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시르메

 


1. 개요
2. 도입
3. 대상
4. 교육과정
5. 이후 경력
6. 변질과 폐지


1. 개요


오스만 제국에서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인재 등용 제도. 점령지의 기독교도 가정에서 남자 아이를 징집하는 제도로, 그리스어로는 '아이모으기'라는 뜻의 페도마조마(Παιδομάζομα)라고 부른다. 몇 년 전까지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한 일부 책들에서 "기독교도 가정의 아이를 납치하는 것"이라고 써 놓기도 했는데, '인간 세금' 이라 부르며 혐오하거나 자식을 숨기는 등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출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이라 자기 자식을 보내기 위해 뇌물을 바치거나 아들이 하나인 경우 다른 집에서 양자를 들이기도 했다[1].
기본적으로는 이미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고위 관료나 군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고위 장교의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황제 이외에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2. 도입


본래 황제가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군대인 예니체리를 모집하는 제도에서 출발했다. 예니체리 자체는 2대 황제인 오르한이나 3대인 무라드 1세 때 창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처음에는 전쟁 포로 중에서 뽑았는데, 무라드 1세 때 이르러 기독교도 소년 중에서 뽑아다 훈련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이후 기독교도 소년들 가운데 징집하여 황제의 친위군을 육성한다는 방법이 상당히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무라드 2세는 이 제도로 관료들도 뽑도록 확장한다. 하지만 무라드 본인부터 투르크계인 재상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당대에 데브시르메 출신자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고, 정치적인 변동은 무라드 2세의 아들로 할릴 파샤를 처형함으로써 투르크계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데브시르메로 뽑힌 자아노스 파샤를 후임 재상으로 임명한 메메드 2세 때 이루어진다[2].

3. 대상


원래 발칸 반도 일대에서 징집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가 늘면서 징집을 하는 지역도 늘어났다. 실제 징집은 선발 담당 관리가 각 마을을 돌면서 마을마다 8세에서 10세 사이인 소년들을 모두 모아 놓고 가장 뛰어난 소년을 선발해서 데려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무슬림은 원칙적으로 제외되었으며,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 집시 등은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제외되었다. 또 보슈나크인은 무슬림이라도 징집되었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목동이거나 수염이 없는 자, 대머리, 오스만 투르크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 키가 너무 크거나 작은 자, 장인이거나 예술가의 자제, 고아나 외아들이거나 대도시에 거주하는 자 등도 역시 제외되었는데, 이렇다 보니 그리스인,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발칸 반도 일대의 기독교도들이 주로 징집되었다[3].

4. 교육과정


징집된 소년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어를 배우면서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은 오스만 투르크어나 황궁의 예법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육을 받는 도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다.
몇년 간 교육을 받은 소년들은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옮겨져 다시 한 번 시험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징집 당시와 달리 합격과 낙제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자질이 어떠한가를 평가받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군인에 적합한 자와 관료에 적합한 자로 나뉘어 군인은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교육기관에 배치되고 예비 관료는 이츠 오을란(Iç oğlan)에 배치되었다. 아제미 오을란에서는 자신의 부대원을 가족같이 생각하며 황제를 아버지 대하듯 하라는 등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과 각종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이츠 오을란에서는 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뒤 침실 정리를 감독한다거나 어마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 등 황제의 시종이나 비서 같은 일을 맡았다.

5. 이후 경력


아제미 오을란에서의 교육을 마친 자는 예니체리 지휘관에 임명되었고, 이츠 오을란을 졸업하면 황제의 시종이나 비서를 시작으로 각종 지방관직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재상을 비롯해 중앙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는 지방관에게 기본적으로 군사적인 재능을 요구했으며[4] 고위 장교라 하더라도 중요한 국경 지대를 맡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밖에도 예니체리 군단에 배속되었다가 예술이나 건축 등에 자질이 있음이 확인될 경우 이쪽으로 전직하기도 했는데,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이런 경우.

6. 변질과 폐지


상술했듯이 데브시르메는 다른 무엇보다도 현직 관료나 장교의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잇지 못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16세기를 거치며 데브시르메 출신자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무슬림도 징집 대상에 포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데브시르메로 원래 징집되어야 했던 기독교도 소년들이 징집되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가령 예니체리의 경우를 보면 1687년 당시 6만 명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징집되어 온 인원은 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결국 이렇듯 유명무실해진 제도는 아메드 3세 재위 초기인 18세기 초에 폐지된다.
[1] 후술하듯이 외아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친아들을 보내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2] 하지만 메메드는 투르크계 세력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을 일종의 여당으로 만들고 투르크계 세력을 야당으로 존속시켜 서로 충성을 경쟁하게 했다. 애초에 데브시르메 제도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황제가 투르크계 세력을 견제할 수단이 딱히 없었기 때문인데, 이들을 완전히 축출하고 데브시르메 세력만 남겼다가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이러한 균형은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딱히 견제하지 않은 쉴레이만 1세 때 무너진다.[3] 처음부터 그리스인이나 알바니아인 등을 노리고 이런 제한들을 두었다기보다,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하는 쪽이 옳다. 소위 '근대화' 가 되기 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극히 희박하여 국법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그나마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토지대장에 언급되었으나 이마저도 혈통이 아니라 모국어가 기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종교를 믿느냐. 즉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훨씬 중요했다.[4] 지방관의 공과를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군공이었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권위가 추락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 이후로는 군공을 세우기 위해 제멋대로 이웃나라를 공격하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