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리노부

 

徳川頼宣
1602년 4월 28일 ~ 1671년 2월 19일
고산케 중 하나인 기슈 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초대 당주이자 기슈번(紀州藩)[1]의 초대 번주
1602년 4월 28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으로 후시미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만노카타(お万の方)[2]. 아명은 쵸후쿠마루(長福丸)
1603년 2살의 나이에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부터 히타치국(常陸国) 미토성(水戸城) 20만석의 영지를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영지로 가지 않고, 아버지 이에야스 슬하에서 지냈다.
1606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교토로 가서 겐푸쿠[3]를 치른다.
1609년 가토 기요마사의 딸 야소히메(八十姫)와 약혼을 하고, 동년(同年)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50만석의 슨푸번(駿府藩)으로 전봉(転封)[4] 한다.
1611년 아버지 이에야스가 교토 니조성(二条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접견 했을때, 형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와 함께 인질로써 가토 기요마사에게 잠시 맡겨 졌다. 이후 형 요시나오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가서 히데요리를 접견했다.
1614년 오사카 전투 - 겨울의 전투에 첫 출진해서 텐노지(天王寺) 부근에 포진했다. 이듬해 오사카 전투 - 여름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1617년 약혼자인 야소히메(八十姫)와 혼인해 정실(正室)로 삼았다.
1619년 기이국(紀伊国) 와카야마(和歌山) 55만5천석으로 전봉(転封) 된다. 영지로 부임 후 거성 와카야마성(和歌山城)을 개축하고 영지 내의 마을등을 정비한다.
1651년 경안의 변(慶安の変)[5]이 일어나고, 주동자인 유이 쇼세츠(由井正雪)가 요리노부의 인장문서를 위조하는 일이 일어나 막부로부터 모반을 의심 받아 에도의 저택에 머물며, 영지인 기슈(紀州)에 10년동안 돌아가지 못한다.
1667년 측실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도쿠가와 미츠사다에게 번주(藩主)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隠居)에 들어간다.
1671년에 사망한다. 향년 70세
[image]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에 첫등장.

[1] 혹은 와카야마번(和歌山藩)[2] 도쿠가와 요리후사와는 어머니가 같다[3] 元服 - 일종의 성인식[4] 영지 이동[5] 도쿠가와 이에츠나시절에 일어난 역모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