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일본국 태정대신
[image] 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とく(がわ(いえ(やす
도쿠가와 이에야스
'''
'''출생'''
1543년 1월 31일
미카와국 오카자키
(現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사망'''
1616년 6월 1일 (74세)
스루가국 슨푸
(現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묘소'''
구노산 도쇼구(久能山 東照宮)
→ 닛코 도쇼구(日光 東照宮)[1]
'''재임'''
1549년 4월 3일 ~ 1605년 4월 16일
'''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1603년 3월 24일 ~ 1605년 4월 16일
'''오고쇼'''
1605년 4월 16일 ~ 1616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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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1543 ~ 1556
마츠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
1556 ~ 1557
마쓰다이라 모토노부(松平元信)
1557 ~ 1563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1563 ~ 1566
마츠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
'''신호'''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
'''신체'''
159cm, 70kg
'''부모'''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어머니 오다이노카타(於大の方)
'''형제'''
이복동생 마츠다이라 이에모토(松平家元)
이복동생 나이토 노부나리(内藤信成)
이복동생 쇼안 에사이(樵臆恵最)
이복여동생 이치바히메(市場姫)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康元)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야스토시(松平康俊)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定勝)
'''부인'''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
계실 아사히히메(朝日姫)
측실 20명
'''자녀'''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장녀 카메히(亀姫)
차남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차녀 도쿠히메(督姫)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3녀 쇼세이인(正清院)
5남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吉)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
7남 마츠다이라 마츠치요(松平松千代)
8남 마츠다이라 센치요(松平仙千代)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徳川頼房) 등

1. 개요
2. 생애
2.1. 고난의 전반생
2.2. 미카와 잇코 신도 반란(三河一向一揆)
2.3. 세력 확장
2.6. 막부의 성립과 오고쇼
3. 인물됨과 일화
3.2. 기다림의 달인
3.3. 감정 조절의 달인
3.4. 새해 첫 꿈
3.5. 취미
3.6. 의외의 성급함
3.7. 막장 부모의 효자 노릇
3.8. 여자 관계
3.9. 카게무샤설
3.10. 주술과의 관계
3.11. 식성
4. 평가
4.1. 근현대의 평가
4.2. 한국에서의 평가
4.3. 정치가로서
4.4. 군 지휘관으로서
4.5. 총체적 평가
5. 가족관계
6. 외모
7. 유훈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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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江戶幕府), 혹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초대 쇼군. 일본 전국시대 최종 천하인.
전국시대 미카와 지역의 영주였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안에 들어가는 등의 일을 거치며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오다 사후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전국시대를 종식시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을 일으킬 때 조용히 몸을 사리다가 그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상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 지금의 도쿄에도를 개척하여 에도 막부를 만들어 에도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문학의 영역에서 인내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 인고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로 해석되는 편이다. 또한 '''간토너구리(関東の狸)'''란 별명이 있으며, 관련된 창작물에서 종종 너구리로 비유된다.[2]

2. 생애



2.1. 고난의 전반생


원래는 '마츠다이라(松平)'성을 사용했으며, 기반이 되는 지역은 미카와국 오카자키(지금의 아이치현 동부의 오카자키시. 나고야시보다 조금 더 남동쪽에 있는 중핵시)이다. 아명은 타케치요(竹千代, 마츠다이라 가문의 후계자에게 대대로 주는 아명).
관례를 올리면서 받은 이름은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松平次郎三郎元信).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 노부나가의 아버지)에서 한 글자씩 따 왔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원래 이마가와와 오다 사이에 낀 약소한 세력이었으며, 미카와를 다스리는 것은 마츠다이라 가문이라기보다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놓인 형편이었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이마가와 쪽 심기를 의식해서인지 노부(信)를 빼고 오다를 상대로 분전한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淸康)로부터 야스(康)를 따와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모토야스(松平藏人佐元康)로 개명한다. 후에 이마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모토(元)도 빼고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이에야스(松平藏人佐家康)로 개명한다.[3] 특히 이름을 여러 번 바꿨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야스(康)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거나 등의 이유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유약하던 아버지에 비해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는 미카와 일대에서 이름난 맹장이었고, 훗날 이에야스가 독립하였을 때 가신들과 영민들도 조부와 비견을 많이 했다.[4]
타케치요 시절에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던 중에 새 외가인 도다 일족이 일행을 오다 가에 팔아넘겨 오다의 인질이 되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덕에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후 이마가와군과 벌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 노부히로와 맞교환되며 이마가와의 인질이 되었다.
대망 등 소설에서 이에야스가 인질 시절에 이마가와에게 학대받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학대설은 역사적인 출처가 없으며 자신의 조카인 세나히메를 시집 보내고, 이마가와 가문의 가장 유력한 책사인 타이겐 셋사이를 가정교사로 붙였다는 설까지도 있을 정도로 실제로는 꽤 대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5] 그러나 이마가와는 이에야스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슨푸에 계속 잡아두고 미카와에는 자기 가신을 보내서 대신 지배하게 했다.마츠다이라 가문은 이에야스의 조부 키요야스 시절에 일시적으로 미카와를 통일하긴 했지만 키요야스가 오다 측의 모리야마 성을 공략하던 중 가신에게 암살당하면서 미카와는 예전의 사분오열 상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숙부에게 추방당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원조를 받아 다시 오카자키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키요야스 시절의 세력을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오다 노부히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이마가와의 지원을 받아 겨우 세력을 보존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마츠다이라 가는 이마가와의 가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진 것도 주종관계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미카와 진출을 위해 마츠다이라 종가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나 마츠다이라의 입장에서도 이마가와의 비호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으므로 손해보는 관계는 아니었다. 요시모토의 입장에서 보면 마츠다이라 종가는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미카와 일부 지역에 세력을 가진 호족일 뿐인데, 그 가문의 후계자를 일문으로 들였으니 제법 파격적인 대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마츠다이라 가문이 요시모토에게서 입은 은혜가 적지 않음에도 요시모토가 죽자마자 관계를 끊고 독립한 것이 도의적으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해석(특히 이마가와의 입장에서만 서술한)에 불과하다. 달리 보면 이마가와와는 관계를 오래 맺었던 것도 아니고[6] 원래부터 마츠다이라 가는 엄연한 독립세력이라 가신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에야스를 데려간 건 이미가와 측에서 보면 교육도 시켜주고 결혼도 시켜줬으니 은혜를 입혀주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마츠다이라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데려간 시점에서 이미 인질이며 나이가 어려도 미카와를 다스려야 하는 것은 마츠다이라 가의 핏줄인데 그 유일한 자손을 데려간 것만 해도 충분히 문제다.[7] 그리고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그렇게 쉽게 가버린 이상 힘이 전부인 전국 시대에서 자기 보신을 스스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시당초 그 시절에 배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반대로 그렇게까지 이마가와 가에서 잘 대해 줬다고 하면 왜 마츠다이라 이에야스는 요시모토가 죽은 시점에서 그렇게 빨리 배신을 했을지 의문이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이마가와 가는 당시 전국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데 말이다.[8] 그리고 우지자네(요시모토의 아들)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9]
그러나 위와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견이나 소설에서의 묘사는 어디까지나 허구일뿐이고, 실제로 그 당시의 기록 및 드러난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파악했을때는 이에야스가 배신을 한 것이 맞다는 게 일본사학계의 정설이다.[10] 요시모토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에도시대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신군전설의 부속물인것이 크다.[11] 실제로 이에야스가 볼모로 잡혀있고 인질로 잡혀있다곤 해도,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나기 1년전 인질시절에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단에게 가법을 만들어서 공표한 적도 있고, 그 가법에 나(이에야스)의 명령에 불복한다면 세키구치 치카나가, 아시나 모토나가에게 읍소해보라고 한 내용을 보면 소설등의 묘사와는 다르게 이에야스가 인질인 시절에도 오카자키와의 주종관계는 여전히 성립하고 있었으나 그 가신단에 대한 장악력이 부족하였고, 그 것을 이마가와 가문이 오히려 후계자입장에서 이에야스의 권력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공격을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국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를 기습하여 목을 쳤고, 이마가와 군에 종군하여 쏠쏠한 군공을 세웠던 이에야스도 급히 퇴각하여 오카자키에 입성해 혼란을 틈타 사실상 이마가와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후지나미나와테(현 아이치 현 도요하시 시 일대)전투 등을 통해서 미카와를 흡수하면서 자립,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이른바 기요스 동맹)을 맺음으로 이마가와의 종속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미노 국, 이세 국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확장해갔고, 이에야스는 영지 내의 잇코 종도의 반란을 진압해가며 착실히 세력을 키웠다.

2.2. 미카와 잇코 신도 반란(三河一向一揆)


어린 시절의 인질 시절에 이은 제2의 고난으로 이때는 이에야스의 목숨조차 위험했다.
혼쇼 사를 거점으로 하는 승려 쿠우세이가 격문을 날려서 일향종(一向宗) 신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것. 딱히 이에야스가 일향종을 박해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 미카와 서쪽은 일향종, 동쪽은 조동종(曹洞宗)이 번성했는데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통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최종적인 목적은 이에야스에게서 기득권을 인정받거나 혹은 이에야스를 죽이고 친 일향종 성향의 다이묘를 옹립하는 것이었던 셈. 직접적인 계기는 불명이지만 이 경우에는 원인이 명확하므로 중요하지는 않다.
실은 이전까지 지배하던 이마가와 가는 일향종의 사찰에는 세금을 면세하고 지역 자치를 인정했다. 그런데 독립에 불타던 이에야스는 병량을 비축하기 위해 절에도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미카와 잇코잇키의 원인이 되었다.
일향종은 꽤 번성했으므로 마츠다이라 가의 가신 중에서도 신도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츠다이라 가가 탄생한 이후[12]로 계속 마츠다이라가를 섬겨온 사카이 가에서도 배신자가 나올 정도였다. 후에 이에야스의 정치적 상담역이었던 혼다 마사노부도 이에야스를 배신했다.
당시 혼다 가나 사카이 가 등의 유력한 일족들도 둘로 갈라져서 싸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분가이면서 종가를 없애고 그 자리를 빼앗을 궁리만 했던 사쿠라이 마츠다이라 가문도 여기에 참여. 그 밖에도 이마가와 가를 버린 이에야스에게 원한이 있던 이마가와 가의 잔당도 합세하여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오카자키성까지 적병이 몰아닥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일족 대부분이 배신을 했음에도 혼자서 개종까지 하면서 이에야스의 곁을 지킨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바로 혼다 타다카츠로 타다카츠는 이때 무공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받아서 고속 출세를 하게 된다. 물론 타다카츠 말고도 이에야스의 곁에 남기로 한 가신도 많았고 그중에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일향종에 투신한 아버지를 등졌으나 결국 후에 이에야스를 버리고 히데요시의 밑으로 갔다.
결국 성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버티고 직접 이에야스가 진두지휘[13]를 취하는 등의 수단으로 힘들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죽거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가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신들이 용서받았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가 관대하다고 평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집안을 떠받들던 중신들도 반수 이상이 잇키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을 전부 벌했다가는 집안이 그대로 망할 판이었고, 또 잇키에 참여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곁에 남은 가신들도 같은 핏줄이었으므로 섣불리 벌했다가는 후환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했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향종과 화평을 맺으면서 그들도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일단 화평이 맺어지고 정리가 되자 바로 약속을 깨고 영내에서 일향종을 금지했으며 혼쇼지는 불을 질러서 쿠우세이는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고 한다.[14]
한편 이 미카와 잇코 잇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 이 일을 계기로 영내의 반대파를 싹 모아서 숙청하고 또 가신단 내부의 결속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다이묘들은 봉건군주에 가까웠기 때문에 무엇을 할 때도 가신들의 반대가 있으면 그것을 억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경우 가신들이 한 번 반역을 했다가 용서받게 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반대의견을 내기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또 영내를 정리해야 다른 곳도 노려볼 수 있으므로 미카와 영내에서 큰 세력을 떨치던 일향종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2.3. 세력 확장


그리하여 1566년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 이때 조정에게서 종오위하(従五位下) 미카와노카미(三河守)로 서임받았고, 도쿠가와 씨(德川氏)로 개성하면서 그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徳川次郎三郎家康)가 되었다. 본래 마츠다이라 씨(松平氏)는 떠돌이 중이 미카와 국 마츠다이라 마을에 정착하며 시작되었다고 하는 호족 출신으로 아무래도 정통성이나 가문의 권위가 좋지 않았는데, 미카와 국을 통일한 참에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권위를 가진 족보를 인정받아 '''갈아탄''' 것이다. 이때부터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 씨(新田氏)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마치 진짜 닛타 씨의 후손인 것처럼 행세했기에, 후일 닛타 씨 출신인 한 승려가 자신의 부하에게 굽신거리자 '같은 닛타 씨인데 눈뜨고 못보겠네. 우리 집안이 걔보다 명문인데 왜 그렇게 저자세로 구니?'하고 야단을 치기도(...)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노려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다케다 신겐과 연합, 이마가와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분할하여 도토미(遠江)는 마츠다이라 가문, 스루가(駿河)는 다케다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1568).[15] 이때 이에야스는 거성을 도토미의 하마마츠로 옮긴다.(1570)
1570년 노부나가가 아사쿠라를 칠 때 종군하였으며 아자이의 배반으로 발생한 가네가사키 전투, 아자이와의 결전이었던 아네가와 전투에도 모두 참여하였다.
오다 가문이 아자이와의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1572년,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오다 공격을 결심하고 동해도(도카이도)로 진격하였다. 이에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맞서지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겐에 맞서는 길을 택했고, 다케다보다 수가 적으면서(1만 1천 명 대 2만 7천 명)도 다수 대 소수에 유리한 학익진으로 도전했는데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종심 깊은 어린진으로 대응한 다케다 군에 크게 패배하였다. (전사자 2천 명 대 2백 명) 오다측의 대장이었던 히라테 히로히데[16]는 전사하였고, 도쿠가와 측은 도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 등의 유력 가신을 잃고 패주하였다.(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것은 이에야스가 겪은 패배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후에 이에야스는 패주해 와서 우거지상이 된 처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젊은 날의 객기, 혈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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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발린 직후의 모습.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신겐에게 패해 도망치다가 말 안장에 똥을 쌌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똥을 식량으로 가져간 볶은 된장이라고 시종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일설에는 똥을 쌌다는 지적에 당황한 이에야스가 "이게 된장이지 똥이냐? '''한번 맛을 봐라 이놈아!'''"하면서 부하인 이시카와 가즈마사에게 얼결에 자기 똥을 먹였고(...) 이것이 후일 가즈마사가 도요토미 가문으로 도주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7]
돌아와서 그는 화공을 불러 지금 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며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와신상담과 비슷한 동기인 듯. 일종의 '패전 인증샷'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 무사들이 명예를 중히 여겼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 이 그림의 정식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이지만, 흔히 '이에야스의 우거지상(しかみ像)'이라고 부른다. 현재 아이치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근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이에야스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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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 초상으로 석상까지 만든 걸로 보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하여 도망친 후에는 거성인 하마마츠성에서 농성하며 월동하고 있었는데, 이 위기는 다케다 신겐의 갑작스러운 병사와 그로 인한 전 다케다군의 철군으로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겐 사후 타케다 가를 실질적으로 계승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그해 가을에 다시 동 미카와로 진출하는 등, 다케다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는 부친의 사망 시에 도쿠가와에 붙은 나가시노 성의 오쿠다이라 일족의 재포섭에 실패하고,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1만 5천의 대군을 일으켰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참전, 이에야스도 이에 호응하였기 때문에 그 군세는 3만 8천이었다. 양군은 그해 5월 21일(태양력 6월 29일)에 미카와 국의 시타라가하라에서 회전하였다.(나가시노 전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6천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도 다케다 군을 격퇴하였다. 카츠요리는 이 패전 이후 우에스기 가와 동맹을 맺고 가문 재건에 힘썼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지속적인 공격에 가신들이 이탈하면서 결국 1582년 멸망한다.
한편 이 시기, 노부나가의 딸인 며느리 도쿠히메와, 이마가와의 조카이자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도노 간의 고부갈등으로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이 갈등은 어찌보면 당연한게 이마가와 가문의 공주로서 자라던 츠키야마도노에게 있어 도쿠히메는 자신의 삼촌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 오다 노부나가의 딸이니만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에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결혼 당시와 달리 도쿠가와는 이마가와의 영향력을 이미 벗어던진 지 오래인지라 츠키야마도노는 가문 내에서 전혀 뒷배경을 가지지 못한데 비해 도쿠히메는 기세등등한 오다의 딸이니 내전에서의 세력 다툼도,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노부나가가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해 이에야스는 이에 따랐고,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자결했다(1579). 단, 이 건에 대하여는 토쿠가와 가 내의 하마마츠파(이에야스파)와 오카자키파(노부야스파)간의 대립의 산물로 보는 시각 또는 단순한 부자 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 등이 있어서,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2.4.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6월 초,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에서 자결하였다. 노부나가 사망 당시 이에야스 또한 교토에 있었는데, 아케치의 모반을 안 직후 이에야스는 사카이에서 이가의 험준한 산을 넘는 도피행(이가고에) 끝에 미카와로 무사히 도망하였고[18] 미카와 귀환 직후에 미츠히데 토벌을 위한 군세를 편성하여 이미 오와리에 이르러 있었다. 이후 사실상의 공백지가 된 구 다케다의 영지를 흡수하였고, 간토의 패자인 호조 가와 사돈의 연을 맺으면서 도카이 지방의 패자로 등극하였다.
한편 혼노지의 변 보름 뒤에 노부나가의 부하인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를 격파하였고, 그 달 말에는 오다 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키요스 성에서 가신들(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간에 다음 당주를 정하는 회의(기요스 회의)가 열렸다. 당시 노부나가의 장성한 아들로는 2남 노부카츠, 3남 노부타카가 있었으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시키는 데 성공하여 가신 중 약간의 우위를 점했고, 이듬해에는 오다 가 가신의 필두였던 시바타 카츠이에와 전쟁이 발발, 오미 국 시즈가타케에서 하시바 군이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사후 패권에 한발 앞서게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이에 노부나가의 삼남(오다 노부타카)과 시바타 카츠이에를 지원하며 히데요시에게 적의를 표했고, 이후에는 차남인 노부카츠와 함께 히데요시에 맞서 싸워 전술 국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승리를 얻었다(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히데츠구가 이끄는 기습작전을 이에야스는 역기습으로 차단. 도요토미군을 거의 갖고놀다시피 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전술면에서는 패배했지만 정략에 능하다는 평가답게 오다 노부카츠와 화친함으로써 이에야스가 전투를 계속할 명분을 끊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으나, 결국 이에야스도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고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 성에 입조하였다(1586). 이때 이에야스는 차남인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의 인질)로 보내었고, 히데요시는 이부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어 사실상의 종속관계를 구축하였다.
1590년 2월,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가를 따르지 않는 호조를 정벌하였는데, 이때 이에야스도 종군하였다.[19] 오다와라성 공방전에서 호조는 히데요시의 유례 없는 대군에 포위당해 장기인 농성전을 거의 펼쳐보지 못한 채 그해 여름에 항복하였고, 호조 우지마사 등이 할복하면서 멸망하고 만다.
문제는 이에야스가 호조의 영지였던 칸토로 전봉되었다는 것. 표면상으론 영지가 100만 석 이상 늘어난 영전이었으나,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 등 구 오다 가문의 가신들에게 영지 교체나 그로 인한 잇키(농민 봉기) 등의 트러블을 구실로 교묘히 숙청하는 상황이었으며 간토의 영민 및 무사들은 반항적, 독자적인 기질과 용맹함[20]으로 유명했으므로, 기존의 지지층을 모조리 빼앗고 호조 가문이 4대에 걸쳐 다스렸던 영지로 보낸 것은 노골적인 견제나 다름없었다.[21][22] 그러나 도쿠가와가의 옛 영토에 대한 히데요시의 관리 실패 및 이에야스의 내정 역량으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 개막 뒤 이에야스는 무사시, 이즈, 사가미, 고즈케, 가즈사, 시모우사 6개국 완전 지배 + 시모즈케 및 히타치의 일부를 지배함과 동시에 옛 영토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은 거물로 성장한다. 명목상 총 석고는 150만 석에서 250만 석으로 증가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오면서, 그 거점을 간토의 고도(古都)인 가마쿠라, 호조 씨 이후의 중심지인 오다와라(小田原) 등에 두지 않고, 오타 도칸이 1457년 에도성(江戶城)을 축성한 뒤 관동 내륙부에서 도네가와, 아라카와를 거쳐 도쿄만에서 가마쿠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가 된 에도(현 도쿄 도 특별구 중심부)에 두어 이를 철저히 개발하였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오사카 조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2.5.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급속히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하고 비대화된 군사력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침략군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요토미 가(家)의 중진(重鎭)[23]들이 반발했지만, 히데요시는 결국 출병을 강행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받았지만, 도쿠가와는 관동 일대의 반란 진압 및 관동 경영을 핑계로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하고 일부만 전진기지인 지금의 사가현 가라쓰시 히젠 나고야성[24]에 주둔시키는 선에서 멈춰버렸다. 히데요시로서는 이에야스의 지원이 절실했으나, 이에야스의 세력이 상당해서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 결국 이에야스의 지원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몰락하면서 이 선견지명은 제대로 들어맞게 된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전이 좌절되자, 마에다 토시이에 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 안건들이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무산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조치는 후술할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중요한 명분이 되었고, 조선 측에서도 의도는 의심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막부와는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선조실록 39년 10월 25일 기사#[25])

2.6. 막부의 성립과 오고쇼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듯이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 가 내부의 오와리 국 출신의 다이묘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들 오와리 출신 다이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오미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과 기타 거대 가문들을 규합하여 도요토미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고, 양자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있는 무게감을 가진 다이로였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사하여 분쟁이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
이러던 중 1600년 6월, 아이즈의 우에스기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고발과 우에스기 가문의 도발적인 대답[26]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이자 '천하를 둔 전투'라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었다. 결국 이에야스는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모략으로 승기를 갖추어놓고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와 결전을 벌인 끝에 군사적 식견의 우위를 점하고 승리, 마침내 천하를 잡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문서 참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직할 영지를 오사카 성과 그 일대의 60여만 석(본래는 220여만 석)으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자신을 적대한 가문들도 모두 개역(추방) 또는 감봉, 전봉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를 예전부터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하였다.
1603년에는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취임하고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열어 사실상 전국을 통일하였다. 1605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오고쇼(大御所)'[27]라 칭하며 표면상으로는 은퇴하였다.[28] 그리고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에 거처하고 하야시 라잔, 차야 시로지로, 미우라 안진 등 주요 인재를 등용하였다.
하지만 현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직에 취임한 후에도 과거 도요토미 가문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파와 이에야스파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도요토미 가문에는 충성을 다하면서도 이시다의 문치파와의 알력으로 동군에 붙은 무단파 다이묘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전히 도요토미 측을 섬기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를 가진 친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히데요시의 외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하면서 불안은 점점 더 현실화되었다.[29][30]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임진왜란일본의 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자만의 뜻임을 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출진한 것이라 해명하며 사과하며[31], 소 요시토시를 시켜 임란시 납치된 조선인과 약탈품들을 가능한한 송환하도록 했다. 또한 도요토미계의 잔당들과 후예들을 '수적'이라 칭하면서 그들을 모두 소탕해 씨를 말렸다고 조선 조정에 알렸음은 물론이다.

2.7. 오사카 전투와 사망


이후 소위 '호코지(方広寺) 종명 사건'이 터졌다. 도요토미 가에서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막대한 예산을 들여 호코지 대불전을 건립하였는데, 이 호코지 대불전의 범종에 새겨진 명문의 글귀 가운데 "國家安康, 君臣豊樂"을 두고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豊臣)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음모론적 해석이 이루어져 트집거리가 된 것이다.[32]
이를 빌미로 이에야스측은 1614년 겨울에 오사카 토벌의 군을 일으킨다. 이때 도요토미 가는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10만 가량의 군을 동원, 이에야스가 직접 이끄는 20만 대군을 상대로 분전했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짐과 함께 도쿠가와 군은 병량 부족과 사기 저하로 전의를 상실했고, 도요토미 군은 농성으로 인한 화약 부족과 심리적 압박감으로 지쳐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막내동생인 오다 우라쿠사이를 사자로 하여 강화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대포를 이용하여 성내의 건물을 직접 포격하여 교섭에서 우위를 점했다. 1614년 12월 18일부터 재개된 강화 교섭은 19일에 합의에 이르렀고, 20일에 서약서가 교환되면서 종결되었다.
당시 양 군에 부과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 본성을 제외한 둘째 성곽(二の丸)과 셋째 성곽(三の丸)을 철거하고, 바깥 해자를 메울 것
  •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인질로 삼지 않는 대신, 도요토미 가의 중신이 인질을 낼 것
이에 대하여 토쿠가와 가의 의무는
  • 히데요리의 신변의 안전과 영지의 보장
  • 성 중의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을 것
을 강화의 조건으로 성곽의 철거를 요구하는 조항은 당시 보편적인 것이었고 다분히 의례적인 면이 강한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철저히 시행하였고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진척을 확인했다. 본래 성곽의 철거는 수비측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공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에게 철거를 명령하여 이를 철저히 진행했다. 안쪽 해자를 메우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속설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고 위의 이야기가 과장되어 전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측도 전쟁 준비를 중단한 것이 아니었고, 도요토미 가문 쪽에서도 고용된 낭인들을 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의 긴장은 거의 전혀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듬해 4월 오사카측이 교토 일대를 약탈하거나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 도쿠가와측에게 빌미를 제공했는데, 이에야스는 오사카측에게 병사들의 해고와 영지 이전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한 도요토미 가에 대해 이에야스는 교토 교외에 휘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무력으로 이를 압박하였고, 5월 초에는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도요토미 측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개전으로부터 사흘 만인 5월 7일에는 성이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자결했다.
이후에는 자기 거처인 슨푸(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 시절을 보낸 곳)으로 돌아가서 국정을 관장했다. 이 시기에 금중공가제법도(禁中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텐노 가와 쇼군 가의 군신 관계를 명확히 하였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쇼군 가와 다이묘 가의 군신 관계를 정했다.
1616년 1월에는 매사냥 도중에 쓰러졌고, 3월 21일에는 조정으로부터 다죠다이진(太政大臣 ; 신하의 최고위)에 봉해졌다. 4월 17일 오전 10시경에 슨푸 성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는 슨푸 교외의 쿠노 산에서 행해졌고, 1주기에 닛코의 도쇼구(日光東照宮)로 이장되었다.[33]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할아버지인 이에야스를 매우 매우 존경하여 이곳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고.[34] 현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골은 5m 높이의 청동탑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여기까지 이어진 길에 수백 개의 계단 + 그 옆의 삼나무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어 인기 관광지로 통하고 있다. 또한 에도에서 이곳까지 도쿠가와의 유골을 옮겨올때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였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현재도 이를 재현하는 천인무자행렬(千人武者行列)이라는 행사가 매우 유명하다.
이제까지 그 사인은 비자기름에 튀긴 도미 덴뿌라[35] 의 과식(혹은 식중독)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도미 튀김을 먹은 것은 1월 중순이고 사망한 것이 4월이어서 그랬을 개연성은 낮다. 현재는 이에야스는 그 이전부터 위암의 증세를 보였고, 직접 약을 조제하여 그 증상을 억제하려 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위암의 악화가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를 다룬 일부 창작물에서는 덴뿌라와 이 위암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덴뿌라 먹어서 위암에 걸렸다는 건 아니고, '이에야스가 덴뿌라 먹고 쓰러짐→처음엔 식중독, 혹은 독살이라고 생각했으나 같이 먹은 사람들은 멀쩡함→증상을 살펴보니 위암'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
숨지기 전에 남겼다는 사세구로는 두 수가 전해진다.

"기뻐하다가 다시금 잠을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嬉やと 再び覚めて 一眠り 浮世の夢は 暁の空)

"먼저 떠남과 뒤에 남겨지는건 결국 같은 것. 함께 가지 못함을 이별이라 여기네."

(先にゆき 跡に残るも 同じ事 つれて行ぬを 別とぞ思ふ)

1617년에는 토쇼 다이곤겐(凍照大権現)의 신호(神号)와 신계(神階 ; 신토에서의 신의 위계) 정일위가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바쿠후의 시조로 신군(神君) 혹은 곤겐 님(権現様) 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었다.

3. 인물됨과 일화


이에야스에 대해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보물을 자랑하는 모임에서 이에야스는 계속 조용히 있다가 '댁 보물을 보여주시오'라는 소릴 듣자 멋쩍게 웃으며 '부끄럽게도 난 가난하지만, 내게 보물이 있다면 그건 내 가신들이라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맛있는 것이 생기거나 하면 노복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교육의 성과에 따른 계산된 행동이라고도 한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지만 실제로도 미카와 출신의 무사들은 충성스러움과 요령을 피우지 않는 무뚝뚝함, 행동을 가벼이 하지 않는 우직함으로 유명했으며, 가신들의 이탈과 배신이 난무하던 그 당시의 다이묘들에 비해 가신들의 이탈이 굉장히 적었다. 솔직히 말하는 부하를 좋아했다고 하며, 날을 잡아 부하들을 모아 서로 떠들썩하게 논쟁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를 헐뜯고 다니면서 추종세력을 모으자 칠본창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판에 또 다시 사건을 일으키냐며 오히려 칠본창을 꾸짖고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미츠나리의 거성인 사와야마성까지 배웅해줬다. 이에야스는 적대 세력의 잔당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살려주는 방식을 즐겨 택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36]의 예도 그렇고, 다케다의 자손들도 마찬가지.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딱 3명만 사형에 처했는데 전술한, 모든 화의 근원격인 이시다 미츠나리는 살아있는 한 영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 판단해 죽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것도 있거니와 제장들과의 사이가 굉장히 나빠 살려두면 사건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해 참수했으며[37] 안코쿠지 에케이모리 테루모토를 꼬드겨 자신을 공격하게 해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게 한 원흉이라서다. 반면, 서군이라고 무조건 처벌을 한 것도 아닌 게 소 요시토시는 서군에, 그것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처벌도 안 내리고 그냥 임무 하나만 내렸다. 바로 '''조선과 화해하는 일이다.'''
소 요시토시에게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면 사보다 공을 더 중요시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서군인 데다가 자신이 직접 죽여버린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인척임에도 불구하고 곤장 1대조차 처벌하지 않고 쓰시마 도주라는 이유로 조선과 화해하기 위한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자신의 원한보다 조선과의 관계를 훨씬 중요시했고, 이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는 그가 공이 사보다 우선되는 성격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존경했던 인물은 제환공, 진문공, 한고제, 당태종,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존경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당태종을 제외하면 어느 한 능력이 특출난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은 부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고 부하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용인술이 뛰어난 지도자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이들을 벤치마킹한 듯한 흔적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일본인들이 최고의 무사로 손꼽는 인물 중 하나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태종을 존경했기 때문인지 정관정요를 즐겨 읽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공식 역사서로 여기저기 잔본 형태로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아즈마카가미(吾妻鏡)[38]를 모아 필사하게 하고 그걸 활자로 찍어 보급하게 한 것도 이에야스. 본인이 겐지의 후손을 자처했던 만큼 겐지로써 최초로 일본의 패자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3.1. 인색한 창업자


이에야스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관리가 매우 철저했다. 한 예로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오는데 옆구리에 끼워놓은 종이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이에 이에야스는 뛰어나가 종이를 주웠고, 이 광경을 본 하인들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묻자 "나는 이것으로 천하를 쥐었다."라고 대답했다. 이 같은 인색함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가모 우지사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천하를 잡을 인물로 마에다 토시이에를 꼽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너무 쪼잔해서 부하들에게 은전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런데 정작 우지사토는 부하들에게 은전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베풀었다고 토시이에에게 까인 인물이다(…).[39]
그외에도 이에야스의 인색함은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망가진 마구간을 수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게 했는데 그 이유가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커야 말이 더 강하게 자라나기 때문'이었고, 뒷간 좀 장식했다는 이유로 성질을 내면서 그것을 철거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부하들이 방에서 스모를 하면서 놀려고 하는 것을 보자 다타미가 더러워진다면서 그것을 뒤집고 놀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옷도 새 옷을 장만하지 않고 헌 옷을 계속 빨아가며 입었다. 그래서 빨래 담당 시녀가 많이 지쳤던 모양인지 하루는 자신의 주군에게 새 옷 좀 사 입으시라고 불평을 했지만 이에야스는 되려 자신은 천하를 위해 절약하는 것이라며 그 시녀를 혼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음식이나 물자 관리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까지 과도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밥은 많이 먹었지만 식사 자체는 삼시세끼 1즙 3찬, 즉 국 하나에 반찬 세 가지로 먹었고, 이런 모습을 가신들이 점차 따라감으로서 훗날 일본의 적은 반찬으로 소식하는 식사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도 이에야스의 이런 면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에야스는 후계자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좋게 말하면 검약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인색했던 인물인 셈. 특히 부나 화려함을 과시하기 좋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반대되는 부분이다.
추가로 자기 자식들에겐 후하고 후다이 가신들은 짜게 대했다. 에도시대 각 번들의 고쿠다카 순위를 보면, 1위에서 10위까지 중에 이에야스 본인의 9남, 10남을 각각 초대 번주로 하는 오와리 번 61만 석(4위), 기슈 번 55만 석(5위)를 제외하면 나머진 모두 도자마 다이묘 출신이다(카가 번 102만 석 (1위), 사츠마 번 72만 석(2위), 센다이 번 62만 석(3위) 등). 더군다나 이런 대형 도자마 다이묘들의 영지 또한 마에다 가문의 카가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국시대에 비해서 대폭 삭감된 규모이다. 후다이 다이묘들 중엔 이이 나오마사의 히코네 번 20만 석(21위)이 가장 높다.

3.2. 기다림의 달인


일본 천하를 움켜쥔 전국 3영걸 중에서 이에야스의 성격이 제일 느긋했다. <갑자야화>의 한 구절이 삼영걸의 성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가) 울지 않으면(鳴かぬなら)

오다 노부나가 - '''죽여버려라(殺してしまえ)'''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鳴かしてみしょう)'''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 때까지 기다리자(鳴くまで待とう)'''

두견새(時鳥)

이와 같이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도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발군이라 기회만 포착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치기했다. 그래서 음흉한 너구리 소리를 듣는다.
결국 이러한 세 명의 지배자들은 그 성격대로 수명이 갈렸다.
  • 오다 노부나가 49살 사망
  • 도요토미 히데요시 62살 사망
  • 도쿠가와 이에야스 75살 사망[40]
다케다 신겐에게 패하고 말안장에 똥을 지리는 굴욕을 당하고도, 오다 노부카쓰의 배신을 당해서 압도적인 군력으로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해야만 했을 때도 임진왜란에 강제로 출병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끝없이 참고 끝없이 기다리며 자신의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3.3. 감정 조절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생애 중반까지 엄청나게 굴욕을 많이 당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바지에 똥을 쌀 정도로 극에 달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붙어 이겨놓고도 명분이 서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가는 등 생각보다 치욕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당히 쿨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바지에 똥을 싼 일을 부하들에게 시켜서 그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고 심지어 석상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매일같이 쳐다보면서 항상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생각했다. 굴욕을 당했다고 해서 열폭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굴욕에 대해 연구를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밑으로 들어가는 굴욕을 당하고 게다가 나이 40살도 넘고 별로 미인도 아닌 아사히히메와 강제로 결혼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을 때도 '이제 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열폭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천천히 생각하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강제로 전봉당했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대로 얼굴마담을 하자. 그리고 새 영지에서 내 이름을 선전한다.'라고 생각하며 양쪽 모두에서 인지도를 유지했다. '''그 결과는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덤으로 이 전봉을 핑계로 임진왜란을 땡땡이 쳐서 자기 세력을 그대로 보존한 데다가 죄없는 조선을 학살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는 이유로 얻은 인망으로 인해 일석이조까지 따냈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굴욕을 참는 능력이 남달리 강했고 그게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더욱 냉철한 판단력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냉철한 판단력은 그를 일본의 지배자로 만들어줬다.

3.4. 새해 첫 꿈


일본에서 '새해 첫 꿈'으로 보면 재수가 좋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는 후지산, 매, 가지의 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것을 열거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후지산은 이에야스가 슨푸성(지금의 시즈오카 현)에서 은거하면서 노년에 즐겼던 경치였고 매는 이에야스가 매사냥 덕후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가지도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음식이라는 데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여기에 연관하여 뜻풀이를 해보자면 후지산(富士山)은 한자 그대로 부유함을 상징하고, 매(鷹:타카)는 고귀함(高:타카)과 발음이 같으며 가지(茄子:나스)는 이루다(成す:나스)와 발음이 같다. 즉 부귀와 꿈을 이루는 것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것.

3.5. 취미


개인적 취미는 '매사냥'이었다. 이 당시 높으신 분들의 취미로 유명했지만 이에야스는 거의 매사냥 마니아 수준이었다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의술'''에도 관심이 있어서 '''자기 몸의 병을 자기가 직접 처방하고 약까지 직접 조제할 정도'''였다고. 이 점을 반영해서 코에이의 <노부나가의 야망 12: 혁신>에서는 이에야스가 습득 가능한 고유 전법이 '치료'로 되어 있고 태합입지전에서도 의술 스탯이 높게 책정되어 있다. 전국시대 무장 치고는 70세 중반이라는 장수를 누린 편인데, 그만큼 이에야스 본인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이에야스의 일본어판에는 이에야스를 대놓고 ''''건강 오타쿠''''라고 적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배웠고, 말년이 되어서도 검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보다 한 수 위'''였으니... 말 다했다. 물론 검술은 당대 장수의 기본 소양이었고, 본인도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취미로서 검술을 상당히 즐겨, 막부 개창 후에도 종종 검술가들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토 잇토사이의 '오노하 일도류' 계열과 야규 무네요시의 '야규 신카게류'가 있으며, 이 두 유파는 다음 세대 쇼군들에게 검술을 교습하였다. 야규 가문은 검술 사범의 역할뿐만 아니라, 에도 막부의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성장하였다. 나름 활도 잘 쏴서 '동해제일궁'[41]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물론 무장에게 관례적으로 붙이는 이름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따라줘야 붙여지는 법이다.
말년에는 젊은 부하들에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마가와 가 인질 시절 이야기나 젊은 시절 최대의 적이었던 다케다 신겐과의 싸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추억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준 기록이 없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동맹 관계를 끊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에도 만났던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부분. 그래서 일설에는 이에야스가 실은 노부나가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는 장기간 서양과의 교역을 끊었던 것과는 달리 이에야스 본인은 노부나가 못지 않게 남만(서양)의 물품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시계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해시계나 서양식 시계, 모래시계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고 하며, 그 중 이에야스가 쓴 서양식 시계가 현존하고 있다. 이외 이에야스의 유품 중에는 나침반이나 연필[42], 안경도 남아 있다. 또한 일본에 표류한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라는 영국인 항해사를 등용하여 유럽과 아프리카, 동남아 등 여러 나라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고, 기하학과 수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윌리엄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일본에 살면서 다른 서양인들과의 교섭이나 선박 건조 등의 업무를 맡았다. 한국으로 치면 벨테브레 쯤 되는 인물. 이 인물을 모델로 하는 대작 게임 인왕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3.6. 의외의 성급함


위의 '기다리다 천하라는 떡을 먹은 자'라는 이야기 외에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인물로도 유명해서 느긋하고 신중, 침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장에서는 그런 이미지와는 달리 꽤 신경질적이고 조급한 면모도 종종 보여주었다.[43]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겐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던 적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노련한 정략가로 변모한 뒤인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도 동군이 불리했을 때 지시를 내리다가 전황이 영 마음에 안 들게 돌아가자 화를 참지 못해서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칼로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44],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야스의 손톱 물어뜯기 버릇은 노부나가의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런가)'란 표현처럼 이에야스를 다룬 창작물에서 빠지지 않고 묘사된다.
또한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노부나가 못지 않게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조선측의 기록에서도 '사납고 날래다' '전투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등 호전적이고 격한 묘사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일본에 대해서 평가가 영 박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45][46]

3.7. 막장 부모의 효자 노릇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버지로서는 영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정말로 없었던 모양. 장남은 권력다툼으로 셀프 할복했고, 둘째인 유키 히데야스는 어머니와 함께 세트로 박대, 셋째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도 서자에 셋째라고 여기저기 인질로 보내는등 박대했다(하지만 나중에 셋째가 물려받음).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태도도 영 아니올시다였다. 본인 아버지도 어린 나이에 자기를 여기저기 인질로 보내고 나몰라라 하던 막장 부모였던 걸 생각하면 그대로 배운 모양.
반면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내쳐져 생이별하고 재가한 어머니 오다이에게는 극진한 효심을 보여 어머니가 재가한 남자와 싸우게 되자 죽기 전에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적진까지 잠입해서 어머니와 만나거나 말년에 정이대장군이 된 뒤 자기 어머니라고 모셔와서 여생까지 극진히 효도했다.

3.8. 여자 관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많은 측실을 거느렸는데, 과부 출신들이 많았다. 남편이 죽으면 생계 자체가 위험한 당대 사회 특성상 과부 구제책을 겸해 '도쿠가와 가에 충성을 다하고 사망한 남성의 충실한 과부이자 그 남성의 아이를 낳아 기른 경력이 있는 여성'을 선호한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자손을 남기고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 이전의 마츠다이라 가는 손이 귀한 상태라 여러 가지로 위험이 많았으므로 자신의 후대에는 그러한 위험을 배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말년에는 소녀들이 많아서 취향이 로리콘으로 바뀌었냐는 말도 있다.
말년에 자기 시녀로 오타아라고 하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는데, 오타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 도중에 전쟁고아가 되어 거둔 조선인 양녀였다. 오타아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는 시녀가 되었고[47]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타아를 측실로 들이려고 했지만 오타아가 거부했다. 이 시기 가톨릭 탄압을 하게 되었는데 오타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자였던지라 이에야스가 신앙을 그만둘 것을 권했지만 오타아는 거부하고, 결국 오타아는 시골 벽지로 유배되어 말년까지 봉사활동을 하다 죽는다.

3.9. 카게무샤설


우에스기 겐신이 '여성설' 혹은 '반음양설'이 있는 것처럼 이에야스도 떡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이에야스 카게무샤설'이다. 한마디로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인이 아닌 대역이었다는 설. 카게무샤로 '세라다 지로사부로(모토노부)'란 사람이 언급되곤 하는데 이 떡밥을 소재로 북두의 권 작가인 하라 테츠오가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바사라에서는 마지막 스테이지 중간 보스(페이크 최종 보스)[48]로 등장하기도 했다.
다만 글자 그대로 설이니 '이런 얘기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재미로만 알아두자. 겐신 여성설과 마찬가지로 이 카게무샤설에 대해서도 이에야스가 카게무샤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에야스의 카게무샤로 확인되는 사람은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본래 이에야스가 막 자립한 초년기에 미카와 일향종 농민 반란[49] 때 일향종 편에 섰다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신겐에게 대패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다케다 진영으로 돌입해 전사했다. 뒷날 요시노부의 아들이 위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동료를 죽여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하야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야스는 아버지의 공을 생각해 이를 용서해 주고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자네 아버님 덕택이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네"라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속 가신으로 배치해 주었다고 한다.

3.10. 주술과의 관계


미묘하게 주술과도 엮여 있는 인물이다. 에도에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관련된 유적이 7개가 있는데 이것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한 장본인이 바로 이에야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통해 덴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세력을 강화할수 있었대나.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보물을 숨기고 그 장소를 비밀리에 전수하기 위해 핫토리 한조에게 노래를 짓게 했는데 그것이 카고메카고메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이에야스가 에도에 저택을 지으면서 저택 한쪽에 악귀들을 모아놓은 귀문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나중에 오카다 유키코사카이 노리코를 골로 보내버린 선뮤직의 저주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260년간 지속된 에도막부의 원동력에 대한 추측이 발전한 것이거나 이에야스의 비범함에 대한 소문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3.11. 식성


덴뿌라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매 끼니마다 덴뿌라를 항상 먹었을 정도. 도미 덴뿌라를 먹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도미 덴뿌라가 위암을 건드렸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도 에도 시대 사람으로서는 엄청 장수한 편에 속하는 74살까지 살았다.

4. 평가



4.1. 근현대의 평가


일본에서는 막부를 세우고 나서 덴노를 몰아붙인 탓에 근대까지 평가가 좋지 못하였다. 특히 막부가 무너지고나서 메이지 유신을 거치자 존왕사상 일변도가 된 바람에 이에야스는 황가를 푸대접했다는 평가가 주가 되어 주로 비열함이나 간사함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사실, 황실과 공경[50]의 처우는 오히려 에도막부로 인해 많이 개선됐다. 전국시대에는 '''상징성조차 없어서'''[51] 아무도 신경 써주질 않아 천황이 직접 글씨를 써서 생계비를 버는 경우까지 있었다. 에도 막부는 무가법도를 제정, 천황과 공경의 역할 및 한계를 규정하여 현실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도쿠가와 직계 여손을 천황에게 시집보냈다. 에도 시대 중기쯤 가면 도쿠가와 가는 무사의 대표이자 천황가의 일원이으며 이는 에도 막부 후기~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지는데, 도쿠가와 사람이 천황가에 시집갔으니 홀대할 수 없어 적어도 경제적으로 궁핍할 일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거쳐서 그러한 시절의 사고방식에 대해 일본 내에서 재고의 흐름이 일어나자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큰 일을 하지 않은 사카모토 료마사나다 노부시게가 유명한 인물인 것처럼 일본 내에서 역사적인 위인의 인식에는 역사소설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대히트작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 철두철미하게 평화주의자로 묘사된 것이 대중의 인식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오다 노부나가와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야 패권을 쥐었다는 점에서 화제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 특히 노부나가와 동맹을 했던 시절에는 주로 싸운 것이 다케다 신겐이었기 때문에[52] 큰 활약상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다.
재미있게도 이에야스는 물론 다른 막부 창건자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시카가 다카우지도 역사의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라이벌에 비하면 인기가 처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리토모는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밀리고, 다카우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같은 라이벌들에게 인기가 밀리는 편. 그나마 이에야스는 세 명의 막부 창건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편이다.

4.2. 한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히데요시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전쟁의 수습을 하고 조선에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는 등 평가가 '''자국에 비해서도''' 엄청 좋은 편.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 교육과정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일본 사람이다.

일본국(日本國) 원가강(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계(書契)는 다음과 같다.

수년 동안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와 조신(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에게 명하여 천고의 맹약(盟約)을 다지도록 하였으나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 채 조신이 죽었으므로 지난해부터는 그의 아들 경직(景直, 야나가와 가게나오)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선토록 하였습니다. 요전에 의지가 비품(飛稟)하기를 ‘여러 번 귀국에 화친을 청하였으나 귀국에서는 혐의를 풀지 못하여 지금까지 지연시키고 있으니, 친히 서계를 만들어 청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이같이 통서(通書)하는 것입니다. 한 건의 일에 대해서는 다행히 죄인(성종선릉중종정릉을 도굴한 범인)이 대마도에 있는 터이므로 의지에게 확고하게 명령하였으니 의지가 반드시 결박하여 보낼 것입니다. 또 누방(陋邦)이 전대(前代,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해 승(僧) 송운(松雲, 유정대사)과 손 첨지(孫僉知, 손문욱) 등에게 모두 이야기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내도록 쾌히 허락하여 우리 60여 주(州)의 인민들이 화호(和好)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면 피차에 다행일 것입니다. 계절에 따라 나라를 위해 자중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11월 12일

실록에도 남아있는 이에야스가 보낸 사과의 뜻이 담긴 국서. 잘못을 인정하고 싹싹 비는 형태지만 이 정도는 고금의 외교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외교적인 수사로 점철된 편지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국서는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조선 정부와 막부 사이에서 적절한 농간을 부린 결과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유약조 항목을 참조.
이에야스가 다시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지만 조선과 명나라는 도쿠가와 막부를 여전히 신뢰하지는 않아서 선조 말엽부터 광해군 때까지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광해군일기를 보면 조선 조정이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받아 본 명나라 유격의 답신이 이랬다.

자문을 받아보고 왜인들의 정세를 알았습니다. 적국에 일이 있는 것이 비록 귀국에 다행이기는 하나 '''덕천가강은 꾀를 써서 강자를 제어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얻은 뒤에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8년(1616) 5월 20일

이는 명나라 역시 히데요시가 아닌 이에야스 또한 경계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그가 조선에 우호적으로 나온 것이 속일 목적이었거나 계략이 있었거나 한 건 또 아니었으니 무작정 나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일본 내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긴 하나 어찌됐건 조선 정벌에 소극적이었으며 관계 회복에 애쓴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완벽주의자인지라 이 사과는 조선의 반격이 나올 만한 근거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생각이었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문제와는 상관없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제로 친조선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을 자신의 처세에 철저하게 활용하기 위해 조선을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폭파시키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살해하기 위해 트집으로 잡은 것들 중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었다.
조선에서는 '국적', '원흉' 취급이었던[53] 히데요시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실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포로 교환이나 전후처리 등을 논할 무렵에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본명인 덕천가강이나 원가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면 평가는 전반적으로 '히데요시보다는 개념 있는 왜인' 정도라서 이렇다 할 악평은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기록은 없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던 임란 당시에는 틀린 정보가 많지만 후대의 통신사의 기록에서는 상당히 제대로 나와 있는 것이 특징.
강항간양록을 보면 이에야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괴팍스러운 성품에다가 싸움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을 통틀어 감히 그와 자웅을 견줄 자가 없었다."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고 얼굴이나 몸집도 두툼하게 생겨 덕스러운 편이다."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는 많은 인심을 얻었지만 수길의 뒤를 갈음하게 되자 도리어 일반의 신망이 떨어져 갔다."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컴컴하다. 한 번 비위에 거슬리면 그 사람을 죽을 고비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에 부하들도 코앞에서만 슬슬 기지 한 놈도 믿고 따르는 놈이 없다고 한다."

-<간양록>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그리고 효종조선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이라는 사람은 일본의 역대 지배자들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이에야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원뢰조의 지파(支派)로서 대대로 겸창(鎌倉: 가마쿠라)에 살면서 8주(州)를 합치고 받아들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으며 상모(狀貌=얼굴의 생김새)가 풍만하고 준수하며 날래고 사나워 잘 싸우므로 온 나라가 감히 그와 싸울 사람이 없었다'''. 평수길이 친히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뒤에 원한을 풀고 수길에게 귀순하였으며, 수길이 죽을 적에 아들 수뢰를 그에게 부탁하였다.

경장 8년(1603년) 계묘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고 10년(1605년) 을사년에 위를 아들 수충에게 전하여 주고 대상국(大相國=태정대신)이라 일컬으며 부자가 국가의 정사를 전집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대판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씨(도요토미)를 멸망시켰으며 다음해 병진년(1615년)에 죽으니 호는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며, 정권을 잡은 게 3년간이었다.

-<부상록> 중 문견별록(聞見別錄)의 관백 차서에서

간양록에서나 부상록에서나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인물이면서 말수가 적고 침착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공통점. 사실 간양록의 기록은 강항이 직접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서, 도쿠가와 가문을 좋게 보기 힘들었던 기나이나 오사카 근방, 서일본 출신의 인물들에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히데요시보단 괜찮게만 보인다는 뜻이지, 이와는 별개로 짠돌이와 간신(?)으로서의 행보로 인해 저평가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4.3. 정치가로서


이에야스는 에도 초기의 주요 정책인 철저한 숙청, 철권 통치를 단행했으며 무사 계급과 평민 계급의 차이를 엄격히 규정하는 한편 다이묘들을 매우 가혹하게 다루었다. 대표적으로 말기 양자[54]를 금지하거나 사사로운 일로 가이에키[55]나 할복을 명하는 등 정책을 취하였고, 또한 도로를 통제하거나 철저한 호적 조사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하였다. 에도 시대에 대중문화가 발달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논공행상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데 '''포상은 짜게, 처벌은 후하게.'''[56]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리시탄 금지령을 이어받아 더욱 엄격한 형태로 확정하였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쿠로후네 사건 때까지 일본의 대외관계는 극히 제한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태정대신 타이틀도 있다. 단, 태정대신 직은 이에야스가 사망하기 1개월 전에 받은 관직이라 태정대신 직을 유지한 기간은 잠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가 지은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57]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4.4. 군 지휘관으로서


전장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에서부터 이미 높게 평가받아 왔다. 전략/정략 측면에서 이에야스의 능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의 역량은 그 휘하의 미카와 가신단이 아네가와 전투에서 병력이 우세함에도 졸전을 벌인 오다군(히데요시, 시바타 가츠이에 모두 돌파당함)과 달리 병력이 열세함에도 아사쿠라군을 격파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미카와 가신단 필두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활약 등으로 용명을 떨친 데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2개 회전이 오다군의 보조적 역할이라면, 압도적 병력 열세에서 야전 축성과 기습으로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를 전사시킨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는 이에야스의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노련함과 신속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 전국시대의 회전 사례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은 가운데,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외에는 이에야스가 참패한 전투 자체가 드물고 말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전투를 제외하면 이에야스의 전적은 최상위권에 넉넉히 든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모리 모토나리, 호조 우지야스 등의 쟁쟁한 다이묘들에 비해 이에야스가 한수 처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에야스가 이긴 전투가 화려한 전략전술이나 극적인 반전 등 오락적인 요소가 부족하기도 했고[58], 반대로 그의 생애에 있어 몇 안되는 패배인 미카타가하라 전투나 그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상대가 다케다 신겐이나 사나다 노부시게등 에도 시대로부터 전통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인물들이었기 때문. 게다가 이에야스라는 인간의 주력 전공은 지휘가 아니라 권모술수였다는 점도 한몫 하는데,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를 한 게 아니라 적장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배신을 유도해내서 이겼다는 점이 그렇다.
영혼까지 털리다 못해 똥까지 쌌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야 병력이나 포진부터 이미 열세였던 데다 아직 미숙하던 이에야스가 노련한 신겐에게 당해버린 것이라 쳐도, 오사카 전투에서는 저 유명한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으로 우위를 점하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려버렸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생전에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는데, 그 두 번이 모두 다케다 관계자가 지휘하는 적을 상대했으며 그때마다 적이 '''빨간 갑옷'''을 입은 놈들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는지 다케다 멸망 뒤 이에야스는 다케다 유신들을 재정비하여 자신이 아끼던 젊은 무장 이이 나오마사 휘하에 편제, 이이 아카조나에를 운용하게 되는데 말년에는 전투가 없어서 군기 빠진 신참들이 붉은 무구를 갖추고 있다고 한탄[59]했다는 걸 보면 역시 다케다 가의 붉은 군대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전략/전술/무략/모략/정략/임기응변 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에야스는 당대 1급 군 지휘자가 맞다. 전략의 시야가 오다에게, 전술의 화려함이 신겐, 무략의 용맹함이 겐신, 모략의 깊이가 모토나리, 정략의 견실함이 우지야스,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히데요시에게 밀린다고 해도, 이에야스는 실패나 굴종을 극복하면서 각 방면의 1인자들에게 버금가는 역량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쟁쟁하던 군웅들을 제치고 천하를 거머쥔 것이다.
개인 무예로 따졌을 때도 가히 당대급 장수라 함에 손색이 없다. 우에스기 겐신이나 혼다 타다카츠보다 못하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겐신이나 타다카츠가 워낙 인간흉기라서 그런거고 칠본창보다도 무예가 더 우수했고 삼국지 시리즈로 따지자면 최소 손견강유 이상 급은 갔다. 그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났다.

4.5. 총체적 평가


이런 점들 때문에 어쩌다 가끔 통이 큰 모습을 보여줘도 사실 뱃속에 속셈을 감추고 있다는 너구리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덴노를 홀대했다는 이유로 별의별 욕을 다 먹게 되는데 전후가 되면서 그때까지의 방침에 대한 반발로서 오히려 평가가 급상승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 말하자면 메이지 시대에 까였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좋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현재의 대인 이미지는 그 시절에 많이 굳어진 것이다. 굳이 객관적으로 총평하자면 소인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인도 아닌 '''철저한 현실주의자''' 라는 평가가 더 어울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
그래도 동상은 뻔질나게 많다. 비록 은혼이나 여타 만화 등에서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삿대질을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상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상 가운데 하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하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역량이 부족해 결국 그가 창업한 막부는 무로마치 막부의 연장선에서 만족해버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세력 구도를 잘 파악하여 약소 세력에서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만 봐도 걸물은 걸물. 서양학자 George Sansom은 오다 노부나가를 평하면서 그의 군재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같은 유능한 장군의 도움을 받은 편이었다고 평해 이에야스가 헛물은 아니었다는 평을 내렸고, 노부나가가 확장하면서 이에야스에게 뒤를 맡긴 것만 봐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노부나가에 비해 개척하는 역량이 부족했을 뿐이지.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으며 전국시대의 재탕을 막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2800만 석이라고 하는[60] 일본 전토의 고쿠다카 중 400만 석은 자신의 직할령으로 만들고[61] 300만 석은 가신단인 하타모토의 영지로 주어 사실상 700만 석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62]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의 논공행상 역시 전국시대의 재탕을 막기 위한 성격이 강한데 전국시대 당시에는 패배한 다이묘는 무조건 할복으로만 조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이 세 사람만 참수 조치하고 나머지 서군 다이묘의 영지는 아예 몰수하거나 생계 유지가 가능한 최소한의 수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수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준 동군 다이묘들에게조차 100만 석을 임계점으로 하여 그 이상은 고쿠다카를 허락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상했다. 이는 다이묘들이 힘을 길러 전국시대의 도래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후손이 아직도 종친회를 갖고 있다. 위의 엉거주춤 동상의 제막식 당시 사진. 가장 키 큰 사람이 현 도쿠가와 종가 18대 당주인 도쿠가와 츠네나리(德川恒孝 1940.02.26~)이다. 도쿠가와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재직 중. 그런데 정작 이 사람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히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6년 11살 어린 '''베트남 여자'''와 결혼해서 도쿠가와 가문 종가엔 베트남인의 피가 흐르게 될지 모른다. 당주가 기업에 재직할 무렵 하필이면 다이묘가인 '''마에다 가문'''의 종가 당주가 한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상사가 '''"마에다와 도쿠가와의 당주를 턱짓으로 부리는 건 타이코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겠지"''' 하면서 좋아라 했다고 한다(...).

5. 가족관계


  • 측실: 오쓰마노가타(お都摩の方)
    •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65]
  •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 - 고산케 (기슈 도쿠가와 가) 창가[66]
    •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 - 고산케 (미토 도쿠가와 가) 창가[67]
  •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측실: 오아이노가타(お愛の方)
    • 3남: 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 4남: 마쓰다이라 타다요시[68]
  • 측실: 오타케노가타(お竹の方)
    • 3녀: 후리히메(振姫) -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 →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정실
  • 측실: 자아노쓰보네(茶阿局)
  • 측실: 오나쓰노가타(お夏の方)
  • 측실: 오카지노가타(お梶の方)
    • 4녀: 마쓰히메(松姫)
    • 5녀: 이치히메(市姫)
  • 측실: 오우메노가타(お梅の方)
  • 측실: 오스와노가타(お須和の方)
  • 측실: 오무스노가타(お牟須の方) - 난산 도중 모자가 함께 사망
  • 측실: 오카메노가타(お?の方)
    • 8남: 히라이와 센치요 - 히라이와 지카요시의 양자가 됨
    •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 - 고산케 (오와리 도쿠가와 가) 창가[69]
  • 측실: 오센노가타(お仙の方)
  • 측실: 오로쿠노가타(お六の方)
  • 측실: 니시고리노가타(西郡の方)
    • 차녀: 도쿠히메(督姫) -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 →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의 아내

6. 외모


[image]
시즈오카시 슨푸유메히로바(すんぷ夢ひろ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물관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든 상들 가운데 오고쇼(大御所)[70]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image]
상을 제작할 때 참고한 초상화.
덴뿌라를 하도 좋아하다 보니 비만이었다고 한다.[71]
참고로 키가 159cm로 당시 일본인 평균인 155cm보다 약간 키가 컸다.[72]

7. 유훈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부자유[73]

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て遠き道をゆくがごとし。''' いそぐべからず。不自由を常とおも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堪忍は無事長久の基、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害其身にいたる。おのれを責て人をせむるな。 及ばざるは過たるよりまされり。[74]


8. 창작물에서



'오다가 반죽하고 하시바(도요토미)가 찐 떡을 기다리다 먹은 자'라는 별명처럼, 능구렁이나 너구리의 이미지로 유명하다. 의외로 인기 없는지 전국무쌍에서는 2편부터 출연했다. 코에이의 영걸전 시리즈의 전국시대편인 모리원취전직전신장전 양쪽 다에서 최종보스로 등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태합입지전도 있는데 도쿠가와만은 자신만의 게임이 없다. 그나마 결전 1편에선 1회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플레이하게 되는데, 2회차는 이시다 미츠나리로 플레이하게 되어서 단독 주인공이라 보기도 애매하다. 전국시대 3대 영걸로 꼽히는 인물, 그것도 최후의 승자가 된 인물 치고는 창작물에서 대접이 비교적 박한 편.

9. 둘러보기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1] 묘소의 이름을 빌려서 사후 그를 도쇼구 또는 도쇼신쿤(東照神君)이라 통칭하기도 했다.[2] 몸이 퉁실하고 성격이 능글맞다 하여 붙은 이명. 역시 본인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전국시대 관련 작품에서 너구리라는 비유가 쓰이면 100% 이 양반이다.[3] 이에야스(家康)의 이에(家)는 헤이안시대 후기의 무장인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이에(家)를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대목인 준민용장 가용평강(俊民用章 家用平康 : 뛰어난 백성이 드러나 집안이 편해질 것이다)의 뒷구절에서 앞글자 家와 끝글자 康을 따서 이토호시(伊東法師)라는 스님이 지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변천사가 나름 의미심장하다.[4] 13살에 가신들에 의해 가주로 추대되어 이듬해부터 전쟁에 나서 꾸준히 성과를 거두고 약관이 되기 전에 미카와를 통일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후엔 오다 노부히데가 다스리던 오와리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오와리 모리야마 성을 공격하던 와중에 가신에게 살해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츠다이라 가문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5] 실제로 봉건시대에 인질 또는 시종으로 상위 집안에 보내지는 경우 대체로 극진한 우대를 받았으며 양질의 교육을 제공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인질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다음 세대에 자신들의 가문을 위해 일할 가신이 될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이에야스라면 한 때 미카와를 통일한 마쓰다이라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이니 그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이마가와 가문이 미카와를 차지할 그럴듯한 명분거리가 되기도 했었고 말이다. 또한 나중에 계속 데리고있지 않더라도 쓸데없이 반감을 만들어놓기보다는 우대를 해서 호감을 쌓아두게 하는 편이 더욱 이득이 될 일이다.[6] 고작해야 1대다. 이에야스가 정식으로 미카와의 영주가 되었을 때는 이미 관계를 끊었으니.[7] 거기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에야스와 그 가신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항상 선봉에 내세워서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 또, 이에야스를 교육시켰다고는 하지만 이에야스가 슨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마츠다이라 가문의 영지(미카와)는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대리 통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에야스의 교육비 및 생활비 등을 이마가와에서 대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아니, 사실 까놓고 말해서 이에야스로부터 그의 영지를 가로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8] 거기다 이마가와에서 벗어나자마자 손을 잡은 쪽이 바로 요시모토를 죽인 오다 노부나가이다.[9] 하지만 나중에 우지자네를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사이가 안좋았다기보다는 껄끄러웠던 듯하다.[10] 사실 그런 배신이 일상화 되어있는게 전국시대이긴 해서 특별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시대의 네임드 무장이면서 대망등의 소설덕분에 좋은 이미지를 쌓은것과 다른 사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듯 하다.[11] 그리고 메이지 시대에는 다시 이에야스의 이미지가 추락했지만 2차대전 이후 에도시대의 신군전설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에야스 생부처 만들기 수준의 미화소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으로 되살아났다.[12] 에도 시대에 탄생한 족보에 따르면 마츠다이라 노부시게가 아들이 없어서 데릴사위로 치카시게를 들였고, 이 치카시게가 이에야스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13] 당시에 일본은 이미 집단전 체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다이묘가 진두지휘를 하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꼭 필요하다면 이럴 때가 간혹 있었다.[14] 일향종의 사찰은 원래대로 두겠다고 하고 화평을 맺은 다음 불태워버리고, 원래 평지였으니 평지로 돌려보냈다 했다고 한다. 흠좀무...[15] 다케다 가는 이마가와 가, 호조 가와 삼국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 분할은 동맹을 배반한 것이었다.[16] 일부 설화에서 노부나가에게 간언장을 남기고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 노부히데 대의 명 군사이자 노부나가의 후견인인 히라테 마사히데의 아들이다.[17] 사실 가즈마사는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직전에서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츠를 옹호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맞서려고 하자 가즈마사는 히데요시와 화친할 것을 혼자서 주장하나 이에야스나 다른 가신들에게 미움을 산 건지, 아니면 히데요시가 많이 꼬드겼는지.... 아무튼, 도요토미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18] 이 과정에서 비슷한 루트로 도망한 구 다케다 가신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폭도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므로 얼마나 위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9] 호조의 반 히데요시 자세는 이에야스의 지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캐스팅보트나 다름없는 이에야스 세력이 히데요시를 따랐기 때문에 그림이 어그러진 것.[20] 이를 히데요시의 호조 가문 정벌 때 일어난 오시성 전투를 주 내용으로 하는 영화 노보우의 성에서 어느 정도 표현해 놨다. 영화에선 주인공 측의 나리타 가문이 원래 호조 가문 소속이지만 히데요시 측과 내통해 항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이 꼬여 항복을 거부, 주인공 측의 성인 오시성에서 주변의 농민들도 입성시켜 같이 싸우기로 결정한다. 이 농민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집집마다 숨겨둔 갑옷과 창, 칼 같은 무구들을 챙기고 입성을 한다. 전투가 벌어지자 나리타 가문의 아시가루들은 적의 대군에게 쫄아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이 농민들은 이런 상황을 전에 자주 겪어본건지 높은 사기와 뛰어난 전투력으로 적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준다.[21] 간토 일대를 지배했던 후호조씨는 전국시대 다이묘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선정을 펼친 가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간토 지방 백성들에게 있어 호조가의 위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땅에 호죠 멸망에 일조한 도쿠가와를 굳이 보냈다는 건 대놓고 그 땅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며 실제로도 이에야스는 간토 통치 과정에서 호조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을 달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22] 이때 도쿠가와의 구 영지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로 전봉된 오다 노부카츠는 전봉 처분을 거절했다가 영지를 깡그리 몰수당해버렸다.[23] 1.어떤 집단이나 분야에서 지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중요한 인물. 2. 군대를 통솔하는 권리를 잡고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는 사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24] 나고야 성으로만 언급해서 중경지방의 대도시인 나고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경 지방의 나고야성이 아닌 사가 현의 나고야성이다. 나무위키에도 나고야성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어서 태그를 눌러 넘어가면 중경 지방의 나고야로 착각하게 된다. 한자로 표기하면 사가의 名護屋, 아이치의 名古屋의 가운데 한 글자가 달라서 착각하지 않지만 한글로는 모두 나고야로 읽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다. 단...이러한 구분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이야기고 에도시대까지는 나고야라는 발음이 중요하지 한자 표기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한자를 자기 임의대로 써댔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 당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구별법이다. 그냥 속한 쿠니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오와리 나고야/히젠 나고야로 부르는 정도가 당대 기준으로도 확실히 구분이 되는 표기라 할 것.[25]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풍신수길(수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덕천가강(가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고로 수길은 히데요시, 가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미한다.[26] 나오에 카네츠구가 작성한 것으로, 일명 '나오에장'이라 불린다. 사실상의 선전포고.[27] 고쇼(御所)란 쇼군을 달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즉 오고쇼란 '상왕'이나 '상장군'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28] 굳이 이에야스가 오고쇼라는 직책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아들을 쇼군에 앉힌 이유가 있는데, 쇼군에 즉위할 때에도 이에야스는 이미 60이 넘은 고령이었다. 그래서 언제 급사할지 몰랐기 때문에 미리 아들에게 쇼군 직위를 쥐어주어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이 쿠데타로 숙청당하는 일을 막아둘 필요가 있었다.[29]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닌 간파쿠에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간파쿠는 조정의 최고직으로 공가에 주어진 문관 직위였다. 무가의 직위인 쇼군과는 약간 다른 계열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쇼군보다도 간파쿠가 상위직이었기 때문에, 쇼군 도쿠가와 가문을 통제하는 간파쿠 도요토미 가문의 형태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30] 간파쿠는 율령제에 없는 일본식 직위 '영외관'으로, 천황의 전권대리이다. 조선에 비교하자면 수렴청정의 일상화. 반면 쇼군은 그 유래가 '오랑캐 토벌대장'으로, 천황의 직계 혹은 친척인 미나모토에게 주는 직위이다. 따라서 명분이 간파쿠에게 있으므로, 도쿠가와 쇼군 측이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도요토미의 남은 권력과 명분을 짓밟지 않는 이상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언제라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31] 외교관계 회복을 위한 단순한 핑계라는 오해가 일반적이지만, <프로이스 일본사> 등의 1차 사료를 상고해 보면 이에야스의 주장은 '''사실'''이다.[32] 이런 해석을 한 것이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배운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으로, 어용학자로서 일부러 도요토미를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억지 해석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종명을 새긴 승려는 이에야스를 저주했다는 대목은 부정했으나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했다는 대목은 인정했다. 이유는 그 승려의 아버지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출신이어서 도요토미가에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33]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34] 그래서인지 이에미쓰도 할아버지의 근처에 유골이 모셔져 있다.[35] 현대의 밀가루와 물을 섞은 반죽을 두른 밀가루 물이 아니라 썰은 생선 조각을 기름에 튀긴 음식. 밀을 가루가 되도록 만드는 제분 기술은 먼 훗날의 이야기[36] 아버지 요시모토의 원수인 노부나가는 가신의 배반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우지자네는 천수를 끝까지 누렸다.[37] 가톨릭이라서 참수했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는 가라샤(그것도 어렸을 때의 본명이 타마코인데 아예 가톨릭 세례명을 본명으로 개명하고 다녔다.)는 멀쩡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38]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로 일기 형식으로 작성된 편년체 사서. 아즈마(吾妻)는 일본의 간토 지역을 가리키는 옛 용어로 이름의 뜻을 풀이하면 대략 '동쪽 땅(간토)의 역사'라는 뜻. 한자로 표기될 때는 '''동감(東鑑)'''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반헤이케 거병(1180년)부터 6대 쇼군 무네타카 친왕의 퇴위(1266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가마쿠라 시대를 연구하는 1차 사료로 꼽힌다.[39] 보통 부하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게 되면 이들이 간이 커져서 주인조차 쥐락펴락하는 경우가 있다. 또, 이들이 돈을 쥐게 되면 아쉬울게 없어지니 통제가 매우 힘들어진다.[40] '인생오십년'으로 시작하는 다이라노 아츠모리의 노래를 즐겨부르던 노부나가는 50세를 채우지 못하였고,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보다 13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13년 더 장수한 특이한 연관성을 가진다.[41] 동쪽 바다가 아니라 일본 동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토카이도(東海道) 지역을 뜻한다.[42] 오늘날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연필이 아니라, 흑연 덩어리를 나무토막 사이에 끼워쓰는 초기 형태였다.[43] 이점은 전략/전술 두단계로 나눠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전략 레벨에서는 신중, 침착한 인물이지만, 전술 레벨에서는 조급한 인물이라는 것.[44] 이에야스가 화를 내면서 시동의 깃대를 칼로 베어버리는 장면은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3대에서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이에야스 역 배우의 연기가 백미.[45] 이에야스에 대한 조선의 평가는 대부분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강항의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강항은 당시 서군 측에 가까운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당연히 그가 접한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도 경외와 함께 증오가 섞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조선 조정에서는 "여전히 믿을 수는 없으나 만악의 근원 풍신수길보다는 좀 낫다"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46] 문관이거나 무관이라고 하더라도 도쿠가와 보다 전투경험이 적을 것이 분명한 조선 사절단 입장에서는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뒹군 도쿠가와가 충분히 저래 보였을 수도 있다.[47] 쇼군을 직접 섬긴 시녀였다는 것과 나이가 좀 들자 측실로 들이려고 한 것으로 보아 에도 시대 정이대장군의 후궁 역할을 하던 오오쿠의 오츄로(御中臈)가 아니었나 싶다.[48] 보스 출현 시 뜨는 자막은 德川家康으로 동일(단 세라다의 경우는 '''大將''' 德川家康라는 자막이 뜨고, 진짜 도쿠가와의 경우에는 '''總大將''' 德川家康라는 자막이 뜬다.). 보스를 족쳐야 世良田元信라는 이름이 뜬다. 출현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냥 이놈이 최종 보스.[49] 이때 이에야스의 참모 혼다 마사노부도 가담했었는데 마사노부는 그대로 도쿠가와가를 이탈했다가 혼노지의 변 무렵에 도쿠가와가로 돌아온다.[50] 막부 이전 일본을 다스린 정통귀족층, 한국이나 중국으로 치면 문벌귀족쯤에 해당[51] 쇼군이 다스린지 너무 오래되다보니 전국시대쯤 가면 상징성조차 쇼군이 가지게 되었다[52] 특히 신겐과 싸울 적의 이에야스는 아직 성장하기 전이라, 겐신처럼 용호상박으로 신겐과 치고박기는 커녕 붙는 족족 박살났었던, 좀 안습했던 시절이다.[53] 간양록에서는 히데요시를 대놓고 '적괴'라고 부르고 있다.[54] 다이묘가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 적통이 없다면 가문이 끊기기 때문에 재빠르게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하는 것.[55] 봉록을 전부 빼앗고 추방하는 것.[56]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400만 석(하타모토의 석고 300만 석을 다 더하면 700만 석인데 이는 총 석고의 1/4 수준이다.)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고쿠다카 2위의 마에다 가문이 겨우 100만 석을 좀 넘겼다. 반면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굴욕을 준 후에 목을 베었다.'''[57] 한국에는 과거 '대망'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적이 있다. 신판은 원제 그대로.[58] 당시 마츠다이라(도쿠가와 이전 성)의 무사단의 용맹함은 유명해서, 이마가와도 이에야스와 미카와 무사들을 선봉으로 내세우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다.[59]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이 나오마사 사후 그 아들이 지휘하게 된 이이 아카조나에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쳐발린 뒤 한 이야기인 듯도.[60] 실제 석고는 시대 등에 따라 이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특히, 에도 시대 후반 가면 이보다 더 많아진다.[61] 전봉되기 이전의 영지와 전봉 후 영지가 된 오다와라 지역을 합친 것이다.[62] 도쿠가와 계통이 아닌 다이묘 가문 중에 석고가 많았다고 하는 가문은 보통 시마즈(사쓰마), 모리(초슈), 그리고 에도 시대 초기에는 마에다, 다테 가문이 꼽힌다. 이들은 실제로 농토 개발에 열을 올리거나 원래 그만한 영토를 보유했거나 아니면 광산 등 다른 수입을 통해 대충 100만 석 이상의 석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63] 아나야마 바이세츠의 부인이자 다케다 신겐의 딸[64] 본래 아나야마 바이세츠와 켄쇼인의 아들인 아나야마 카쓰치요-다케다 노부하루가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후계자 없이 사망해서 노부요시가 카쓰치요의 양자가 되는 형태로 계승[6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과 의모(養母)인 켄쇼인[63]을 후견인으로 하여 노부나가에 의해 단절됐던 카이 다케다 가문을 이었다가[64] 후에 다시 마쓰다이라로 복성한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서군으로 참전했던 사타케씨의 영지를 몰수해 노부요시에게 히타치 미토 25만 석을 주지만, 후계자 없이 사망한다. 향년 21세.[66] 이에야스의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에 형의 영지인 미토 번을 받았다가 스루가 번 50만 석으로 전봉되고, 오사카 전투 참전 후엔 다시 전봉과 가증을 거쳐 최종적으로 고쿠다카 55만 5000석(실제 고쿠다가 약 61만 5000석)의 기슈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67] 3살 때 히타치 시모츠마 번 10만 석을 받았다가, 이에야스의 10남이자 동복형인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스루가 번으로 전봉되어 형의 미토 번을 이어 받아 고쿠다카 35만 석(실제 고쿠다카 약 31만 3000석)의 미토 번주가 되었다.[68] 이이 나오마사의 사위다. 여러 이름을 쓰다가 방계 마쓰다이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로 개명했다. 21살 때 세키가하라 전투에 처음으로 참가하고 서군의 시마즈 가문과 싸우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전투 후 오와리국과 미노국에 걸쳐 키요스성과 52만 석짜리 영지를 받았다. 후에 병을 얻어 후계자 없이 사망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입은 부상 때문에 병을 얻은 듯하다. 향년 28세. 히데타다는 동복 형제였기에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69] 세키가하라 전투 후 어린 나이에 카이 25만 석을 받아 코후번의 번주가 되었으나, 이에야스의 4남이자 형인 마쓰다이라 타다요시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에 부친 이에야스에 명령으로 코후번을 반환하고 대신 타다요시의 키요스 번과 함께 일부 가증을 받아 고쿠다카 61만 9500석(실제 고쿠다카 약 91만 3000석)의 오와리 번 초대 번주가 된다.[70] 쇼군에서 은퇴한 뒤 이에야스의 이름[71] 위의 패전했을 때 그린 사진에서는 꽤 야위였는데 막부를 건설하고 나서의 모습을 보면 꽤나 살쪘다. 아마도 막부를 건설해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다보니 덴뿌라를 많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역시 자기가 살던 시대에서는 평균보다 약간 컸다. 21세기 일본으로 따지면 대략 174cm 정도에 해당된다.[73] 여기서 부자유란 신체의 자유가 없음을 의미한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항상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종종 일본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컸다는 얘기를 아무런 부자유 없이~ 라고 표현한다.[74] 평소에 새겨 두어도 나쁘지 않을 명언이며 이에야스의 일생을 잘 보여주는 글이어서 널리 인용되지만 사실은 후세에 창작된 위서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과유불급 등 곳곳에 다른 사람의 발언을 짜깁기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