관련 보도가 나갔고, 발바리 검거 여부는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부담을 느낀 대전 동부경찰서는 이중구의 얼굴 사진과 옷차림, 현상금 500만원 내역 등이 담긴 수배 전단을 제작해 전국 경찰관서에 배포하고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경찰은 수배전단 2만매를 제작해 전국 역과 터미널, 백화점 등 다중 이용시설에 배포하고 시민들의 제보를 유도키로 했다.
그러던 중 2006년 1월 18일, 이중구가 서울에서 대전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낸 경찰이 형사 20여명을 서울로 급파해 소재를 파악하던 중 이중구가 지인의 아이디를 도용, 인터넷 게임[3] 을 하고 있는 사실을 파악하고 1월 19일 오후 4시 30분경 서울 강동구 천호동 소재의 모 PC방에서 급습했다.
검거 당시 이중구는 흰색 야구모자와 푸른색 마스크를 쓰고 상의는 밤색 무스탕, 하의는 군청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흰색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당시 이씨는 갑자기 나타난 형사들의 모습에 놀라 저항하기도 했으나 이내 순순히 포기하고 검거에 응했으며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흰색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대전동부경찰서로 압송돼온 이씨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피해자들에게 할말이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잘못했습니다"는 말만 남기고 유치장에 수감됐다.
이씨는 경찰에서 전국을 돌며 범행을 한 데다, 피해자들이 연관성이 없는데 경찰이 어떻게 자신을 검거하게 됐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고 한다.
3. 발바리의 정체
8년동안 대전을 비롯해 전국을 공포에 떨게했던 발바리에 관한 관심도 집중되었다. 157cm의 작은 키에 마른 체격을 지닌 소심한 성격의 40대 중년 남성. 그는 1960년 충남 공주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 천호동에서 구두닦이, 롤러 스케이트장 종업원, 신문배달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4]
그는 10대 시절 절도죄를 저질러 소년원 생활을 잠시했고, 특수절도 전과 2범이었다. 20대 초반 고향에 돌아와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작은 문구점을 열었다. 아내를 만난 것도 바로 이때다.
90년부터는 3년간 택시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한 뒤, 93년 개인택시를 구입했다. 10년 정도 개인택시를 몰다가 자신을 향해 수사망이 좁혀지는 것을 느끼자 2003년 개인택시를 판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살아왔다.
가정에 불화는 전혀 없었다. 아내와의 금실도 좋았고, 회사원인 20대 초반의 딸과 대학생인 아들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실업자가 된 뒤에는 택시를 팔아 남은 돈과 딸의 급여로 생계를 유지했다.
운동을 즐겨 10년간 조기축구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누구보다 재빠른 몸놀림을 구사했던 이 씨는 공격수로 맹활약했는데 워낙 빠릿빠릿하고 민첩해서 축구회 내에서도 ‘발바리’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축구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는 등 회원들과도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이 그를 추적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은 대목도 이중구와 가까이 지낸 지인이 별로 없는 점이었다. 술은 잘하지 못하면서도 카드게임 등의 도박과 인터넷 게임을 즐겼다. 경찰에 붙잡힌 것도 바로 인터넷 게임 때문이었다.
그가 즐겨하던 인터넷 온라인 게임 '천년'에서 같이 게임을 즐겼던 유저의 말로는 그의 캐릭터는 마치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였으며, 발 빠르게 움직인다 하여 게임 내에서도 ‘발바리’로 불렸다고 한다.
이 씨가 돈에 대해서도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5] 여성을 강간하고 뺏은 돈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저금했다. 돈 쓰기를 꺼려 검거 당시에도 도피자금 100만 원 중 70만 원 가까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3.1. 발바리의 범행 수법
그가 처음에 범죄를 저지른 것은 1998년 2월이었다. 택시기사로 일했던 시절, 어느날 술 취한 여자 승객이 "택시기사가 지리도 모르냐"는 식으로 모욕적인 언행을 퍼부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뒤따라가 보복으로 강간했던 게 첫 범행이었다.
잡히지 않자 그는 한번 더, 한번 더 식으로 계속하다가 완전히 습관화 되기에 이르었다. 여성을 위협할 때만큼은 마치 자신이 왕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범죄행각은 대담하고 지능적이었다. 택시 승객과 원룸촌에 홀로 거주하는 여성들을 범죄의 타깃으로 삼았다. 그는 새벽운동을 하며 범행 장소를 물색한 뒤, 출입문이 열려 있는 여성의 집에 주로 침입했다.
처음에는 주로 유흥업소 종업원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나 나중에는 가정주부, 회사원, 영업사원, 무직자 등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
가스 배관을 타고 화장실 창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출입문이 닫혀 있을 때는 가스 검침원이나 우유배달원, 보일러 수리공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을 속여 집에 침입했다. 많은 피해자가 “범인에게 심한 냄새가 난다”고 증언한 것은, 그가 축구를 마친 직후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그는 ‘상희’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피해자의 집에 침입하기 전, “여기 상희네 집 아니냐”며 접근했던 것이다. 경찰은 상희라는 이름을 가진 수백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이는 등 헛수고를 거듭해야 했다. 공범이 있는 걸로 위장하기도 했다.
범행을 저지른 후에는 “대전역이 어느 방향이냐”, "노숙자다" "고아원 출신이다" 라는 거짓말로 자신이 대전 지리에 밝은 사실을 감췄다. 또 귀금속이나 수표는 건드리지 않고 현금만을 뺏는 등 교묘하게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그는 모든 여성을 빼놓지 않고 성폭행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2001년에는 '''여성 7명이 함께 사는 투룸에 들어가 3명을 성폭행하고, 나머지 4명은 강제 추행했다.''' 밧줄로 한꺼번에 손이 묶인 7명의 여성들은 서슬퍼런 회칼을 들이대는 위협에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피해자의 부탁으로 돈을 갖고 현장에 나타난 다른 여성까지 성폭행하기도 했다. 피해를 당하지 않은 여성이 자신을 경찰에 신고할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강도 강간범의 수법이다.
시부모, 자녀와 한집에 살고 있는 부녀자도 범행의 대상이 됐다. 새벽에 가정집에 몰래 잠입한 그는 “당신이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가족에게 망신을 당한다”며 피해 여성을 위협했다.
또 피해여성의 남자친구를 묶어놓고, 그 앞에서 무자비하게 성폭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번 성폭행한 여성을 3개월만 또다시 찾아가 성폭행'''하는 대범함도 보였으며, 피해 여성들에게 “경찰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못잡을 것이다”라고 경찰을 조롱했다.
피해자들의 신고를 지연시키기 위해 휴대폰을 감추거나, 유전자 검사를 피하기 위해 피해여성을 강제로 목욕시키는 등 지능적으로 경찰추적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가선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고자 범행의 무대를 대전과 충북 청주 지역에서 전북 전주, 경기도 등지까지 넓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몇 차례 범죄를 저질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범행일지를 치밀하게 기록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4. 판결
사형이 구형되었지만, 이중구에겐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다. 성범죄는 법무부에서 가석방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중구가 가석방이 될 가능성은 0.1%도 없다.
5. 그 외
한 경찰관이 수사 도중 이씨에게 “딸을 키우는 아비로서 성폭행을 저지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내 딸이 피해를 당한다면) 괴롭겠지요” 하며 고개를 떨궜다고 한다. 이씨의 딸이 면회 와서 “아버지, 힘내시라” 고 위로하자, 그는 딸의 두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