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
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의 리드 보컬 겸 프런트맨.'''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나는 록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것이다.'''
2. 유년기-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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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안에 위치한 섬인 잔지바르에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기에 무슬림에 쫓겨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구자라트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구자라트어: ફારોખ બલસારા, Pharōkh Balsār)이다. 파로크란 이름을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Freddie로 불린 이유
이때문에 프레디 머큐리를 인도나 탄자니아가 아닌 이란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8-90년대 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퀸을 영국밴드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이란 사람이라고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면서 XX계 영국인등을 두며, 그 뿌리를 중시한 케이스다.
다만 프레디 머큐리는 그런 혈통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탄자니아 출신이면서도 그쪽 사람들을 외면했고, 이슬람 압제에 떠난 파르시 집안이지만, Mustapha 같은 '알라신이 너를 위해 기도할거야.' 같은 가사도 만드는 등 혈통에 대해 초탈한 모습을 보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보미 불사라(Bomi Bulsara)는 1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구자라트 주의 불사르(Bulsar)라고 한다.[5]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파르시로 정통 인도 혈통이 아니고 독실한 파르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시아계 혈통이라고 한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르시라는 걸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머큐리는 잔지바르의 성공회 학교에서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6]
그리하여 머큐리는 인도 뭄바이[7] 동남쪽에 위치한 판치가니(Panchgani)의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Saint Peter church of England)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는 모든 종교의 학생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들였으며, 기본적인 성경공부와 채플 외에는 학생들의 종교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학생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음악에는 일찍이 두각을 보여서,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교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음악 외에도 미술과 스포츠를 잘했고, 특히 탁구와 복싱은 교내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Lesley-Ann Jones의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에 따르면 프레디의 인도 유학은 끝이 좋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듯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막바지 즈음에는 성적도 확 떨어지고 프레디 본인도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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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에서, 학창 시절 프레디. 치아가 신기하다. 거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수준의 뻐드렁니가 돋보인다.[8]
어쨌든 인도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딱히 큰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도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프레디의 동창들은 그를 밝고 좋은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여성들에게 대화를 걸지 못하는 쑥맥도 아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고루 친구를 사귀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달링,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습관은 그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훗날 그의 컴플렉스가 되는 뻐드렁니도 그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프레디의 동창들은 프레디를 bucky(뻐드렁니)[9] 라는 별명으로 부르고는 했는데 훗날 프레디에 대해 기억하는 동창들은 파로크나 프레데릭이라는 이름보다 버키라는 별명으로 그를 자주 칭할 정도였다.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었는데,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64년에 술탄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기존의 지배층인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들이 수천명 가량이 학살되고 백인들은 추방됐다. 백인 이외에 살아남은 이들도 재산의 절반가량을 압수당하는 조건으로 추방되었는데, 재산이 많던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상당수의 재산을 빼앗기고 프레디와 함께 잔지바르를 떠날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후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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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10] 아무래도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 봐.''''라고 말했었다. 후에 이는 신의 한 수가 된다.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티에서 프레디가 기타를 연주하며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한다.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인터뷰에서 존 레논에 대해 레논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고[11]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12] 그를 무척 존경한다[13] 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 퀸의 정규 10집 앨범 Hot Space에서는 존 레논에 대한 헌정곡인 <Life Is Real (Song For Lennon)>을 써서 수록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레디는 지미 핸드릭스의 광팬이었다. 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관람하기도 했고, 직접 그린 지미 핸드릭스 드로잉이나 그에 대한 논문도 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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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위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가 보인다. 대학 친구들은 이 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3. 퀸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14][15] 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 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 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16]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17]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 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퀸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쟤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 식으로 웃어 넘겼다는 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다.
퀸이나 프레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주 나오는 증언 중 하나가 무대 위의 프레디와 일상 생활 속에서의 프레디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남성적이고 다이나믹한, 굉장히 쾌활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면 일상 속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가 죽은 이후 애인이었던 짐 허튼이 방송에 나와 증언하기로 일상 생활 속의 프레디는 '내성적인 보통 사람'이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보아도 일상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며 복잡한 사연을 가진, 알 수 없는 부문이 있는 그런 외로운 인물이었다는 식의 말이 종종 나온다.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18] 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었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19]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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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4, 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한다.[20]
밴드 이름을 'Queen'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gay'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21]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퀸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 락의 영향을 받아[22]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23]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강한 인상과 큰 얼굴을 가진 것치고는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이 중에서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24]
퀸 초기의 프레디는 무대조명과 의상에 유난히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 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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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에서 이런 옷 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덕분에 수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옷을 못 입는 팝 아티스트 1등을 차지했다.[25]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프레디는 1집을 녹음하면서 장난 삼아 "로네츠(The Ronettes)"[27] 의 "I Can Hear Music"[28] 을 녹음했던 적이 있다. 의외로 녹음 퀄리티가 좋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때 본명을 쓰지 않고 'Larry Lurex'[29] 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물론 당시에 프레디는 무명의 가수였기 때문에 본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도 사실상 묻혔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프레디가 무명 시절에 녹음했던 앨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프레디의 미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며, 이 중 Goin' Back은 1995년 15집 앨범의 수록곡 Mother Love의 끝부분에서 등장한다.
3집 발매 전까지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길거리 가전제품매장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봐야 했다.[30]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성 정체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31]
무엇보다 프레디는 여러모로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다. 일단 인종 측면에서 보자면 프레디 본인이 유럽인이 아니었다. 프레디는 인도계 파시족, 즉 영국에서도 차별받기 쉬운 아시안 인종이었고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멀리 있는 잔지바르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파시족 혈통은 그 시절 온갖 차별과 혐오를 받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인종차별, 혐오 범죄가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데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프레디의 절친했던 친구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이 있었던 마당에 양성애 성향도 있었으니 언론에서는 더없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셈. 프레디가 언론과 평론가들을 불신했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정체성을 이유로 공격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중에 프레디도 평론가들의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했는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후문도 있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록 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동시대 영국 밴드들에 비해 유럽적인 감성이 짙은 퀸의 음악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32]
프레디 머큐리의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33]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을 토대로 비성과 구강 공명을 적절히 활용하며, 적절히 가성을 넘나드는 방식을 주로 썼는데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구강 포먼트를 최대로 하고 목을 조이고 댐핑을 엄청나게 줘서 드라마틱한 탁성을 유도했다. 이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또 뒤로 먹는 소리나 목을 조인 가성도 많이 썼다. 이러한 창법의 변화로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1980년대 공연부터는 성대에 엄청 무리를 주는 창법으로 인해 (먹는 소리, 턱으로 누르는 소리 등)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달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 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 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프레디 다큐멘터리인 Who Want To Live Forever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미국 뉴욕 여행에서 게이 클럽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때 프레디가 이때 미국의 게이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 발레복을 입지 않고 가죽자켓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을 길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여러 추측이 있지만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진 것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고, 성대 폴립이 생기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피치를 맞추기가 어려워진 것도 이유가 될것이다.
4. 솔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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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Bad Guy
Barcelona
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과 별개로 솔로 앨범도 두 장이나 냈었다. 퀸 활동의 휴식기였던 1985년에 Mr. Bad Guy란 앨범[34] 과 1987년경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라 카바예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Barcelona' 활동을 했었다.[35] 그리고 1987년에는 솔로 싱글 <The Great Pretender>을 커버하기도 했다.[36]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 팝, 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바르셀로나' 앨범은 그가 좋아했던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앨범으로 하나의 클래식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프레디의 고음역대의 발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거기다 이 시기부터 80년대의 탁성에서 조금씩 본래의 미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다만 후에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응원가에서 탈락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37]
'The Great Pretender'에선 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 난다. 퀸의 예전 뮤직비디오에서의 장면을 가져와 콧수염이 있던 뮤비에서도 밀은 채 다시 찍었다.[38] 또한 여장을 했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인 로저 테일러와 피터 스트라커[39] 도 함께했다.[40][41]
아이러니하게도 프레디의 솔로 활동이 다시 알려진 건 이 시기 활동이 매우 왜곡된 전기영화 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솔로 활동 문서 참조.
5. 말년, 그리고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숨을 거뒀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Inside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부서지고,''''''My makeup may be flaking,
내 화장은 흩날리지만,''''''But my smile still stays on.
내 미소는 여전히 남아있지.'''
- 'The Show Must Go On' 中
죽을 무렵엔 앞도 잘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42] 프레디는 1987년, 멤버들은 1988년에 이미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 이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레디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확히 언제쯤에 에이즈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에이즈 전문가들과 주변 인물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43] 이때부터 프레디가 몸에 이상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고, 공연 후에는 엄청 지쳐버리는 등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프레디의 에이즈 감염 시기는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인데 에이즈라는 질병 자체가 잠복기가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팬들이 추정하는 에이즈 감염 시기는 프레디가 1982년 미국에 놀러갔을 때, 혹은 Hot Space 앨범 이후 프레디가 잠시 음악에 열정을 잃고 밤놀이에 빠졌을 때, 아니면 더 올라가서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클럽에 드나들 때까지도 감염 시기를 넓게 잡는 의견이 있다. 프레디에게서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 계산을 해 보면 감염 시기는 1982년이나 1983년 사이가 유력하다고 한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HIV 보균자 검사를 받는 것을 꺼려했는데 프레디 역시 그랬다. 하지만 동성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비밀리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측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는지 언론사 쪽에 프레디가 HIV 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바로 나버렸다.
물론 프레디 역시 인간인지라 에이즈 감염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가 처음으로 프레디에게 에이즈의 감염을 알려줬을 때 프레디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Who Wants to Live Forever'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무척이나 싱크로율이 높은 재연배우가 에이즈 감염을 선고받았을 당시 프레디의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다.
프레디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차량에 마네킹을 분장시켜서 시선을 따돌린 후 자신은 나중에 다른 차량으로 나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결국 런던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기 시작한다(이 때 스위스 몽트뢰에서 체류한 기간이 늘어난 것 같다.).
프레디가 병에 걸림으로써 1986년을 기점으로 퀸은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프레디는 매직 투어 이후로 병색이 짙어졌으나, 1988년경까지 솔로곡으로 라이브를 계속했다. Barcelona를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라이브를 했었다. 즉, 1989년 The Miracle 앨범이 발매될 당시에 프레디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었던 것은 맞으나, 1986년 이후 프레디가 어떤 라이브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44]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 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은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하는데,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45] 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46]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팬들을 안쓰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뮤비.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고 초췌해지는게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부인했지만, 되려 뮤직비디오가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근 1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47]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48]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49]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가수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병문안은 허락을 받은 몇 사람만 할 수 있었고, 엘튼은 그 중 한 명이었다. 프레디와 엘튼 사이의 우정을 알 수 있는 부분.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내가 해도 저 정도 보단 잘하겠네.'''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 그 이후에도 디자인을 공부했던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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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생전 마지막 사진.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 돼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는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에이즈를 부각하며 프레디가 이 병에 걸렸다고 기사를 썼지만, 곧[50] 그 내용은 다시 프레디가 죽었다는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 기사는 전 세계 언론에서 톱기사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선 몇몇 언론에서 짧게 보도되거나 늦게 언급되었다.[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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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흔들었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는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애니 레녹스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No One but You'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1997년, 은퇴를 선언한다.[53]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은 프레디를 조장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디콘, 메이 등 퀸 멤버들과 지인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54] 결국 프레디는 화장[55] 되었고 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영국 언론들에 의해 프레디의 묘지로 추정되는 묘비가 런던 켄살 그린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프레디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프레디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똑같이 기재되어 있다. 프레디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연인 메리 오스틴과 퀸 멤버들은 이 묘지가 발견된 뒤 진위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대다수 팬들은 유년기를 제외하고 프레디가 평생 살았던 런던이 프레디의 마지막 안식처가 맞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며[56] 추모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이 묘비에는 오늘도 팬들의 헌화가 가득하다.[57]
이 묘비가 밝혀지며 팬들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묘비 안의 유골이 사라졌다는 등의 말이 나왔고, MBC 서프라이즈를 통해서도 다뤄진 바 있다. 해당 소식이 다뤄진 1주일 뒤에 프레디의 묘를 보기 위해 해당 묘지를 방문했던 블로거의 후기가 있는데 #묘지 관리인이 해당 블로거가 프레디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설명해주길 그 묘비는 프레디의 묘가 맞으며 근 20여년간 안치되어 있었다. 프레디의 가족들이 무덤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고 숨겨지길 원해 묘비의 글도 불어로 새겼다고 한다.[58] 하지만 묘비의 존재가 알려지고 언론과 팬들에 의해 묘지에서 소동도 빚어졌고, 프레디의 가족들이 유골의 도난을 두려워하여 무덤을 옮겼다고 한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의 개인의 유골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유골도 함께 안치된 가족 무덤에 가까워서 더더욱 민감했던 모양. 덧붙여 묘지 관리인의 말을 영상으로 촬영하려하니 영상은커녕 사진도 찍지말고 들어가지도 않아줬으면 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에서는 메리 오스틴이 프레디를 독차지하기 위해 유골을 옮겼다는 등의 주장이 나왔지만[59] 관리인의 말대로라면 쏠리는 관심을 원치 않았던 프레디의 가족들이 이장한 듯하다.
2019년 중반 켄잘 그린 묘지의 묘비에서 프레디의 명판이 가족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퀸 팬카페 회원의 증언.
이로서 프레디의 마지막 안식처는 그의 가족 그리고 그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르게 되었다. 대신 아직까지도 메리에게 상속한 저택 가든 로지(Garden Lodge)에 팬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6. 재능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가진 록스타, 대중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레전드'''[60] 로 평가받는다.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먼치킨, 보컬부터 작곡까지 모든면에서 최고를 달렸던 불세출의 천재, 록 음악의 신으로 평가받는다.
6.1. 가수로서
'''활화산'''에 비유될 만큼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무엇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강렬한 고음을 자랑하는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의 노래에서는 프레디를 능가하는 소화력을 지닌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처럼 다양한 음악 장르(발라드, 오페라틱, 소울, 디스코 등)의 감성을 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보컬은 그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쿵쿵따 드럼 소리뿐인 We Will Rock You나 기타 사운드 거의 없이 베이스 리프로 진행되는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같은 곡을 빈틈없이 완벽한 노래로 만들었던 건 프레디의 보컬과 라임, 리듬 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
보컬로서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의 대학 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61]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이미 테크닉적으로 거의 안정된 보컬이었다.[62]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다.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70년대 보컬은 성구전환을 정석적으로 조심스럽게 하되, 성대가 최대한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창법을 주로 사용한 반면에 ,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고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 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 전성기는 1980년도 초반이다.[63][64] 하지만 1982년도 후반으로 접어 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목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Hot space 앨범이 실패했으며 1983년도에는 아예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65] 1984년도에 The Works 앨범과 함께 다시 투어를 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였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눈물 날 정도로 삑사리를 냈다.[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67] 1984년도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선 시티[68][69] 에서 가졌는데[70]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 9일간의 공연[71] 에서 10월 19일 공연에서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Live Aid급으로 불러냈다.[72]
1985년도는 브라질 리우에서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첫째날 콘서트에서는 그 어렵다는 Somebody to Love를 전성기급으로 불러냈다.[73]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2옥타브 라#(A#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74] 그리고 찾아온 Live Aid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었다.[75] 다만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있는 것이 라이브 AID에서 프레디가 최악의 컨디션에서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목에 혹이 난 상태랑은 별개로 이 공연서 프레디의 컨디션은 정말 최상이었다. 1985년도에 프레디는 여전히 기복이 심했고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최대 고음이 '''2옥타브 라#(A#4)''' 였지만 이 날 We are the champions를 부를 때 '''3옥타브 도(C5)'''를 찍고 후렴부분을 전부 높혀서 불렀으며 RADIO GAGA 역시 낮춰부르는 일 없이 깔끔하게 소화했다.[76] 일부 사람들은 아무래도 라이브 에이드 때 부른 노래들은 퀸의 단독콘서트에서는 공연 후반부에 나오는 곡이라 프레디의 컨디션이 낮아져 있는 상태인 단독콘서트와는 컨디션 비교가 힘들다곤 하지만 1985년 콘서트 곡리스트 초반부에는 프레디가 부르기 힘들어했던 Somebody to love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곡이 워낙 고음이 많이 들어가있는 곡이라 해당곡을 들어보면 프레디의 컨디션을 가늠할 수 있고 훌륭한 공연도 많지만 live aid 만큼의 가창력이 나오긴 힘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77] 아무쪼록 그렇게 LIVE AID에서 최고의 공연을 펼쳐 전성기를 다시 연 후 1986년도에 가진 MAGIC 투어는 전반적으로 그리 좋았던 컨디션은 아니였지만[78]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과 함께하는 공연들은 명장면을 연출한다.[79] 이렇듯 프레디는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몇몇 사람들이 웸블리 둘째 날 라이브를 보고 프레디의 가창력에 의심을 가지는데 전날공연에서 비까지 맞으면서 불러서 해당 콘서트는 최악 중 최악의 컨디션이였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80] 보통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81][82][83] ,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84] 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
성대가 유난히도 약한 데다가 정식적으로 보컬 수업을 배운 적이 없어서 라이브 기복이 있는 편이다.[85] 다만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약했다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에서 순간적으로 성대근육을 조으고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호흡을 폭발시켜 벤딩없이 피치를 높이는 창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음성학이 발달하고 보컬트레이닝이 보편화된 지금은 절대 권장되는 창법이 아니다. 일반인은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힘들며 숙련된 보컬리스트도 몇곡 부르고 나가 떨어질정도로 목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는 이런 창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곡을 소화하며 끝까지 기복없이 공연을 마친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프레디의 성대가 유난히 약했다기보다는 다른 가수에 비해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써야하다보니 기복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활동을 하던 70-80년대에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락 역사상 최고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안 나오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86] 추가적으로 프레디 머큐리는 년도에 상관없이 가성을 라이브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디가 세상과 작별을 해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면서 부르면 템포가 처질 것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나 somebody to love이 그렇다. 원곡엔 가성이 많이 포함되어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진성으로 처리했다. 진성처리로 불러서 그런지 라이브가 원곡보다 템포가 빠르다. 거의 모든곡을 진성처리하다보니 컨디션 좋은 날과 안좋은 날의 차이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프레디가 가성을 못부르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컨디션 안좋은 날에도 가성 고음을 뽐내는 경우가 많아 이유를 추정하기 힘들 뿐이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발라드[87] , 디스코[88] , 성악[89] 등 장르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90]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91] 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이게 샤우팅인지 뭔지 분간이 안가는 괴성[92] 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가면서 다시 1970년대 창법으로 돌아갔다. 아니, 1970년대보다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소리가 가벼워져 소리가 명료하게 들린다.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 씰(Seal)[93] 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 뿐이다.
원래 성부가 테너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바리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던 몽셰라 카바예는 이를 간파하고 프레디에게 "당신의 성부는 바리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굳이 고음을 부르지는 말아요. 고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내가 할게요."라고 했고, 이에 프레디는 "하지만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부로 부르면 사람들이 저인지 모를 것 같아요..."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94] 에서 3옥타브 파(F5)[95] , 가성 음역대는 '''4옥타브 라(A6)'''[96][97] 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 여성의 두성을 구사했다.
6.2. 프런트맨으로서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98]
'''(락앤롤 역사에 프레디 머큐리를 능가하는 쇼맨이 있었는가?)'''
'''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이며 라이브 공연계의 '''본좌'''로 평가받는다. 퀸이 같은 록 밴드, 아니 대중음악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가수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가수를 통틀어도 '''마이클 잭슨''' 외엔 사실상 경쟁자가 없어 보인다. 프레디는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 기술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타디움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기획자인 밥 겔도프[99] 는 '그날 공연한 밴드 중에서 그냥 퀸이 최고였다'라고 평했고, 같은 공연에 출연한 엘튼 존이 퀸의 공연 후 백스테이지에서 '우라질! 니들이 공연 전세냈냐(you stole the show)!' 라고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100] 당시 라이브 에이드 공연 특성상 모든 아티스트에게 20분의 시간만 주어졌고 퀸의 콘서트에 평소 사용하는 조명, 특수효과 장치 같은 것은 전혀 쓸 수 없었기에, 이 날의 공연은 오직 프론트맨인 프레디가 나대는 것으로 관객들을 매료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레디는 '''그걸 해냈다.''' 당시 U2나 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101]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은 공연이었다.'''세상에 나타난 모든 프런트맨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레디 머큐리가 분명하다. 그의 음역대, 카리스마, 존재감 그 모든 것이 프런트맨 그 자체였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102][103] 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서있는 것 조차 부담백배인 10만명 청중 앞에서 쫄기는 커녕 확 제압해버리는 무게감과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프레디가 그처럼 인상적인 무대 매너와 쇼맨쉽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퍼포먼스 면에서의 기교와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걸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걸 즐길 줄 아는 타고난 무대체질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뛰어난 록 뮤지션이라 해서 모두가 청중앞에서의 공연을 좋아하는 무대체질인 건 아니다. 프레디와는 정반대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의 공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록 보컬리스트의 대표적인 예로 커트 코베인이 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공연에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니 어찌하면 좋냐는 내용의 비통함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104]
프레디는 공연이란 하나의 '쇼'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퀸 초기 때부터 적자를 보더라도 공연 조명과 의상에 예산을 가장 많이 쏟아부었다고 한다. 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조명부터 후기에 사용하던 거대한 조명 장치 등 화려한 조명이 퀸 공연의 또다른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70년대 초반에 멤버들이 입고 있는 괴상한 날개옷과 강렬한 화장[* 1973년 11월 2일 공연의 사진. 이날 프레디가 멤버들 모두에게 손수 화장을 해 주었다고 한다.]도 모두 프레디의 취향이며, 다른 멤버들이 밝히길 프레디가 계속 이상한 옷들을 입으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입게 되었다고.
라이브 에이드때 시전한 관중 조련.[105] 말이라곤 All Right! 한 마디만 하고 전부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만 하는데도 10만 관중이 아주 자연스럽게 프레디를 따른다. 이렇게 프레디가 관중을 조련할 때 치는 "'''Eh~Oh!'''"는 프레디를 상징하는 멘트 중 하나.
1986년 웸블리 공연 도중 관중을 지휘하는 영상. Under Pressure 시작 전의 그 유명한 관중 조련.
공연 중간에 목을 풀 겸 독특한 소리[106] 를 내며 관중들과 호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107] 이 관중 조련은 78년 재즈 투어때부터 시작되고 그가 죽은 이후까지 계속돼, 추모공연이나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등에서 스크린에 나온 그의 생전 공연 음성을 관객들이 따라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참조 0:00~1:15위에서 서술되어 있다시피 저 때 프레디의 컨디션은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었음에도 전설의 장면을 연출한 것을 보면 그가 최고의 프런트맨으로 평가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6.3. 작곡가로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까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 작곡가로, 퀸의 히트곡들 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의 작품이 많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108] ,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109] , <I Was Born to Love You>'''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다.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락,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인 <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다양한 장르가 짬뽕된 노래의 가장 대표적 예시가 바로 대표작 Bohemian Rhapsody로 이 노래는 여러 장르를 합친 다음에 프로그레시브 락과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197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110]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111]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112]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와 Queen II에 수록된 곡들). 반면 '''그 자신은 악보를 거의 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113] ,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한다.
작곡가로선 70년대 중후반기[114] 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80년대엔 밤놀이에 빠져서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클럽의 음악에 영향받은 가벼운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70년대 곡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Barcelona>나 <Innuendo> 같은 명곡들을 써낸 거 보면 마지막까지 재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작곡을 하고 나서도 로저나 존이 작곡을 할 때면 으레 곁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5] 다만 브라이언은 작곡에 관한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과 방식이 있어서 프레디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 같이 의견을 통일시키려고 하다 보면 꼭 싸움이 터졌다고 한다.[116]
6.4. 연주자로서
퀸에서 리드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117]
건반악기로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락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118]
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119] , 때문에 80년대에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120]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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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쳤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공연 때 코드는 3개밖에 칠 줄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론 6개를 친다.[122][123]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까진 12현 통기타[124] 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125]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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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15일, 퀸의 마지막 북미 공연인 로스엔젤레스 잉글우드 공연에서.[126][127]
왼쪽부터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존 디콘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128] 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129] 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에 의하면 프레디도 마이클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정도로 마이클을 좋아했다고 한다. 퀸 결성 전부터 이미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고. 한편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달성하는 데에 마이클 잭슨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로저 테일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본래 퀸은 해당곡의 히트 가능성을 낮게 보며 싱글 발매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나 마이클 잭슨이 반드시 크게 히트할 것이라고 자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내놓게 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 둘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단일 인물이 누구인가?' 논쟁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이 되었다.
- 밴드가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멤버들끼리 자잘한 트러블도 잦았는데, 그중에서 프레디는 브라이언 메이와 제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싸우는 방식은 좀 웃겼다고 전해진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점점 서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프레디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하면 프레디는 빡쳐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몇시간 뒤에 다시 프레디가 돌아와서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주위 대부분의 반응이 '브라이언이 심한 말 할만 했네'였다고. 프레디가 주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화냈던 적이 많았던 걸로 여겨진다.[130]
- 1977년에 퀸이 Wessex 스튜디오에서 We Will Rock You 녹음을 하고 있을때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 화려한 음악 스타일과 대중적 성공을 거둔 스타밴드들을 싫어했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시드 비셔스에게 톱스타 프레디 머큐리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듯. 스튜디오에서 프레디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어이. 네가 관객들 앞에서 발레나 춰야하는 프레디라는 놈이군"[131] 이라며 괜히 시비를 걸었는데[132] , 프레디는 "이봐, 사나운 친구여.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네."[133] 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또라이같은 시드 비셔스의 성격상, 만약 프레디가 그때 공격적으로 응수했다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는데, 프레디가 굳이 같은 수준으로 맞대응하기보단 부드럽게 넘긴 것.[134] 퀸과 섹스피스톨즈는 애초부터 서로 추구하는 음악성이 완전히 다른데다가, 섹피 멤버들과 달리 퀸 멤버들은 영국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고, 다들 대학도 나온 사람들이다. 전형적인 영국 뒷골목 양아치 스타일이였던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 눈에 퀸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밴드였으니 좋게 보였을 리가 만무하다.
- 세간엔 게이나 양성애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정확히 밝힌 적이 없다.[135] 다수의 팬들이나 언론들은 그의 연애경력을 보아 그냥 양성애자라고 흔히들 보고 있는 듯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의 성적 지향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으니 눈치 못 채는 사람이 이상했을지도.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 언론이나 외부에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개인사를 밝히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원래 언론과 친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프레디 본인이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특히 성적 지향 쪽은 주위에 밝히길 굉장히 꺼려했었으며, 평전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도 부모님에게까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프레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같이 살고 있는 애인 짐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곤란해했다고....(물론 프레디의 부모님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은 프레디의 성적 지향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7년 자신의 매니저 폴 프렌터가 더 선에 프레디의 사생활과 에이즈로 인해 전 애인이 죽었다는 것을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을 때 극도로 분노했으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폴 프렌터 역시 프레디가 죽기 3달 전인 1991년 8월 에이즈로 인해 사망했다.
- 1970년대 브라이언와 메리 오스틴은 몇 번 데이트를 했는데 프레디가 메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브라이언은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던 메리를 수줍음이 많던 프레디에게 흔쾌히 소개해준다. 소개로 알게 된 여성 메리 오스틴과 사귀며 동거까지 하였으나 프레디가 다른 남성과 불륜을 가졌고 그 사실을 1976년 메리에게 알리며 헤어졌다.[136] 그렇지만 메리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137] 프레디와 사귀던 애인들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한 평전에 따르면[138] 후일 1980년대 중반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배우 바바라 발렌틴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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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디가 가장 오랫동안 애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했던 사람은 짐 허튼으로 1983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1985년부터 1991년 프레디가 죽을 때 까지 함께 했다.[139] 그들의 관계는 대중에서 숨겨졌기 때문에 종종 프레디의 정원사 내지 이발사로 소개되었으나 투어마다 같이 따라 갔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프레디 생일파티 영상에서도 자주 보인다. 프레디의 40세 생일 때 법적으로는 인정 못받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었고, 오른손 약지에 커플링을 끼기 시작하였다. 독일 방문 중엔 시장 한복판에서 짐 허튼 품으로 뛰어든 프레디 때문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었다고. 짐은 1987년 프레디의 HIV 감염 사실을 알았으나 계속 함께했고 결국 그도 1990년에 HIV 감염사실을 알게되었지만 이미 투병생활로 피폐해진 프레디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두번째 검사 결과는 프레디에게 알렸고 소파에 누워있던 프레디는 'The Bastards'(이 개자식들)라고 중얼거렸다고. 프레디는 짐 허튼에게 50만 달러의 상속을 남기고, 짐 허튼과 살고 있던 자신의 런던 대저택을 메리 오스틴에게 상속하며 짐 허튼이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의 사망 이후 짐 허튼은 메리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140][141] 짐 허튼은 2010년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짐 허튼은 1995년 자신과 프레디의 삶에 대한 회고록 <
>를 출판했다. 아무레도 프레디 머큐리를 우상화 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읽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142]
-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때문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짐 허튼에 따르면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굉장히 감성적이였다고. 한번은 크게 싸움을 하고 하루종일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레디에게 36개의 블루 문 장미를 가져다 주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풀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배신도 많이 당하면서[143]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
-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는 장사를 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 오페라와 발레 등 고전 예술 장르를 좋아했으며,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바로티도 좋아했었다. 다큐 '프레디 머큐리, 가려진 삶'에 의하면 특히 프레디는 파바로티의 공연을 직접 듣고난 뒤 자신과 동행한 스태프에게 '세계 최고의 목소리를 들었다'라고 쉴새없이 흥분했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다큐에서 언급하기를, 프레디가 바르셀로나가 발표될 당시에 파바로티는 이 곡이 ''오페라를 단순화시킨 곡"이라며 탐탁치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프레디 사후에는 이래저래 잘 풀린 모양인지 파바로티는 퀸 멤버들과 공연을 했었다(노래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브라이언이 영어로 부르고 파바로티가 이탈리아어로 부름). 고음역대의 창법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프레디의 취향은 그가 작곡한 노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퀸 노래 중 뭔가 요상한 멜로디의 노래들이 들린다면 십중팔구 프레디가 만든 노래라고 봐도 좋다.
-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왠지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177cm로 그냥저냥한 수준이다.[144] 하지만 전신 사진을 보면 상체와 다리의 비율이 3:7로 보일 정도로 다리가 매우 길어서 신장이 커보였다고한다. 더군다나 트레이드마크 수준으로 유명한 복장인 민소매와 하얀색 배바지를 입으면 기이할 정도로 다리가 더 길어보였다.
킬러 퀸을 부르는 프레디
- 메가쑈킹이 알타리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영화 패러디 만화를 그리다가 기사 윌리엄에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입힌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그려 퀸 팬들에게 쌍욕을 들은 적이 있다. 윌리엄을 등 뒤에서 안고 싶어하는 공주가 나오는데 어찌 공주가 쓴 마스크가 벗겨지더니 드러난 얼굴이 바로 프레디 머큐리 얼굴을 덧입힌 것이었고 윌리엄이 분노하면서 창으로 힘껏 두들겨 패주며 끝나는 줄거리였다. 당시에도 프레디의 팬들이 불쾌해하며 이 만화에 악플을 달기도 했다. 사실 영화 기사 윌리엄에 그의 노래가 나온 점 때문에 들어간 우스개이긴 하지만 어쨋든 고인드립이니... 메가쑈킹 항목참조.
- 한국에서도 영챔프 기획으로 신인만화가들의 단편 형식 시리즈물에 단편으로 나온 적이 있다. 요정과 관련해서 퀸의 그룹명이 퀸이 되었던 얘기를 다루고 있다.(퀸의 명곡들이 사실은 그 요정과 프레디와의 조우로 인해서 만들어졌다는 식이다.) 참고로 여기 등장한 마녀는 프레디와 연인이 되려다 딱지맞고 돌아서 막장 타는 역, 말년의 프레디가 죽기 직전에 다시 등장해서 그를 보살핀다......라고 쓰여져 있으나 덧붙이자면 써니라는 이름의 마녀는 마녀들의 세계에서 인간세상을 체험하는 일종의 성인식에 참석했고 마녀는 마녀세계에 있을때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반해 프레디의 집에 찾아가지만 불시착하는 바람에 프레디의 창문을 거의 깨부순다. 그로 인해 집안일을 해준다든지 작곡 공부를 배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프레디의 집에 얹혀 살게 되고 때때로 퀸 멤버들도 만나고 하다가 마녀는 스스로 작곡을 하게 된다. 그 노래가 바로 Love Of My Life 라는 설정이다. 마녀는 프레디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에게 바치는 선물로 그 노래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해보라는 마녀의 권유에 따라 프레디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를 하지만 마녀는 순간 프레디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145] 프레디가 연주를 끝내고 다른 멤버들은 명곡이라며 기뻐하고 프레디 역시 고맙다고 하지만 마녀는 혼자서 화난 듯한 표정으로 프레디를 쏘아보다가 "밴드 이름 아직 안 정했다고 했죠? 이건 어때요? Queen." 이라고 추천해버린다. 물론 Queen 에는 동성애자의 뜻도 있기 때문인 것인 설정인 듯 하며 마녀가 밴드명으로 Queen을 추천하는 순간 프레디의 얼굴도 굳어지는 묘사가 나온다. 그날 밤에 써니는 프레디에게 화를 내다시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프레디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써니는 당신이 그럴리가(동성애자 일리가) 없잖아 라고 울부짖다 눈물을 흘리며 빗자루를 타고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프레디의 집, 병약한 프레디가 브라이언 메이에게 써니가 보고 싶다며 Love Of My Life의 연주를 부탁한다. 프레디는 곡을 감상하다가 눈앞에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써니를 보며[146] 이름을 되뇌이며 끝.
- 2011년 9월 5일에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며 영문 자막으로 가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대한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147]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148] 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149] 그때의 이후 The Miracle 앨범 뮤비에서는 아예 콧수염 뿐만 아니라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다며 호세 카레라스, 사라 브라이트만의 "Friends for Life"(영원한 친구)로 바꾸어 빈축을 샀다. BBC는 꿋꿋이 'Barcelona'를 틀었다.[150]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 퀸 평전에 따르면 진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직후 프레디의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잔지바르 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를 절대 스스로 입에 안담았을 뿐더러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퀸의 홍보담당으로 일했던 직원은 십 년 넘게 퀸의 멤버들과 같이 일했는데 프레디가 죽고 나서야 프레디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걸 알았다고. 상술했다시피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근데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사라'라는 성을 밝히는 걸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풀네임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이쯤 되면 본인이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이나 인도에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냥 흑역사라고 생각했던듯. 인도야 그러다쳐도 잔지바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1964년에 잔지바르의 아랍왕조가 흑인에 의해 뒤엎어지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났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인도계였기 때문에 덩달아서 쫓겨났던 경험 때문이었다는게 정설, 그래서 그런지 시사인에 따르면 잔지바르에는 프레디 동상 하나 없고 추모열기도 거의 없다고한다. 몇몇 백인과 팬들만 생가터를 기웃거린다고. 덕분에 그의 출생신고서라든지 여러 문서도 흔적이 없다. 이렇게 묻혀지던 잔지바르이긴 한데 그가 죽으면서 생가를 찾으러 온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엉터리로 생가라고 뻥치는 현지인도 많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생가는 실제로 남아있지 않다. 어릴적에 살던 다른 집이 남아 일본계 사업가가 사서 호텔로 만들어 프레디 머큐리 어릴적 살던 집으로 홍보하지만 오래전에 이미 개조되어 어릴적 흔적은 전혀 없다.
- 일본의 대전격투액션게임 길티기어 시리즈의 주인공 솔 배드가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캐릭터 이름부터 프레디의 별명이고 이 캐릭터의 보물이 퀸의 시어 하트 어택앨범. 캐릭터 테마 ost는 퀸 1집의 수록곡
에서 제목을 따왔다.사실 락 음악 매니아인 프로듀서 영향 탓에 이 게임에 등장하는 전 캐릭터가 락음악, 뮤지션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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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몽트뢰[152][153] 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생전 프레디 머큐리는 몽트뢰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흔히 프레디 머큐리 하면 생각나는 A Kind of Magic 투어의 모습[154] 을 담아냈다.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이기도 하다.[155]
- 84년 9월 22일의 독일 하노버 공연에서는 Hammer To Fall을 부르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노래를 중단하고 관계자들의 부축으로 피아노에 겨우 앉은 뒤, Bohemian Rhapsody,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s만을 부르고 공연을 중단해버렸다. 이때 브라이언이 당황하였는지 We Will Rock You의 기타 솔로 파트를 조금 더 일찍 연주해 버렸다. 이 당시 넘어지고 부축을 받는 사진이 남아있다.
- 라이브에서 고음을 조금씩 낮춰 부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역대 최고를 다툴 음색과 목청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대의 내구성을 약하게 타고난 데다 정석적인 트레이닝을 전혀 거치지 않은 프레디의 목소리는 투어 후반으로 갈수록, 또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쉽게 피로가 누적되고 빠르게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84년 전후로는 자기관리 역시 좋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좋은 컨디션을 투어나 공연 내내 유지하는 데 무리가 오면서 점차 스스로 목을 사리게 된 것이지, 고음을 부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던 가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실제로 고음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던 78년의 News of the World 투어와 최전성기인 79년의 Crazy 투어, 80년부터 82년 여름까지의 투어를 보면 프레디가 원곡에도 없는 고음 애드립들을 섞어가며 노래를 더 빡세게 불러대는 모습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 고음을 피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곡은 발표 이후 대부분의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등장했던 We are the champions. 1절의 But I′ve come through(B♭4)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때도 성공할때가 있었지만, And we′ll keep on fighting till the end에서 fighting부분은 3옥타브 도(C5)로 라이브에선 대부분 2옥타브 솔(G4)에서 라(A4)까지만 올렸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매 코러스마다 등장하는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Bb4)!" 를 부를 때면 프레디는 한 옥타브 아래를,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가 원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코러스를 모두 원음으로 부른 라이브는 현존하는 음원들 중에서는 85년 라이브 에이드 하나뿐이다[156] . 목을 험하게 사용하는 프레디의 가창방식상 마지막에 부르는 곡에 가장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래의 하이라이트이니만큼 팬 입장에서 상당히 아쉬운 대목임은 분명하다. # 일례로 컨디션이 좋기로 유명한 1981년의 몬트리올 라이브에서도 1분 즈음에 등장하는 해당 파트를 저음으로 깔아부르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곡에서 등장하는 같은 높이(Bb4)의 다른 고음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만큼 상태가 좋은 공연들에서도 한결같이 낮춰 부르기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못한다기보다 일부러 사린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 # 이름높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목소리 최전성기가 살짝 지났고[157] 목에 혹이 있어 컨디션이 좋지 못해 의사가 말렸음에도 짧은 공연시간과 투어 휴식기라는 이점을 살려 첫 코러스의 C5와 위에 언급한 3차례의 Bb4s 노트를 모두 불러낸 바 있다. 사실 두 번째와 마지막 코러스에서 약간의 음정 불안이 드러나긴 하는데, 이는 부틀렉의 사운드로 들을 때나 확연하지 방송에서는 로저 테일러의 완벽한 고음 하모니에 거의 묻혀 버린다.
- 1984년부터 1986년까지의 투어생활 말년 동안에는 데미지의 누적과 약간 미흡한 자기관리로 인해 성부가 바리톤에 가깝게 내려갔고, 투어 초반이 지나면 고음이 점차 버거워져 로저 테일러의 도움을 자주 받곤 했다.[158] 거꾸로 이야기하면 낮아진 성부로도 고음역이 대부분 커버되는 투어 초반의 공연들은 정말 귀가 즐겁다는 뜻도 된다. 어쨌거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경우 위에 서술한 것처럼 20분 남짓한 짧은 공연 시간과 The Works 투어를 마치고 가진 2달 가량의 휴식 덕에 당시 공연들의 평균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들려주지만, 대체로 당시, 특히 1984년도 9월 즈음의 콘서트들 중에는 커리어 최악의 기량을 선보인 적도 적지 않다. 다행히도 1985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목소리 관리에 신경을 기울인 것인지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고[159] , 1986년에 벌어진 A Kind of Magic 투어에서는 긴 셋리스트와 빡빡한 일정[160] 이라는 난관에도 오히려 투어 막판에 상태가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 이상의 공연을 여럿 남기기도 했다.
- 다만 Live At Wembley 86' 라이브 앨범과 DVD 영상은 매직투어 중 가장 상태가 나빴던 7월 초중순의 공연을 담고 있다. 게다가 이틀 연속 진행된 웸블리 공연에서 이미 첫날 많은 힘을 쓴 상태에서 훨씬 지친 모습의 2일차 공연을 베이스로 사용하게 된 것 또한 악재.[161] 이 때문에 가끔씩 웸블리 공연에서 프레디가 의외의 파워풀한 고음을 내는 장면들은 대부분이 오버더빙의 힘을 빌어 연출된 것이다. 공연 후반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고 나서는 목소리가 거의 나가버려서[162] 이후의 곡들 중에서는 오버더빙이 들어가지 않은 곡이 오히려 드물다.이외에도 One Vision, A Kind of Magic, Who Wants to Live Forever 등에서 오버더빙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버더빙 이전의 웸블리 공연은 이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해당 영상이 올라와 있는 채널은 퀸의 공연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유명 퀸 부틀렉 전문 채널.
- 롭 헬포드가 그가 70년대 후반에 가죽옷을 입은 것을 보고 복장에 대해서 자기처럼 오토바이 대회에 나갈 생각은 없냐면서 깐 적이 있었는데, 네가 먼저 로열 발레단이랑 합동 공연하면 생각해보겠다고 응수한 적이 있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롭은 프레디의 더 이상 가죽 의상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163]
- 생전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정확히는 프레디 뿐만 아니라 퀸 멤버 전체가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는데 3집 전까지 그리 큰 인기가 없었던 퀸을 영국을 제외한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고 머나먼 이국의 자신들을 좋아해주는 그런 일본팬들의 마음에 감동 받아 5집 마지막 트랙을 Teo torriatte 라는 일본어 가사가 포함된 일본풍 노래를 넣어 팬들의 사랑을 감사로 보답했다. 또 훗날 1987년에는 La Japonaise 라는 일본어로 부르는 곡을 Barcelona 앨범에 넣기도 했고 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여행도 자주 갔으며 1976년 일본 투어 때는 기모노를 입고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 2016년 3월 26일에 뜬금없이 S.H. 피규어아츠로 발매되었다. 그리고 2019년 08월 31일에 재판되었다. 가겨은 6480엔. 퀸의 마지막 투어였던 무대인 Live at Wembley Stadium에 등장했던 유명한 노란색 코스튬을 재현했으며 마이크 스탠드를 활용한 전신 풀가동의 액션 및 대담한 퍼포먼스의 재현이 가능하다. 또한 다수의 참고 자료로부터 디지털 채색기술 구사하여 여러가지 표정을 바꿀수있는 다수의 헤드도 부속되어 있다. #
- 각 투어 때 마다 복장이 꽤나 달라지는데 1970년대 초중반에는 날개옷과 레오타드[165] 를 입었고, 1977년, 1978년 뉴스 투어에서는 레오타드 위에 가죽옷을 걸치다가 5월 6일 영국 스태퍼드부터 재즈 투어까지 멜빵이 달린 가죽바지에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다.[166] 1979년 크레이지 투어에서는 재즈 투어와 다른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167] , 빨간 넥타이[168] 와 무릎 보호대[169] 착용했다. 1980년 게임 투어에서는 크레이지 투어처럼 검은 가죽 재킷, 빨간 넥타이, 빨간 가죽바지에 파란 무릎 보호대를 차다가, 1980년 말 ~ 1981년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는 가죽 옷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시티에 빨간 가죽 바지 또는 백바지를 입었고[170] , 1982년 핫 스페이스 투어에서도 나시티에 백바지를 입었다.[171] 그리고 웍스 투어에서는 레슬링복스러운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을 입었고,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흰 런닝셔츠와 색바랜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프레디의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선 재킷을 걸치고,[172] 빨간줄과[173] 금색줄이 있는 백바지를 입었다.또 매직 투어 끝에서는 왕관과 빨간 망토를 걸친다.
- 신발은 하이탑을 자주 신었는데 레슬링화나 복싱화 혹은 농구화를 신었다.[174] 퀸 초창기였던 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진 굽이 높은 부츠나 덧신같은 양말만 신고나왔으나 패션이 조금 바뀌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는 오니츠카타이거 하이탑을 자주 신기 시작했고 패션이 완전히 바뀐 80년대 초반에는 나이키를 신었는데 레슬링화나 농구화를 자주 신었다.[175]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디다스를 자주 신었으며 라이브 에이드에서 신은 아디다스 헤라클레스 하이탑이 유명하고 매직 투어에서도 그대로 신었었다. 후엔 공연을 진행하지 않고 등장했던 공식석상이나 방송에선 뾰족 구두나 로퍼를 자주 신었다. 90년대 초반부터는 에이즈 증상이 발바닥에도 번져 딱딱한 신발을 신을수 없게 되며 운동화를 신었고 그가 등장한 마지막 공식자료인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비에서는 다시 아디다스 하이탑을 신고나왔다.
- 1985년부터 타국에서의 라이브는 마무리 곡인 We Are The Champions직전 We Will Rock You를 부를 때에는 항상 유니언 잭을 펼치는데[176] 그 뒷면에는 공연하는 국가의 국기도 펼쳐져 있다.덕분에 타국 관객들의 환호성은 덤. 독일 공연 사진도 자세히보면 흑적황 독일국기가 희미하게 비춰진다.
- 1992년에 개봉한 웨인즈 월드 영화에 사용된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은 주연 배우 마이크 마이어스가 프레디 머큐리의 허락을 받았다고 브라이언 메이가 밝혔다. 브라이언에 의하면 프레디가 작고하기 3개월전에 마이크가 직접 관련 장면 음원을 가져와서 프레디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마이크 마이어스가 보헤미안 랩소디(영화) 영화에서 퀸(밴드)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퇴짜 놓는 EMI 제작자로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2018년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에 힘입어 프레디 머큐리 패러디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1997년 '허리케인 블루' 이윤석까지 재조명되는 분위기. # 참고 기사 유세윤의 패러디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중이다. 심지어 12월 9일자 개콘 봉숭아학당에서 곽범도 따라했으나, 프로그램 사정이 사정인지라 별 반향이 없었다. 이후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가 무큐리로 패러디하며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냈다.[177] 2019년에는 베로카 CF에서 권혁수가 프레디 머큐리 분장을 했다.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있다. 프레디가 사망한 1991년에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에서 발견된 ‘소행성 17473’이 그것. 퀸의 기타리스트이지만 천체물리학 박사이기도 한 브라이언 메이가 2016년 9월 4일 프레디의 탄생 70주년 하루 전에 해당 소행성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라고 명명했으며 국제천문연맹(IAU)이 이를 승인하였다.# 이 소행성의 잠정 번호는 1991 FM3. 프레디의 이니셜과 같다.
- 로그라이크이자 리듬 게임인 인디 게임 Crypt of the NecroDancer에 등장하는 상인의 풀네임은 Freddie Merchantry인데 상인(Merchant)과 머큐리(Mercury)가 라임이 비슷하다는 걸 노린 말장난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인게임에서 상인은 배경음악에 맞춰 성악풍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실제 프레디 머큐리가 성악을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단순 말장난 말고도 오마주라고도 볼 수 있다.
- 2019년 말 인터넷 밈이 된 적이 있다.[179] 그의 생전 음원들을 짜깁기하여 괴랄한 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거의 주연은 항상 프레디 머큐리이고, 가끔 마이클 잭슨이 빌런으로 등장하는 정도. 브라이언 메이도 나오지만 음원이 없어서 말을 하지는 않는다. 2019년 말에 가장 인기있었던 밈들 중 하나였다.
- 프레디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스탠드 없는 마이크는 사실 의도치 않게 탄생한 것이다. 공연 도중 사고로 마이크가 스탠드에서 빠졌지만 프레디는 그 상태 그대로 노래를 계속했고, 이후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스탠드 없는 마이크를 일부러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1] 1964년 영국으로 이민을 가며,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2] 열흘뒤에는 미국 대표 배우 토미 리 존스가 태어났다.[3]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인 폐렴이다.[4] 참고로 위의 사진은 1986년 7월 11일 매직 투어 중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찍힌 것이다. 퀸의 마지막 투어공연이기도 하다. 프레디 머큐리를 상징하는 노란 자켓을 입고 오른손을 드는 자세이다. 공연 중 Tie Your Mother Down 라이브 영상을 잘 찾아보면 찾을수 있다. 참고로 2016년 3월에 발매된 S.H 피규어아츠에서도 이 의상이 재현되어 있다.[5] 현재 이름은 발사드(Valsad).[6] 가족이 독실한 조로아스터교이어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어차피 옮긴 학교도 성공회 소속 학교여서 잘 맞지 않는다. 성공회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한 것으로 봐서는 인도 출신인 부모님 입장에서 당시 상류 계층이었던 영국인들의 문화를 접하도록 해주고 싶어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단지 잔지바르보다는 훨씬 큰 도시인 뭄바이에서 아들을 교육시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7] 당시 공식명칭은 봄베이.[8] 저 뻐드렁니는 후에 프레디의 컴플렉스가 된다. 그의 상징이 된 콧수염을 길렀던 이유도, 바로 저 뻐드렁니와 튀어나온 입을 가리려는 것이었다.[9] 뻐드렁니를 가리키는 실제 영단어인 Bucktooth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10] 여담이지만 이 대학은 더후의 피트 타운젠드와 롤링 스톤즈의 로니 우드도 재학했다.[11] he was just the greatest[12] unique and the one-off[13] I admire John Lennon very much[14] 음원이 공개된 이 시절의 공연은 딱 한 개 있는데, 1969년 9월 9일 리버풀에서의 공연이다. 들어보면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몸담았던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아마추어틱하다. 아무래도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들이 퀸의 멤버들과 갭이 있는데다가 프레디 머큐리도 어릴 적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듯. 프레디는 이 시절에 서너 개의 밴드를 거치지만 모두 1~2년을 넘기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했다. 음악 수준도 모두 고만고만했다.[15] 참고로 이 공연은 역사적인 공연이기도 한데, 앙코르에서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무대에 올라와 함께 공연했다. 즉, '''프레디와 브라이언, 로저가 함께 공연을 한 최초의 공연'''인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앙코르의 음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음원에서 들을 수 있는 'Vagabond Outcast'이라는 곡은 프레디가 최초로 작곡한 곡 중 하나이다.[16]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년 작)에서는 크게 될 밴드라며 이런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17] 팀 스타펠은 옮겨간 'Humpy Bong'이란 밴드의 결과가 좋지 못했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고 토마스와 친구들의 모형과 디오라마를 만든 사람이다. 자신은 퀸이 잘될 것을 알고 있었고 음악을 그만둔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18] 이를테면 The Reactions나 그 이전의 Beat Unlimited 등[19] 공연이 맘에 들지 않는 날이면 "내가 너희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좀 더 너희들의 가능성을 끌어올려봐" 식으로 애정 어린 격려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20] 프레디 머큐리의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요정, 브라이언 메이를 상징하는 게자리,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의 사자자리. 참고로 별자리가 2명이라서 사자도 2마리이다. [21]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Queen은 단순히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 역할을 하는 게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성 역할로 매력있는) 게이라는 뜻이다. 이성애자들의 세계에서 여러 남자들의 사랑을 받고 그 남자들을 거느리는 매력있는 여성을 빗대어 ‘여왕벌’이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 여왕벌의 게이 버전을 Queen이라고 하는 것이다. 퀸이 데뷔 초에 ‘멤버 전체가 동성애자들’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22] 이 때문에 글램 락의 잔재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23] 성악, 오페라, 클래식, 발레 등을 즐겨보는 것이 취미였던 프레디의 영향이 컸다.[24] 1985년 자신의 솔로 앨범 "Mr.Bad Guy"의 수록곡인 "Living On My Own"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타이즈를 입었는데, 촬영장소는 다름아닌 본인의 생일파티.[25] 이 사실이 의문스럽다면 퀸의 대표곡 'We Are The Champions'의 뮤직비디오에서의 프레디 머큐리를 보면 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라이브 무대에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의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26] Carole King과 Gerry Goffin가 부른 곡이 원곡이다.[27]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필 스펙터가 키운 여성보컬그룹이다.[28] 필 스펙터가 다른 두 명의 작곡가와 공동작곡해서 로네츠에게 준 곡이다. 필 스펙터의 열렬한 팬이었던 비치 보이스도 커버한 바 있다.[29] 정확히 말하면 Larry Lurex는 프로듀서의 이름이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여러 뮤지션들을 불러 옴니버스 음반을 녹음해서 내놓았는데 좀 뻔뻔하게도 프로듀서인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여기서 프레디 머큐리는 'I Can Hear Music'과 'Goin' Back' 두 곡을 불렀다.[30] 이 때문에 전자공학도였던 존 디콘을 멤버로 영입해 전자악기를 관리시켰다.[31] 보수적인 마인드가 강한 영국에서는 양성애자인 그의 퀴어적인 행동이 언론의 가십거리였다.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인 앨런 튜링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만 보아도...[32] 이런 작사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메탈 후배들이 물려받게 된다.[33] 물론 같은 70년대라고 해서 보컬이 다 같은 건 아니다. 퀸 1집과 퀸 7집을 들어보면 보컬이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80년대 역시 초반인 퀸 8집과 후반인 퀸 12집의 보컬을 비교해보면 의외로 상당히 차이가 있다.[34] 세계 최대 음악 사이트인 allmusic.com에서 별4.5를 받았다!(5개 만점)[35] 프레디 머큐리는 몽셰라 카바예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간 적도 있었다.[36] The Great Pretender 원곡은 플래터스가 1955년에 부른 노래다. 이 때 프레디가 콧수염을 밀었다.[37] 본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는 프레디 머큐리와 몽셰라 카바예가 듀엣으로 부른 'Barcelona'였으나 당시 에이즈는 동성애자만 걸리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IOC가 부정적인 영향을 줄수있다고 주제가를 바꿔버렸다.[38] 다만 몇몇 장면은 콧수염이 그대로 있다. 없어졌다가 있었다하는 1초 단위로 바뀌는 장면.[39] 음악가로 프레디와 같이 음악작업할 정도로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프레디와 재밌는 레파토리도 있는데 퀸의 두번째 매니저 '짐 비치'가 피터에게 '퀸' 녹음실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해다줬는데 화장실이 고장난 집이였다. 때문에 프레디가 화장실 고치라고 돈을 다섯번정도 챙겨줬는데 계속해서 유흥비로 쓰고 돈 달라고 요구하니까 프레디가 빡쳐서 그 집에서 쫓아내버렸다.[40] 로저가 '퀸' 드러머 그 로저 테일러 맞다.[41] 이때는 퀸 멤버들이 공식적으로 활동을 잠시 쉬기로 다들 약속했던 때이다. '''그럼에도 로저는 달려와 주었다.''' 또한, Barcelona 작업 때도 퀸은 휴식기간이었는데, 이 때는 프레디가 수록곡 <How Can I Go On>의 베이스 연주가 필요해 퀸의 베이시스트 존 디콘에게 연락을 했고, '''존 또한 바로 달려와 작업을 해주었다.'''[42] 실제로 뮤직비디오 촬영장 영상을 보면 한쪽 안구가 누런색이다. 그만큼 병세가 심각했단 뜻이다.[43] 1985년 당시 애인 바바라 발렌틴과 동거했을 때 어느 날 프레디가 면도를 하다가 손에 상처가 나 피가 났었는데 바바라가 붕대를 가져와 프레디에게 가자 프레디가 제발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쳤었다고 한다. (그때 프레디의 친구 두 명이 에이즈로 죽었을 때였고 프레디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한다.) 아마 그 때부터 에이즈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44] 다만 몽셰라 카바예와의 라이브는 퍼포먼스만 하였고 노래는 립싱크였다.[45] '씨발, 하지 뭐' 정도의 뉘앙스.[46]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듯한 가사의 이 곡을 프레디 역대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로 뽑는 팬들도 많다.[47] 이를 다시 표현하면 1989-1990년 프레디의 인터뷰를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 된다! 1990년 프레디의 인터뷰 모습을 보고 싶다면 찾아보자.[48] 그 당시 치료가 완전 의미없던건 아니고 아주 조금 진행을 느리게할수있는 정도의 치료였다. 프레디가 음악을 위해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수있었을것이다. 프레디의 애인이였던 짐 허튼도 에이즈에 걸렸지만 꾸준하게 발전하는 치료법과 휴식으로 2010년까지 살았고 암으로 죽었다.[49] 현재는 HIV가 프레디 사망 당시처럼 전혀 치료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6년 데이비드 호 박사가 다양한 항바이러스제와 각종 칵테일 요법으로 체내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약제와 치료법을 개발한 이후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같은 HIV 감염자인 전 NBA 선수였던 매직 존슨이 아직 어떠한 병색이 나타나지 않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니 혹여 주변에 HIV 감염자가 있다면 치료를 받도록 용기를 복돋아주어야 한다. 2018년 기준 하루 한알의 약으로 효과적으로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치료법까지 개발되어 치료만 제대로 받는다면 에이즈 증상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치료법 항목 참조.[50] 정확히는 '''하루 뒤, 그것도 더 정확히는 24시간도 채 안 되어서.'''[51]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후반까지 퀸의 대표곡들은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들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대표곡이자 프레디의 인생곡인 보헤미안 랩소디마저도 1989년까지 한국에서 금지곡이었고 방송금지에서도 해금된 것은 프레디가 죽고 나서 3년이 지난 1994년이었다. 그러니 퀸의 골수팬이 아닌 이상 프레디의 부고를 접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 이 당시 한국 팝계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프레디의 사망 원인이었던 에이즈에 대한 당시 국내의 보수적 인식 수준을 감안한다면 프레디의 죽음을 알리기가 더더욱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52] 그러나 퀸을 좋아하는 국내 뮤지션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문세는 그가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소식을 전하며 침통한 감정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고 ‘이치현과 벗님들’ 의 리더였던 이치현은 운전 도중 라디오를 통해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너무 놀라서 사고를 낼 뻔 했었다고 한다. 확실하진 않지만, 배철수는 자신의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한 회차를 퀸 노래만 계속 틀어주었다고 한다.[53] 사실 존 디콘이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록 스타 생활도 프레디가 있어서 즐길 만 했는데, 이젠 그런 이유가 되어줄 사람도 없으니...[54] 심지어 영국 언론과 국내 여론조차도 프레디를 조장하겠다는 프레디 부모의 행동을 비난했을 정도였다.[55]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화장과 매장을 금기시하며 특히 화장은 불(정확히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하루에 5번 이루어지는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해당 종교의 특성상 극도로 금기시된다. 그런 상황에서 화장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프레디 머큐리의 세속적이었던 생전 모습을 존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56] 팬들 사이에서 확실시 되는 이유가 프레디와 프레디의 부모님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때문인데, 앞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불을 매우 신성시여겨 화장을 금기시 하기 때문에 차라리 매장을 했을 것이라는 점과, 애초에 정말로 프레디의 묘비가 아닌 동명이인의 묘비였다면 퀸 측에서 프레디의 무덤이 아니므로 추모 방문을 그만두라고 (반달의 우려와 진짜 유족에게 가는 피해 때문에) 확실히 못을 박았겠지만 아무 말을 안 하고 말아버리는 점 역시 진짜 프레디 머큐리의 묘비라는 추측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57] #[58] 묘비에 쓰여진 불어는 'pour etre toujours pres de toi avec tout mon amour' 이며 '내 모든 사랑과 함께 당신과 항상 가까이 있을수 있도록'이라는 뜻이다. 해당 글귀의 아래에는 M.이라고만 적혀있으며 이 M은 메리 오스틴일 것이라고 팬들은 추측했다.[59] 이는 일부 올드팬들이 주장하는 의견이기도 하다.[60] 원폴 닷컴에서 뽑은 역대 록 최고의 신(Ultimate Rock God) 1위에 올랐다. 2위는 엘비스 프레슬리[61] 로저의 말을 빌리자면 '''"양이 시끄럽게 우는 것 같았다"'''정도의 목소리였다.[62] 종합해 보면, 프레디는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괴수인 셈이다.[63] 정확히는 1979년 크레이지 투어부터 1982년 핫스페이스 투어 중반까지.[64]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몬트리올 라이브 역시 1981년도에 진행된 것이다.[65] 사실 이때도 남미에서 Hot Space 공연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불명이나 취소되었다.[66] 그런데 9월 5일 런던 공연에서는 Under Pressure의 '''3옥타브 라(A5)''' 파트를 '''4옥타브 파(F6)'''로 올려서 불렀다.[67] 선시티 라이브나 슈가르트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68] Sun City, 현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에 있는 대규모 콘도, 카지노 시설이다. 남아공 법에서 카지노를 영업하면 걸리지만, 반투스탄인 보푸사츠와나에서는 남아공 법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이용해 법을 우회하여 만들어졌다. 이 시설을 이용해 백인들한테 돈을 어미무시하게 벌었다고 한다.[69] 참고로 공연은 썬 씨티 내부의 공연장인 슈퍼 보올에서 진행했다. 실내 공연장치곤 규모가 커서 현재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공연을 가는 곳이다.[70] 하지만 그때 당시의 뮤지션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하여 남아공에는 공연을 하러 가지 않았는데, 퀸은 그걸 무시하고 더군다나 아파르트헤이트의 최대 병크인 반투스탄까지 가서 공연을 했으니... 그리하여 언론에서 인종차별 밴드라고 지탄을 받게 되었다.[71] 단, 10월 7일의 공연 도중, 4번째 곡 Somebody to Love를 부르다 목에 생긴 혹으로 인해(이 혹 때문에 그 전설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없없을 뻔 했다.)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프레디가 백스테이지로 뛰쳐나가고 조명이 전부 꺼진 후에, 프레디가 나오길 기대하던 관중들이 발구르기로 쿵쿵따 리듬을 만들며 We Will Rock You를 떼창하던 도중, 썬시티 라이브 기획자인 Hazel Feldman이 라이브가 취소되었다고 관중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때 프레디는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이 공연을 제외하면 총 8일간의 공연이다.[72] 슬프게도 10월 19일 공연만 음원자료가 남아 있다. 19일 컨디션도 좋았는데 이 전 9개의 공연은 자료가 없다는 게 참 아쉬울 따름이다.[73] 안타깝게도 고음질 라이브는 없다. 다른 노래는 다 고음질로 복원해놓고 Somebody to Love와 몇 곡은 쏙 빼놓았다.[74] 여담으로 퀸은 일본만 가면 Sheer Heart Attack 투어와 대부분 일본 투어의 첫 날을 제외하면 컨디션이 늘 안좋았다. 하지만 이 때는 퀸의 마지막 일본 공연인 오사카 공연만 제외하면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 도쿄에서는 3번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 가장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지막 날 공연만 영상자료가 남아있다.(물론 도쿄 공연 중 에서지, 실제로는 최악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다른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꽤나 좋은 컨디션이다.)[75] 라이브 AID는 사실 프레디가 의사와 상담한 결과 프레디의 목에서 혹이 발견돼서 의사조차 공연을 말렸으나, 프레디가 강행한 것이다. 그런데도 목에 혹 난 상태로 '''3옥타브 도(C5)'''를 지르는 프레디는 그야말로 괴수가 따로 없다.[76]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We are the champions 후렴 부분 고음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라이브를 제외하면 다 낮춰불렀다, RADIO GAGA 역시 가사 중 "You had your time" 을 거의 모든 라이브서 낮춰부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좋은 컨디션이였음을 알 수 있다.[77] 그나마 근접한 공연이 리오 1차, 도쿄 1,2차 공연 정도다.[78] 7월 2일의 취리히 공연과 7월 12일의 웸블리 공연 때 컨디션이 굉장히 안좋았다. 그래도 84년도의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79] RADIO GAGA나 프레디의 에롭타임이 그렇다.[80] 이렇다보니 목소리를 덧붙이는 오버더빙이 많은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실제 공연에서는 삑사리나 갈라짐이 거의 모든 곡에서 나왔다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관객과의 에롭타임에 이어서 부른 under pressure는 레전드로 남게되었고 (under pressure는 프레디가 컨디션이 안좋아도 잘 소화하는 노래 중 하나였다.) 의외로 낮춰부르긴 했지만 보헤미안 랩소디서 삑사리가 없이 잘불렀다. [81] Bohemian Rhapsody (Queen-Live In Newcastle: 12/4/1979) 3분 21초 3옥타브 도 라이브 영상.[82] 컨디션이 매우 좋은 공연에서도 원곡의 3옥타브대의 고음을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처리하는 편인데, 못 낼 것 같아서 못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컨디션 조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83] 컨디션 조절을 할 필요가 없을 경우엔 이 정도이다. 저 애드립을 빼면 죄다 립싱크를 한 날이었기 때문.[84]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았던 웸블리 2번째 날 공연에서도 '''3옥타브 라#(A#5)'''의 엄청난 고음을 냈다.[85] 이는 1986년 웸블리 공연 첫째날 밤(7/11)과 이튿날 밤(7/12)의 차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날도 완전한 컨디션은 아니라 목소리 갈라짐이 꽤 있었지만 둘째날처럼 탈진된 목소리도 아니였고 파워풀한 고음을 뿜어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86] 이는 jazz에 수록된 Dead on time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속도가 거의 랩 수준인데도 발음이 완벽하다.[87] 대표적으로 Love of my life, 프레디 머큐리의 감성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곡으로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88] Hot Space에 수록된 몇몇 곡들.[89] 솔로 활동곡.[90] Innuendo에 수록된 Don't try so hard에서는 70년대의 보컬이 되돌아왔다고 봐도 될정도의 미성을 내며, A Kind of Magic에 수록된 Gimme the prize에서는 굉장히 강한 하드락 분위기에 맞는 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91] Under Pressure 등.[92] One Vision에서의 '''3옥타브 솔(G5)'''부분, It's Late에서의 '''4옥타브 미(E6)'''부분 등.[93] 흑인 팝가수로 항상 대머리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걸로 유명한데 프레디 추모공연에선 레게 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히트곡으론 Crazy가 있다.[94] <All dead, all dead>, <Somebody to love>, <Don't try suicide>, <Bijou>[95] <All god's people>[96] <It's Late>1977년 BBC Session 라이브.[97] 공연 중 최고음은 1979년 12월 6일 공연 <Get Down, Make Love>의 '''4옥타브 파#(F#6)'''이다.[98] 프레디 머큐리를 최고의 락 프런트 맨 2위로 선정하면서 남긴 코멘트. 록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을 꼽을 때 절대로 순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1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출처[99]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로, 핑크 플로이드의 벽에서 주인공 핑크를 연기한 사람이기도 하며, 사실 이 사람도 그리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엄연한 뮤지션이다. 아일랜드의 펑크 밴드 Boomtown Rats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었다.[100] 엘튼 존도 무대 위에서 날뛰는 거 하난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프론트맨인데도 프레디에게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101] 실제로 퀸은 Hot Space을 기점으로 나름의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102] 이 마이크의 유래는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프레디의 퀸 이전 소속 아마추어 밴드였던 Wreckage 공연에서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분리하던 중 스탠드가 부서지며 마이크에 막대기가 달린 채 분리되어 버렸고, 프레디는 이 새 유형의 마이크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공연들에서 계속 쓰게 된 것이다.[103] 이는 후대에도 전승되어 후배 밴드인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겸 프론트맨 액슬 로즈가 받침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마이크 스탠드를 쓰기도 했다.[104] 유서 중 해당 부분: "나는 당신들 누구도 속이기 싫다. 내가 공연할 때 100% 즐기는 척하며 속이는 건 (뮤지션으로서) 최악의 범죄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난 그것이 억지로 가야만 하는 직장 출근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I can't fool you, any one of you. The worst crime I can think of would be to rip people off by faking it and pretending as if I'm having 100% fun. Sometimes I feel as if I should have a punch-in time clock before I walk out on stage."[105] 이어지는 곡은 Hammer To Fall[106] 통상적으로는 Ay-oh,에-오라고 표기되며 부틀렉 등에선 Day-oh로 표기가 되곤 한다.[107] 위 영상의 0:26~2:15초 부분 참조.[108] 이 곡은 독일의 호텔에서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109] 피아노에 앉은 뒤 약 5분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110] 이 노래를 구상한 것은 1960년대, 즉 20대 초반부터라고 한다.[111]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프레디의 노래 중 가장 대중적이고 단순한 노래로 꼽힌다.[112] 대표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는 매우 극적인 전개로 유명하다.[113] 후기에는 방식이 조금 달라져 80년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기타 중 무엇으로 작곡하냐는 질문에 '요즘은 머릿속으로 작곡한다'고 대답했다.[114] 대략 1974년 ~ 1979년. 프레디가 수많은 퀸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시기다.[115] 퀸의 대 히트곡 중 하나인 Radio Ga Ga도 아이디어와 시작, 그리고 진행은 로저가 했기에 크레딧은 로저의 이름으로 올라가 있으나, 후반부에 정식 발매 전에 프레디가 로저 몰래(로저는 휴가를 갔었다고 한다.) 곡을 좀 변형시켰고 로저가 그 편집본을 마음에 들어해서 낸 것이 현재의 라디오 가가이다.[116] 그렇게 싸우다보면 주변에서는 다들 '브라이언이 싸울만했네..' 라는 반응이었다고...[117]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118] 이후 인터뷰에서 프레디는 그 전자 피아노를 꺼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름을 말하는 것도 질색하는 수준의, 거의 경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전자 피아노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 망할 것"(That damn thing)이라고 그냥 뭉뚱그려 말했다.)[119] 머큐리의 절친이었던 엘튼 존은 1982년 인터뷰에서 자신과 머큐리를 비교하며, 프레디는 가창력이 있지만 공연에서 노래보다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는 반면, 자신은 피아노를 평생 연주해서 손에 익숙하기에 노래에 더 집중한다고 말한 적 있다. 즉, 피아노는 본인이 더 잘 치고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가 더 잘한다는 얘기다.[120] 정확히는 1982년 Hot Space 투어 공연부터.[121] 가령, 70년대의 공연에선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매직 투어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단 4곡뿐이었다.<In the Lap of the Gods...Revisited>, <Seven seas of Rhye>,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다만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셋리스트에서 피아노 연주곡이 점점 적어진 탓도 있다. 매직 투어에서는 위의 곡들도 포함해서 피아노 연주곡이 <Tutti Frutti>,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까지 해서 고작 여섯 곡이었다.[122] 라이브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아니라 프레디가 직접 친 이유는 스튜디오 버전의 해당 파트를 녹음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사후 공연들에선 브라이언이 프레디 파트까지 모두 연주한다.[123] 1982년 Hot space 투어의 일환으로 열린 밀턴 케인스 보울 공연에서 프레디는 이렇게 말했다."10년 전 내가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코드 3개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코드 3개뿐이다!!'''"[124] Ovation 사의 Pacemaker 12-Strings 기타.[125] 텔레캐스터는 본인 소유의 기타로 추정된다. 그런데 프레디 사후 도둑맞았다고 한다.[126] 해당 사진에는 욱일기의 백적 욱광 무늬가 그려진 티셔츠가 걸려 있는데, 본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대로 일본은 퀸이 유일하게 투어를 간 아시아 국가로서 프레디 역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티셔츠를 가지고 있어도 정황상 이상할 게 없는 셈. 2010년대에 이르러 서양권에서도 어느정도 알려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서양 국가 인물들은 욱일기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1980년대는 일제의 피해자인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욱일기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있는 편은 아니었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여 현재 욱일기의 이미지 상당수를 일장기가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 다만 200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정치계가 극우화되고 욱일기 역시 일본의 극우단체가 극우집회에서 자주 쓰게 되면서 욱일기가 일본군의 군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재발굴되어서 비판받기 시작했다.[127]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에서도 해당 티셔츠가 등장한다. 다만 영화 제작진들도 논란을 인지한 것인지, 보헤미안 렙소디의 국내 상영판에서는 욱광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장면이 CG로 처리되어 개봉되었다.[128] , , . 이 중 은 마이클이 프레디의 권유로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마무리 작업을 거쳐 공개되었다. [129]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130] Lesley-Ann Jones가 쓴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 참조.[131]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132]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건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발레의상같은 의상들을 비꼰 것이다.[133]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134] 사실 프레디 머큐리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만약 거기서 치고 받으며 싸웠다면 이기든 지든 결국 손해보는 건 잃을 게 없는 시드 비셔스가 아닌, 이미 톱스타인 프레디 머큐리쪽이다.[135] 언론들의 질문 공세에 자기는 그냥 자신일 뿐이라고 일갈했었다.[136] 남녀 상관없이 애인 관계가 복잡했던만큼 바람 핀 애인들도 많다. 프레디 동성애인 중 한명인 '토니 바스틴'이 프레디가 미국투어를 하고 있을때 바람피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를 미국으로 오라며 비행기표를 보냈고 도착해서 프레디를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한뒤 바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137]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는 그 아들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138]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139] 짐 허튼은 아일랜드계이다. 아일랜드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9명이다.[140] 쫓겨났지만 자신보다 메리를 더 믿은 프레디나 메리를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고 상속받은 50만 달러로 아일랜드로 돌아가 편히 살다가 사망했다.[141] 메리는 프레디 전재산의 절반과 모든 저작권, 집 등을 상속받았다.[142] 로저 테일러가 책에 대해서 '짐 허튼을 잘 알고 출판계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이 책을 반대하진 않지만, 프레디라면 이런 책의 출판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143] 돈을 받고 사생활을 언론에 넘긴다든가 하는 식으로...[144] 퀸 멤버 중 키가 제일 작다. 공식적으론 로저가 179cm, 존이 180cm, 브라이언이 188cm다. 근데 사진만 보면 로저나 디콘과 비슷하거나 커 보이는 경우가 많은 편.[145]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설정인 듯 하다.[146] 정말 나타난건지 환상인지는 의문.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듯 하다.[147]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큘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148] 프레디가 웃을때 6개의 이빨이 보일정도로 뻐드렁니가 심했는데 뒷이빨들이 다른 이빨들을 앞쪽으로 내보낸것인데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선 프레디의 성부는 바리톤이였지만 4옥타브에 달했던 음역대는 뻐드렁니때문에 성부를 빠르게 움직일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149] 정확히는 1987년 The great pretender 커버 당시 밀었는데 위선자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밀었다 한다.[150] 뭐 이 노래 대신 선정된 노래도 나쁘진 않았다.[151] 첫 번째 솔로 앨범도 자신의 애완 고양이에게 바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의 애묘인들까지 포함해서.[152] 이곳에는 퀸의 옛 녹음 스튜디오(현재의 퀸 박물관)가 있다. 현재 퀸의 매니저 짐 비치(Jim Beach)가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153] 딥 퍼플의 명곡 Smoke on the water에 나오는 그 장소가 맞다. 딥퍼플 보컬 이언 길런은 영어식으로 몬트럭스라고 발음한다.[154] 위에서 세번째 사진 속 모습.[155] 다만 브라이언 메이는 이 동상에 대해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프레디는 단순히 기념동상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었다고.[156] 다만 평소에 원음으로 부르던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파트는 낮춰불렀다.[157] Crazy 투어때부터 Hot Space 투어 중반까지 전성기였다.[158] 로저 테일러는 중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괜찮은 목상태를 유지했고, 선천적으로 높은 성부에 창법 상의 이점이 더해져 고음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목소리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파워는 프레디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만.[159] 1984년의 남아프리카 투어 당시 녹음되어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공연인 Sun City 에서의 공연은 몹시 유려한 가창을 들려준다![160] 공연마다 20곡을 넘게 연주했고 그나마 쉰다해도 이동하고 2~4일만에 공연을 다시진행해 때마다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진행했다.[161] 투어 중반을 넘어가면서 피로도가 극에 달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지, 에이즈나 질병의 조짐이 보였다 판단할 만큼 극단적인 건강상태는 아니었다.[162] 이때의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는 컨디션에 비하면 정말 잘 부른 편. 사실 흉성의 완성도와 활용도가 높아진 매직 투어의 프레디는 이 곡과 Tear It Up 등을 이전 투어에서보다 수월하게 소화해낸 경우가 많다.[163] 이게 어떻게 보면 참 웃긴 이야기다. 둘 다 같은 성소수자이면서도 롭 헬포드는 자신은 마초형 성소수자라서 나름 가죽옷을 걸치면서 터프한 이미지를 연출한 반면 프레디는 발레복 등 여성형으로 화려하게 꾸몄던 것을 조롱했던 것이다. 후반부에선 프레디 역시 가죽옷을 걸쳤을 뿐만 아니라 콧수염 기르고 무대에서 수시로 웃통을 벗으면서 마초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164] 현재 라미 말렉은 보헤미안 랩소디와 동일한 제작진이 제작 중인 비 지스 전기영화에서 로빈 깁 역에 고려되고 있다.[165] 정확히 말하자면 유니타드였다.[166] 그렇다고 레오타드를 그만 입은 것은 아니였다. 1978년 영국 공연, 북미 재즈 투어 일부 공연, 1979년 일본 공연이나 몇몇 크레이지 투어 공연에서도 공연 후반에 반짝이 레오타드를 입었다.[167] 빨강과 검정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168] 12월 4일 뉴캐슬 공연 때는 흰색이었다.[169] 바지가 빨강일 때는 파랑, 검정일때는 빨강 무릎 보호대를 찼었다 다만 리버풀 12월 7일 공연에서는 리버풀과 에버튼 축구팬들을 위해 두색의 무릎 보호대를 각각 두 개 다 찼다.[170] 가끔 맨발에 핫팬츠도 입었었는데 영상으로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연 후반부와 81 몬트리올 공연 후반부에서 볼 수있다.[171] 나시티의 디자인이나 백바지는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 입던 것들과 다르긴 하다.[172] 주로 노란 재킷이였으나 완전 하얀색이거나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경우도 있었다.[173] 노란줄이거나 하얀줄인 경우도 있다.[174] 물론 공식석상에선 로우탑도 많이 신긴했다. 오니츠카타이거나 아디다스 삼바 등을 신었으나 공연에서는 대부분 하이탑을 신었다.[175] 공연에서 신었던 레슬링화는 나이키 블레이저 미드 '77과 디자인이 비슷했다.[176] 다만 1985년 호주는 예외였다.[177] 참고로 스포츠에서도 이 영화의 흥행으로 프레디 머큐리 패러디가 등장했다. KBL 올스타전에서 전태풍이 콧수염에 민소매를 입고 등장해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V-리그 올스타전에서도 팬 최다 득표자 서재덕 역시 덕큐리라는 별명으로 출전, 민소매를 입고 마이크까지 들고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178] 1980년 12월 9일 런던 공연부터 12월 18일 뮌헨 공연까지만 불렀는데, 1980년 12월 8일 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존 레논을 추모하기 위함인 듯하다.[179] 자고로 퀸과 프레디 머큐리가 다시 화제가 된 것은 1년 전인 2018년 말 보헤미안 랩소디의 개봉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