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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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영어로는 David Hockney[1]
1. 소개
1937년 7월 9일생으로 앨런 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출신의 팝아트 화가다. 요크셔의 브래드포드에서 출생하여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이었던 알렌 보우니스의 저서에 따르면 그가 예술 평의회의 의뢰로 회화 작품을 물색하던 중 21살의 신입생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눈여겨 보고 구입을 원했으나 보수적인 평의회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호크니는 3년 후 금색 재킷과 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하고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이후 예술평의회는 그의 추상화를 구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래의 61년 작, "서로 껴안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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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데이비드 호크니는 화풍을 바꾸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도전했는데 화가로서의 작품 이외에도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사진작가, 무대 디자인, 영화제작자 등으로서도 이름을 날린다.
한 대상을 여러 번의 사진을 찍은 후 콜라주화 하여 마치 모자이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독특한 화법은 호크니의 전형적인 트레이드 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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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동안 포토콜라주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이다가 회화만이 지닌 관찰의 중요성에 다시 매료되어 회화로서 회귀한다. 그리고 건조한 풍경 속에서 물의 운동만큼은 생생하게 묘사를 하는 특징 때문에 호크니는 "수영장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의 작품들 특징 중 하나는 청년이 나체로 수영을 하거나 샤워를 하는 모습을 관객이 바라보는 관음적인 묘사가 있다는 점인데 호크니 자신이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호크니는 자신의 성적 성향 때문에 당시 보수적이었던 영국을 벗어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 뒤 이러한 자신의 성향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이주한 미국에서도 당시 동성애는 불법이었는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분류되어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해고당하고 군인들이 강제 전역 당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1960년대부터 각종 시위와 목소리가 높아져 동성애자들의 사회 권리가 주장되어 불법이 폐지되고 동성애자가 시의회 의원에도 당선되는 등 여러가지 인권 운동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동성애자 정치가가 암살 당하는 등 시대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크니는 별 일 없이 무사히 잘 지냈는데 하필이면 가장 개방적인 도시에 거주하는 바람에 본인도 미국에서도 불법이라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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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1972). 이 작품은 2018년 11월 16일 뉴욕 경매에서 9,030만 달러(약1,018억원)에 낙찰되어 현존 작가 작품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데이비드 호크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2] 그림 속 서 있는 남성은 호크니의 11살 연하 애인이었던 피터 슐레진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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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릴 때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는데 40대가 될 무렵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2013년엔 그의 파트너와 호크니의 조수인 23세의 도미닉이 브리들링튼 집에서 약물파티를 하는데 도미닉이 코카인과 엑스터시 등을 흡입한 상태에서 강산성 세제를 복용하는 바람에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현장에 있던 호크니와 파트너가 경찰조사를 받게 되지만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도중에 호크니는 잠들고 있어서 결국 사건은 사고사로 처리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호크니는 집을 처분하고 그 곳에 연관된 모든 인연들을 끊게 된다.
미술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가 편찬한 저서인 "명화의 비밀" "그림의 역사" "다시 그림이다"가 국내에 정식 번역되었다.
2019년 8월 8일부터 "호크니"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다. 다섯개 극장 상영 예정이었다가 8월 7일부로 전국 총 23개 극장으로 늘었다. (서울13, 경기2, 부산 1, 창원1, 대전1, 강원 3, 대구 1, 광주 1)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특별전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