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빙스턴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David Livingstone
1813년 3월 19일 ~ 1873년 5월 1일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탐험가이자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2. 상세


선교사로서 다양한 교육을 받은 리빙스턴은 원래는 중국으로 가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행이 무산된 이후, 로버트 모펫을 만나 남아프리카 선교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1841년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는데, 한 예로 1844년 마보차에서 선교 도중 마을에 사자 무리가 나타나 생활을 방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본인이 직접 사자 사냥에 나섰다가 사자에게 물리게 되어 평생 왼쪽 팔이 온전치 못하여 어깨 위로 팔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의 대립이 있어 마보차를 떠났으며, 결국 2년 후인 1847년 콜로벵이란 작은 마을에 정착하고 틈 날 때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리고 원주민에게 선교활동을 했다.
이곳에서의 선교 활동에도 많은 고난이 있었다고 한다. 한 일화로, 당시 현지인들과 함께 정글 지대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동행한 흑인 토착민들은 선교사 백인들이 자기네 말을 못 알아들을거라 생각하고 리빙스턴의 바로 옆에서 큰소리로 뒷담을 까면서 비웃었다. 그러다가 오랜 걸음으로 흑인들이 지쳐서 헐떡거리고 있을때 리빙스턴이 아주 유창한 토착 언어로 '그렇게 덥나? 벌써 지친건가?'라고 씩씩하게 소리쳤다. 흑인들은 깜짝 놀랐고(..) 저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인정하게 되어 그 이후로는 리빙스턴을 잘 따랐다고 한다. 낯선 땅에 백인 선교사이자 이방인이라는 포지션에서 안주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다른 제국주의적 사고관을 가진 기독교 선교사들과는 일부 차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탐험은 1849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6월 60일만에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 은가미 호수에 도달한다. 이후 3년간 콜로벵을 기점으로 다양한 탐험 활동을 시작했는데, 1851년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콜로벵을 떠났으며 1853년 잠베지 강에 도착해 그 강이 대서양까지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향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한다. 여정을 계속하여 1856년 마침내 잠베지 강이 인도양으로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16년만에 귀국한 그는 영국내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이란 책을 출판한다. 리빙스턴은 탐험중에 천체관측을 통한 측량술을 배워서 거의 정확하게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리상의 발견을 영국에 편지로 전하였고 유럽각지에서 이를 통해 지도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교역과 선교, 정복 활동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1857년 이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잠베지 지역을 탐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2차 탐험은 굉장히 성과가 미흡했는데, 그는 초기의 개인적인 탐험이 아닌 대규모 원정대를 이끄는 형태의 사업에는 능하지 못했으며 구성원들 사이에서 불만을 사기도 했다. 결국 1864년 이 2차 잠베지 탐험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다음으로 그가 향한 곳은 나일 강이었다. 1866년 나일 강의 수원을 찾기 위한 원정에서 그의 나일강 수원에 대한 이론은 오류로 밝혀졌지만 많은 지리적 발견을 유럽에 전달할 수 있었다. 원정 도중에 역시 수많은 문제가 있었으며 동행했던 현지인들이 그의 사망을 오보로 전달하여 유럽에 그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낙오되어 유럽과 통신이 끊기고도 여행을 진행했는데, 1869년 폐렴으로 고생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시기에 그 유명한 미국 기자 스탠리와의 만남이 성사되기도 한다. [1] 리빙스턴은 이후 건강악화, 콜레라와 식량 부족 등에 시달린 끝에 1873년 한 대학살을 목격하였다는 것을 계기로 하여 원정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5월, 결국 노쇠한 그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현재 잠비아에 해당하는 일랄라 지역 치탐보에서 사망하였다. 아프리카 하인이 리빙스턴을 찾아냈을 때 그는 침대 곁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죽어 있었다. 리빙스턴의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미라로 만들었으며 심장과 내장을 제거한 뒤 아프리카 땅에 묻었다. 그뒤 사람들은 9개월의 힘든 여행 끝에 리빙스턴의 시체를 해안까지 운반해 영국으로 옮겨가서 성대한 빅토리아 풍의 장례식을 치르고 1874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다. 그 해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마지막 일지 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가 출간되었다.
불행히도 그가 개척한 교역 루트를 이용한 것은 상아상인이 아니라 노예상인들이었다. 중앙 아프리카 루트가 개척됨으로서 그 지역의 노예상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잔지바르 노예시장은 중앙 아프리카 최대라고 불릴만큼 성장해버렸다. 정작 리빙스턴은 생애 막바지에 도달하기까지 '''노예무역 폐지를 목표로 삼아 활동했었다.'''[2]
그의 저서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포르투갈 영토와 잔지바르[3]에서 이루어지는 노예시장을 철폐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고, 이에 노예상인들은 그의 탐험을 방해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암살까지 시도하였다. 그의 청원운동은 1871년 영국 하원에 요청서가 제출됨으로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수개월후 잔지바르의 노예시장은 폐쇄되었다[4].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노예무역은 그로부터 각지로 옮겨저 소규모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유럽열강이 아프리카 정치에 개입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으며, 열강은 아프리카 분할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있어서 리빙스턴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리빙스턴 구조대에 참가한 미합중국의 기자이자 탐험가인 헨리 스탠리이다. 그는 우수한 탐험가이면서 동시에 벨기에 왕국 레오폴드 2세의 위탁을 받아 아프리카 각지 부락의 족장들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콩고 자유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탐험가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유럽 식민지 지배를 위해 힘쓴 스탠리에 비해 리빙스턴은 스스로는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은 선교였다. 리빙스턴 본인 역시 자신의 저서를 통해 탐험은 그의 거점을 탐색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하고 있다. 그의 공적으로 유럽으로부터 선교사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저서를 보고 선교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들도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적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즉 시대상에 비해서는 진보적이었으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사고관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한 인물.
그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계속 모험을 함께 한 그의 아내는 안타깝게도 그보다도 더 먼저 사망했다고 한다.

3. 기타


잠비아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인 리빙스턴이 있으며 지금도 그의 기념비와 그의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1] 유명한 우지지에서의 만남, 즉 스탠리의 "리빙스턴 박사님 맞으십니까?(Dr. Livingstone, I presume?) 이 나온 것이 이 시기이다.[2] 또한 리빙스턴은 비록 그 시절 유럽 제국주의적 시각과 우월한 서구인에 의한 미개한 아프리카인을 계몽해줘야 한다는 서구 우월식 계몽주의적 시각을 보유했다는 한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프리카에 대해 진정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인물이었다.[3] 프레디 머큐리의 출생지로도 유명한 그곳으로, 당시 아프리카 최대 노예시장이 있던 곳이다. 뒷날 영국의 괴뢰국이 되었다가,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영국 정부의 방침에 왕실이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영국-잔지바르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4] 여담으로 이 노예시장이 폐쇄된 것이 뒷날, 전쟁사 최고의 코미디(...)인 영국-잔지바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