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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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6년 5월 23일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플랑다르의 라미예에서 맞붙은 전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게 최악의 패전을 안긴 전투였으며, 유럽의 패권을 확립하려던 루이 14세의 야망이 좌절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2. 배경
1704년 블레넘 전투에서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플랑다르로 공세를 개시했다. 1706년 4월,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다일 강 건너편에 세워진 프랑스 요새들과 빌레루아 원수 휘하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안전한 위치에서 움직일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연합군이 요충지 중 하나인 나무르 요새를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니 자신이 나무르 요새를 공격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여겼다.
빌레루아 공작은 적이 나무르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뇌에 빠졌다. 당시 루이 14세는 대동맹(영국-오스트리아-하노버-네덜란드-프로이센)에게 프랑스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알자스와 북이탈리아 전선에 공세를 전개했다. 알자스에서는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바덴 변경백이 이끄는 바덴군을 헤게나우에서 격파하고 라인강 너머로 패주시켰고, 북이탈리아 전선에서도 프랑스군은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루이 14세는 이제 플랑드르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빌레루아 공작에게 당장 적을 섬멸해 블레넘 전투의 오명을 씻어내라고 독촉했다. 결국 빌레루아 공작은 전군을 이끌고 나무르 요새를 구원하러 출격했다. 적이 이동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말버러 공작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을 향해 이동했다. 이리하여 플랑다르 전선 최대의 격전 중 하나인 라미예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 존 처칠
- 병력: 74개 보병 대대, 123개 기병 대대, 대포 120문, 62,000명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 병력: 70개 보병 대대, 132개 기병 대대, 대포 70문, 60,000명
4. 전투 경과
1706년 5월 23일, 말버러 공작의 병참사령관 케도건은 라미예 마을에 숙영지를 건설하기 위해 본군보다 먼저 진군했다. 그는 아침 8시 경 짙은 안개를 헤치며 라미예 마을로 나아가다가 잔드레노윌레의 고원 외각지대에서 마초를 모으고 있던 프랑스 후사르 부대와 마주쳤다. 프랑스 후사르 부대는 짧은 교전 후 퇴각했고, 케도건은 정찰병들을 파견해 적의 위치를 탐색한 끝에 빌레루아 공작의 프랑스군 정찰대가 4마일 밖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케도건은 즉시 전령을 보내 말버러 공작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당시 본군을 이끌고 뒤따르고 있던 말버러 공작은 즉각 홀로 말을 몰아 케도건에게 달려와서 그와 함께 전방을 살펴본 끝에 프랑스 대군이 전열을 갖추고 있는 걸 확인했다.
빌레루아 공작의 프랑스군은 우익 측면에 메헤인 강을 두고 타비에르, 프랑퀴니 마을을 전방에 뒀다. 그리고 타비예르 마을과 라미예 마을 사이의 넓은 평원엔 프랑스 보병대 중앙이 배치되었고, 전방엔 고지대가 펼쳐졌다. 또한 프랑스군 좌익은 아우터 에글레세 마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군은 타비에르 마을과 라미예 마을을 요새화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고, 아우터 에글레세 마을엔 보병대와 포대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프랑스 대열의 길이는 약 4마일이었다.
빌레루아 공작은 이렇듯 유리한 지점에 군대를 배치해놓고 있으면 적이 쳐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이러한 소극적인 자세는 블레넘 전투에서도 그랬듯이 적이 군사 기동에 유리한 지점을 선택해 공세를 가할 때 이에 맞서 대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게 만들었다. 또한 대형이 동맹군 쪽으로 오목한 모양을 형성하고 있어 적군이 자신들에게 깊숙하게 침투한 프랑스군을 협공할 빌미를 제공했다. 게다가 빌레루아 공작은 보급품들을 프랑스 전선에 너무 가까이 머물게 해 적의 공세로부터 보급품들을 지켜내는 데 애를 먹게 만들었다.
오전 11시경, 말버러 공작은 전군의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그는 최우익에 영국 보병대대와 기병대대를 제우체 강 근처에 배치해 전투 시 제 위치를 사수하게 했다. 그리고 중앙엔 네덜란드, 독일, 스코틀랜드 보병대를 라미예 마을을 정면에 바라보는 위치에 배치했다. 또한 말버러 공작은 24파운드 짜리 중포 30문을 중앙 전방에 배치했고, 나머지 포병대는 좌익에 배치했다. 그리고 좌익엔 69개 기병대대와 네덜란드의 19개 보병대대, 2개 포병 부대를 배치하고 타비에르, 라미예 마을 사이의 넓은 평원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오후 1시경, 연합군 포병대가 적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크니 경이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 보병 연대는 아우터 에글레세 마을을 향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리틀 게테 강은 이 공세를 까다롭게 만들었고, 말버러 공작은 곧 공격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리틀 게테 강의 동쪽 언덕 지대로 후퇴하게 했다. 하지만 말버러 공작은 적이 아우터 에글레세 마을에 대한 위협이 남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더러 적을 계속 도발하게 했다. 여기에 속아넘어간 빌레루아 공작은 적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중앙의 보병대 상당수를 아우터 에글레세 마을로 파견했다.
얼마 후, 좌측면에서 4개의 네덜란드 보병 대대가 메헤인 강둑을 따라 전진해 타비에르 마을을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도링턴, 리, 클레어 장군이 이끄는 17개 보병 대대가 프랑스군 중앙의 프랑퀴니, 라미예 마을에 배치된 아일랜드 연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장군 오버크리크 백작 헨릭 데 나사우는 강력한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 마을 사이의 평원으로 이동해 프랑스 기병대를 덮쳤다. 또한 말버러 공작은 우익에 기마 연대를 친히 이끌고 오버크리크 백작을 돕고자 진격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양측 기병대간의 격전 도중,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드래곤 병사들에게 공격당해 낙마했다가 보좌관 몰스워스 대위에 의해 구출되었다. 말버러의 호위장교 브린필드 대령은 말버러 공작을 말에 태우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한편, 뷔른켐베르크 공작이 이끄는 덴마크 근위대 및 기병대는 메헤인 강을 도하해 빌레루아 공작의 우익을 공격했다. 그들은 곧 프랑스의 스위스 보병과 용기병 부대의 측면을 유린했고, 프랑스군 우익에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군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져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프랑스 보병대를 라미예 마을에서 밀어낸 연합군 보병대가 오버크리크 백작의 기병대와 합세해 적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어 제압한 뒤 오푸스로 진격했다.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 예비대는 이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전선에 가깝게 배치된 보급품들이 그들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군 중앙 부대는 오푸스에서도 적의 기세에 밀려 패퇴했고, 뒤이어 모든 전선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전열을 이탈했다. 연합군 기병대는 그런 그들을 추격해 마구잡이로 살육했고, 빌레루아 공작은 하마터면 적에게 사로잡힐 뻔했지만 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장교들을 공격하는 데 만족한 덕분에 가까스로 포로 신세를 피할 수 있었다. 말버러 공작은 도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전장으로부터 12마일 떨어진 멜더트 근처에서 자정이 지날 무렵에 전군에 추격 중지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라미예 전투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8,000~1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포로는 7,000~15,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라미예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포 70문은 전부 연합군 수중에 넘어갔다. 반면 연합군의 전사자는 1,066명이었고 부상자는 2,597명이었다. 프랑스는 이 참패로 인해 플랑다르에 대한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했고, 말버러 공작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브뤼셀, 겐트, 앤트워프 등을 탈환하고 플랑다르 전역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라미예 전투의 패장 빌레루아 공작은 지휘권을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에게 넘겨주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돌아왔다. 루이 14세는 그를 용서하며 "원수,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좋은 행운이 없었을 뿐이오."라고 달랬다. 그러나 빌레루아 공작은 두 번 다시 전장에 서지 못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대동맹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동맹 사이에서 이권을 둘러싼 대립이 심해지면서 프랑스 본토에 대한 대동맹군의 공세는 차일파일 미뤄졌고, 프랑스는 그 동안 라미예 전투의 참상을 복구하고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