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賴'''
[image]
[1]
'''출생'''
1593년 8월 29일 오사카 성
'''사망'''
1615년 6월 4일 '''오사카 성'''
'''직업'''
다이묘
'''초명'''
도요토미 히로이마루 豊臣拾丸
'''신체'''
'''197cm, 161kg'''
'''배우자'''
센히메
'''자녀'''
도요토미 구니마쓰, 덴슈니
'''부모'''
아버지 :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머니 : 요도도노


1.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생모인 측실()이었던 요도도노(챠챠)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히로이마루(拾丸)인데 '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업둥이'이며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히데요시가 지은 이름이다. 태어난 후 길거리에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히데요시는 52세라는 늦은 나이에 요도도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큰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3살 때 병으로 죽자 다시는 자식을 못가질 거라고 거의 포기하던 차였기에, 56세라는 더 늦은 나이에 간신히 얻은 아들 히데요리가 오래 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계자가 되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자 21살의 젊은 나이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참고로 히데요리를 쇼군으로 표기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오류'''다. 히데요리는 쇼군 직위를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인 히데요시도 관백이었지 쇼군은 아니었다.

2. 생애


츠루마츠 사후 히데요시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여겼는지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히데츠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히데츠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약혼시켜 후견인을 자처했지만 결국 일가족과 함께 숙청되었다. 이후 양자였던 처남의 아들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의 양자가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유키 히데야스도 히데요시의 양자였다가 유키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예외적으로 우키타 히데이에는 여전히 도요토미 성을 유지했다.
1596년 성인식을 치른 뒤 히데요리의 보좌를 위해 오대로, 오봉행 등의 제도를 정비하고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약혼시킨다. 센히메와 히데요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지 부부관계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너무 어렸다. 10살도 안 되던 애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하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흔들리고, 결정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이 패배하면서 결국 천하는 도쿠가와로 기운다. 그래도 아버지가 쌓아올린 것들은 있어서,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동서 양군 모두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기치로 삼았다.
세키가하라 이후 도요토미는 오사카 65만석의 다이묘로 전락한다.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유신들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1611년 교토니조 성에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가 만나는데, 이때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위험을 느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멸망을 결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그 너구리같은 성격과 본래 정권이라는 것이 이전 정권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차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장성할 때까지 놔둔 게 기적이라 봐야 할 판.
이때 교토의 백성들이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 정권이 아닌 섭관정치를 행했으며 황실의 권위를 존중했던 인물인 것도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 보니 어머니 요도도노가 제대로 가르쳐서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음을 확인했고, 이에야스도 놀라고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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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발견된 히데요리가 스무 살 때의 초상화.
결국 1614년, 호코지 종명사건이 벌어진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건립했던 호코지를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14년 4월에 완성된 범종에 새겨진 문구 國家安康, 君臣豊樂(국가는 안전하고 건강하며 군신은 풍족하고 즐겁다)을 도쿠가와 측의 어용학자들인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우덴이 첫째구에서 이에야스의 이름 家와 康을 나눈것은 이에야스를 쪼갠다는 뜻이고 둘째구를 거꾸로 읽으면 '즐겁게(樂) 도요토미(豊臣)가 임금(君)이 된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억지나 다름없는 해석을 벌인 것이지만 당시 전국에서 이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중재를 하려는 다이묘가 '''한 명도 없었다.''' 즉 처음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자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고, 여기에 대부분 동조하거나 방관했다는 뜻.
결국 도쿠가와가 오사카 성을 공격하면서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된다. 원래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기 전 히데요리는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다 거부당했다.''' 이미 도쿠가와 치세가 안정기에 들어섰고, 이에야스에 비해 히데요리는 군사적 재능이 없어 보인데다 어머니 요도도노에게 휘둘리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혼간지 켄뇨가 10년간 이시야마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다는 이야기로 자신을 설득하는 히데요리측 사자에게 '''"니네 대장이 요도도노잖아."'''라며 무시해 버린 것.
하지만 오사카 성 자체의 방어력이 생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랑할 정도로 엄청난데다가 사나다 노부시게 등 세키가하라 이후 낭인으로 전락한 이들[2]이 가세, 분투하여 전투는 오래 갔고, 도쿠가와 측에서 화의를 제의하면서 해자와 산노마루, 니노마루 등을 철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일단 휴전이 되었다.
하지만 해자와 일부 건축물을 제거한 오사카 성은 방어력이 격감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 말대로 평야 한복판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판잣집 신세가 되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을 노리고 화의를 한 막부는 다시 전투준비를 진행했다. 이리하여 이듬해 6월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오사카 여름의 진이라 한다. 오사카 측에서는 분전했으나 6월 4일, 오사카 텐슈가쿠가 함락되면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 카이샤쿠모리 카츠나가가 맡았다. 그외에 오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들 다이스케, 카츠나가의 아들 카츠이에 등 수십 명이 함께 자결했다. 일설로는 여기서 죽지 않고 사츠마로 도주했다고도 한다.
가고시마에는 아직도 히데요리의 무덤이 있으며,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려서 마을 사람들이 괴로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그를 칭한 가짜라는 게 정설인데 술마시고 행패부리며 히데요리라고 한다면 막부에게 "나 좀 죽여달라"고 광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가고시마가 멀리 떨어진 시골동네라서 거기서 발광하던지 말던지 놔뒀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3. 후손


정실인 센히메와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측실 와기노카타(和期の方)[3]와의 사이에서 아들 쿠니마츠(8살)가 있었으나 오사카 전투 이후 교토에 숨어있는 곳이 발각되어 참수당했다. 일설에는 이때 처형된 것은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아들이고 쿠니마츠는 사츠마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 다른 측실 오이와노카타(小石の方, 나리타 씨)가 낳은 딸 나아히메는 센히메가 양녀로 삼아 조부 히데요시의 측실인 카이히메[4]가 키웠으며 결국 토우케이지에 출가한다. 에도 시대에는 엔키리데라(縁切寺)[5]라 하여 이혼을 원하는 아내가 절로 도망쳐 비구니가 되면 이혼이 성립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녀의 출가로 이 제도가 정립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히데요리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전해지는, 구엔(求厭)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그는 오사카 여름의 진 당시 에도로 몸을 숨겨,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며,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688년 임종 당시 향년 80세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160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임종 직전에 이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출처:일본어 위키백과 도요토미 히데요리 항목과 구엔 항목.)
이 외에도 히데요리의 또 다른 숨겨진 자식들의 기록이 있는 모양이지만, 공식적인 자식은 어디까지나 쿠니마츠와 나아히메다.

4. 기타


어머니에게 휘둘린 유약한 도련님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아버지 히데요시가 140센치의 키 작고 왜소한 몸집이었는데 반해 히데요리는 대단히 건장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거구였다고 한다. '''신장 6척 5촌(약 197cm), 체중 43관(약 161kg).'''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거구고,[6] 당시 일본의 기준[7]으로는 문자 그대로 거인이다. 또한 '''BMI 41.56'''[8]로 상당한 비만이다.
다만, 외가인 오다 가문이 키가 컸고, 어머니 요도도노(168cm)의 생모인 외할머니 오이치가 168cm, 외할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도 170cm 후반의 장신이기는 했다. 당시 시대를 감안한다면 외가 사람들의 키가 매우 컸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마마 자국이 심하게 남아있었다는 듯.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었고, 실은 요도도노가 바람 피워서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고, 또 정실인 네네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후계자를 낳기 위해 히데요시는 15명이 넘는 측실을 두었는데, 요도도노 외에 자식을 낳은 부인이 없었다. 히데요리보다 먼저 태어난 요도도노의 아들인 츠루마츠 역시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썰도 있다. 히데요시가 오미국 나가하마 영주였을 때 10년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첫번째 첩 사이에 아들(하시바 이시마쓰마루)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히데요시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지 데려온 자식인지는 불분명하고, 요절했다고 한다. 정말로 자식복이 없기는 했던 모양. 다른 측실들도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가 5명이 있어서, 그냥 기록만 봐서는 히데요시의 무정자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젊은 시절의 아들이 친아들이었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무정자증으로 변하는 부류도 있다.
그래서 에도 시대에는 히데요리는 씨다른 아들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일단 친부 후보는 오오노 하루나가[9]이시다 미츠나리[10], 나고야 산자부로가 있다.

5. 매체에서의 등장



5.1.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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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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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D급 무장이며 천하창세~창조 PK까지 같은 초상화를 쓰다가 전국입지전에서 새 초상화를 받았다. 히데요리가 군주인 세키가하라 시나리오에서는 천상기 PK를 제외하면 도요토미 직속 세력은 약하고 창조 기준으로 동맹 세력은 많다.

5.2. 전국무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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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의 업은 난세의 업

모두...내가 짊어지고 가겠어.

'''난세의 업, 모두 이 불꽃이 태우리라!'''

클론 무장으로만 나오다가 전국무쌍 애니메이션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성우는 오노 켄쇼. 상당한 꽃미남이자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성격도 외유내강형이고 상황을 읽는 안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물리친 일로 오사카 성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카이히메가 그를 방문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도 도요토미의 가신이라면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이히메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오르자 "제법이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이후 교토 니조 성에서의 회담을 제의하러 온 사나다 노부유키를 주변 가신들이 흥분하는데도 그대로 돌려보낸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에야스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그러나 사나다 유키무라마에다 케이지가 등장한 이후에는 사실상 도쿠가와 측과 전쟁하기로 결심을 굳힌 채 니조 성으로 찾아간다. 세키가하라 때는 이에야스에게 붙어 있던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돌아와 히데요리를 수행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에도 성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고 히데요리는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올 것을 역제안한다. 이때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행방을 묻지만 히데요리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자칭하는 낭인들이 수없이 많이 오사카 성내로 몰려들고 있다"고 일축한다. 이에야스는 그의 얼굴에서 히데요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인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에 집결한다.
유키무라가 오사카 성을 위해 축조한 사나다마루 주둔군에 사나다 군의 붉은 갑옷과 육문전 깃발을 준 것은 히데요리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우에다 성에서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해 싸운 사나다 병사의 의기를 보여달라는 의미라고 독백한다. 오사카가 도도 다카토라의 포격을 받을 때도 천수를 끝까지 지키지만 이 때 침투해온 사나다 노부유키가 화의를 제의하자 성내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이를 수용한다. 하지만 결국은....
11화에서 도쿠가와는 제1성벽, 제2성벽을 무너트리고 해자까지 메워 오사카 성의 방어선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후 재차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히데요리가 이를 거부하자 도쿠가와 군은 다시 군사를 이끌어 공격해 온다. 남은 장수들이 분전하지만 패색이 짙자 히데요리는 천수에 불을 붙여 자살한다.
전국무쌍 4-Ⅱ에선 투구를 써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조형으로 나왔다. 오사카 전투에서 결국 성이 넘어갈 상황이 되자 도요토미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언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고 하는 등 애니와 마찬가지로 개념인으로 등장.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는 차차의 묘사 때문인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대사 등으로만 언급되어서 존재는 하는거 같은데 게임 중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다. 게임에 대해 호평해도 이 부분을 아쉬워하는 플레이어들이 상당히 많다.
100만인의 전국무쌍에서는 떡보에 바보로 나와 전국무쌍 애니와는 갭이 상당히 심하다.

5.3. 효게모노


'''거인 수준의 체구를 충실히 재현했다.''' 히데요시가 생전에 꾼 예지몽에서는 평범한 체구로 등장했는데, 후일 정식으로 등장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잔인하고 냉혹한 아버지, 격렬한 성품의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은 온후하고 도련님스러운 성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이 거구 때문에 회견하러 온 도쿠가와측 인사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요도도노가 불륜을 한 것은 맞는데, 씨를 받은 시점이 비슷해서 확실히 누구 자식인지는 모르겠다고. 상대 남자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5.4. 태합입지전


능력치가 나쁘며 마지막 시나리오인 태평의 장(1599년)에서 6살로 등장한다. 초반 세력 자체는 충분히 강대하나, 1년도 못가서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후 세키가하라 합전이 일어나고 히데요리 시점에서 세키가하라 이벤트를 보면 무조건 서군이 진다. 오사카 겨울의 진 싸움은 4-5턴 정도 지나면 자동으로 이벤트가 진행되며[11] 이후 오사카 여름의 진 이벤트로 이어지는데, 선택지 2개중 오사카 성을 이에야스에게 넘겨줄 경우 이에야스와 동맹상태가 되고 거성을 옮기며, 항전할 경우 야전에서 지면 게임오버된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 이에야스와의 연전에서 승리하면 이에야스가 사망하고 절반가량의 다이묘가 지배하로 들어오면서 역전할 기회가 생기니 시간제한인 1620년이 오기 전에 일본을 통일하면 된다.

5.5. Fate 시리즈


Fate/Grand Order의 등장 서번트인 차차(요도도노)의 인연레벨 2 대사에서 진지한 어조로 '말해두겠는데 히로이 이야기만큼은 하지 마. 나는 그것만큼은 못 참아. 설령 상대가 마스터인 그대일지라도.'라고 경고한다.
[1] 외모로 보면 히데요시보다는 외할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의 분위기와 더 비슷하다.[2]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끝까지 지켜준 건 정작 그의 도요토미가 생전 우대하던 가신들이 아니라, 바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낭인들이었다. 심지어 도요토미 가문에 별다른 감정이 없는데도 그저 숙청에 휘말려 가문이 멸족된 뒤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원한으로 가담한 자들도 적지 않았을 정도. 이들 대부분은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 죽었다.[3] 이름은 이차(伊茶). 와타나베씨(渡氏).[4] 전국무쌍의 그 카이히메 맞다.[5] 해석하면 연을 끊는 절. 앞서 언급한 토우케이지도 엔키리데라로 유명하다.[6] 현대 일본 축구선수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평균 신장이 168cm에 지나지 않는다. 여담으로, 월드컵 참가국 중 뒤에서 2등(...).[7] 식생활이나 영양상태가 괜찮았던 무장 클래스의 인물들도 유해나 갑옷을 분석해 보면 160cm를 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8] 척관법 BMI 공식은 4083.75 × (관) / (촌)^2 이다. 미터법에 의거해서 환산한 공식이기에 정확도 100%이다. [9] 하루나가의 모친이 요도도노의 유모였고, 하루나가 본인이 용모가 단정하기로 유명했다.[10]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에서는 대놓고 이쪽을 밀고 있다. 다만 실제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히데요리의 출산 시점으로부터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잉태한 시점을 역산해볼 때, 미츠나리는 그 당시 임진왜란 때문에 조선에 출정해 있어서 시기가 맞지 않는다.[11] 여기서 히데요리 능력치를 최고로 하고 시작하고, 풍림화산을 마사유키에게 배워두었다면 점사로 이에야스를 조져서 이벤트 일어나기 전에 승리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딱히 이점이 없어서 그냥 이벤트를 진행시키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