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image]
'''이름'''
오스만어
'''اورخان غازی'''
터키어
'''Orhan Gazi'''
'''출생'''
1281년
룸 술탄국 쇠위트
'''사망'''
1362년 3월 (81세)
오스만국 부르사
'''재위'''
오스만국베이
1323년 혹은 1324년 ~ 1362년 3월
'''후궁'''
닐뤼페르 하툰 (출신: [image] 동로마 제국 추정)
아스프로차 하툰(출신: [image] 동로마 제국)
테오도라 칸타쿠지니(출신: [image] 동로마 제국)[1]
에판디세 하툰(출신: [image] 오스만 가문)[2]
'''자녀'''
무라트 1세
'''아버지'''
오스만 1세
'''어머니'''
말훈 하툰(출신: [image] 튀르크인)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오스만 베이국의 2대 통치자. 오르한 가지(Orhan Gazi)라고도 불리며, 국가보다는 전사 집단에 가까웠던 오스만의 국가 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다.
왜 '오르한 1세'가 아니냐면, 후대에 오르한이라는 이름을 쓴 황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2. 생애


오스만 베이국의 창건자인 오스만 1세의 아들로, 오스만 1세 사후 오스만 베이국의 베이(Bey) 직위를 물려받았다. 1326년에 오스만 1세의 명령으로 부르사를 함락했으며, 공방전 도중이나 그 직후에 부왕이 서거하자 갓 함락한 도시를 새 수도로 삼았다. 1340년대에는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6세의 재위를 도와, 요안니스 6세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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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색은 오르한 1세 즉위 직후 영토, 연한색은 재위 말기 영토
오스만 베이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1354년에는 아들인 쉴레이만 파샤의 활약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잇는 갈리폴리를 점령하고 그 후 발칸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후에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내정에서는 이슬람 법관의 제도를 정비하고 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설립해 교육제도를 확립하였으며, 1327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독자적인 화폐인 악체 은화를 처음 도입하여 룸 술탄국의 신하국이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임을 더욱 분명히 했다.

3. 여담


형제간의 사이가 돈독했다고 한다. 오르한은 동생에게 나라를 나누자는걸 권유했는데[3] 동생은 거절하고 오히려 형제끼리 손잡고 나라를 하나로 합치고 부강하게 만들자고 권유했고 여기에 감동받은 오르한은 동생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것이 오스만 제국 최초의 재상제도이기도 하다.

[1] 요안니스 6세의 딸.[2] 오스만 제국의 황실.[3] 몽골, 튀르크족의 전통이다. 몽골제국도 때문에 칭기즈칸 사후 여러 칸국들로 나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국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하나로 뭉치기도 힘든 마당에 나누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